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아벨의 신앙(信仰) 창4:1-8

  • 잡초 잡초
  • 295
  • 0

첨부 1


창4:1-8
아벨의 신앙(信仰)

  만나는 사람마다 어렵고 힘들다고들 합니다.
  그런데 무엇이 어렵고 힘들다고 합니까? 정말 힘들고 어려운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 우리에게 닥친 경제 문제입니까? 거의 모든 사람들이 어렵고 힘든 것을 말하라고 하면 경제문제를 첫째로 꼽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어려움과 고민의 대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경제적 어려움은 오늘의 문제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경제문제는 과거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도 있었고, 지금도 또 앞으로도 우리에게 늘 있는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정한 문제입니까?
  그것은 관계의 문제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그리고 사람과 나와의 관계, 사람들과 사람들과의 관계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들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지 않을 때 우리는 고민과 갈등,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속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몇 주 동안 우리가 살펴본 창 3장은 성경의 축(軸)이라고 불리 울 만큼 아주 중요합니다. 창 3장을 이해하지 않고는 성경 전체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제까지는 세상에 죄가 없었습니다.
  얼마동안인지는 잘 모르지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에덴동산에서 행복하고 복된 삶을 살았습니다.
  인간의 무죄성, 만물의 완전성,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교제가 창 1,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오늘 본문이 속해 있는 창 4장부터는 질투와 분노, 살인, 거짓, 악과 타락, 배신과 심판, 아픔과 죽음 등이 인간의 삶에 현장에 나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모든 것이 어디에서 왔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깨질 때 우리는 상상하지도 못할 끔찍한 고통과 아픔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절대로 행복할 수 없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파괴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 이것이 죄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높아지려고 하는 영적 교만이 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을 몰아내고 내가 주인이 되겠다고 하는 것이 죄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이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가 단절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된 것입니다.

  죄는 얼마나 악합니까?
  오늘 본문은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가져다주었는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는 불신과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멀리 떠났으며, 그의 범죄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와 똑같은 성품을 이어 받게 되었고, 그 결과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아담과 하와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인 오늘 본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Ⅰ. 오늘 본문은 첫 번째로 하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다는 사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에서 쫓겨난 후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본문 1절을 보십시오.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최초의 가정에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하와는 가인을 낳고서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고 외쳤습니다.

  “여호와로 말미암아” 이 말씀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여호와로부터’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여호와의 도움으로’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하와는 아이를 낳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전에 하나님은 창 3;15절에서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깰 것이며, 이 여인의  후손을 통하여 인간의 구원이 이루어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마도 하와는 첫 아들을 낳으면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여자의 후손’을 생각했습니다.
‘이 아들이야말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여인의 후손이 아닐까? 하는 믿음을 가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와는 가인을 낳으면서 생전 처음으로 무시무시한 해산의 고통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지금껏 이보다 큰 고통은 없었습니다.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께서 해산하는 고통을 주시겠다고 하셨으니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막상 겪고 보니 세상에 이런 고통이 없었습니다.

  아마 하와는 이런 고통 속에서 내내 회개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하나님이 도와주시기만 하면 앞으로는 절대 교만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 제발 도와주십시오.” 하와는 이런 기도를 드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성공적으로 아들을 낳게 되자 ‘하나님의 도움으로 아이를 낳았다’고 생각해서 아이의 이름을 ‘가인’이라고 지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이 끌어들인 이 죄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이며 얼마나 인간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인지 아직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너무 쉽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소망을 가졌던 이 아들이 살인자와 범죄자로 드러났을 때 그들은 비로소 자신들이 불러들인 이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Ⅱ. 본문은 두 번째로 우리에게 최초의 제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본문 2절부터 5절을 보십시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놀라운 사실은 아담의 두 아들이 각각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이 두 사람이 어떻게 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지만, 그 제사의 결과는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인과 그의 제사는 거절하시고 아벨과 그의 제사만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형 가인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거절당한 것을 알고 분노했으며, 그 분노로 동생을 죽여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제사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제사라고 해서, 예배라고 해서 모두 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제사가 있는가 하면 받지 아니하시고 물리치는 거짓된 제사가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예배는 분명히 달랐습니다.
  단순히 제물이 다른 것이 아니고 제사의 성격과 의미가 달랐습니다.
 
