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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으로 순교한 자들의 간증 (히 11:3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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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앙은 크게 두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사람이 중심 되는 인본주의와, 하나님께서 중심이 되시는 신본주의가 있다. 인본주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있지만, 신본주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 존재한다. 그 차이는 엄청나게 크다.

  저는 어렸을 때, 천주교회를 나갔다. 어머니는 열심히 천주교회를 다니시고, 봉사도 많이 하셨다. 사람들이 천사라고 할 정도로, 착한 분이었는데, 병이 들었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 우리 어머니처럼 열심히 교회 다니고, 착한 분이 병에 걸리느냐고 하나님을 원망하다, 결국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그렇게 미울 수 없어서, 교회 문 앞에서 교회 들어가려는 사람들을 끌고 가서 두들겨 패기도 했다. 이렇게 죄 많은 저를, 하나님께서 쓰시겠다고 찾아오셨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를 깨닫고, 주인 되시는 주님을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다.

  인본주의 신앙은, 복 받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한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 절대 고생하지 않고, 병에 걸리지도 않고, 늘 승리만 한다고 믿는다. 그렇게 믿다가 어려움을 만나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떠나게 된다.

  왜 이 시대가 영적 암흑시대인가? 사사시대와 같이, 자기가 옳다고 생각대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쓰시려고 부르셨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제 멋대로 행동하기에 영적으로 어둡게 되었다. 즉 인간이 중심 되는 인본주의 신앙이 판을 치고 있기에, 세상이 어둡게 되었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으로 부름 받았다(벧전2:9).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 세상 사람들은 말씀이 아니라, 비전을 따라 움직인다. 세상은 비전이 없으면, 리더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비전의 백성이 아니다. 말씀의 백성이다. 세상은 하나님도 말씀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의 뜻도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세상은 “자신의 비전”을 강조한다. 그러나 (잠29:18)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무절제하게) 행하거니와…”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누구나 자기 생각에 옳은 대로 행하게 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때, 제 멋대로 살게 된다. 본문은 믿음 때문에, 희롱 당하고, 핍박당하고, 순교하도 한다고 말씀한다. 주님 뜻이라면 죽음도 영광으로 아는 신앙이, 바로 신본주의다.

  한동안 청년들 사이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철저하게 실력으로 무장해서, 사회의 영향력 있는 자리를 모두 차지해야 한다는 주장(고지론)과, 아프리카처럼 소외된 이웃과 아픔을 당한 이웃에게,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미답지론)과, 논쟁이 붙은 적이 있다.

  그러면 고지론과 미답지론은, 항상 상충하는 적대적인 논리인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 각자에게 사명이 있다. 교회는 다양성 속에서, 일치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각각 주어진 사명이 다르다. 고지론을 붙들고 사회의 요소로 나아가서, 복음을 펼쳐야 할 사람이 있다.

  남들이 가지 않은 사회의, 소외된 곳으로 가야 할 사람들이 있는 법이다. 자신의 사명에 충실하고,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잠재력을 극대화시키면 된다. 모두 중요하다. 우리는 ‘성공’을 위해 부르심을 입지 않았다. 충성을 위해 부르심을 입은 종들이다. 이것이 사역의 기초이자 출발이다.

1. 믿음 때문에 고통당한 자들이 있다(35).

믿음으로 승리하는 자들도 있지만, 믿음 때문에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다. 따라서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보고, “저 사람은 죄 값을 받았다”라고 말하지 말라.

  베드로는 옥에 갇혔다. 성도들은 그를 위해 기도했을 때 옥문이 열려, 옥에서 구출되었다. 그러나 야고보는 옥에 갇혔을 때, 옥문이 열리지 않았고, 결국 순교했다. 베드로는 믿음이 있어서 살아났고, 야고보는 믿음이 없어서 죽었는가?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함부로 평가하지 말라.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적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숨 막히는 상황에서도, 참고 견디는 능력을 제공해 주며, 순교할 수 있는 힘도 준다. 이적을 일으키는 믿음만 아니라, 순교하는 믿음도 귀하다. 오히려 더욱 크고 귀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서, 우리의 삶을 바꾸는 것도 영광스럽지만, 극한적인 절망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찬양을 계속하고, 기도를 계속할 때 더 감동된다. 그러므로 만사형통한 삶 속에서만, 믿음의 본질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순교자들은 실패자가 되고 만다.

