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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불변의 신앙 (단 3: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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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론 역사에는 느브갓네살왕이 차지한 부분은 꽤 큽니다. 성경 역사만 아니고 세상의 역사 기록에서도 느브갓네살왕은 BC 605~ 562년까지 43년 동안 최강국이었던 바벨로니아를 통치한 인물로 남았습니다. 그의 특징은 전쟁에 능숙한 영웅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나보폴라살이 왕으로 있을 때 청년의 나이로 아버지 밑에서 군 통수권자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왕이 된 후에 끝없는 영토 확장을 이루기 위해 주변의 모든 국가들을 점령했는데 당시 바벨로니아는 현재의 이라크 땅입니다. 이라크에서 유대 땅까지 가려면 현재의 국경 지대를 보더라도 시리아와 요르단을 거쳐야만 갈 수 있는 거리로 끝없는 사막을 걸어서 군대를 이끌고 마침내 예루살렘 점령까지 해낸, 당대 누구도 당할 자 없었던 사람이 바벨로니아 느브갓네살이었습니다. 얼마 전에 사형 당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대통령은 자신에 대해 이렇게 공식적으로 말한 바 있습니다. “나는 바벨로니아 느브갓네살의 후예다.” 그래서 영광스런 바벨론 제국의 회복을 원한다는 목적으로 쿠웨이트를 12시간 만에 점령을 했다가 미국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며 살던 유대 민족은 별안간 세상이 바뀌는 바람에 국민의 대부분이 바벨로니아로 노동 착취를 위한 강제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당시 바벨로니아에서 사막의 수로 공사가 필요했는데, 유대 나라에서 잡혀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은 거의 다 수로 공사에 투입이 되어 온갖 고통에 시달리면서 살았습니다. 이 다니엘서에는 그 당시의 네 사람의 유대 청소년이 등장하여 기록으로 남게 된 것입니다. 이 소년들은 바벨론에 잡혀가서 첫 번째 당한 고난이 창씨개명입니다. 다니엘은 벨드사살, 하나냐는 사드락, 미사엘은 메삭, 아사랴는 아벳느고 이런 바벨론식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이 청년들은 엄격한 심사를 거쳐 뽑힌 사람들로 바벨론 궁중에서 살았습니다. 그 이유는 “너희 같이 지혜롭고 총명한 청년들이 이 나라에 왔으니까 이 나라의 학문과 방언을 배우라. 그리고 그 배운 것을 너희들이 너희 민족에게 가르치도록 하라.”였습니다. 이것을 문화일원화 작업이라고 합니다. 그 중에 대표자와 같은 취급을 받은 사람이 다니엘이라서 본 성경의 이름을 다니엘서라고 붙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궁중에서 느브갓네살왕에게 이상한 신변상의 문제가 생겼습니다. 꿈을 꾸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좋은 꿈이 아닙니다. 느브갓네살은 꿈에 대해 심각한 공포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이 꿈은 틀림없이 나와 우리 민족에게 불길한 징조인데 무슨 일이 앞으로 벌어질 것인가?’ 더 큰 문제는 자신이 꾼 꿈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불안과 공포만이 남아있습니다. 성경에서 꿈을 통해 확실한 예언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탄생하실 때에도 요셉에게 꿈으로 지시하였고, 동방박사들에게도 하나님이 꿈으로 갈 길을 지시하셨습니다. 또, 유명한 꿈의 사람 요셉은 자신이 어린 시절에 꾼 꿈의 예언으로 자신의 일생이 그대로 나타났던 역사를 우리가 보게 됩니다. 그래서 특별히 우리 크리스천 중에 꿈의 예언성을 부인하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성서적이기 때문에 꿈의 예언성을 믿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어떤 때 좋은 꿈을 꾸면 기분이 좋아지고 ‘이야! 오늘 꿈이 좋으니까 어떤 행운이 내게 올 것이다.’라는 예감을 갖기도 하고, 너무 불길스러운 꿈을 꾸었을 때는 마음이 흔들려서 평화가 오지를 않고 공연히 어려운 일을 당할 것 같은 예감도 가지고 살아갑니다. 교인들이 이상한 꿈을 꾸고 이것이 영적으로 무슨 뜻이냐고 해석해 달라고 찾아오는 교인도 적지 않습니다. 지금 느브갓네살이 이렇게 된 것입니다. 문제는 꿈의 내용을 이야기를 해야 해석을 하든지 말든지 할 텐데 잊어버린 꿈을 해석하라니 너무 답답합니다. 그래서 여기 박수와 술객과 술사와 지혜스러운 사람들을 모두 불러서 “말하라. 이게 무슨 꿈이냐?” 잊어버리고 나서 자기 꿈을 말하라니 아무도 말하지 못하니까 느브갓네살왕이 화가 났습니다. 화풀이를 어떻게 합니까? “이 놈들을 모조리 다 죽여 버려라.” 시위대장 아리옥에게 명령을 했습니다. 죽여 버리라는 살생부 명단에 다니엘도 들어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숨겨놓으신 영적 지혜를 다니엘에게 주심으로 이 일을 해결하는 기록이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로 남았습니다.

