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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거기 너 있었는가?(2) (마 27:2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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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

오늘 주보를 보시면 알겠지만 설교제목이 지난주와 똑같습니다. 설교제목만 똑같은 것이 아니라 본문도 똑같고 설교 후 부를 찬송도 똑같습니다. 다만 설교 중에 다룰 인물만 다릅니다. 지난주에는 십자가 주변의 악역들 중에 빌라도 총독과 로마군병을 살펴보았는데 오늘은 이어서 군중들과 유대종교지도자들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이 두 부류는 중요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군중들이나 유대종교지도자들 모두 '하나님에 대해 아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천지의 창조주요 이스라엘을 도우시는 분임을 그들은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이나 하나님'을' 아는 것이나 그게 그거지 뭐가 다른가 하는 분이 있다면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이 두 가지는 전혀 다릅니다. 한 마디로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이런 저런 지식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시는가? 등을 아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 단순히 지식적으로 아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하는 것을 뜻합니다.

한국에서 꽤 유명하다는 이 아무개 목사님이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목사님이 안식년이 되어 전국을 여행하고 다니던 중 주일이 되어 마침 어느 이름 모를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교회 목사님 설교를 듣자니 유난히도 자기의 지식을 자랑하고 드러내는 식의 설교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조금은 씁쓸한 마음을 가지고 설교를 듣던 중, 드디어 그 목사님 왈, 내가 한국에서 유명한 이 아무개 목사님도 잘 안다고 하더랍니다. 그 유명한 이 아무개 목사님이 난데, 나와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그것도 내가 바로 앞에 앉아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나를 잘 안다고 하니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하지만 모른 척 하고 예배 후에 나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그 목사님이 어느 교회에 시무하며, 나이가 몇 살이고 어느 신학교를 나왔는지를 안다면 그 목사님을 아는 것입니까? 이것은 그 목사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 목사님에 '대해' 아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을 잘 안다고 하면 적어도 서로 만나서 인사도 나누고 밥도 먹고, 나아가 삶을 나누고 생각을 나누고 정도 나누는 그런 인격적인 만남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인격적 만남이 없는데 그 사람에 대해 몇 가지 정보를 안다고 해서 그를 안다고 주장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인지, 아니면 진정 '하나님 자신을 아는 것'인지 잘 구분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나는 하나님을 안다고 했는데 하나님은 나를 모른다고 하시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두 부류, 즉 군중들과 유대종교지도자들 모두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 아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정보는 많이 알고 지식적으로는 누구보다 많이 알았는지 모르지만 정작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데 앞장서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에 대해 아는 사람'입니까?




군중들

이제 첫 번째 부류를 살펴봅니다. 바로 군중들입니다. 빌라도 총독에게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친 유대인들입니다(27:21~23).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자 이들은 어떻게 행동합니까? 본문 39절부터 보면 이들은 지나가며 머리를 흔들면서(조롱하는 몸짓) 예수님을 모욕합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심하게 조롱하고 멸시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악을 쓰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조롱하는 이 유대인 군중들이 바로 앞서 마태복음 21장에 보면 어떤 행동을 하던 사람들입니까? 다음주일이 종려주일입니다만 이들은 불과 닷새 전만 해도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을 향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우리를 구원하소서!")를 외치며 환영하던 바로 그들입니다. 그런데 왜 그토록 예수님을 열렬하게 환영하던 유대인들이 이제 와서 태도가 돌변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치고, 조롱하는 자들로 바뀐 것일까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첫째로는 군중심리 때문입니다. 군중심리라는 것이 참 무섭습니다. 군중 속에서 그 분위기에 한번 휩쓸리면 이것이 옳은지 그른지는 관심 없습니다. 그냥 분위기에 휩쓸려 몰려가는 것입니다. 저는 유대인들도 정말 예수님이 메시야인지 믿어서라기보다 상당수가 우르르 몰려가서 열렬히 환영하는 분위기에 휩쓸려 함께 흥분하다가, 이번에는 못 박으라는 분위기에 휩쓸려 함께 소리쳤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어떻게 이렇게 태도가 돌변하는 지 설명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설교 첫 머리에 설명한 것처럼 정말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알았던 사람들이라기보다 분위기에 휩쓸려 금세 뜨거워졌다가 금세 싸늘하게 식어버리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자신을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나는 정말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서 믿는 것인지, 아니면 분위기에 휩쓸려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인지 말입니다. 학생회 때 여름수련회에 가서 다 같이 통성기도 하면 나도 왠지 은혜 받은 것처럼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수련회 끝나고 며칠만 지나면 그 은혜 다 사라지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전에 하던 습관과 생활로 되돌아갑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은혜 받은 것이 아니라 분위기에 휩쓸려 은혜 받은 것처럼 생각된 것뿐입니다. 이 두 가지는 엄연히 다릅니다. 구분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분위기나 군중심리로 예수 믿어서는 안 됩니다. 어디까지나 나 자신이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나 자신이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가지고 그 안에서 은혜를 받아야 참된 은혜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둘째로는 예수님이 자기 기대와 생각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자기 기대와 생각과 다르면 언제든지 외면하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자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해줄 구원자요 메시야인줄 알고 그토록 열렬히 환영한 것입니다. 하지만 며칠 사이 예수님이 하는 행동이나 말을 살펴보니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원수 로마를 대항해 혁명을 일으키고 쳐부수어야 할 사람이 오히려 사랑을 말하고 용서를 말합니다. 원수를 엎어버리고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대인들이 그토록 의지하던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러니 자신들의 기대와 너무도 다른 메시야임을 깨닫고 태도가 돌변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혹시 유대인들처럼 나의 기대와 다른 하나님, 내 뜻대로 안 되는 예수님 때문에 실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간혹 교회를 다니다가 실망했다며 안 나오던지 다른 종교로 가는 분들을 보게 됩니다. 분명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고 했는데, 교회 나오면 잘 된다고 했는데 자기 기대와 너무 달리 잘 안 되고 힘들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곳으로 갔다고 합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 생각, 내 기대에 맞춰 따라와 주는 것이 아닙니다. 혹시 그런 종교 찾으신다면 다른 데 가서 알아보십시오. 하나님이 내 기대, 내 생각에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기대와 생각에 맞춰 따라가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이 사실을 망각하면 오늘 우리도 유대인들처럼 마음대로 예수님을 떠날 수도, 배신할 수도, 조롱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한 가지만 더 생각해 봅니다. 사명 문제입니다. 이 군중들, 이 유대인들은 그들 말대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선민이지만 그 사명 감당 못해 버림받은 자들이 되었습니다. 수 천 년 동안 하나님을 믿어왔다고 하지만 결국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해서 이런 일이 생긴 것입니다. 오늘 나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백성으로서 어떤 백성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명을 감당하기 전에 먼저 주님을 만나고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사명을 감당할 수 없고 사명을 감당할 수 없으면 결국 버림받고 맙니다. 나는 어떤 하나님의 백성입니까? 내 사명이 무엇인지 알고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 사명을 잘 감당하는 신실한 백성입니까?




