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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대로 한 번 믿어봅시다! (수 24: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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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이 땅에는 탕자의 계절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모든 가치관이 흔들리고 옳고 그름의 기준이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사람과 짐승을 구별하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경제 부흥이나 산업의 발전을 통해 이런 문제의 불을 끌 수 있다고 l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경제 성장의 과정 속에서 일어나는 당연한 일이라고 합리화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경제 성장 정책 일변도로 달려온 우리 사회 전체가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지금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아이들과 함께 뉴스를 보기가 두렵습니다.  입에 담기 부끄러울 정도로 인륜이 무너지고 원칙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창조적인 노력의 결핍과 도덕률의 저하에서 옵니다

응급 처치적 향락주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경건의 모양도 없고, 내용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전멸했습니다.  사람들 속에 거룩한 능력이 없습니다.  과연 오늘 우리의 시대가 소돔과 고모라보다 낫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예루살렘 도성에 의인 한 사람만 있으면 이 성을 멸하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과연 오늘 우리가 사는 이 땅이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함을 받을 수 있을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시간이 지나면서 나이를 먹어가면서 한 가지 분명하게 깨달아지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믿어야겠다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시대일수록 하나님을 향한 내 믿음이 더 분명해져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내 아이들을 책임질 수 없습니다.  이 아이들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  대답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내 아이들에게 더욱 분명한 자기 신앙을 갖도록 하는 길 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러한 저의 고백은 어쩌면 오늘 우리 모두의 고백이 아닐까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키를 한 자나 더 크게 할 수 있습니까?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내 임의로 바꿀 수 있습니까?
지금 우리들 주위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들을 바라보면서 깨닫는 것은 이 고백입니다.
"하나님, 나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나에게는 하나님 밖에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마지막 시대에 저는 여러분들에게 아름다운 내일을 창조하기 위하여 제안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를 제대로 한번 믿어보십시다.  내 인생의 남은 때를 주를 위하여 후회 없이 뜨겁게 불태워 보십시다.

기억하십시오.  패역하고 황무한 이 땅의 심령을 살리는 길은 오직 하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거듭나야 합니다.  사람이 하늘의 영으로 조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하나님의 영으로 권능의 채움을 받으십시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나와 내 가정과 내 아이들의 장래를 준비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지금 이 땅에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사회의 구조를 바꾸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조직을 새롭게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닙니다.  아무리 사회 구조를 바꾸고 조직을 새롭게 한다고 해서 이 땅에 근본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문제는 사람이 변해야 합니다.  조직과 사회를 이루는 사람이 변한다고 하면 문제는 정말 쉽게 해결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살아나고 변화 받는 기적이 처처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바람을 일으켜야 합니다.  심령들 속에 신령한 바람만 일어나면 됩니다.  이 세상을 변화시킨 가장 위대한 혁명가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의 계절이 이 땅에, 이 백성들 속에 다시 임하면 초대교회를 들어 세계를 변화시키듯이 오늘 우리 교회를 들어 이 땅에 정신혁명을 이루실 것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종교놀이를 거부하십시오.  그저 주일 아침 낮예배에 참석하는 것으로 위로를 받고,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나약한 종교꾼이 되지 마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확실한 영성 운동을 일으켜야 합니다.  이 언양과 울산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거룩한 성령의 바람을 몰고 가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무력함이 거룩한 성령의 바람 앞에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모든 편견과 욕심이 우리가 몰고 가는 거룩한 성령의 바람 앞에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사랑하는 언양 영신 가족 여러분, 우리 일어나 용서와 화해와 사랑의 불길로 이 땅을 변화시켜 나가십시다.  인륜이 무너진 이 땅에 성령의 권능을 받아 영적 각성의 대 혁명의 바람을 일으키십시다.

"주여,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쓰시옵소서!"

