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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면 (요일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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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진 인간 관계, 그 극복의 비결은?>
어느 미국 목사님의 설교에서 읽은 이야기입니다.
결혼에 관한 재미있는 고백들입니다.

·Patrick Murray: "나는 두 번 결혼했는데 모두 다 불행했습니다.
첫 번째 아내는 제 곁을 떠나버렸고, 둘째 아내는 아직 제 곁에 있습니다."
·Sacha Guitry: "다른 사람이 당신의 아내를 훔쳐 갈 경우, 그냥 그 남자더러
당신의 아내와 계속 함께 살도록 내버려두는 것보다 더 좋은 복수는 없습니다."
·Henry Youngman: "우리가 어떻게 그토록 오랫동안 결혼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느냐며 비결을 묻는 이들이 있습니다. 굳이 비결이 있다면 우리는 일주일에
두 번씩 외식하러 식당에 가는데 있습니다. 작은 촛불과 감칠맛 나는 저녁 식사와
부드럽게 흐르는 음악과 감미로운 댄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하지요.
그런데 그 식당에 제 아내는 화요일에 가고 저는 금요일에 갑니다."
·Rodney Dangerfield: "제 아내와 저는 꼭 20년 동안 행복했었지요.
그 행복한 20년이 지난 뒤 우리는 서로 만났습니다."

생각할수록 재미있는 고백들입니다.
누가 말했는지 기억이 안 나지만, "결혼은 석달간 사랑하고
3년 동안 싸우고 30년 동안 참는 것이다"라는 말을 생각나게 합니다. 
부부관계도 그렇고, 부모와 자식 관계, 형제자매 관계, 이웃 관계,
이 모든 것이 많은 이해와 용서와 인내를 요합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맺고 있는 모든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좋은 관계가 되시길 빕니다.

그런데, 사람들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살기 위해서 하나의 선행 조건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우리가 먼저 수직적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이루면
이웃과의 관계는 저절로 건강하고 아름답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빛 가운데 행하는 삶 = 사귐 + 죄씻음>
본문 5절은 먼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들어서 여러분에게 전하는 소식이라고 말합니다.
앞으로 말씀하려는 것은 본래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들은 내용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그리스도 예수로부터 전해들은 내용이
"하나님은 빛이시며 하나님 안에는 어둠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요한복음을 비롯한 요한 서신에 자주 등장하는 전문 용어가 '빛'과 '어둠'입니다.
그런데 언제나 빛은 진리와 생명이며, 어둠은 거짓과 죽음입니다.
하나님이 빛이시라는 주장은 하나님이 어둠과 죄와 죽음으로부터 자유롭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마다 어둠과 죄악과 죽음이 물러가고, 빛과 구원과 생명이 찾아옵니다.

사람들이 죄를 지을 때 대개 어두컴컴한 곳에서 그렇게 합니다.
어두운 밤, 남이 보지 않는 밀실에서 얼마나 많은 음모와 죄악들이 이루어집니까?
그러나 빛나는 새벽, 광명한 대낮에는 어둠과 거짓과 죄악과 죽음이 물러갑니다.
빛이 가득 비추이는 곳마다 진리와 구원과 생명이 충만합니다.
하나님은 빛 그 자체요, 온통 빛으로 충만하시기에 하나님 안에는 어둠이 전혀 없습니다!

이제 6-10절에서는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명제를 구체적인 행위를 통하여 설명합니다.
6절을 보세요.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지난 주에 우리는 생명의 말씀, 즉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은
언제나 두 가지 차원의 사귐으로 이어진다고 했습니다.
위로 하나님과 사귀고, 아래로 이웃과 사귀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에서 보니까 만일 하나님과 사귄다고 말은 하면서도 여전히
어둠 속에 산다면 그것은 거짓말하는 것이요, 진리를 행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로는 하나님과 사귄다고 하면서 빛 되신 하나님 안에 있지 않고 죄악으로 가득찬
어둠 속에서 방황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요, 진리와 무관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십니까?
그렇다면 빛 안에 살아야 하고 어둠 속에 있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과 사귄다고 하면서 어둠 속에서나 하는 부끄러운 일들을 계속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하는 것이요 진리를 행치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귀시는 분들은 다 어둠의 일을 벗어 던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롬 13: 12-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옳습니다.
빛 되신 하나님과 사귄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 행위와 삶이 빛과 진리와 생명 안에 있어야 합니다.
여전히 어둠 가운데 방황한다면 그것은 거짓말하는 것이요 진리와 아무 상관없습니다!

