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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성읍을 치료하리라 (렙 3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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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읍을 치료하리라 
예레미야 33:1-9

본문의 6절을 보면 “치료”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나 보라 내가 이 성읍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안과 진실이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교회에서는 이 치료라는 말을 치유로 바꾸어서 많이 쓰고 있습니다.

치유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먼저 육신치유가 있습니다. 육신이 병든 것을 낫게 하는 것입니다.
치료라는 말이 가장 직접적이고 또 많이 쓰이는 경우입니다.
건강에 약함이 있는 분들, 육신 치유가 이뤄지시기 바랍니다.

내면치유가 있습니다. 내적치유라고도 하는데 마음의 상처를 낫게 하는 것입니다.
요즘 이 내면치유의 중요성이 날로 커지고 있습니다.

전인치유(全人治癒)가 있습니다. 육신치유 플러스 내면치유 이퀄 전인치유입니다.
우리 교회는 전원적인 교회라는 말을 많이 듣고 있습니다.
전원적인 교회는 단순히 ‘전원적인 환경 가운데 있는 교회’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이상이어야 합니다.
‘전원적인 분위기, 다시 말해 편안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교회’ 여기에서 그쳐서도 안 됩니다. 그 이상이어야합니다.
전원적인 교회는 전인치유가 행해지는 교회를 말합니다.
사람들이 육신과 내면의 상처를 치유 받고 새 존재가 되어 새 힘을 얻어 새롭게 살도록 하는 교회를 말합니다.

환경치유가 있습니다. 날로 심각해 가고 있는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힘쓰는 것입니다.

6절에 나오는 치료는 어떤 치료일까요?
우리는 이 치료에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요?
성읍치유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읍치유, 매우 낯설게 느껴지는 말입니다.

이 말은 “그러나 보라 내가 이 성읍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에서 중요한 단어 둘을 합한 것입니다.
오늘은 이 성읍치유에 대해서 생각하는 가운데 은혜와 교훈을 얻기 원합니다.

첫째, 우리는 병든 성읍은 반드시 망한다는 사실을 두려워해야합니다.

예레미야 당시 예루살렘 성읍은 깊은 병이 들어 있었습니다.
제일 큰 병의 이름은 우상숭배였습니다.
악행이라는 병도 심각했습니다. 5절 뒷부분을 보세요.
이는 그들의 모든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얼굴을 가리어 이 성을 돌아보지 아니 하였음이라

예루살렘 성읍의 병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하나님은 예레미야서 32장 17절에서 “네 상처는 고칠 수 없고 네 부상은 중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은 결국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정복당하고 철저하게 파괴되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성읍, 이 시대,  이 사회도 그에 못지않은 병이 들었습니다.
일류병, 유행병, 투기병, 타락병, 음란병, 책임전가병, 무책임병, 선열들과 장병들의 피, 선배세대의 땀과 눈물을 잊어버리는 망각병, 말 함부로 하는 병, 이기주의 병, 집단행동 병,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병이 들었습니다.
이 시대, 이 성읍이 병들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 병든 성읍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이제는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어린이 유괴살해 같은 끔찍한 범죄가 일어나도 그 충격이 그리 오래 가지 않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 다시 같은 범죄가 일어납니다.
집단 이기주의 현상에 대해서도 중독이 되어 ‘그저 그런가보다’ 합니다.
과연 그래도 될까요?

아까 치유에는 육신치유와 내면치유가 있다고 했습니다.
육신이 다치거나 병들면 얼른 병원에 갑니다.
눈에 보이거나 당장 아프기 때문입니다.
그대로 놔두면 생명이 위협 받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면에 있는 열등감, 분노, 증오, 과거에 받은 큰 충격, 가문에 흘러내려오는 좋지 않은 기질, 이런 것들은 그대로 놔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서서히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뇌두어도 괜찮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과연 괜찮습니까?

