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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빚진 마음의 복음 전파 (롬 1: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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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롬1:14)

  저는 요즈음 제가 살아온 삶의 과정 속에 도움을 베풀어주신 많은 사람들을 기억해 보게 됩니다. 부모님으로부터 6.25 전쟁시에 병들어 죽어가는 1살짜리 인 저를 살린 적십자 의료기관의 이야기를 들을 때에 ‘나를 살려주신 그분들은 어떤 분들이었을까’고 생각해 봅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는 경기도 오산시의 냇가에 많은 비로 홍수가 났었는데, 그곳에서 수영하다가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가 거의 죽게 된 나를 건져내 살려준 두 사람의 청년도 기억납니다. 
  수원시에서 중학교 다닐 때는 제가 살고 있던 교회사택이 화재로 전소되어 경제적으로 어려운 생활을 했었는데, 등록금을 내지 못해 학교 다니기가 어렵게 될 때에 학교 교목이신 김노환 목사님께서 제 학비를 대 주셨습니다. 외국인처럼 생기신 그 목사님의 얼굴이 어렴풋이 떠오릅니다. 저의 부모님께서 강원도로 임지를 옮기셨을 때에도 계속 되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학교를 다니지 못하게 될 때에도 제 학비를 지원해 주셨던 독일 선교사님이 있었습니다. 강릉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하셨던 그 분의 한국이름은 ‘서여수’였습니다. 유난히도 키가 크고 코가 크신 분이셨던 분으로 기억이 납니다.     

  학비를 마련할 수 없어 거듭되는 휴학으로 5년 동안이나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힘들었던 청소년 시절 제게 용기를 주셨던 많은 분들, 대학 다닐 때에는 가정교사로 입주하게 해주어 공부하게 해 주셨던 분, 나에게 있어 이런 분들은 잊을 수없는 고마운 분들입니다. 
  목회자가 되어서도 저의 곁에는 저를 돌보아 주셨던 분들과 함께 목회 사역 중에 뜨거운 사랑을 나누면서 동역해 주셨던 분들이 있습니다. 부족한 저를 주님의 일을 위한 하나님의 종이라면서 목회자의 권위를 인정해 주면서 정성을 다해 돌보아 주셨던 분들의 사랑을 잊을 수 없습니다.

  호주선교사로서 어려운 한인교회를 세워가는 과정 중에 함께 공동체생활을 할 때에 우리가정을 돌보아 주었던 ‘데이빗 호건’(David Hogan)이라는 이름의 호주청년을 기억합니다. 당시 가족과 함께 헤어져 영주권을 얻기 위해 사면령이 내리기를 기다리면서 불법체류자로 고생하던 집사님, 그 집사님이 나와 함께 동역하며 교회를 세워가는 일에 혼신을 다해주었습니다. 추운 밤 낡은 나의 차가 멈추어 서버리자 찾아와서 손전등을 비추어 가며 입김으로 손을 녹여가며 차를 고치기 위해 고생했던 그 집사님을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귀국하여 마산성은교회를 섬기다가 1997년 여름 다섯 번째 목회사역지로 제천제일교회에 부임했습니다. 그 교회는 교회건축 중에 건축회사가 부도가 나고 교회건축이 중단되어 건축의 모든 계획이 원점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그 일로 교회가 분열되어 목사님께서 마음고생을 하시던 중 새벽 예배 시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신 교회였습니다. 교회는 그 일로 큰 아픔을 가지고 되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제가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된 것입니다.

  부임 후 저는 교회의 상처를 싸매면서 회복과 부흥의 역사 위해 열심을 기도하며 목회에 최선을 다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부임 일 년도 되지 않은 다음해 5월 과로로 저의 허리 디스크가 터지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가까운 인근 병원에 입원하여 터진 디스크를 제거하고 그곳에 기구를 넣어 고정시키고 다른 부위의 뼈를 떼어 이식하여 생성시키는 큰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회복 치료 과정 중에 대퇴골 두에 작은 계란 크기의 뼈 종양이 있음이 발견되었습니다. 허리치료의 일정기간이 지난 후에 또 다시 그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습니다. 종양이 제거된 부위에는 또 다른 부위의 뼈를 떼어 이식하고 모자라는 분량은 보관해둔 다른 사람의 뼈를 기증 받아 채우고 생성시키는 치료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 때 두 분의 정형외과 의사선생님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허리수술을 집도하셨던 선생님은 캐톨릭 신자이면서도 개신교목사인 저를 신부님처럼 대해 주며 그의 커다란 손으로 얼마나 정성껏 돌보아 주었는지 모릅니다. 대퇴골 종양제거 수술을 집도하셨던 선생님은 죤 홉킨스 의과대학에서 공부하신 분으로 지금 강남의 선한목자정형외과 원장님으로 기독교TV에 출연하시는 분이십니다. 지방병원에 잠시 근무했던 과정에 저를 수술해 주셨던 분입니다. 보조의사가 해야 할 일을 직접하고 있음을 보고 ‘과장님이 직접 이런 일까지 하십니까?’고 묻는 동료의사에게, 나와 10년 정도의 연령차이임에도 ‘이분은 나의 아버지 같은 분’ 이라면서, 자기가 섬기는 교회 부족한 담임목사일 뿐인데도, 저를 영적인 아버지로 고백하면서 정성을 다해 수술해 주시고 치료해 주셨음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수술과 치료과정과 회복기간은 길고 힘든 과정이었습니다. 더구나 전임목사님이 새벽예배 중에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교회에 부임하여 큰 수술을 두 번식이나 받으니 교회에 누가되고 교인들의 짐이 되는 것 같아 교인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죄송하고 미안해서 수술 후 몇 주간을 요양 한 뒤에는 허리 복대를 차고 목발을 짚고 강단에 올라가 설교했습니다. 입원한 환자들이 발생할 때는 원주와 서울에 있는 종합병원을 찾아 자동차의 의자를 젖히고 누워서 아내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다니며 심방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때에 부족한 목회자를 믿어주고 베풀어준 교우들의 배려와 사랑을 잊을 수 없습니다. 특별히 그 중에 어느 권사님 가정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 가정의 어머니 권사님은 제가 수술하기 위해 입원한 후부터 그 교회를 사임할 때 까지 교회에서 주무시면서 저의 목회와 건강을 위해 기도해주셨습니다. 남편 권사님은 가족 몰래 매월 일정액의 금액을 입금시켜 저의 건강관리를 책임졌습니다. 아들 부부는 회사를 경영하면서도 지극정성으로 교회를 섬기고 목회를 도왔습니다.     