오늘 본문은 여호수아서의 가장 절정을 이루는 장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복한 가나안 땅은 전쟁이 그쳤습니다.  이곳 저곳 마을이 형성되고 도시가 형성되며 안정감을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창고에 곡식이 쌓이고 아랫목이 따뜻해져 오면서 정체성의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물론 공적으로는 야훼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지만 계속되는 전쟁에서는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었던 애굽의 문화와 우상들에 대한 그리움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또 한편에서는 가나안의 새로운 문화를 접하면서 이방문화와 우상에 대한 묘한 호기심과 매력까지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여호수아는 인생의 석양에서 그의 유언이라고 할 수 있는 마지막 설교를 외치게 됩니다.  한 시대를 이끈 지도자의 마지막 절규는 더욱 힘이 있었고 호소력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철부지를 두고 죽게된 한 아버지의 유언처럼 철없는 백성을 두고 떠나는 지도자 여호수아서 안타까움이 서려있습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안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여호수아의 이 말을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집 한 칸이라도 마련해 보겠다고 아둥바둥 할 때는 몰랐던 신앙의 위기가 집 한 칸이라도 준비하고 집안의 가구도 이럭저럭 준비가 되면서 찾아 올 수 있다.'

어느 사회학자는 아파트 문화의 위기를 익명성의 유혹과 편안의 유혹이라고 요약했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자기를 알리지 말고 혼자서 숨어살고 싶은 유혹과 전화 한 통으로 만사를 끝내는 생활에 익숙해져서 심지어는 신앙생활도 편안하게 숨어서 하고자 하는 유혹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교회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우리교회도 금년 9월이 되면 창립 10주년을 맞습니다.  교회가 어려울 때는 몰랐던 위기와 유혹이 교회가 부흥되고 안정되면서 찾아올 수 있습니다.

이런 정체성의 위기 상황 속에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 우상은 여호수아 당시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도 여전히 우리 곁에 있습니다.  우상은 원시인들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우주시대, 컴퓨터시대, 지구촌시대 속에서도 여전히 각처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상은 예수 믿기 전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은 후에는 오히려 더욱 교묘히 나를 유혹할 수 있습니다.

워런 위어스비는 현대인의 두 가지 우상을 날카롭게 지적한 바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루어진 일의 공로를 자기 자신에게 돌릴 때 자기가 우상이 되고, 두 번째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하나님보다 귀하게 여길 때 그 선물이 우상이 된다고 했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첫째는 자기 우상입니다.
인생이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만사가 부족하고 모자랄 때, 우리 인생이 비바람에 시달려 뿌리부터 흔들릴 때,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제발 저를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하나님의 도우심과 사랑을 구했고 그분께 매달려 능력을 구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삶 속에 성공이 찾아오고 안정이 찾아오기 시작했을 때 기도를 잊어버립니다.  그리고는 자기에게 이루어진 성공과 안정된 삶의 모든 영광을 자신에게 돌리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 순간부터 그토록 사랑스럽던 '나'라는 존재는 우상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우뚝 서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물론 당신이 고귀한 땀을 흘려 사업을 이루었고 성공을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잊어버린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건강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땀을 흘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가능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둘째는 공로의 우상, 선물의 우상입니다.
돈을 모았을 때 그 돈만 귀중하게 보입니다.  그 순간부터 그 돈은 우상입니다.  바닥을 헤치고 이름을 날렸습니다.  그 순간부터 그 이름은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얻은 삶의 편리한 조건들 아파트, 자동차, 그것들이 내 삶 속에 우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기적적인 도움으로 가나안 땅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에 대한 유혹을 물리치지 못했다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줍니까?  오늘까지 일마다 때마다 하나님의 기적을 먹고 살아온 그리스도인들이 때로는 자기 우상에 빠지고, 때로는 환경이라는 우상에 빠져서 허우적거릴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자신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하나님만 바라보던 당신의 그 맑고 순수한 시선을 빼앗은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만 사랑하던 그 고결한 가슴에 큼직히 자리잡은 그 우상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그러므로 이제는 …우상을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연결되어지는 앞부분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1절 이하를 보게 되면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세겜에 모이게 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옛적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섭리와 도우심을 이야기합니다.  그 이야기의 요점은 이렇습니다.
애굽에서 노예가 되었던 너희를 이끌어내어 가나안 땅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께서 너희를 광야에서 먹이고 입히고 보호해 주셨다.  지금 너희들이 누리고 있는 모든 행복의 조건들을 하나님이 주셨다.  '그러므로' 이제 너는 하나님만 섬겨야 한다.  그러므로 이제는 하나님을 제대로 섬겨야 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호흡을 주셨습니다.  삶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분이 나를 축복해주셨습니다.  내가 누리는 모든 삶의 풍요와 평안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그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마땅치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내와 내 가정을 주관하시고 여기까지 인도하셨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그러므로 이제는'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지 않습니까?