  그러면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가 어떤 점이 다릅니까?

  A. 그들의 제사 차이는 마음가짐이었습니다.

  본문 3절-4절을 보십시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여기에 두 가지의 제물이 나타나는데 하나는 땅의 소산이요, 둘째는 양의 첫 소산입니다. 하나는 곡식이고, 하나는 짐승입니다.
  양에는 ‘첫 새끼’라는 말이 있는데, 땅의 소산에는 ‘첫 소산’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저 땅에서 난 것 가운데 하나를 갖다 바친 것입니다.

  그런데 아벨은 자기의 양들이 새끼를 많이 낳았지만 그 중에서 아무 것이나 갖다 바친 것이 아닙니다. 그중 첫 번째 것을 골라 바쳤습니다.

  성도여러분!
  아벨이 양의 ‘첫 새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어떠했겠습니까?
►아벨은 신중했습니다. 아벨은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아벨은 주의를 집중하고, 어떻게 바쳐야 될 것이며, 무엇을 바쳐야 될 것이며, 누구한테 바치는 것인지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기본적인 신앙의 태도가 여기에 나타나 있습니다.
►‘첫 새끼’라는 그 단어 한 마디 속에 아벨의 마음가짐이 나타나 있습니다.
►아벨의 신앙 속에 하나님 중심, 하나님 우선주의, 하나님 제일주의가 나타나 있습니다.

  반면에 가인은 멋대로, 아무렇게나, 하고 싶은 대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예배를 안 드리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를 드리지만 그렇게까지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습니다.
  내 방법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하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 우선주의와 인간 우선주의가 여기서부터 출발합니다.
  하나님의 방법과 인간이 방법이 여기서부터 갈라져 나갑니다.
  신앙과 비신앙의 차이는 간단합니다.
  그것은 순종과 불순종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다면 그런 줄 알고, 하라 하시면 하고, 하지 말라 하면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것이 쉬운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마음대로 하려니까 그때부터 복잡해지는 것입니다.
  거기에 죄가 있는 것입니다.
 
  아벨은 하나님 중심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삶은 무엇을 하든지 언제나 우선적으로 하나님을 생각하기를 원합니다.

  숨을 쉬어도 주님이요, 일을 해도 주님이요, 그저 모든 것을 주님 우선주의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하나님 중심의 삶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다윗이 그랬습니다.
  다윗에게는 실수도 있고, 죄도 많은 사람이지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신앙고백인 시편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적어도 그 가슴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여호와는 나의 빛이시요, 여호와는 나의 등대시요,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요’ 이것이 다윗입니다.

  이와 같이 다윗은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았고, 그것이 바로 아벨의 모습입니다.

  성도여러분!
  사실 곡식이 짐승의 고기보다 못합니까?
  곡식도 주님이 만드신 것인데 곡식이 꼭 짐승보다 못할 리가 없습니다.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가가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하되, 하나님의 방법대로 할 것인가? 아니면 내 방법과 생각대로 할 것인가의 차이입니다.

  성도여러분!
  이것은 가인과 아벨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문제입니다.
  우리 자신도 날마다 이 두 가지 사이에서 얼마나 갈등합니까?

  그래서 우리 자신의 뜻을 죽이려 하고, 우리 자신을 무릎 꿇게 하려 하지 않습니까? ‘주의 뜻을 따라 하루하루 순간순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하면서 부르짖기 않습니까?
  가인은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도 여러 가지가 있을 텐데 꼭 그렇게 하나님 방법대로 해야 되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생이야 짐승을 키우지만, 나는 농부니까 그렇게 힘들게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할 것이 뭐있나.
  하나님을 안 섬기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저 내 최선을 다해서 제사하면 되지 않겠나. 그러니 그저 곡식 좀 바치면 되겠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가인은 하나님의 방법이 귀찮고, 싫고, 불편해졌습니다.
  그러니 나의 방법대로, 인간의 방법대로 하나님을 섬겨 보겠다고 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마음가짐의 차이였습니다.

