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큰 빛으로 오신 예수님 (마 4:12)

  • 잡초 잡초
  • 416
  • 0

첨부 1


제목: 큰 빛으로 오신 예수님 

(마 4:12)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마 4:13)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 에 가서 사시니 
(마 4:14)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마 4: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마 4: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마 4: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오늘 본문 1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이 헤롯왕에게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공생애의 사역의 때를 설명합니다. 세례요한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짐으로써 예수님의 메시야로서의 공생애가 시작된 겁니다. 찬란한 태양이 떠오를 때 달과 별들이 사라지듯, 세례요한은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할 때가 되니 흔연히 떠나는 겁니다. 

  혹자는 세례요한과 예수님이 같이 사역을 하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죽을 자는 죽고 살 자는 살아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각자의 사명이 다르다는 겁니다.

  문제는 주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오래 살고 일찍 죽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오래 머물라고 하시면 오래 머물고 또 일찍 부르시면 ‘할렐루야!’ 하고 가는 겁니다. 

  499장 찬송처럼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 하나 괴론 세상에 할 일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시니’ 그래서 우리는 살뿐입니다. 결코 이 세상이 좋아서 오래 살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아직 할 일이  남아 있기에 이 세상에 머물러 있는 겁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의 생사관(生死觀)입니다. 

(빌 1:20)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빌 1: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셨듯이 여러분도 이제부터 사명을 깨닫고 주님을 위한 공생애를 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을 어디에서 시작하셨습니까?     

1. 예수님은 공생애의 첫 사역을 소외된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시작하셨습니다.

  저는 첫 목회사역을 저의 고향 근처 시골에서 시작했습니다. 여주 도자기 공장 지역인 북내 학동이란 곳이 저의 첫 사역지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의 첫 사역을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시작하셨습니다.

(마 4:13)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주님께서는 유대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시고 갈릴리로 내려와 고향인 나사렛에서 사시다가 가버나움으로 가셔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신 겁니다. 이 가버나움은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었습니다.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제자 중 어부였던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당시 갈릴리 가버나움은 소외당하고, 멸시와 천대를 받는 지역이었습니다. 정말 희망이 없던 지역입니다. 이스라엘 중 아주 변두리 지역입니다. 이곳에는 이방인들도 섞여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방의 갈릴리’라고 불렀습니다.

(마 4: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예수님은 이런 소외된 갈릴리 가버나움 마을을 세계선교의 센터가 되게 하신 겁니다. 이곳에서 짐을 풀고 본격적인 전도를 시작하셨던 겁니다. 가버나움으로서는 이보다 영광스러운 일이 없습니다. 여러분, 의정부 신곡동이 세계선교의 센터가 된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 같은 예수님의 갈릴리 선택은 유대인들에게는 어처구니없는 일로 비쳐졌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메시야 사역의 최적지는 당연히 유대 예루살렘으로 생각했을 겁니다. 저들은 갈릴리나 나사렛에서는 결코 선지자가 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갈릴리 사람으로 출세를 하려면 갈릴리를 속히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야했습니다. 

  당시에 유대인들도 지방색이나 지역차별이 심했습니다. 유대나 예루살렘이 오늘날로 말하면 우리나라의 서울이요, 수도권입니다. 그 중에서도 강남, 분당 같은 곳입니다. 그리고 갈릴리나 가버나움, 나사렛, 스불론, 납달리 여기는 그야말로 아주 소외된 지역, 변두리입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저 강원도 감자바위, 그리고 충청도 멍청도 사람, 전라도....같은 곳입니다. 이런데 출신은 큰 일을 못한다는 겁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지방색 가지면 안됩니다. 예수님이 지역차별의 피해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를 초월하신 겁니다. 

  예수님은 왜 복음사역을 유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시지 않고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시작하셨을까요? 예수님의 복음은 유대인이나 특권층을 위한 복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방인을 포함한 전 인류를 위한 복음이라는 겁니다. 특히 천한 자, 낮은 자, 가난한 자, 그리고 죄인을 위한 복음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장 작은 나라인 유대나라, 그리고 가장 작은 동네인 베들레헴, 그것도 마굿간에서 태어나신 겁니다. 그리고 가버나움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겁니다.