이어지는 15절 말씀에 여호수아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렇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너는 왜 하나님과 우상 사이에서 갈등하며 머뭇거리느냐?
너희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갈등, 우왕좌왕 - 이것은 인생을 무력하게 만듭니다.  두 마음 세 마음을 가지고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선택과 결단, 오직 한 마음, 여기에 힘이 있고 용기가 있습니다.

보십시오.  1천명이 힘을 모아 줄을 당겨도 서로가 다른 방향으로 줄 당기기를 하면 5m도 끌고 가기가 힘이 듭니다.  힘은 언제나 일직선에 있습니다.  기둥을 봐도 그렇습니다.  굽은 기둥은 아무리 굵어도 쓸모가 없습니다.  그러나 비록 가늘어도 곧은 기둥은 힘을 낼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마음 또한 확실한 선택과 결정이 있을 때 강한 힘을 낼 수가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에 1천명이 모이고, 1만명이 모여도 그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지 못하면 그 교회는 오합지졸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비록 우리들처럼 적은 수가 모였지만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마음을 품고, 같은 뜻을 가지고 나아간다면 우리는 놀라운 하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신앙은 부단한 자기 결단에 의해서 성장되어 갑니다.  이리 갈까, 저리 갈까?  계속해서 갈등하는 사람에게 영적 성장은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호수아의 마지막 설교가 외쳐진 장소는 세겜이란 곳입니다.  세겜이란 장소는 에발산과 그리심산 사이에 위치한 유명한 계곡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만난 곳입니다.  또한 야곱이 메소포타미아의 방황에서 돌아와 우상을 땅속에 파묻고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삶을 살기로 작정했던 곳이 세겜입니다.  이곳에 요셉의 뼈가 묻혔고, 여호수아는 이곳에서 율법책을 낭독하여 백성들의 순종을 요구한 바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세겜 땅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올바른 결단이나 선택을 할 때 섰던 장소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이 언제나 옳은 선택이었기에 이스라엘이 축복 받은 장소가 세겜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세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른 선택을 배우는 곳입니다.  옳은 결단을 하게 하는 곳입니다.  우리 언양 영신교회가 여러분 모두의 세겜 땅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느 한 순간, 한 번 쯤은 이 세겜에 서 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에게는 이 세겜에서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시간 묻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 세겜에 서보신 경험이 있습니까?
"과거에 거짓되고, 방탕하고, 저주스런 삶을 집어던지고 이제는 하나님만 섬기기로 작정합니다."
하나님 앞에 결단을 했던 경험이 있습니까?
못된 우상과 끈질기게도 따라다니던 유혹과 잘못된 습관을 집어던지고 바로 살아보겠다고 다짐했던 결단의 자리가 있습니까?

누구나 한 두 번은 세겜이 있어야 축복된 인생을 살 수가 있습니다.  그래야 사랑 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만약에 그런 세겜에서의 결단이 없었다면 오늘 여러분이 서 있는 이 자리가 세겜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지금 이 곳에서 과거에 세상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며 갈등하고 방황하던 모든 삶들을 정리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자기 결단을 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임종을 앞두고 끊임없이 갈등하고 방황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라보면서 가슴 아파하던 여호수아는 이 세겜 골짜기에서 결단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너희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좀더 직설적으로 말한다면, "그러므로 이제는 제발 하나님을 제대로 믿어보아라"

언젠가 세계 청소년 대회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가장 괴로워하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가를 논의한 적이 있었습니다.  오늘 젊은이들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놀랍게도 자기 목숨과 젊음과 정열을 바칠 수 있는 절대가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인생을 바칠 수 있는 대상, 젊음을 불살라 드릴 수 있는 대상, 내 삶을 던져 헌신할 수 있는 그런 대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바울의 고백은 얼마나 행복한 것입니까?
"나는 하나님을 위하여 미쳤다."

미국에 '행복한 젊은이들의 모임'이 있습니다.  이 모임의 가장 기본적인 복장은 모자를 쓰는 것이고, 그 모자에는 붉은 글씨로 이렇게 쓰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미쳤다."
그리고 모자 뒤에는 이렇게 씁니다.
"그러면 당신은 누구를 위하여 미쳤는가?"