이제 7절 말씀을 보세요.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여기 보세요.
우리가 하나님과 사귄다고 말하면서 실제 행동에 있어서는 어둠 속을
걷고 있으면 우리는 거짓말하는 사람이요,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앞에서 읽은 6절에서는 먼저 말을 앞세우지만 행동이 못 미칠 때,
이것은 거짓이요 진리를 따라 사는 삶이 아니라고 꼬집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7절에서는 정반대의 논리를 폅니다.
먼저 말이 앞서는 것이 아니고 행위와 실천이 앞섭니다.
하나님이 빛 안에 계신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빛 가운데로
걸어다니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과 우리의 이웃과 사귄다는 사실과 더불어
모든 죄를 깨끗이 씻음 받았다는 사실을 입증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을 앞세우기 전 먼저 빛 가운데 행하기만 하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과 우리의 이웃과 사귀는 것을 보여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죄씻음을 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6절과는 정반대이지요.
6절에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사귄다고 먼저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어둠 속에서 삽니다.
그것은 거짓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7절에서는 우리가 먼저 하나님처럼 빛 가운데 행하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과 우리의 이웃과 사귀고 있다는 사실을 그대로 입증한다는 것이지요! 
이와 같이 요일서 기자는 말보다 행동과 실천을 앞세울 것을 요구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빛 가운데 살면 두 가지 결과가 생깁니다.
첫째로, 우리는 서로 사귐을 가지게 됩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인해 죄씻음을 받게 됩니다.
이웃과의 아름답고 건전한 사귐, 그리고 죄용서를 의미하지요.

오늘 여러분은 빛 되신 하나님 안에서 생활하십니까?
어둠과 거짓과 죄악과 죽음을 멀리하고 빛과 진리와 구원과 생명 안에 사십니까?
그렇다면 제일 먼저 여러분은 하나님뿐만 아니라 이웃과 온전한 사귐을 갖게 될 것입니다.

왜 가정 생활이, 직장 생활이, 사회 생활이 어려워집니까?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험악해지고 엿가락 꼬이듯이 꼬입니까?
빛 되신 하나님 안에서 떳떳하게 살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눈치를 보며 살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이웃과의 온전한 사귐을 갖기 위해서
가장 먼저 빛 되신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모든 부끄러운 어둠의 일을 벗어 던지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 이웃과의 관계가 밝고 아름답고 건강해질 줄로 믿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어둠 속에서 못된 음모나 꾸미고 술 취하고 향락에 빠지고 싸움과
시기심에 빠져 있어서 어떻게 이웃과의 사귐이 온전해질 수 있습니까?   
어둠 속에 살면 우리와 이웃의 관계는 마주 보는 열차와도 같이
정면 충돌로 치달릴 뿐, 결국 파멸 밖에는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피를 통한 죄씻음의 원리>
자, 이렇게 빛 되신 하나님 안에서 살 때 우리의 이웃과 진정한 사귐을
누리게 되고 모든 죄를 용서받는다고 했는데, 이미 사귐은 지난 시간에
충분히 말했으므로 본문 말씀은 '죄씻음'에 대해서 집중하고 있습니다.

8-9절 말씀을 봅시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여기에서 요일서 기자는 '죄씻음'과 관련해서 세 가지를 강조합니다.
첫째로, 언제 어느 때나 누구에게나 죄가 만연해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가 우리의 죄를 부인하면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살아가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씻음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의한 죄씻음은 한 가지 중요한 조건을 전제합니다.
온 인류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없이는 죄 속에 깊숙이 파묻혀 있다는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 간섭하지 않는 한, 온 인류는 아무리
양심적이고 윤리적으로 살아도 죄의 무서운 속성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롬 3: 10-18절에서 구약 성경을 인용하여 이렇게 선언합니다.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죄씻음을 받지 않는
한 자연인으로서 인간의 철저한 죄성을 폭로하고 있는 것이지요.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께서 왜 십자가에 달리셔서 보혈을 흘리셨습니까?
온 인류가 죄악과 어둠과 거짓과 죽음에 빠져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시간과 장소를 초월해서 온 인류가 죄와 죽음 속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피는 아무 소용도 없고 의미도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자기의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자백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씻어주십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기에 우리의 지은 죄가
어떠하든지 간에 용서해주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십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로 죄씻음을 받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 우리 자신의 죄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깨끗이 씻어주시고 용서해주십니다!
먼저 우리의 죄를 자백하기만 하면 우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흰눈 같이
희어질 것이며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될 것입니다(사 1: 18). 