  예수님을 생각해 보라. 예수님을 조롱하던 자들은, “네가 메시아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소리쳤다. 예수님께서 원하셨다면, 십자가를 부수고 내려와, 자신을 핍박하는 자들을 심판하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무력한 자처럼, 십자가에서 고통당하며 죽어 가셨다.

  사람들이 기대한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으로 진정한 사랑을 나타내시고자 한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죽으셨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실패자인가요? 누가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나요? 예수님은 죽음에서 승리하셨다.

  이적이 일어나기보다, 이 죽음을 받아들였을 때, 더 좋은 결과가 온다는 믿음과 소망을 가졌기에, 기꺼이 죽으셨다. 이처럼 믿음은 사지에서, 영광스럽고 죽기도 한다. 이처럼 예수님을 믿어도 환경이 변화되지 않을 수 있다. 믿기 때문에 오히려 어려움에 처하는 경우도 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며,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두시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35) “…어떤 사람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그들은 조금만 타협하면, 죽음을 면하고 살 수 있었지만, 구차한 죽음보다 영광스런 죽음을 택했다.

  고대 교회에서는 흔히 성도들의 순교일(사망일)을 생일로 지켰다. 왜냐하면 이날이야말로 영원히 태어나는 날이기 때문이다. 이런 부활신앙이 있었기에 순교자들은, 담대히 그리스도를 증거 할 수 있었으며, 기꺼이 순교할 수 있었다.

  여러 해 동안 김 목사와 27명의 교인들은, 땅 밑에 파놓은 굴속에 숨어 지냈다. 공산주의자들은 도로를 건설하다가, 그들이 숨어 지내는 곳을 발견했다. 관리들은 곡산 주민 3만 명이 운집한 광장으로 끌어냈다. 그들은 공개 재판을 거친 후, 처형 될 예정이었다. 공산당 관리들이 말했다.

  “그리스도를 부인해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은 모두 죽는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다. 바로 그때 고위관리가, 네 명의 아이들을 무리 속에서 끌어내, 목을 매달라고 명령했다. 어린 아이들의 작은 목이 밧줄로 감겨졌을 때, 다시 부모들에게 그리스도를 부인하라고 명령했다.

  교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자신의 믿음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녀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천국에서 곧 만나게 될 거야” 아이들은 조용히 죽어갔다. 관리는 도로 포장에 사용하는 중기 롤러를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모든 교인들을 땅에 강제로 눕게 했다.

  엔진에 시동을 걸고,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부인할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거절했다. 증기롤러가 조금씩 앞으로 움직이자, 성도들은 함께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들의 살과 뼈가 육중한 증기 롤러에 눌려 뭉개지고 있었지만, 그들의 입에서는 여전히 찬송이 흘러나왔다.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엎드려 비는 말 들으소서. 내 진정 소원이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이 세상 떠날 때 찬양하고 숨질 때 하는 말 이것일세. 다만 내 비는 말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찬송 511장)

  (고후4:17-18)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2. 이들은 어떤 어려움을 당했나?

통치자들은 믿음을 부인하도록 만들기 위하여, 모든 방법을 다 동원했다.

(1) 악형(튐파논) : 사람을 어깨부터 다리까지 두 쪽으로 쪼갠 다음에, 가슴을 북을 치듯이 쳐 죽이는, 잔인한 형벌이다. 팀파니가 여기서 나왔다.

(2) 조롱 : 조롱은 애들처럼 갖고 노는 행동이다.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에게, 즉석에서 만든 왕의 표를 제공하고 왕이라고 절하였으며, 예수님에게 침을 뱉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조롱하는 경배를 하였다.

(3) 채찍질 : 채찍 끝에 쇠나 뼈, 또는 납이 매달려 있다. 그래서 살갗이 찢어지고, 피를 흘리며, 온몸이 녹초가 되는 형벌이다.

(4) 결박 : 노끈, 쇠줄, 착고, 수갑, 족쇄 따위로 도망을 가지 못하게 묶어 둠을 말한다.

