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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죄와 사망에서 해방 (롬 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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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원이란 무엇인가?

몇 주 전 최경훈 강도사가 “찌께다시”에 대한 설교를 했는데요. 많은 성도들이 아직도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면, 대단한 설교였던 같습니다. 그런데 그 설교의 본문이 시편 51편이었다는 것이나, 성도의 삶에는 “찌께다시”가 아닌 본 음식인 “회”에 해당되는 세 가지가 있다고 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를 기억하는 분들은 많지 않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단어 공부 한 번 하고 넘어가죠. “찌께다시”란 말은 정확하게 발음하면 “쓰키다시(つきだし[突(き)出し])”라는 것으로서, 이 말은 일본 씨름인 스모에서 상대편 가슴을 밀쳐서 씨름판 밖으로 밀어내는 기술을 가리키기도 하고, 일본 요리에서 처음에 내놓는 간단한 안주를 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 말이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횟집에 갔을 때, 사전에 내놓은 ‘에피타이저’를 뜻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은 이렇게 본 음식 전에 내놓는 ‘쓰키다시’만 먹는 것이 아니라 본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그 본 음식 가운데 가장 우선적이고 중요한 것이 바로 “구원의 즐거움”을 가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여러분들에게 구원에 대한 감격과 감사가 있다면, 여러분은 신앙생활의 본 음식을 제대로 드시는 분들이지만, 구원의 감격과 감사가 없다면, 여러분은 ‘쓰키다시’만 늘 먹으면서 누구처럼 불만만 터뜨리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구원의 즐거움과 감격을 가지고 살아오셨습니까? 지금 여러분에게 구원의 즐거움과 감격이 있습니까?

안타까운 것은 구원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잘 몰라서 구원에 대한 감격이 없는 분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구원은 무엇입니까? 구원은 기본적으로 ‘~로부터의 건져냄, ~로부터의 해방’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부터 건져냄을 받고, 무엇에서 해방을 받는다는 말일까요? 그것은 우리 속에 본성적으로 자리잡은 죄와 죄의 사슬과 그 저주, 그리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건져냄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가장 우선적인 의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구원이란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 즉 죄 문제를 가장 우선으로 하기 때문에, 구원과 관련하여 죄 문제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2. 죄책감 또는 과거의 죄

군대 시절, 한겨울에 ‘혹한기 훈련’이라는 것을 했습니다. 부대를 떠나 장거리 행군을 하고 어느 야산의 중턱에 자리를 잡고는 ‘A 형 텐트’라고 3~4명 들어가 잘 수 있는 텐트를 쳤습니다. 군 생활을 좀 하고 텐트를 자주 치다보면 바닥을 잘 고르고, 거기에 나뭇잎이나 볏짚을 깔고 그 위에 텐트를 치는 노하우가 생깁니다. 그렇게 텐트를 치고 훈련에 지친 몸을 누이면 얼마나 편한지, 호텔방이 부럽지 않습니다. 그 날도 그렇게 텐트를 치고 병사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는데, 새벽녘에 뭔가 묵직한 것이 누르는 느낌이 들어 잠이 깼습니다. 깨어보니까 텐트가 무너져 마치 이불처럼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단순히 텐트가 무너진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밖으로 나가보니 밤새 눈이 엄청나게 와서 그 눈이 텐트 위에 쌓여서 그 무게 때문에 텐트가 무너졌고, 밤새 느낀 그 묵직한 느낌은 바로 눈의 무게 때문이었습니다.

성도들 가운데는 눈이 쌓여서 텐트가 무너지듯, 자신의 삶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두려움을 안고 사는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지금까지는 지은 죄가 어떻게 어떻게 하다가 넘어갔지만, 어느 날 갑자기 그것이 폭로되거나 아니면 보복성의 징벌을 받아서 자신의 가정이나 하는 일이나 자신의 전 삶을 무너뜨릴 것이라는 두려움을 안고 사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횃불을 높이든 마틴 루터는 변호사가 되려고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비 오는 날, 친구와 함께 길을 걷다가 비를 피한다고 나무 밑에 서 있었는데, 갑자기 벼락이 쳐서 바로 자기 옆에서 친구가 죽는 일을 겪었습니다. 너무나 놀란 루터는, 자신도 죄인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자신도 하나님이 이렇게 심판하실 것이라는 두려움에 떨게 되었고, 그것 때문에 다른 일이나 공부를 하지 못하고 번민하다가, 수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인간의 죄를 심판하는 무서운 하나님과 죄에 대한 두려움에서 피해보려는 것이었죠.

