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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크신 은혜 (사 5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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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하나님의 크신 은혜
♣본 문: 이사야 53:1~10

해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올 무렵이면 브라질의 삼바축제가 뉴스로 등장합니다. 이 축제를 보기 위해 세계의 수많은 관광객이 모여들기도 합니다. 삼바축제의 춤곡은 2/4박자로 매우 빠르고 정열적입니다. 왜 그들은 해마다 이때가 되면 삼바축제를 벌일까요? 삼바축제는 사순절을 앞두고 행하는 그들의 관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사순절이 되면 40일간 그들이 즐기는 춤과 오락 그리고 술과 고기 등 먹는 음식을 절제해야 하는데 그 앞서 마음껏 즐기는 행사가 삼바축제라고 합니다. 사순절이란 부활주일 전 40일간을 일컫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뜻으로 이 기간에 더욱 경건하게 살고자 노력합니다. 부활절일은 성탄절과 같이 고정된 월일이 아닙니다. 춘분이 지난 첫 만월 직후의 주일이 부활절입니다.

사순절 기간인 오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베푸신 가장 크신 사랑을 간결하게 묘사한 성경이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사람의 몸으로 오신 것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인간에 대한 사랑의 절정입니다.

예수님께서 30세까지 살았던 곳은 시골 나사렛동네 가난한 목수의 가정이었습니다. 노동자로 살았습니다. 오늘날 화가들이 예수님의 성화를 그릴 때 항상 미남 예수로 그립니다. 그러나 주전 약 700여 년 전에 살았던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의 모습에 대해 예언하기를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이사야 53:2)라고 했습니다.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기에 흠모할만한 미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햇볕에 검게 탄 얼굴이 어찌 미남이겠습니까? 예수님의 공생에 3년 동안은 외로운 자의 벗으로, 병든 자의 의사로, 실망한 자의 소망으로, 약한 자의 대변인으로 사셨습니다. 이토록 귀하신 주님이셨는데 가시는 곳마다 멸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이에 대해 본문에 예언하시기를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이사야 53:3)라고 했습니다. 이 예수님은 끝내 제자들의 배신과 하나님께 충성한다던 제사장들의 음모로 말미암아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一.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위대한 성인가운데 한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일반 성인에 비교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오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립보서 2:6~8)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처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 탄생하신 동정녀 탄생이 그 증거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이 그 증거입니다. 성난 파도를 말씀 한마디로 잔잔하게 하셨으며, 바다 위를 걸어가신 것이 그 증거입니다. 뿐만 아니라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은 모두가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오신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는 증거입니다.

二.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1. 길 잃은 양을 찾는 목자로 오셨습니다.

본문 6절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양은 반드시 목자가 필요 합니다. 양은 자기의 몸을 보호할 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소는 힘센 뿔이 있고, 말은 거센 뒷발이 있습니다. 개는 사나운 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양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목자가 지켜 주어야만 합니다. 목자 없는 양은 살았으나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처지가 이와 같습니다. 악마에게 사로잡혀서 악한 영이 유혹하는 대로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며, 온갖 죄악에 얽혀 영원한 멸망으로 달려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을 구원하시고자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대로 두면 인간의 종말은 지옥의 불 못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양은 분별력이 없습니다. 양은 스스로 길을 찾아갈 만한 지혜가 없습니다. 어디에 가면 물이 있고, 어디에 가면 좋은 풀이 있는지 양은 알지 못합니다. 양은 이 길로 가면 맹수가 있는지, 낭떠러지가 있는지 분별력이 없습니다. 가시거리가 60여 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이 그와 같습니다. 지식은 고도로 발달하여 안방에 앉아서 세계 곳곳의 일들을 한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만 정말 중요한 것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죽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누가복음 12:16~21)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지옥과 천국이 존재함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지혜나, 지식으로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물가운데 가장 귀하게 창조하신 것이 인간입니다. 모든 만물은 인간을 위하여 만드셨습니다. 그 만물을 정복하며 다스리도록 하셨습니다. 이토록 가장 귀한 인간이 범죄하여 하나님을 멀리했습니다. 범죄한 사람이 가야할 곳은 감옥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 인간이 가야할 곳은 지옥의 형벌입니다. 그러나 이 안타까운 사실을 인간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옥의 형벌을 면하고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시고자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혹 지옥과 천국이 있음을 알고 있다 할지라도 인간의 자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무기력한 것이 인간이기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오셨습니다.

양은 눈앞에 보이는 맛있는 풀만 보고 따라가다가 길을 잃습니다. 인간이 그와 같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세상의 것만 따라가다가 하나님을 멀리하며 길을 잃었습니다. 이처럼 길을 잃고 지옥의 낭떠러지에 서있는 길 잃은 양과 같은 우리를 위해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목자로 오시되 선한 목자로 오셔서 양을 위해 희생하셨습니다.

호주에는 양을 많이 키우는데 가끔 독수리가 와서 새끼 양을 잡아채 간다고 합니다. 어느 날 큰 독수리가 와서 양을 채 가려는 것을 목동이 달려가 좇았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니까 어미 양이 독수리에게 두 눈이 파 먹혀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는데 죽을 번한 새끼양은 어미의 네 다리 사이에서 살아있었다고 합니다. 이 어미양의 희생으로 새끼양은 살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목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한복음 3:11)라고 하셨습니다. 길 잃은 양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2. 우리의 속죄의 제물로 오셨습니다.