사랑하는 여러분,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죽음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위해 미쳐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나를 구원하신 그분 앞에 당신의 삶을 던져보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여러분에게, 우리 모두에게 주신 사명과 비젼을 위해 내 인생의 남은 때를 불태워보지 않으시겠습니까?
내 삶에 깊은 사랑과 관심을 가지시고 나를 돌보고 간섭하시는 그분을 위해 당신의 인생을 불살라 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무력한 것을 선택하면 여러분의 삶도 무력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전능자에게 붙들리면 여러분은 그 순간부터 능력 있는 사람이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오늘 여러분이 누구를 섬기는가에 따라서 여러분의 인생관이 달라지고 세계관이 달라집니다.

"너희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여호수아가 왜 이렇게 직설적인 말을 해야만 했습니까?
그가 모세를 따라서 출애굽하여 광야를 지날 때에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끊임없이 보아왔습니다.  홍해 앞에서 '우리가 이제 죽게 되었다'면서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홍해를 건너게 되니까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는 사흘도 못되어서 마실 물이 없다고 또 다시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광야 40년의 세월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런 모습을 끊임없이 보고 또 보아왔습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됩니다.  그리고 그들을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합니다.  여리고성이 무너지고, 수많은 이방족속들을 이기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전지전능하심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땅에 전쟁이 그치고 도시가 형성되면서 안정감을 찾아가면서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신앙은 퇴색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신앙의 정체성을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들은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매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절기를 지켰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쉐마를 매일 외웠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방 문화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향락을 쫓아갔습니다.  음란한 이방 신들을 섬겼습니다.  그들은 한 쪽은 하나님을, 그리고 다른 한 쪽은 세상을 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웃지 못할 모습을 여호수아는 보고 있었습니다.

이제 자신은 이 땅을 떠나야 할 시간이 다가옵니다.  자신은 떠나가지만 자신의 목숨보다 더 사랑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앞날을 생각하면 참담함을 느껴야 했을 것입니다.  답답했을 겁니다.
이것은 아닌데….  저렇게 생활해서는 안 되는데….  저렇게 믿어서는 정말 안 되는데….

이제 그는 작심을 하고 결단의 장소 세겜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이게 합니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만약에 제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좀더 직설적이고 분명하게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이제는 제발 제대로 믿으십시오.  언제까지 우왕좌왕하면서 이중적인 종교놀이를 하시겠습니까?  사람들 앞에서 당신의 믿음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십시오.  제대로 한번 믿어보십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 여정에서 선택과 결단의 기회가 언제입니까?  내일이 아닙니다.  오늘입니다.  다음에가 아닙니다.  지금입니다.  여기에서 오늘이란 말은 여러분이 교회에 찾아올 때마다 언제나 오늘이 되어서 은혜가 되고 결심이 생기고 능력이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또 오늘이란 그 긴박성을 강조한 말씀입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여기에 선택의 긴박성이 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지도자 케네디는 그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아이젠하워 전대통령을 찾아가서 자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때 아이젠하워는 젊은 새 대통령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의 임무는 결단해야 할 때에 결단하는 것이요."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유부단하거나 우왕좌왕하는 지도자는 나라를 살릴 수 없고 국민의 신임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인생의 기회는 우리가 결단하기까지 언제나 기다려 주는 것이 아닙니다.  신속하게 바른 결단을 하는 사람만이 기회를 포착해서 남보다 앞서가는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여호수아는 주저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선택을 고백합니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은 선택만큼 행복하고 선택만큼 삶의 질이 높아집니다.  나무나 돌을 선택한 인생의 가치는 나무나 돌의 가치만큼만 높아질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선택한 사람은 하나님만큼 높아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높으신 분을 위해 내 심장과 삶을 불사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기쁜 일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 얼마나 더 살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며 하나님 앞에 충성된 자는 생명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남은 때를 주를 위하여 제대로 한 번 뜨겁게 믿어보십시다.  내 인생의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섰을 때 후회 없는 그 날을 위하여 제대로 헌신하고 섬겨보십시다.  내가 믿는 하나님이 정말로 창조자요, 전능자요, 나의 구원자이심을 믿는다면 시간마다 때마다 이렇게 고백하십시다.
"나와 내 집은 오직 하나님만 섬기겠다."
"영원토록 하나님만을 섬기며 살리라"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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