어떤 상담전문가는 이런 것들은 내 안에 있는 나쁜 운전수와 같다고 했습니다.
그 나쁜 운전수는 나라는 차를 난폭운전을 하게 해서 다른 차들과 부딪게 만듭니다.
심지어는 역주행을 시켜 마주 오는 차와 충돌하게 하게 합니다.
끝내는 차를 낭떠러지에 떨어지게 만듭니다.
우리는 내면치유에 힘써야합니다.

환경치유도 그렇습니다.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 신학생 시절에 생태윤리라는 과목이 있었습니다.
환경문제를 다루는 것입니다. 그 당시로서는 매우 앞선 과목이었습니다.
요즘 신문에서 환경문제에 대한 보도를 보면서 그 때 공부한 내용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자세한 것들은 기억나지 않지만 ‘사람의 피부가 3분의 2 이상 화상을 입거나 페인트칠을 해 놓으면 살 수가 없는데 지구도 마찬가지이다. 지구의 3분의 2 이상이 도시가 되거나 사막이 되면 지구는 죽음의 별이 된다. 그런데 얼마 남지 않았다.’ ‘지구 온난화 현상이 계속되어서 남극과 북극의 빙산들이 녹으면 해수면이 높아져서 사람의 생존이  불가능해진다. 이미 시작되었다.’ 이런 내용은 기억납니다.

‘지구가 죽음의 별이 된다.’ ‘생존이 불가능해진다.’ 이렇게 강력한 표현을 썼기 때문에 지금까지 기억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그런 일이 깊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크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는 심각하게 생각하면서도 나와는 크게 상관없는 일로 여깁니다.
따라서 그것을 치유하는 일에는 별로 힘쓰지 않습니다.
마치 뜨뜻해지는 물속에 들어 있는 개구리와 같습니다.
개구리를 뜨거운 물에 넣으면 놀라서 뛰어나옵니다.
그러면 그 개구리는 화상은 좀 입었겠지만 살 수 있습니다.
개구리를 미지근한 물속에 넣고 불을 천천히 땝니다.
개구리는 기분이 좋아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가 삶은 개구리가 되어 죽고 맙니다.

이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이 사회는 병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성읍치유가 행해지지 않으면 이 사회는 심각한 위기를 만납니다.
노아의 이야기가 그것을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가 그것을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구약시대 예언자들은 그 시대, 그것을 날카롭게 지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모스가 그랬습니다.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번영을 좋아했습니다.
아모스는 그 사회가 부패와 부정의의 병을 깊이 앓고 있음을 날카롭게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벌할 것이라고 날카롭게 외쳤습니다.

나훔도 그랬습니다.
나훔은 니느웨의 멸망을 선포한 예언자입니다.
오늘날 이라크 모슬이라는 곳이 예전 니느웨 성이 있던 곳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니느웨는 당시 세계를 지배하는 앗수르 제국의 수도였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튼튼했겠습니까?
얼마나 화려했겠습니까?
그런데 나훔은 니느웨가 깊이 병들어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니느웨를 “피의 성”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안에는 거짓이 가득하다고 하였습니다.
포악이 가득하며 탈취가 떠나지 아니한다고 하였습니다.
마술에 능숙한 미모의 음녀가 많은 음행을 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나 3:1-4).
그래서 니느웨가 망할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나훔서의 내용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다음 다음 주일, 4월 1일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종려주일입니다.
그리고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우리는 고난주간을 잘 보낼 준비를 지금부터 해야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에 가까이 오셔서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셨습니다(눅 19:41).

왜 우셨습니까?
그 성이 병든 모습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예루살렘 성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멸망당할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안타까움이 우리에게 있어야합니다.
서울을 보고 울고, 수지를 보고 울고, 분당을 보고 우는 마음이 있어야합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병이 깊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두 성을 멸망시킬 계획을 세웠습니다.
아브라함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묻습니다.
“하나님,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다면 용서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아, 의인 오십 명이 있다면 온 성을 용서하겠다.’
“하나님 오 명이 부족하면 어떻겠습니까? 사십오 명이 있다면 용서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아, 사십오 명을 찾으면 멸하지 않겠다.’
아브라함은 계속 숫자를 줄여 나갑니다.
“사십 명이면?”
“삼십 명이면?”
“십오 명은?”
“십 명은?”