(5) 옥에 갇히는 시험 : 고대의 옥은 오늘날 죄수를 감금하는, 교도소와는 전혀 다르다. 어둡고 축축하며, 지옥 같은 곳이다. 존 번연은 이런 곳에서 믿음이 조금도 쇠하지 않고, ‘천로역정’을 썼다.

(6) 돌로 치는 것 : 스테반은 돌에 맞아 죽었다. 그때 하늘이 열리고, 주님께서 서서 맞아 주셨다.

(7) 톱으로 켜는 것 :이사야 선지자는 톱으로 켜 죽었다고 한다.

(8) 칼에 죽음 : 목이 짤려 죽는 참수형,

(9)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

짐승의 옷을 입혀, 맹수의 우리에 던져 넣어 죽임을 당하게 하였다.
  중세 로마 카톨릭 교회는, 개신교 성도들이 신앙을 포기하게 하려고, 이 같은 고문을 자주 행했다.
신앙을 포기하면 살려줄 뿐만 아니라, 커다란 보상과 지위까지도 준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러한 무서운 고문에도 성도들은,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오히려 죽음을 택했다. 성도를 고문하는 사단의 의도는, 육체를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파괴에 있다. 사단은 설득과 협박을 번갈아 가며, 신앙을 포기하도록 유도한다.

  따라서 우리는 “육체의 현재적 편안함과 영혼의 영원한 복락 중에, 무엇을 소중하게 여기고, 택할 것인가?” (마10:32-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고 하셨다.

  일시적으로 만족함을 얻기 위해, 영혼이 버림받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스도와 영원히 사는 부활의 소망은, 육체적 고통과 환란을 보상해 주고도 남는다. 소망이 있다면 인내할 수 있고, 고난이 겁나지 않는다. 소망이 있으면 안정된 삶을 살지만, 소망이 없으면 안정이 없다.

  내일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못할 짓을 하게 된다. 그러나 소망이 있고 믿음이 있는 사람은, 참고 견딜 수 있다. 부활의 소망을 가졌기에, 믿음으로 죽을 수 있었다. 믿음의 사람들은 죽으면 죽었지, 구차히 살고자 믿음을 놓지 않는다.

  세상이 어려움을 준다고, 세상에 지지 않고, 믿음으로 세상을 이겼기에, 세상이 감당치 못했다고, 세상이 포기했다. 이것이 또한 믿음의 증거다. 이 땅에서 담대하게 죽어서, 나중에 하늘 나라에서 더 좋은 것을 받는다는 생각으로 죽음이 와도 한 점 부끄러움 없이 담대하게 죽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루마니아에 ‘조셉 톤’이라는 목사님이 계셨다. 루마니아에서 상당히 영향력이 있는, 목사님이었다. 그런데 그가 너무 과격하게 공산주의를 반대하니까, 공산 당원들이 견디지 못하고, 목사님을 국외로 추방시켜버렸다. 그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여러 교회에서 설교도 하고, 신학교에서 강연도 했다.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다. “목사님의 신학을 한 마디로 정리한다면,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있나요?” 그럴 때마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다. “신학의 핵심은 한 마디로 순교다. 순교 신학 이외는 있을 수가 없다. 우리는 부활을 믿고, 영생도 믿는다. 우리는 이에 대한 증인이 되어야 한다.

  증인이라는 말은, 순교자라는 뜻이다. 순교에 초점을 맞춘 신학과 신앙만이 바른 신학이요, 바른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제 시대 때, 신사 참배에 반대하다가 ,감옥에 갇혔던 주기철 목사님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라. 그는 모진 악형을 받았다. 그는 굵은 못이, 수 백개 박혀 있는 널빤지 위를, 맨발로 걸어가는 악형도 받았다. 그는 조금만 자신의 신앙을 굽히고 타협을 하면, 얼마든지 살아남을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구차히 자기 목숨을 유지하려고 하지 않았다. 순교를 택했다. 그 이유가 35절 이하에 있는 것처럼, 더 좋은 부활, 곧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과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그 엄청난 핍박과 환난 속에서도, 끝까지 인내하면서 믿음을 지켰다.