이렇게 우리가 피할 수 없이 온 인류에 만연해 있는 죄에 의해
삼킨 바 되었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하는 것이 죄씻음을 위해
필수적이라고 한다면 죄를 부인하는 것은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옵니다.

10절을 보세요.
만일 우리가 죄를 지은 일이 없다고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이단종파 중에는 죄의 현실성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죄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피가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보통 큰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의 죄를 부인할 경우 이것은 곧 우리의 죄를
속해주시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신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며 생명과 진리 되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없다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빛 되신 하나님의 자녀'라는 의식을 가지고>
이제 오늘 말씀의 요점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빛이시며 하나님 안에는 어둠이 전혀 없습니다.
둘째,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귀고 있다고 말부터 먼저 하면서 실제 행동은
어둠 속에서 그냥 살아가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요 진리를 행치 않는 것입니다.
셋째, 그러나 두 번째 경우와는 정반대로 먼저 우리가 빛 되신 하나님 안에서 살면,
우리는 서로 사귐을 가지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씻음을 받게 됩니다.
넷째, 생명과 진리의 빛 되신 하나님 안에서 살아갈 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씻음을 받게 되는데 세 가지가 강조됩니다.

① 인류에 깊숙이 침투해 있는 죄의 실상을 부인하면
자기를 속이는 것이 될 뿐 아니라, 진리가 우리 속에 없습니다.
② 우리가 먼저 우리의 죄를 자백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십니다.
③ 우리가 지은 죄가 없다고 주장하면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통하여 빛과 생명과 진리와 구원과 용서를 가져오십니다.
반면에 우리의 죄는 어둠과 죽음과 거짓과 멸망과 정죄를 가져옵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먼저 빛 되신 하나님 안에 거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될 것이며,
여러분의 이웃과의 관계가 온전해질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빛 되신 하나님 안에서 여러분의 죄를 자백하기만
하면 여러분의 모든 죄가 깨끗이 씻음 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

끝으로 프란츠 파농(Frantz Fanon, 1925-1962)이 했던 말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파농은 흑인 정신과 의사로서 알제리 민족 해방에 크게 기여한 사상가였습니다.
파농은 일찍이 제국주의의 압제로부터 한 민족이 진정한 독립을 이루려면
다리 하나라도 자력으로 건설할 수 있는 알찬 실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다리와 관련된 파농의 말을 직접 인용하겠습니다.

"하나의 다리를 건설하는 일이, 만일 그 곳에서 땀 흘리며 일하는 이들의
의식을 풍요롭게 하지 못할 양이면, 차라리 그 다리를 만들지 않는 편이 낫다.
시민들은 예전처럼 헤엄을 쳐서 건너든가 아니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면 된다.
다리는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땅에서 솟아오른 것이어서는 안 된다.
다리는 사회 전체에 절대로 임기응변(Deus ex machina)식으로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
그런 방식이 아니라 시민들의 피와 땀, 두뇌 속에서 태어나야만 한다.(…)
시민들은 다리를 개인의 소유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 때야 비로소 모든 것이 가능해진다."(『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중에서)

다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리를 만드는 사람들의 의식과 자존심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만일 멋진 다리를 만들어 놓았다고 할지라도 다리를 만든 사람들의
의식은 조금도 변화되지 않고 옛날의 식민지 습성을 버리지 못한다면,
옛날처럼 다리 없이 헤엄을 치거나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편이 훨씬 더 낫다는 말이지요.

여러분, 오늘 우리의 의식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자녀라는 의식과 자존심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언제나 빛과 진리와 생명 안에 거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둠으로부터 벗어나 빛 가운데 걸어야 합니다.
거짓이 아닌 진리 안에 살아야 합니다.
죽음이 아닌 생명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의식을
다시 한번 회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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