유대종교지도자들

두 번째 부류는 바로 유대교의 종교지도자들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과 장로들입니다. 우선 '대제사장들'이라는 말이 생소하게 들립니다. 우리가 알기로 구약시대의 제사장은 레위지파 중에도 아론의 후손들만 될 수 있었고 그 가운데 한 사람을 대제사장으로 뽑았는데 어떻게 '대제사장들'이라는 말이 나올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실제로 예수님이 체포되고 십자가에 처형되는 장면에서 '안나스와 가야바'라는 두 제사장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상황은 이렇습니다. 이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제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이스라엘 성전제사의 최고지위인 대제사장조차도 로마 황제에 의해 임명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 황제에 의해 언제든지 해임될 수도 있었습니다. 여기 등장하는 안나스는 주후 6년에 로마 황제에 의해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으로 임명이 되었다가 9년 뒤인 주후 15년에 해임됩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몇 명의 대제사장이 임명된 후에 주후 18년부터 안나스의 조카이자 사위인 가야바가 대제사장이 됩니다. 그런데 비록 로마 황제의 명령으로 해임되기는 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전히 대제사장은 누구 마음대로 임명하고 해임하는 자리가 아니라 평생토록 감당하는 종신직이라고 여겼기에 비록 안나스가 대제사장직에서 해임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는 대제사장으로 인정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당시에는 로마에 의해 새로 임명받은 가야바가 공식적으로는 대제사장이었지만 실제로는 장인인 안나스가 막강한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고 바로 이런 까닭에 '대제사장들'이라는 표현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또 대제사장들과 함께 등장하는 '서기관'이란 율법을 두루마리에 기록하고 해석하는 전문적인 율법학자들이며, '장로들'이란 유대인의 최고기관인 공회(산헤드린)의 의원으로서 이스라엘을 정치적 종교적으로 이끌어가는 핵심인물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라고 하면 당시 유대교의 종교지도자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지도층의 사람들을 모두 열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의 체포와 십자가형에 어떤 역할을 하느냐? 마태복음 26:3에 보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가야바 대제사장의 관사에 모여 예수님을 잡아 죽이자고 모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결국 이들은 예수님의 제자인 유다를 이용해 은 삼십 냥을 주고 스승을 팔아넘기도록 회유하고 그 유다를 앞잡이 삼아 종들을 보내 예수님을 체포합니다. 그 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까지 모든 과정이 그야말로 일사천리로 진행되는데 제일 먼저 대제사장 가야바의 관사에서 예수님을 심문할 때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들은 온갖 거짓증거들을 만들어 예수님을 모함하고 참람죄, 즉 신성모독죄를 적용해 예수님을 죽이기로 모의합니다. 그 후에 누군가를 사형시키기 위해서는 당시 로마 총독인 빌라도의 허락을 받아야 하기에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 재판하게 하고 끝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앞에서는 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과 장로들이 예수님을 이렇게 희롱합니다. "너는 남은 구원하면서 자기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느냐?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당장 그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다."고 말입니다. 한 마디로 "꼴좋다. 그렇게 나서더니만 지금 네 처지가 어떻게 되었나 봐라." 하는 뜻입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였던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들이 이렇게 총동원 되어 한 마음으로 협력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데 앞장서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자신들이 지금 누리고 있는 종교적 정치적 지위를 예수님이 위협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종교적인 지도자로 대접 받고 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을 끼치며 누리며 잘 살고 있는데 갑자기 예수라는 자가 나타나 이상한 설교를 하고 이상한 기적을 행하면서 자신들의 지위를 위협한다고 생각하지 참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온 지도층이 마음을 합해 예수를 제거하는 데 앞장서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예수님은 이들의 음모에 희생되고 만 것입니다. 