성경을 보면 아브라함이 얼마나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리고 송구스러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호소하는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십 오인을 말할 때는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 했습니다.
열 명을 이야기할 때는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말씀하리이다”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왜 이렇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호소합니까?
물론 그 성에 조카 롯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롯 때문이겠습니까?
깊이 병들어 이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이런 안타까움을 가지고 우리가 사는 곳에 의인의 숫자를 늘여나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와 사회, 내가 살고 있는 지역사회가 깊은 병이 들어 있는데 ‘나는 모르겠다.’ 하는 것은  죄입니다.
예언자 에스겔은 이런 사람들을 “여우”라고 했습니다.
에스겔서 13장 4절과 5절을  읽어 드립니다.

이스라엘아 너의 선지자들은 황무지에 있는 여우 같으니라 너희 선지자들이 성 무너진 곳에 올라가지도 아니하였으며 이스라엘 족속을 위하여 여호와의 날에 전쟁에서 견디게  하려고 성벽을 수축하지도 아니하였느니라

이 말씀에서 성이 무너졌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성벽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신앙의 성벽, 도덕의 성벽이 무너진 것을 말합니다.
그 무너진 성벽을 수축하는 것이 바로 성읍치유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여호와의 날에 아무런 방비를 할 수 없게 됩니다.
에스겔은 그런 것을 알면서도 방치하는 선지자들을 “황무지에 있는 여우”라고 강하게 꾸짖고 있습니다.
이 사회가 깊은 병이 들었는데,  이대로 가면 이 나라와 이 사회가 폐허가 될 수밖에 없는데, 벌써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윤리적으로 황폐해저 가고 있는데, 우리가 모른척하면 우리는 황무지에 있는 여우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이 성읍의 병 때문에 이 성읍은 무서운 재앙을 만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두려워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 병을 치유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상처를 낫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6절 뒷부분의 말씀과 같이 이 성읍이 평안과 진실이 풍성한 성읍이 되도록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9절의 앞부분의 말씀과 같이 이 성읍이 세계 열방 앞에서 하나님의 기쁜 이름이 되고 찬송과 영광이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9절 뒷부분의 말씀과 같이 세계 열방이 하나님이 이 백성에게 베푼 복과 평안을 보도록 할 수 있을까?’
생각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 우리는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일꾼들이 되어야합니다.

하나님은 “그러나 보라 내가 이 성읍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시고”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예레미야서 30장 17절에서도 “내가 너의 상처로부터 새 살이 돋아나게 하여  너를 고쳐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서 29장 11절에서 우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신다고 하셨는데 여기에서도 하나님의 그런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병든 예루살렘을 치료하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은 병든 서울도 치료하실 것입니다.
이 지역사회도 치료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치료하는 일의 일꾼들이 되어야 합니다.
일꾼이라는 말은 ‘조력자’ ‘조수’ ‘사환’ ‘심부름꾼’ 이렇게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사실 부족한 우리가 이 성읍을 치료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치료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의사가 아닌 사람이 수술을 하겠다고 메스를 들고 나서는 것과 같습니다.

포항에 있는 어느 기독교병원에서 그 병원의 신문을 정기적으로 우리 교회에 보내주고 있습니다. 목양 카페 앞에 있는 정기간행물 열람대에 그 신문이 놓여 있는데요, 그 신문 1면에 있는 그 병원의 구호가 참 인상적입니다.
‘하나님은 치료하고 우리는 봉사한다.’
여러분,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위해 성실하게 봉사하는 일꾼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의사 선생님이 치료를 잘 하기 위해서는 좋은 의료진의 도움이 꼭 필요합니다.
약사, 간호사, 임상병리사, 물리치료사, 방사선 기사, 행정요원…, 많은 손길이 필요합니다.
의료선교훈련원 같은 기관의 강연을 맡아 가보면 참 다양한 직종의 의료인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지금 중국에서 의료선교를 성공적으로 잘 하고 있는 장로님이 한 분 계십니다.
이 분은 사실은 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던 분이었습니다.
선교일선에 직접적으로 헌신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어느 의료선교기관의 행정책임자가 되었습니다.
그 경험을 가지고 중국에 가서 선교를 목적으로 한 병원을 세워 사랑을 베풀고 있습니다.