  낮고 천한 곳에 있는 우리를 찾아 구원하시려고 그리하셨고 스스로 낮추시어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시려고 그리 하신 겁니다. 여러분, 참 고맙지 않습니까? 요즘에는 아이들은 친구도 제 마음대로 못 사귄답니다. 부모님이 다 조사해서 수준 높은 집 아들과만 사귀게 한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 같은 죄인 구원하시려고 미천한 곳으로 오신 겁니다.
        # 내 친구 되신 예수님 날 구원하시려고
        그 귀한 몸을 버리사 내 죄를 대속 했네

  우리도 예수님의 이와 같은 겸비한 마음을 본 받아 소외된 사람을 찾아 친구가 되어주고 그들을 주께로 인도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이것은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 성취를 위한 겁니다.

(마 4:14)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마 4: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이 말씀이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사 9:1)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과거에 갈릴리는 혹독한 압제와 재난을 당했던 지역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곳에 거하심으로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다는 겁니다. 그 예언이 이렇게 이루어진 겁니다.

  성도여러분, 우리가 어느 지역에 살던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주님이 함께 하시느냐가 중요합니다.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신’ 주님이 여러분을 영화롭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친구가 되심을 믿고 감사하기를 바랍니다. 

2. 예수님은 그곳, 흑암에 앉은 백성들과 사망의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큰 빛이셨습니다.

(마 4: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여기서 ‘흑암에 앉은 백성’ 또는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이란 멸시받고, 절망의 상태에 놓인 당시 갈릴리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옛부터 이 갈릴리 지역은 어둠에 앉은 백성들이 살아가는 곳이요 사망의 그늘 진 곳이었습니다. 그들은 소망이 무너진 상태에 ‘앉아’ 절망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어둠과 절망에 빠진 백성들에게 어떤 일이 생겼습니까? 16절 말씀처럼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고 했습니다. 할렐루야! 남이 잘 되도 기뻐합시다. 

  멸시받고 소외된 지역, ‘이방의 갈릴리’에 큰 빛이 비추었습니다. 흑암에 앉은 백성들에게 참 빛이신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래서 ‘이방의 갈릴리’에 참 빛이 눈부시게 비추었던 겁니다.

  여러분, 일출(日出) 광경 보셨지요? 어둠을 뚫고 태양이 솟아오르듯 예수님께서 ‘이방의 갈릴리’에 떠오른 겁니다. 흑암 가운데 백성에게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큰 빛을 비추었던 겁니다.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대로 된 겁니다.

(말 4: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암흑천지가 광명천지가 된 겁니다.

  어찌 ‘이방의 갈릴리’뿐입니까? 이 말씀은 죄와 사망 가운데 있는 전 인류를 가리킵니다. 인류는 아담의 타락 이후 허물과 죄로 죽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은 자였습니다.

(엡 2: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엡 2: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 하는 영이라 

  그래서 죄의 노예로 살아왔습니다. 물질의 노예로, 마귀의 노예로, 질병과 죽음의 노예로 살아왔습니다. 이들의 영혼은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런데 이런 인류에게 빛이 비추었습니다. 아주 큰 빛이 비추었습니다. 예수님은 큰 빛이십니다. 여러분은 빛의 고마움을 아십니까? 모든 생물은 태양 빛을 받지 못하면 죽습니다. 빛이 없다면 어찌 살겠습니까? 지금 이 순간에 전기 불이 나가면 우리도 눈먼 소경이나 똑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빛 중에도 큰 빛이십니다. 참 빛이십니다.   

(요 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요 8: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 9: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예수님은 진리의 빛이요, 어둠을 밝히는 큰 빛이십니다. 이 빛은 신령한 빛입니다. 영적인 빛입니다. 이 빛이 임해야 죄로부터 자유 함을 얻습니다. 영적 세계가 보입니다. 새 사람이 됩니다. 백주 대낮에 이 빛이 박해자 사울에게 비추므로 그가 변하여 전도자 바울이 되었습니다.