다니엘은 꿈의 내용을 왕 앞에 말합니다. “당신은 큰 신상을 보셨나이다. 큰 동상 만든 것을 보셨나이다. 그 신상의 머리는 정금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생각이 나는 겁니다. “아! 맞다. 내가 그런 것을 봤다.” “가슴과 팔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그 종아리는 철이요 발은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이었습니다.” “맞다. 그것을 내가 봤다.” “그런데 난데없이 돌멩이 하나가 날아오더니 그 신상을 때려 산산조각으로 부서져서 마치 타작마당의 겨같이 바람에 날려 없어졌고 우상을 친 그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나이다.” “맞다. 그렇게 되었다. 참 신통하다. 어떻게 내가 꾼 꿈을 네가 그렇게 똑같이 말하느냐? 그런데 그게 무슨 뜻이냐?” “머리가 정금이라는 것은 당신입니다. 현재의 바벨론 제국입니다. 맨 위에 있는 당신은 이 세상에 누구도 당할 수 없는 머리가 되었고 금같이 빛나는 제국 건설의 성취자가 바벨로니아가 되었고 당신이 되었습니다.” “그렇지, 내가 그렇게 된 거지?” “맞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지나가면 은 같은 나라가 나타날 것입니다.” 바벨로니아가 망하고 메대 왕국이 왔습니다. “또, 역사가 지나면 배와 넓적다리가 놋이라는 것은 놋 같은 나라가 나타나 세계를 지배할 것입니다.” 페르시아를 말합니다. 현실대로 되지 않았습니까? “종아리가 철이라 철 같은 나라가 나타날 것입니다.” 헬라 왕국입니다. “발이 절반은 철이요 절반은 흙이라.” 로마의 혼합적인 역사를 말합니다. “이렇게 역사는 지나갈 것입니다. 그 이후 로마 시대에 뜨인 돌이 하나 나타나서 그것을 때려 부수고 온 세계에 가득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흰 돌이신 메시야 왕국 건설을 예언을 한 것입니다. 46절에 “이에 느부갓네살왕이 엎드려 다니엘에게 절하고 명하여 예물과 향품을 그에게 드리게 하니라. 이에 말하기를 네 하나님은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자시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러한 꿈을 느브갓네살왕에게 주셨으며 다니엘로 하여금 해석케 하시는 영적 지혜를 주셨는가? 세계무대에 서있는 바벨로니아의 힘을 통하여 하나님이 구원의 빛을 온 세상에 전하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느브갓네살왕은 그렇게 신비스러운 하나님의 역사를 자신이 체험하였으면서도 그 길을 따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타내 주기 위해서 다니엘서가 기록된 것입니다. 다니엘의 꿈 해석이 다니엘 2장에 나타나고 있는데, 3장에서 느브갓네살왕은 정책적으로 어떤 일을 하게 됩니까? 자기가 꿈에 본 신상을 만들게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국가적 신적 존재로 선포하는데 역사가들은 이것을 종교일원화 작업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문화일원화 작업과 종교일원화 작업은 지금까지 세상에 나타났던 많은 독재통치자들이 수없이 있었던 정책 중에 하나입니다. 그 신상의 내용이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높이가 60규빗이며 넓이는 6규빗이라.” 쉽게 계산하면 30m의 금덩어리 신상을 만들어 놨습니다. 다니엘이 말한 그 꿈대로 금신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목적하신 바의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 국민에게 이 신상에게 절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역사에서 이런 것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김일성 동상 참배 문화도 똑같은 것입니다. 누가 감히 그 명령을 거역한단 말입니까? “거역하면 극렬히 타는 풀무불 속에 집어넣겠다.” 극렬히 타는 풀무불이 어떤 불입니까? 요즘 젊은이들은 극렬히 타는 풀무불이 뭔지 모를 것입니다. 옛날 시골에는 대장간이라는 곳이 있어서 농부들이 농사짓는데 필요한 쇠로된 연장들을 쓰다가달아서 못쓰게 되면 쇠를 녹이는 풍구질을 해서 풀무불을 달구어놓습니다. 그 불의 세기가 얼마나 강렬한지 거기다 집어넣으면 모든 쇠가 다 녹습니다. 새빨갛게 물렁물렁해집니다. 그러면 집게로 집어내 물렁물렁해진 쇠를 망치로 때려 새로 쓰기 좋게 만드는 불이 풀무불입니다. “거기다 사람을 집어넣겠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안 들어가고 싶으면 종교일원화 작업에 순종하라. 어서 여기에 절하라. 