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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보다 더 강한 말 (룻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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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보다 더 강한 말 - (룻1:1~7)

고대 히브리인들은 문자로, 혹은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자신의 의도와 뜻을 더 강하게 전달하고자 나름대로의 특유한 문학적 스타일과 문법적 장치들을 이용한 기법을 사용했습니다. 특히 성경기자들도 이런 기법을 많이 사용하곤 했는데 그 이유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뜻을 한 갓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사용하는 문장과 말을 통해 다 담아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 즉 성경의 단어, 문장 뿐 아니라 문장의 구조, 배열, 분위기 등을 통해서 더 강력하고, 중요한 메시지를 말씀하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룻기를 읽으면서 표면에 나타난 문장, 단어, 스토리등을 통해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룻기의 강점은 문장의 구조를 통한 또 다른 메시지 전달입니다. 즉 '행간을 통한 메시지', '말보다 더 강한 말'을 통해서입니다. 본문을 유의깊게 살펴보면 서로 짝을 이루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A.(룻1:1~2) 유다에서 모압으로 들어감, 두 아들과 함께, 리더가 엘리멜렉, 내리막길을 걸음
B.(룻1:3) 남편이 죽다, 두 아들이 남다.
C.(룻1:4)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아내를 취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거기 거한지 십년 즈음에
B'(룻1:5) 두 아들이 죽다, 두 사람이 남다.
A'(룻1:6~7) 모압에서 유다로 들어감, 두 자부와 함께, 리더가 나오미, 상승곡선을 탐

그렇다면 4절이 그 중심에 있습니다. 이러한 히브리식 문학구조를 '중앙집중식 교차대구법'(Concentric Structure)라고 부르는데 이 구조를 통해서 말과 문장으로 표현할 수 없는 또 다른 메시지를 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룻1:1~7절까지 한절, 한절이 다 중요하지만 그 중에서 4절이 가장 중앙에 배치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이 말씀의 중요성을 인지하여야만 합니다. "그들은 모압 여자중에서 아내를 취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거기 거한지 십년 즈음에"(룻1:4) 유대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때 리더가 어떤 행동을 취합니다. (1)공동체를 이끌고 모압으로 갔다(1절), (2)그들이 모압지방으로 들어갔다(2절) (3)그곳에 유하였다(2절), (4)리더격인 엘리멜렉이 그곳에서 죽었다(3절)로 정리됩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생각하게 되는 4절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흉년을 핑계로 모압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갔습니다' '들어갔습니다' '유했습니다' 점점 그곳에서의 거주가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모압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의식하지 아니한 채 행하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검은돈, 쾌락, 세상의 것으로 내 공허함을 채우려는 모든 현장, 하나님의 백성임을 숨긴 채 머물고 있는 어두움의 현장이 모압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내어 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공동체를 이끌어 왔던 리더 엘리멜렉이 갑자가 죽습니다. 그렇다면 이 충격적인 사건 앞에서 그 공동체는 어떤 태도를 취하여야 마땅했나요?

이 상황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물어 보아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그곳에서 결혼을 합니다. 이 의미는 아예 그곳에 눌러 앉겠다는 의지적 표현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쫓고, 서고, 앉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누워버리는(lying)태도입니다. 이들의 태도는 한마디로 지금 이 일이 터졌든지 말았든지, 공동체가 무너지든지 말든지, 이에 상관하지 않고 나는 내 고집대로, 내 기분대로 행하겠다는 태도입니다. 이들의 고집은 '하나님의 진노'(롬2:5)를 쌓는 것이나 다름 바 없습니다. 계속 고집을 피우고,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 어디 해 볼 테면 해 봅시다'라는 식으로 대하니 어떤 일이 일어났던가요?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룻1:5)

때론 말보다 더 강한 것이 있습니다. 구조와 단어의 배열, 반복, 암시 등을 통해 하나님은 더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 하실 때가 많습니다. '고집피우지 마라. 하나님과 맞서지 마라.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고집을 계속 관철 시키려 해서는 안 됩니다. 고집을 피우다가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자기의 뜻을 굽혀야 합니다. 애굽의 바로 왕이 하나님 앞에서 계속 고집을 피우다 열 가지 재앙을 만나고 결국은 손을 듭니다. 가룟유다는 교만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팔아 넘기는 자리까지 가다가 스스로 자멸의 길로 빠져버렸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고집을 피우다가도 하나님앞에서 항복한 사람들은 놀라운 은혜를 입었습니다. 왕상 19장에 보면 '로뎀나무아래' 쓰러져 있는 엘리야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가 죽겠다고, 하나님 앞에서 떼를 씁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그를 어르십니다. 그래도 막무가내입니다. 그러던 그에게 하나님이 새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그러자 이 말씀 앞에 엘리야는 마치 충격을 받은 듯이 벌떡 일어납니다. 그리고 순종합니다. 지금까지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른 행동을 합니다. 왜냐하면 귀에 들리는 말씀은 아니었지만 행간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모세도 하나님의 뜻 앞에서 처음에는 고집을 피웠지만, 나중에는 하나님의 뜻 앞에서 겸손히 항복합니다. 팔십이라는 나이였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다 그분 앞에 내려놓고 오로지 순종하기로 결심합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디에 서 있습니까? 계속되는 고난과 환란 속에서도 돌아서지 못하고 고집만 부리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결코 인간에게 지는 분이 아니십니다. 전능자이신 그분 앞에서 고집피우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순복해야 합니다. 어서 항복하고 돌아오십시오. 그것이 오늘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요. 은혜를 입을 수 있는 길입니다.
(옥성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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