  하루는 전라도 익산에서 교인가족이 초상이 났습니다. 늦은 밤 그곳을 찾아가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아들 권사님이 자기 회사에서 제일 좋은 차인 회장님이신 아버지의 차를 가지고 와서 저를 태우고 초상집에 다녀오겠다는 것입니다. IMF 경제 한파로 회사 직원을 감축하고 하루 종일 고되게 일하고 마음고생도 클 때인데 ....,  그것도 당뇨와 간경화로 건강이 좋지 않은, 건드리기만 해도 쓰러질 것 같은, 삐적 마른 몸을 가지고도 저의 건강을 생각하여 자신이 직접 운전하겠다면서......, 그리고 새벽녘에 돌아오면서 무척 피곤하고 힘들 텐데도 오히려 저를 위로하며 힘내시라고 격려해 주었던 그 사랑을 잊을 수 없습니다.

  어느 날 그분은 저의 허리건강을 위해 좋은 차를 타야 한다면서 그 당시에 높은 수준급의 승용차를 뽑아 교회로 끌고 와 목사님이 타실 차라고 키를 넘겨주면서 그렇게 기뻐하고 좋아했던 그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 분과 그의 가족은 그 교회에서 제가 목회할 때에 저를 목사가 되도록 사랑이 무엇이고 희생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준 분들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저를 돌보아 주신 이런 모든 분들은 내게 어떤 대가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조건 없이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나를 향한 그분들의 돌봄은 사랑자체였습니다.
  제가 살아온 과정 속에 점점 깨달아지는 것이 있습니다. 나는 이 모든 사람들에게 빚진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분들의 사랑에 빚을 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욱 깊이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그 사랑의 빚 배우에는 하나님이 계셨음을 보게 된 것입니다. 요즈음, 저는 하나님께서 수많은 사람들을 통하여 제가 살아오는 과정가운데서 사랑과 은혜로 돌보시면서 오늘까지 인도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더욱 깊이 깨달아지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그리고 그 분의 손길의 역할을 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나는 빚진 자로서, 이 빚에 대한 나 자신에 대한 책임감입니다. 빚을 갚아야 한다는 양심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빚을 가리는 것이 나의 즐거움이고 값진 삶의 태도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받은 사랑이 곧 나도 남을 위해 사랑을 주어야 하는 빚이라는 깨달음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있는 의식과 정신 중에 부채의식이 있었습니다. 곧, 빚진 자의 마음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빚진 자라는 것은 돈에 빚진 자라는 말이 아니라 복음의 빚을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복음전파 사명을 복음에 대하여 갚아야 할 빚으로 표현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받은 구원의 은혜를 갚아야 할 빚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복음을 주셔서 구원받게 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에 빚진 자이기에 그 빚을 가려야 한다는 마음에서 복음전파를 빚을 갚는 것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복음은 인간에게 죄의 용서와 구원을 제공해줄 뿐 아니라 인간을 의롭게 까지 합니다. 바울은 이 복음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하면서 복음만이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가 된다고 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6,17)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이 우리를 구원했다면 우리는 복음에 대하여 빚진 자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는 그 구원에 대하여 우리가 내놓은 어떠한 대가도 없이 그 구원을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빚을 가려야 할 양심과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주는 것입니다. 

  바울이 복음의 빚을 갚기 위하여 얼마나 수고했는지를 고린도 후서 11장 23-27절 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빚진 자의 마음은 그 빚에 대한 의무와 책임으로 짓눌림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빚을 가리는 데서 즐거움을 찾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주님을 사랑해서 하는 것이 있고, 그렇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을 가지고서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눈빛과 행동이 다릅니다. 복음에 빚진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주님의 사랑의 빚을 가지고 그 사랑의 빚을 가리고자 일하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는 바울처럼 복음의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누어 주도록 복음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받은 복음은 사도 바울을 비롯한 많은 믿음의 선진들의 사랑과 수고에 의해서 우리에게 전해져 받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이 복음을 우리에게 전해주기 위해 고귀한 생명을 아낌없이 버렸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 복음의 빚과 함께 그 복음을 전해주기 위한 사랑의 빚을 가려야 합니다. 그 빚을 가려야 한다는 음성은 우리 안에 들려지는 양심의 소리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복음을 값없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께 불이익을 안겨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바울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9:16)
  복음에 대한 우리자신의 빚을 깨달읍시다. 복음으로 구원받도록 사랑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사랑의 빚과 하나님의 은혜의 빚을 깨달읍시다. 복음의 빚을 가리고자 하는 뜨거운 마음이 우리 모두의 마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복음의 빚을 가리고자 복음을 전해주고 나누어 주는 성도가 되십시다. 하나님의 사랑의 빚과 은혜의 빚을 가리고자 하는 뜨거운 마음이 복음전파의 열정으로 드러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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