둘째로 이 유대교의 종교지도자들, 특히 앞서 설명한 안나스와 가야바 같은 사람들은 과연 누구의 눈치를 보았겠는가 하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자신들을 임명할 수도, 파면할 수도 있는 로마의 눈치를 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지도자로 떠받들어 주는 유대인들의 눈치도 보아야 했습니다. 이들이 정말 진정한 유대교의 종교지도자들이라면 당연히 사람이 아닌, 권력도 아닌 하나님의 눈치를 보고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로마의 눈치를 보고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일만 행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은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로마의 하수인이며 백성들의 하수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 노릇을 제대로 못하고 군중들을 우매한 판단으로 멸망으로 몰아넣은 자들이 되었습니다.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을 알고 선생이 되지 말라"(약 3:1)는 말씀처럼 이들은 앞서 설명한 유대인 군중들보다 더 큰 심판을 받을 죄를 지은 것입니다. 왜? 그만큼 지도자는 책임이 크고 그 중에서도 영적 지도자는 백성들의 영원까지 좌우할 사람들이기 때문에 특별히 책임이 크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다면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지난주에 설명한 빌라도처럼, 또 오늘 말씀드린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들처럼 자신의 이익과 자리를 지키는 데만 급급한 자들은 아닙니까? 오늘 내가 지키려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 지위, 지금 내가 누리는 좋은 것들과 특권을 지키는 데만 급급하여 악과 타협하고 얼마든지 앞장 서 악을 행할 수도 있는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요. 또한 저는 교회의 영적 지도자인 목사로서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과연 나는 어떤 지도자인가? 이 나라는, 우리 교회는 지금 어떤 지도자가 필요로 하는가? 우리 성도들이 교회의 영적지도자를 탓하고 비난하기 전에 우리는 과연 그 지도자가 바른 길로 가도록 기도하고 충분히 뒷받침해 주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조롱하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본문 41절에 보면 유대인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희롱하고 있는 모습이 나옵니다. 헬라어로 보면 이 '희롱하다'는 말이 '엠파이조'로 '비웃다, 조롱하다, 속이다.'는 뜻을 가진 낱말입니다. 그런데 이 낱말이 본디 '무엇을 가지고 놀다, 이리저리 춤추다.'라는 말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들은 지금 무엇을 조롱하고 있는가? 십자가라는 방법을 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은 세상에서 어떤 처세술을 가지고 살아왔습니까? '조롱하다'는 원어의 뜻처럼 자신의 권력과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남을 '속이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낱말 뜻처럼 권력을 좇아 이리 저리 춤추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아슬아슬한 권력의 줄타기를 하며, 어느 장단에 춤추어야 할까를 살피며 살아왔습니다. 이쪽이 더 강해 보이면 그 장단에 춤추고, 저쪽이 좋아 보이면 얼마든지 그 장단에 춤추며 살았습니다. 덕분에 지금까지 내 권력과 기득권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라는 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이 예수라는 자는 자신들이 지금까지 살아온 방법과는 너무도 다른 삶을 사는 자였습니다. 자기 것을 지키려고 하지도 않고, 오히려 남을 위해 내 모든 것을 내주고 희생하는 삶을 살다가 지금 그 목숨까지 내주려고 십자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마음껏 예수라는 자를 조롱하고 비웃습니다. "바보 같은 놈, 우리처럼 살아야지 왜 저렇게 바보같이 손해 보는 삶을 사는 거야?" 하며 십자가라는 방법을 비웃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의 삶은 십자가를 부인하고 조롱하는 삶입니까? 아니면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삶입니까? 십자가를 믿고 바라보지만 정작 우리의 처세술은 십자가와는 정반대의 길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십자가를 조롱하는 사람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십자가는 조롱의 대상이 아니라 나도 지고 따라가야 할 대상입니다. (이하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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