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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지자 요나 그러나 (욘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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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 요나 그러나

  요나서 이야기는 어린 아이들도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순종해야 할 선지자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도망치다 바다에 빠지고, 바다 속에서는 커다란 물고기 뱃속에서 3일 동안 있으면서도 죽지 않고 살아 나와서 결국에는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이 요나서의 설명은 다양합니다.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강조하는 부분이 여럿이라는 것이지요. 선교학적으로 보면 선교사 요나, 구원론적으로 보면 이방인의 구원을 예표하는 것이 됩니다.

    어떤 분은 요나서에 전개되는 이야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이 이야기는 지어낸 이야기로서 풍유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요나서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를 자유주의라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비유로 해석을 합니다. 요나는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이고, 바다는 이방이며, 물고기는 앗수르이고, 3일은 포로생활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서는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요나라는 인물은 실제적으로 선지자로서 활동을 한 기록이 있기 때문입니다. 북이스라엘 여로보암 2세 때에 선지자로서 활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직접“나는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것이 없다”고 하시면서 요나가 실제 인물임을 말씀하셨습니다.

1. 역사적 배경

  요나의 역사적 뒷받침을 해 줄만한 내용을 요나서에서는 ‘아밋대의 아들’이라는 것 밖에는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성경 역사서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열왕기하 14장 23-27절 내용에 “여로보암 2세”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는데 거기에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하는 선지자로 등장을 합니다.

(왕하 14:25)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로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지경을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여기에 나오는 여로보암은 2세이구요, 1세는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뉠 때에 북왕국을 건국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여로보암1세입니다.
  여로보암2세는 북이스라엘을 41년 동안 다스렸습니다. 오랫동안 왕으로 있으면서 정복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였습니다. 그래서 옛 솔로몬의 영토를 회복시켰습니다.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바바 바다까지 --아라바 바다: 사해바다를 가리키고, 하맛 어귀: 앗수르와의 접경지역, 지금의 터키 남부지방입니다.)
 
  북쪽에 아람이 있고, 그 위쪽에 앗수르가 있었는데 이 두 나라도 힘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특히 앗수르라는 나라는 일찍부터 이스라엘에 위협적이었습니다. 전에 북이스라엘을 침략해서 조공을 바치게 끔 한 나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여로보암2세 때는 힘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여로보암2세가 북쪽으로 영토를 확장해 나가고 있는데도 간섭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대로 놔두면 곧 망하게 될 그런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여로보암2세가 통치하고 요나가 선지자로 활동하던 시대에는  솔로몬 이후 잃었던 영토를 회복했고,  정치경제적으로 번영을 하고 있었고, 국제적으로 앗시리아는 퇴보를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태평성대를 이루는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이 건국된 이래로 가장 흥왕했던 시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2. 선지자로 부름을 받은 요나

  이런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는 시기에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습니다. 이것은 요나가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위하여 세우신 사람입니다. 하나님에 의하여 세워진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명령받은 것을 백성들에게 다 알려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는데 어떤 말씀이 임하였느냐 하면 2절의 말씀입니다.
(욘 1:2)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요나는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이미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여로보암 왕에게 하나님께서 영토를 회복시켜주실 것이기 때문에 전쟁을 하라는 그런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이런 말씀을 전할 때에는 얼마나 재미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나라를 회복시켜주시고 백성들에게 평안을 주시겠다는 그런 말씀을 전할 때에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도 즐겁고, 그 말씀을 듣고 순종한 사람도 즐거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라는 것입니다.  악독이 가득하여 하나님께 상달하였으므로 40일 후면 망하게 된다는 말씀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저큰 성읍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였습니다. 앗수르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원수의 나라였습니다. 우리나라로 비유한다면 일본과 같은 나라라 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목사님들도 설교할 때에 일본에 대한 반감으로 얼마나 나쁘게 말했는지 모릅니다. 일본으로 선교여행을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선교사로 간다는 것도 생각 못한 일입니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관계처럼 북이스라엘과 앗수르의 관계가 그렇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북이스라엘이 강대국이 되었고, 앗수르는 조금 있으면 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기를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 하시니 요나로서는 이 말씀에는 순종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니느웨로 가는 대신에  욥바로 내려가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을 칩니다.
  선지자는 자기주장을 할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그 주신 말씀만을 선포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그것조차도 하기 싫은 요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떤 선지자도 이런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이기를 포기하는 모습입니다.
  왜 내가 가서 전해야 합니까? 왜 내가 그곳에 가야 합니까? 나는 이곳에서만 전하겠습니다. 이렇게 항변하는 것입니다.

  요나는 잘못된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기 민족적 우월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니느웨는 망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더군다나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로서 얼마나 포악한 민족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런 나라에 가서 죄를 지적하고 심판을 선포하다니요. 그러다가 그들이 회개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그 민족이 다시 강성해집니다. 그러면 그 민족에 의해 이스라엘이 망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전개된다면 이것은 정말이지 최악의 시나리오입니다. 그래서 가지 못하겠다고 항거하면서 정 반대인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배 밑으로 내려가서 쿨쿨 잠에 빠져버립니다.