3. 세상이 두려워하는 신앙

로마시대에, 기독교를 가장 가혹하게 핍박했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도미티아누스’황제다. 닥치는 대로 그는 기독교인들을 잡아다가, 때리고, 가두고, 유배를 보내고, 무참하게 죽였다.

  그런데 아무리 기독교인들을 박해해도, 그 신앙을 꺾을 수가 없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매를 맞으면,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감옥에 가두면 함께 갇혀 있는 사람들까지 전도하여 신자가 되게 한다. 독방에 가두면, 하루 종일 기도와 찬송하면서, 오히려 즐거워한다.

  죽이겠다고 하면 순교를 최고의 영광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기독교를 가장 혹독하게 핍박하던 도미티아누스는, 이런 말을 남겼다. “그렇다면 저 기독교인들을 어떻게 해야 된단 말인가?” 그렇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믿음으로만 산다면, 우리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자들이 된다.

  그렇다. 어두움이 빛을 감당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세상은, 믿음에 굳게 선 사람들을 감당할 수 없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영원한 하늘나라 본향을 바라보면서, 나그네처럼, 순례자와 같이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믿음에 굳게 선 사람을, 도무지 감당할 수 없다.

  주후 4세기 중엽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였던 크리소스톰은 “황금의 입”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설교도 잘하고, 많은 사람에게 감화를 끼쳤던 유명한 분이었다. 핍박자들에게 붙들렸다. 핍박자들은 어떻게 하면 크리소스톰을 완전히 패배를 시켜 버릴까를 의논했다.

  어떤 사람이 제안을 했다. “그를 깊은 감옥에 가두어서, 평생토록 감옥 속에서 썩게 만드십시다.” 그러자 다른 사람이 반대했다. “안될 말입니다. 그러면 그는 조용한 가운데, 하나님과 교제 시간을 가지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기도 생활을 힘쓸 것입니다.”

  또 다른 한 사람이, 이렇게 제안을 했다. “그러면 그를 굶겨서 죽여 버리십시다.” 또 반대 의견이 나왔다. “그러면 그는 자동으로 금식 기도를 하면서, 자기가 원하는 천국에 가게 되었다고 좋아할 것입니다.”

  또 한 사람이 이런 제안을 했다. “그러면 그를 불러내서, 모든 사람들이 보는데서, 심하게 매질을 합시다.” 그러자 또 다른 사람들이 반대를 했다. “기독교인들은 매를 맞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맞는다고 더 기뻐합니다.”

  마지막으로 어떤 사람이 화를 벌컥 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지 말고 차라리 그의 목을 당장 베어 버립시다.” 그러니까 또 반대 의견이 나왔다. “그러면 그는 순교하면서, 영생의 면류관을 얻게 되었다고 오히려 좋아할 것입니다.” 그래서 핍박자들은 그를, 감당할 수 없었다.

  오늘 본문 35절 이하에 있는 것처럼, 더 좋은 부활, 곧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과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믿음의 선진들은, 그 엄청난 핍박과 환난 속에서도, 끝까지 인내하면서 믿음을 지켰다.
믿음이 그들을 붙들어 주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놀라운 힘이다.

  이처럼 믿음에 굳게 선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 어두움이 어떻게 빛을 감당할 수가 있는가?

이 세상 핍박과 환난이, 우리를 거꾸러뜨리지 못한다. 세상의 부귀영화와 유혹이,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믿음을 빼앗아 가지 못한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몹시도 어렵다고 한다. 국민 개개인이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으로, 이보다 어려운 일들도 다 이겨내었다. 문제는 우리의 믿음이다. 믿음이 연약하기에 힘이 빠진다. 그러나 믿음만 있다면, 우리는 지금의 어려움도, 얼마든지 이겨낼 수가 있다.

  삶에는 뜻이 있다. 고난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 아무리 우리를 숨막히게 만드는 환경일지라도, 그 속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 그렇다면 그 환경을 받아들이겠습니까?

  틸리히라는 신학자는 이렇게 기도했다. “제게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를 주십시오. 그러나 이 환경이 변화되어서 안될 것이라면, 이 환경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함을 제게 주십시오. 그리고 이 두 가지가 어떻게 다른 것인지 알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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