그렇게 해서 1507년에 신부가 되었으나, 죄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했습니다. 그 두려움을 해결해보려고 가진 노력을 다 했습니다. 며칠 동안을 아무 것도 먹거나 마시지 않았으며, 또 오랫동안 아예 잠을 자지 않았고, 뼈를 깎는 추위 속에서 옷을 하나도 입지 않고 고행을 했으며, 때로는 자기 몸을 채찍으로 때리면서 수행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루터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그렇게 해도 과거의 죄에 대한 두려움과 마음속에 가득 찬 죄책감을 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선배 신부를 찾아가 끊임없이 고해성사를 했는데요. 그의 고해성사를 받은 사람은 루터가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아왔기 때문에 귀찮아 죽을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루터를 보다 못한 어느 분이 성경을 연구해보라고 권했습니다. 1514년의 어느 날, 그는 시편 22편을 읽다가 놀라운 아주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됩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나이까!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삐죽이며 머리를 흔드나이다.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내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이 말씀을 연구하다보니 이상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것이 다윗이 쓴 글인데도 다윗에게는 전혀 해당하지 않는 내용이라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이 비록 사울에게 추적을 당했지만 백성들에게 훼방과 조롱을 받은 일이 없었고, 그 혀가 잇틀에 붙을 만큼 목마른 상황을 경험한 바도 없었으며, 다윗의 수족이 찔려서 뼈가 어그러진 일이 없었고, 악한 무리가 다윗의 겉옷을 나누고 속옷을 제비뽑았던 일도 전혀 없었습니다. “

그렇다면 이게 무슨 말일까?” 하고 연구하니, 그것은 모두 예수님에 관한 예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하고 외치셨고, 예수님이 백성들의 조롱거리가 되셨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수족이 찔러 못 박히셨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혀가 이틀에 붙도록 목이 마르셨고, 군병들이 예수님의 겉옷을 나누었고, 그것을 제비뽑아 가져갔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실 상황을 예언한 것이며, 하나님의 아들의 고통과 신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어찌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이렇게 버림을 당해야 했는가? 어째서 그리스도가 그런 대접을 받으셔야 했을까?” 거기서 그는 놀라운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멸망할 죄인인 나,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짐을 당하고 벼락에 맞아서 죽어야 하는 나, 바로 나를 대신하여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받고 끊어짐을 당하셨다”는 사실, 주님께서 나의 죄 값을 치러 주셨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성경 도처에 깔려있는 하나님의 말씀들이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얻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5-6).”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 하나님은 인간의 노력과 공로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대신 죽으신 예수님을 믿으라는 은혜의 초청을 하고 계셨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로마서 1장 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를 읽고는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그렇다. 사람은 믿음으로만 의인이 될 수 있으며, 의인이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더 이상 과거의 죄와 죄책감에 눌려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다 해결하셨다는 것은 여러분의 죄가 쌓이고 쌓여서 여러분의 인생을 무너뜨릴 일도, 보복성의 벌을 받을 일도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현재 나를 괴롭히는 죄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과거의 죄만이 아닙니다.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하면서 절규했습니다(롬7:24). “곤고한 사람”이란 ‘저주 받은 사람’, 즉 아직도 여전히 죄로 인하여 고통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일부의 학자들은 바울의 이러한 모습은 자신의 죄 고백이 아니라 중생하지 못한 사람, 즉 일반인들의 모습을 대신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중생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이런 경험이 없습니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이 왜 죄 때문에 이토록 고통하면서 처절하게 부르짖겠습니까? 그러나 십자가의 보혈로 죄씻음을 받아 거룩한 백성이 된 성도들이 아직도 자기 안에 남아있는 죄성과 죄악의 욕구들 때문에 이렇게 외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누구입니까? 그는 삼층 천에 올라갈 정도로 크고 신비한 은혜를 체험한 분입니다. 그의 손수건이 닿기만 해도 불치의 병들이 고쳐졌던 위대한 능력을 지녔던 분입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이렇게 처절한 탄식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 성경이나 기독교 역사를 보면 바울만 이렇게 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내 속에 정한 곳이라고는 한 곳도 없습니다.” 이사야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어거스틴은 “나는 망할 자이옵니다.” 성 프랜시스는 “나는 작은 벌레입니다.” 길선주 목사님은 “나는 아간과 같은 죄인입니다.” 김치선 목사님은 매일 새벽 죄를 고백하면서 우셨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나는 신사 참배한 죄인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나는 83년 묵은 죄인입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아직도 자기 속에 용솟음치는 죄 때문에 고민한 분들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성경은 뭐라고 말합니까? 비록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살아가고, 죄의 유혹과 인간의 욕망이 살아있고, 또 거기에 순종하여 범죄하지만, 이런 우리에게 적용되는 법이 달라졌다고 선언합니다. 오늘 본문을 같이 읽으실까요?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즉 아직도 우리에게 죄의 본성이 남아있고 또 죄를 짓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죄인은 심판을 받는다’는 법이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정죄하지 아니하시고 용서하시는 주님의 사죄의 은총과 변치 않는 사랑 가운데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내 주변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게 적용되는 법은 우리 주님의 생명의 성령의 법입니다. 오늘도 우리 속에 있는 죄, 그리고 실수하고 범죄한 것 때문에 고통하지만,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심판이 아니라 용서이고 은혜이고 축복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4. 또 다시 죄를 짓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마지막으로 죄와 관련하여 우리에게 있는 것은 우리가 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몸부림치며 결심해 보지만, 계속 죄를 달고 다니는 자신의 모습, 아니 죄가 우리들을 끌고 다니는 듯한 모습을 보면서 좌절하고 낙망하는 경우입니다. 죄는 쇠사슬처럼 견고한 연결고리로 우리의 인격과 삶을 공격합니다. 하나의 죄에서 또 다른 죄로, 계속해서 우리의 삶을 더욱 어둡고 깊은 곳으로 끌고 가려고 합니다. 처음에는 손님처럼 우리에게 다가 온 죄를 받아주었더니 친한 친구처럼 우리 곁에 늘 있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우리를 마음대로 쥐락펴락하는 왕이 되어 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우리 속에 두려움이 생깁니다.