우리는 병든 도성을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의료진 가운데 한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 이사야를 부르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선포한 예레미야도 부르셨습니다.
요나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해 열두 제자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오늘 여러분과 저를 부르고 계십니다.
“일하러 가세 일하러 가 삼천리 강산 위해 하나님 명령 받았으니 반도강산에 일하러 가세”
하면서 부름에 응하시기 바랍니다.

지난 화요일, 여선교회 기도회에서 ‘전달자 뵈뵈’라는 제목으로 설교했습니다.
오늘 저녁에 신천집사 주관예배를 드리는데 뵈뵈는 교회 역사에서 최초의 여집사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에서 로마서를 기록했는데 뵈뵈가 이 로마서를 로마까지 전달했습니다.
우리 모두 바울과 같은 사도는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을 돕는 뵈뵈 집사와 같은 사람들은 될 수 있습니다.

주일 예배 순서를 작성할 때 설교내용에 도움을 주는 찬송을 택하기 위해 힘씁니다.
오늘 부르고 싶은 찬송은 사실은 250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익숙한 찬송이 아닙니다.
저도 부를 줄을 모르고 다른 분들에게 물어보아도 모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른 찬송을 택했습니다.
250장의 1절 가사는 이렇습니다.

아름다운 시온성아 어서 문을 열어라
그 곳에서 기쁨으로 내 주 예수 섬기리
복되도다 시온성 빛과 은총 넘치네

하나님은 우리가 사는 곳이 치료를 받아 온전하게 되어 아름다운 시온성, 복된 시온성, 빛과 은총 넘치는 곳이 되기 원하십니다.
우리는 이 일에 우리의 아주 작은 힘을 보내야 합니다.
지난 주일에  벤자민 슈몰크 (Benjamin Schmolk 1672-1737)목사님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슈몰크 목사님은 찬송가 431장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를 작사한 분입니다.
슈몰크 목사님은 이 찬송가 250장도 작사했습니다.
슈몰크 목사님이 목회할 때 유럽은 30년에 걸친 종교전쟁 끝에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져 있었습니다.
지난 주일에 그 때 페스트까지 돌았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생활환경도 황폐해졌고 사람들의 마음도 황폐해졌습니다.

슈몰크 목사님은 그렇게 병들고 황폐해진 환경과 마음을 아름다운 시온성으로 바꾸기 위해서 힘썼습니다.
우선 사람들의 상처 받은 마음을 치유해 주기 위해서 많은 수고를 했습니다.
슈몰크 목사님은 병든 성읍을 치료하는 하나님의 훌륭한 일꾼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성읍을 치료  하시는데 훌륭한 일꾼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 이 성읍의 상처는 말씀으로 치유할 수 있습니다.

육신치유는 약, 주사, 수술, 이와 같은 것들을 통해서 이뤄집니다.
내면치유는 많은 경우 상담을 통해서 이뤄집니다.
성읍치유는 무엇을 통해서 이룰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서 30장 13절에서 “네 상처에는 약도 없고 처방도 없도다”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딱 하나를 제쳐 놓고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제쳐놓은 치료제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18세기 영국사회가 깊은 병에 들었습니다.
그 때 영국에서 사람이 꽉꽉 차는 곳이 두 군데 있었습니다.
하나는 유치장입니다. 하나는 술집이었습니다. 
텅텅 비는 곳이 두 곳 있었습니다.
하나는 학교였습니다. 하나는 교회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피가 영국사회의 이 병의 치료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유혈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요한 웨슬리 목사님이 감리교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말씀을 선포하기에 힘썼습니다.
정말 때와 장소를 가지지 않고  말씀을 전했습니다.
병든 영국 사회가 새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이 전통을 잘 살려야합니다.
말씀으로 한국 도성을 치유하는 교회가 되어야합니다.