(행 9: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안요한 목사 같은 사람은 소경이 되고 나서 이 빛을 받아 목사다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희미한 호롱불 아래서도 양심의 빛은 밝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휘황찬란한 빛이 뻔쩍이고 있지만 양심의 등불은 꺼지고 흑암의 절벽에서 탄식하고 있습니다. 본다고 말하나 실상은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신 겁니다.

(요 9:4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소경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한 시각 장애인 목사님이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이 눈 뜬 장님들아, 눈뜨고도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소경이 아니라 바로 당신들이 소경이다.’ 참 빛이 여러분에게 비추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마지막 죽음이라는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거친 숨을 몰아쉬고 죽음의 그늘이 드리울 때에 인생에게 소망은 무엇이겠습니까? 한 줄기 생명의 빛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빛이십니다. 그 빛을 통해서만이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여기 계신 분 중에 아직도 흑암과 절망에 앉아 있는 분이 있습니까? 출구가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방에 갇혀 있습니까? 큰 빛이신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십시오. 그러면 빛의 자녀가 될 겁니다.   

  끝으로 

3. 그들을 향하신 예수님의 첫 메시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년 동안 침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세례요한이 혜성같이 나타나서 불을 뿜듯이 외친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마 3:1)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마 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이 말씀은 수 백년을 참고 참았다가 토해낸 말씀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이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도 똑같은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은 ‘가까이 온’ 천국을 선포하였고 예수님은 지금 당장 이루어질 천국을 선포한 겁니다. 이 천국이 오늘 여러분 안에 임하기를 바랍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이 말씀은 종말론적 메시지입니다. 교회가 선포할 핵심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에 과연 이 긴박한 종말론적 메시지가 있는가. 오늘의 교회는 무엇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가. ‘하나님의 나라’보다는 다른 것에 관심이 있는 교회라면 분명 문제가 있는 겁니다. 

  우리교회는 세례요한처럼, 예수님처럼 하늘나라를 선포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최대의 관심이 하늘나라에 되기를 바랍니다. 또 담대히 하늘나라를 선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선포 앞에는 어떠한 설득이나, 논쟁을 제기할 수 없습니다. 천국의 도래를 알리는 일방적인 선포입니다. 전도는 어명(御命)과 같습니다.

  먼저 여러분 가운데 하늘나라가 임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회개(悔改)해야합니다. 회개란 지금 나 자신이 ‘흑암에 앉은 백성’이요, ‘사망의 그늘에 앉은 자’란 사실을 깨닫는데서 시작됩니다. 내가 지금 절망의 상태에 놓여 있는 자임을 깨달아야합니다. 이 길로 곧장 가면 영원히 멸망하게 됨을 깨달아야합니다.

  그러나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영접하면 구원을 얻습니다. 이것은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이 큰 빛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죽음 가운데 있는 사람이 생명의 빛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이 복음의 빛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의 빛, 구원의 빛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제 빛 가운데서 살아가야 하고 또 빛을 발해야합니다. 달이나 별들이 태양 빛을 받아 반사하듯 우리도 예수님의 빛을 반사해야합니다. 

(엡 5: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흑암에 앉은 백성’이 너무 많습니다. 구원받지 못하고 사망의 그늘에 있는 자들입니다. 전 세계 인구의 60%가 아직도 구원을 못 받고 흑암에 앉아있습니다. 우리나라도 4천9백만 인구 중의 800만이 신자고 나머지 4천 백만이 사망의 그늘에 앉아 있습니다. 우리 의정부 40만 인구 중의 믿는 사람은 고작 6만 명이요, 나머지 34만 명이 어둠과 절망에 속한 자입니다.

  이들이 지금 생명의 빛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찌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참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전하여 흑암에 앉은 백성들과 사망의 그늘에 앉은 자들을 구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