‘지금은 은혜 받아 괜찮다지만, 언젠가 또 다시 죄를 짓지 않을까, 그때는 어쩌지? 주님께로부터 너무나 놀랍고 큰 은혜를 받았는데도 또 다시 죄를 지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때도 주님은 나를 용서하실까? 아니 나 자신이 그런 나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다.’

이러한 두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고민과 걱정을 해 보신 적이 없습니까? 내가 약하고, 세월이 하수상하며, 사탄의 공격이 집요한 가운데, 내가 앞으로 순전하고 깨끗하게 살리라는 것을 믿을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두려움이 있을 때, 여러분은 먼저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주님께 있는 그대로 고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님의 인도와 강권적인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강력하게 여러분을 붙드셔서 또 다시 실패하지 않도록 해 주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넘어질 수 있습니다. 안 하리라 했던 죄를 반복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기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십자가 때문에 주님은 여러분을 용서하시고 사랑하심에 있어서 변치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죄를 지어 주님께 죄송하고 자신이 밉기도 하고 영적으로 침체되겠지요. 그러나 그럴지라도 탕자를 아들로 받으시고 신발을 신기고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워주고 잔치를 열어준 아버지처럼 하나님은 여러분을 있는 그대로 받으실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께 너무너무 미안하고 낯뜨거울지라도, 또 여러분 자신은 스스로를 용서하기가 쉽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은 그런 여러분을 이미 아시고 용서하셨으며, 여러분이 그렇게 아파할 때에 품어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미래는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 안에 있습니다.

5. 구원 받은 것을 즐거워하라!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을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과거의 죄를 모두 용서하시고 기억조차 하지 않는 주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도 여러분 속에 일어나는 죄, 끊임없이 파도치는 그 죄를 용서하시는 주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앞으로 혹시 범하게 될 지 모르는 그 죄도 용서하실 뿐 아니라 여전히 여러분을 사랑하고 축복하시는 주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구원이란 바로 이 죄로부터 여러분을 해방시킨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죄와 관련된 그 어떤 추궁이나 벌도 없이 오직 한 없는 용서와 사랑만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믿고 기뻐하는 것이 구원의 즐거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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