니느웨도 한 때 말씀으로 치료된 때가 있었습니다.
언제입니까? 
요나가 복음을 전했을 때입니다.
요나가 니느웨에 가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외챴습니다.
니느웨에 큰 회개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니느웨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모두 굵은 베를 입었습니다.
왕도 굵은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았습니다.
왕이 직접 명령을 내려 짐승까지도 금식하라고 했습니다.
물도 마시지 않는 금식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부르짖고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나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니느웨의 역사에서 도덕 진흥운동 같은 것이 일어났던 때가 있습니다.
아닷 니라리(Adad-Nirari)라는 왕이 다스리고 있을 때인데 요나가 예언활동을 했을 때와 같은 시대였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니느웨가 계속해서 말씀으로 치료를 받았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결국 니느웨는 나훔이 예언한 것처럼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쓰러져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 버립니다.

성읍치유는 말을 바꾸면 사회선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구원운동이라고도 합니다.
오늘날 사회선교에 힘쓰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분들 가운데 시위라든가 성명서라든가, 세상에서 쓰는 방법과 같은 방법을 쓰는 분들이 있습니다.
사회적 이슈의 여러 시위에 감초처럼 얼굴을 볼 수 있는 교역자들도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저것이 아닌데…’ 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런 방법으로 근본적인 치유가 이뤄지는 경우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성읍을 진단하면서 ‘말씀!’ 이라는 처방을 말합니다.
그런데 다른 것을 들고 나가는 것은 잘 하는 것 아닙니다.
그 환자에게 유익한 것도 아닙니다.
한국은 깊은 병이 들어 있는 도성입니다.
사회의 여러 모습을 보면 소망이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국은 말씀을 받은 나라, 말씀이 있는 나라입니다.
천만 안팎의 성도가 있고 오만  안팎의 교회가 있습니다.
해마다 막대한 양이 성서가 반포되고 있습니다.
병을 이길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은 치유 받을 수 있는 도성입니다.
믿음의 도성 예루살렘을 향해 “내가 이 성읍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안과 진실이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라고 하신 하나님은 그래서 이 땅을 향해서도 같은 말씀을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라는 치료제를 널리 나눠주는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이제 신년축복대심방이 거의 끝나가고 있습니다.
신년축복대심방 기간에는 신년축복대심방을 우선순위 1번으로 하고 있습니다.
신년축대심방이 끝나면 전도가 우선순위 1번이 될 것입니다.
신년축복심방을 하면서 성도들의 집 문에 세 가지 종류의 교패(敎牌)가 붙어 있는 것을 봅니다.
하나는 예전부터 사용하던 진한 파란색으로 된 것입니다.
하나는 연두색으로 된 것입니다.
하나는 몇 해 전에 만든 심벌마크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새로 부임한 부담임목사님과 심방을 같이 하면서 파란 것은 고참 교인, 연두색은 중고참 교인, 새 심벌마크가 들어있는 것은 신참교인으로 알면 된다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고참교인 가운데 교회를 따라 수지로 이사한 분들이 많은데 그 분들은 집에 심벌마크가 들어 있는 새 교패를 붙이고 있습니다.

연두색으로 된 교패에는 영문자 세 개가 한 칸에 하나씩 들어 있습니다.
M자, E자, H자입니다.

M은  Mission을 말합니다. 선교입니다.
E는  Education을 말합니다. 교육입니다.
H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Healing을 말합니다. 치유입니다.

치유는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치유에는 성읍치유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치유가 행해지지 않으면 이 성읍은 위기를 겪는다는 사실을 두려워하사기 바랍니다.
“그러나 보라 내가 이 성읍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안과 진실이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하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님이 하시는 치유의 일에 좋은 일꾼이 되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말씀을 들고 이 일에 나서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치유를 중요한 사역의 하나로 삼으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관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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