본문 5~6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당하신 십자가의 고난은 돌발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본문은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입니다. 이 말씀은 주전 700여 년 전에 살았던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예수님의 고난을 예언한 것입니다.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시고자 채찍에 맞으시고, 창에 찔리시며, 벌거벗기심을 당하시되 한마디 원망이나 변명도 하지 않으신 모습까지 자세히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고난은 하나님의 세심한 계획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2000년 전 사건인데 그것이 오늘의 우리들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죄인이라 할지라도 그냥 용서하셔서 천국에 보내시면 되지 왜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참혹한 죽음을 당하게 하시는 복잡한 절차를 거치게 하셨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 이후 범죄 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범죄한 인간의 모습에 대하여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로마서 3:10~19) 하셨습니다. 이렇게 범죄한 인간에 대해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이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로마서 6:23) 하셨습니다. 세상사람 모두가 죄인이므로 모든 사람이 사망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망의 죄에서 용서받는 법을 정하셨는데, 그것은 피 흘림이었습니다.“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브리서 9:22)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위기 17:11) 하신 것입니다.

피를 흘리되 흠 없는 피라야 죄를 속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 레위기 22:18~20에 “소나 양이나 염소의 흠 없는 수컷으로 드릴지니 무릇 흠 있는 것을 너희는 드리지 말 것은 그것이 열납 되지 못할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속죄의 제사는 장차 있을 그리스도의 모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한복음 1:29) 하셨습니다. 죄 값으로 피를 드리되 흠 없는 피 즉 죄 없는 피를 드려야 용서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죄를 지었으므로 속죄에 합당한 흠 없는 피가 없습니다. 인간이 죄에서 속함을 받을 길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죄 없으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보내셔서 피를 흘리게 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피가 세상 죄를 사하는 속죄의 길이 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브리서 9:11~14)라고 하셨습니다.

더러워진 옷은 맑은 물에 씻을 때 깨끗해 질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영혼의 더러운 죄는 맑은 피로서 깨끗케 할 수 있습니다. 맑은 물은 어디에나 많이 있으나 맑은 피는 세상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인류의 죄를 씻을 맑은 샘을 만드시고자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제가 1970년도 1월에 해군 신병훈련소에 입대하여 훈련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 밤 갑자기 비상 훈련을 하는데 그날의 훈련은 캄캄한 밤에 하얀 침대 카바를 벗겨 세탁하는 것이었습니다. 수백 명의 군인들이 한꺼번에 수도에서 세탁을 해야 하는데 그 시간은 5분이었습니다. 5분 안에 세탁을 하여 연병장에 집결해야 합니다. 수도에는 이미 동작 빠른 사람으로 가득 차서 들어갈 틈이 전혀 없고, 물을 찾아 헤매다가 보니 하수구에 물이 있었습니다. 밤중이므로 윗물에 조심해서 씻으면 될 것 같아 거기에서 씻었습니다. 연병장에 집결한 후 밝은 불빛 앞에서 보았을 때 하얀 천은 회색이 되어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날 밤 세탁 불량으로 힘든 기압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또한 그해 12월 월남전에 참전키 위해 일주일간 배를 타고 항해를 했습니다. 어느 날 세수를 하고자 세면장에 갔으나 사람이 많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곳저곳을 다니다보니 어느 갑판 구석에 있는 수도에서 물이 잘 나왔습니다. 그 곳에서 세수를 하며 머리를 씻었습니다. 그런데 비누로 아무리 씻어도 거품이 나지 않고 머리카락이 뻣뻣하고 전혀 씻어지지 않았습니다. 알고 보니 그 물은 바닷물이었습니다.

아무 물이나 세탁과 세수를 할 수 없듯, 아무 피나 죄를 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깨끗한 피라야 가능합니다. 그 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죄 사함을 받을 길이 전혀 없습니다.

3. 인간다운 삶의 본을 보이시고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요한복음 12:26, 21:19,21)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따른다는 것은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나도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셨던 삶을 나도 본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3:15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의 형벌아래 놓여 있는 사람들에게 인간다운 삶의 본을 보이시고자 오셨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불완전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나오되 사람을 바라보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허물이 있고 실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바라보면 실망하게 됩니다. 병원을 찾아가는 환자는 의사를 보고 갑니다. 의사에게 치료할 기대를 가지고 갑니다. 환자를 보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오는 곳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주님을 닮고자 기도하며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에베소서 4:13 말씀같이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는(리니).”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을 사랑하시며 복을 내려 주십니다.

요즘 네티즌들에게 화제가 되고 있는“반성하는 주기도문”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를 할 때,‘하늘에 계신’하지 마십시오. 세상일에만 빠져 있으면서!‘우리’라고 하지 마십시오. 자기 혼자만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아버지’하지 마십시오. 아들딸로서 살지 않으면서!‘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하지 마십시오.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면서!‘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옵시며’하지 마십시오. 물질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하지 마십시오. 내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면서!‘오늘날 우리 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하지 마십시오. 가난한 이들을 못 본체 하면서!‘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 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하지 마십시오. 죄 지을 기회를 찾아다니면서!‘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하지 마십시오.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아멘’하지 마십시오.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치지 않으면서!” 행동은 없고 말만 무성한 형식적 기독교인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나의 왕이요. 내 주인이요. 내 중심이요. 내 삶의 푯대요, 내 삶의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내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출세하고, 병 낫고, 복 받고, 예수님의 능력으로 내가 잘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 가노라보면 하나님이 덤으로 주시는 것들입니다. 그것이 목적이 되면 그 사람의 신앙은 진실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고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깊이 감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내가 범한 죄 때문에 예수께서 고난 받으셨으므로 죄악에서 떠나야 합니다.
이제 나는 하나님의 소유임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해야 합니다.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해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세상의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기쁨과 만족을 선물로 주십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을 사랑하셔서 풍성한 은혜와 복을 주십니다. 이러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만 아니라 내세에 영광된 상급을 받아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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