3절의 말씀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욘 1: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3. 요나의 착각

  요나의 행동을 통하여 요나가 잘못 판단한 것이 있습니다.
① 요나는 자기가 가나안 땅, 이스라엘 땅을 벗어나는 것을 여호와의 낯(얼굴)을 벗어나는 것이라고 착각한 것입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만 다스리고 다른 지역은 다른 신이 다르신다는 생각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지 못했던 것이지요. 우리 하나님은 온 우주만물을 지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온 우주 만물의 통치자이십니다. 그래서 어디를 가도 하나님을 피할 수가 없고,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이 없습니다.
(시 139:7-10) 『[7]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10]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② <마침> 잘 되어지니까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착각했습니다.
  다시스로 가려고 (욥바)로 내려갔다가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선가(배삯)을 주고 그 배에 무사히 올라탔습니다.
  이 때 요나는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요?  와 만사형통이네? 하면서 그러면 그렇지 하나님께서도 나의 생각을 이해하신 게야. 그래서 이렇게 나를 먼 다시스 가는 배를 만나도록 하신거야! 하면서 이 배를 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판단을 한 것입니다.
  기가 막힌 우연이지요. 여기에서 사용하는 단어 <마침>은 정말 묘한 단어입니다.
-때로는 그것이 하나님의 때나, 하나님의 뜻을 표현할 때도 사용이 되기 때문입니다.
-룻기 같은 곳에서는 (마침)이란 말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어려운 일을 만나게 되면 요나처럼 착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는 하나님을 피할 수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되구요. 두 번째는 피해갈 때에 마침 시기에 딱 맞게 일어나는 일들, 특히 그것이 좋은 일, 이로운 일일 때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믿음입니다.

  무조건 잘되는 것이 축복이 아닐 수 있습니다.
  요나가 활동하던 시대에 태평성대를 누렸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여로보암2세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보겠습니다.
(왕하 14:23-24) 『[23] 유다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 십오년에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어 사십일 년을 위에 있으며 [24]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여로보암이 41년 동안 치리하면서 나라를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평화가 임했습니다.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그런데 그 때 왕을 평가하기를 북이스라엘을 건국했던 여로보암1세가 지은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기보다는 우상을 숭배하면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그런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여로보암2세를 통하여 나라가 태평성대하게 하셨습니다.
  이 때에 요나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하던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이 시대에는 이사야, 아모스, 호세아 등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면서 회개를 외쳤지만, 그러나 이스라엘은 우상 숭배에서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암 2: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팔며』
  그런데도 이상하게 나라가 부흥하고, 경제가 살아났습니다.  그래서 착각한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복주신다. 요나가 그랬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마음에는 민감하지 못한 선지자였던가 봅니다. 자기 민족이 잘 살고 태평성대를 누리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요나는 민족의 죄를 지적한다든지, 회개를 요구하는 그런 메시지를 전하지 않았습니다.

3. 항거하는 요나

  요나는 절대로 니느웨에 갈 수 없다고 생각한 이유는 몇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먼저는 민족적 악 감정입니다. 그리고 니느웨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악독이 가득하여 그 악이 하나님께 상달한 도시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제는 더 이상 봐줄 수가 없을 정도로 죄악이 가득한 성이라는 것입니다.
  한이 맺힌 원수의 나라인데 거기에다 악독이 가득한 도시 인데 갈 필요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항거합니다. 하나님 나는 갈 수 없습니다.
  또 하나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두려움입니다.
  만일에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니느웨성에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한다고 합시다.
  실제로 그렇게 선포했습니다.
(욘 3:4)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며 곧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 가로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이렇게 외쳐가지고 이 백성이 회개하지 않고 그대로 망해버리면 좋겠지만 최악으로 생각해서 만의 하나 이 백성들이 듣고 회개하면 어떻게 될까? 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망해야 할 민족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그곳에 임하지 않는다면 이보다 더 비참한 일이 없을 것입니다.
  아마 이것이 가장 두려웠을 지도 모릅니다.

  자신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지자들을 통해 그렇게 많이 들었고, 죄를 지적당했고, 그랬어도 회심하지 않았는데 하나님께 돌아서지 않았는데 앗수르가 회심하면 그보다 더 비참한 일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보면 그렇게 되어버렸습니다. 아수르 왕은 온 백성들에게 심지어 짐승들까지도 금식을 시키면서 정결케 하였습니다. 회개하였습니다. 온 시내가 뒤집어졌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용서하셨습니다.

  결론: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과 영적 민감함이 필요합니다.
  요나는 자신의 니느웨에 대한 감정과 그리고 민족적 감정을 앞세워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니느웨를 사랑하셨습니다.
(욘 4: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앗수르 민족이 하나님 앞에 악이 상달하였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마음은 이 민족이 회개하여 구원함을 얻기를 원하십니다. 이방인들도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니느웨의 회개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보아라 이스라엘아 니느웨는 한 번 외친 말씀으로 회개하였다. 보아라 너희가 더 악한 민족이냐? 앗수르가 더 악한 민족이냐? 하는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안 그럴까요? 처음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을 때에는 작은 일에도 감동이 오고, 감사가 넘쳐났습니다.  그런데 그런 은혜가 많아지면 많을수록 은혜가 은혜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냥 무덤덤해집니다. 마음이 둔해집니다. 어지간해서는 은혜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그런 모습을 돌아보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통해 교훈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눅 11:32)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다른 사람은 은혜를 받는데 나는 은혜를 받지 못하고 있다면 나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첫사랑의 은혜의 감격을 우리는 회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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