  B. 뿐만 아니라  그들의 제사 차이는 믿음의 차이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 11:4절에서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아벨은 믿음으로 제사를 하나님께 드려,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믿음으로 행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는 빼놓을 수 없는 하나의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언가로 우리의 죄를 덮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범죄 하기 전에는 하나님 앞에 바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벌거벗었지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과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를 짓고 난 후에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는 반드시 그들의 수치를 가릴 수 있는 그 어떤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범죄하고 난 후에 인간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가죽옷은 짐승이 죽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짐승이 죽지 않고 가죽이 나올 수 없습니다. 살아있는 채로 가죽만 벗기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보호하고 지켜주기 위해서 이미 한 짐승이 죽었습니다.
 
  가죽옷은 구원의 상징입니다.
  가죽옷은 장차 여인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죽의 임자를 죽이시고 그 가죽옷을 손수 지어 아담과 하와를 입히셨습니다. 이것은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손수 지어 아담과 하와를 입히신 가죽옷은, 장차 여인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대속의 십자가를 지실 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범죄한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신 것은 우리의 죄를 가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의 죄를 덮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참된 예배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가인은 자신의 종교성을 가지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아벨의 제사에는 분명히 죄를 가리는 요소가 들어 있었습니다.

  짐승을 잡아서 그 짐승의 기름을 하나님 앞에 태운 아벨의 제사에는 자신이 말할 수 없는 죄인이며, 하나님의 긍휼 없이는 도저히 살 수 없는 버림받은 죄인이라는 고백이 분명히 들어 있습니다.

  아벨의 제사에는 분명히 말씀의 요소가 있었습니다.
  아벨의 제사에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으며 나의 죄를 무언가로 덮어야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다’는 분명한 말씀의 요소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씀을 붙들고 예배 드렸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중심을 보신 후에 하나는 받으시고 다른 하나는 거절하셨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 ‘나는 하나님 앞에 죄인이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의식이 조금도 없다면 이 예배는 거짓된 예배입니다.

  참 예배에는 말씀이 있어야 하고, 정말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으며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용서해 주시고 허물을 덮어 주셔야 한다는 고백이 있어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붙잡고 나가는 요소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예배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만나주시고, 내 문제를 풀어주시며, 내 속에 있는 죄를 씻어주시고, 새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입니다.
  아벨은 이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가인이 드린 예배는 인본주의적인 예배였고, 인간이 시작해서 인간이 끝마친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예배였습니다.

  성도여러분!
  지금 드리는 예배는 여러분들을 위한 예배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그 무엇인가를 얻고자 드리는 예배가 아닙니다. 나 중심의 예배는 하나님이 거절하십니다.

  이런 예배는 감동이 없습니다. 죄  사함도 없습니다.
  예배를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변한 것이 하나도 없는 예배가 바로 가인의 예배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면서 변해야 합니다. 기뻐해야 합니다. 내 속에 있는 모든 더러운 것들을 다 씻음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의 예배 속에 아벨이 드린 제사와 같은 살아 있는 예배의 요소, 믿음으로 드리는 요소가 반드시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가인은 예배의 실패자였습니다. 가인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거절하셨습니다. 왜 입니까?
  가인은 인간 중심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가인의 예배는 믿음의 요소가 빠진 예배였습니다. 결국 가인은 예배의 실패자뿐만 아니라 인생의 실패자가 되었습니다.
  본문 8절을 보십시오.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아담과 하와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고, 이 두 아들 사이에 죽음과 살인이 있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나타내고 있습니까?

  예배는 살아 있어야 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정한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겸손을 되찾는다면 얼굴을 들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대로 나아갈 때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사건은 인간의 대조적인 두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좁은 길과 넓은 길, 순종과 불순종, 신앙과 불신앙의 길입니다. 이 두 사람은 하나님 중심주의와 인간 중심주의의 대조적이고 대표적인 인물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합니까?
  아벨의 신앙, 본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