이게 하나님이다. 이게 나다.” 다니엘서가 있는 뜻은 생명 위협의 극렬한 순간 앞에서 신앙을 지켜 우상 숭배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발표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들은 신앙의 핍박이 없는 문화에서 살고 있습니다. 핍박은 고사하고 국가가 신앙생활을 도와주는 시대입니다. 보세요. 주일날 교회에 가지 말라고 대통령이 말했다가는 민주국가에서 큰일 납니다. 게다가 교회에 가서 헌금 내는 것을 소득세에서 기부금으로 공제해 줍니다. 기독교 국가는 다 똑같습니다. 교회는 비영리 단체이므로 세금을 공제 받습니다. 국가가 그만큼 협조하는 겁니다. 국가적 권위로 열심히 교회에 가라고 신앙생활 잘 하라고 권장합니다. 부시 행정부는 교회마다 공문을 보낸 것이 있습니다. 사회 공익사업을 위해서 투자할 마음이 있는 교회가 투자하는 것만큼 정부가 협조를 해서 사회공익 사업을 같이 하자고 하고 있습니다. 만약 대통령이 교회에 출석하면 본받으라는 뜻으로 매스컴에서 광고를 하지 않습니까? 무슨 핍박이 있습니까? 핍박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교회 오시는데 경찰관이 교회 오지 말라고 하신 분 계십니까? 만약 저를 포함해서 우리 갈보리교인 전체가 “오늘 정부가 예수 믿는 사람들을 풀무불 속에 집어넣겠다. 가려면 가라!” 그리고 실제로 집어넣었을 때 다니엘과 같이 우리 신앙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이게 말은 쉬운데 안 된단 말입니다. 과거 일제하에서 신사참배 안하면 감옥에 투옥시키고 결국 주기철 목사님과 같이 죽어야 될 때 끝까지 버틸 수 있는 신앙은 과연 있을까? 김일성 동상 참배 안하면 그 사회에서 살 수 없는 사회를 만들어 버렸을 때 안하는 사람이 있는가? 다 하지 않습니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본인이 당하지 아니한 사건에 대해서 큰소리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신사참배 현장에 내가 있었다면 그때 나는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내가 그 사건을 안 만났으니까 보호를 받은 것뿐이지 그 자리에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우상화된 동상 앞에 섰을 때 나는 어떤 반응을 나타냈을까? 그때 정말 굴복하지 아니한 사람들은 위대한 겁니다. 굴복한 사람도 내가 당하지 아니한 사건에 대해 비판할 마음이 없습니다. 내가 안 당했기 때문에 큰소리치는 것뿐이지 실제로 현장 체험을 한다면 과연 내가 어떻게 되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다니엘서가 있는 겁니다.

한국 기독교 100년 역사에 가장 위대한 인물이 누구냐? 가장 표가 많이 나온 분이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이라고 한 것을 신문에서 봤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6~7명의 가족을 거느리고 계신데 그때 제일 어린 아들이 6살이었습니다. 자신이 죽었을 때 그 아이는 어떻게 됩니까? 그때 신앙의 절개성을 굽히지 않고 죽음의 길을 선택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또, 기독교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두 아들 모두는 한꺼번에 공산당이 죽여 버렸습니다. 그런데 아들을 죽인 자를 양자로 삼아서 키운다는 것이 할 수 있는 일입니까? 그런데 했습니다. 그런 위대한 순교자들이 대한민국에 많이 있었기 때문에 위대한 하나님의 영적 축복을 우리나라가 받은 것이 확실하지만 다른 한편 부끄러운 역사도 우리가 부인하지 말아야 합니다. 1938년 9월 10일 27회 총회에서 193명이 신사참배 하는데 찬성했습니다. 반대한 사람은 오직 한명! 외국 선교사였습니다. “이거 하면 안 됩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 하나님의 도성을 향하여 기도하면서 그들의 영적 능력을 키웠고 풀무불에 들어가기를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신앙 역사를 길이 밝히기 위해 다니엘서가 남은 것 아닙니까? 그러면 그들에게 어떻게 그러한 믿음의 능력이 주어졌는가? 우리들도 그런 경우를 만나게 되면 그때의 필요한 믿음과 능력을 하나님이 주신다는 겁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예수께서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관원들에게 끌려가 핍박을 당할 때 무슨 말을 할까 머리 준비하지 말라. 그 때가 되면 아버지께서 너희가 할 말을 이를 것이다.” 그러니까 “할 수 있다. 할 수 없다.” 미리 장담도 하지 말고 또한 겁내지 않아도 됩니다. 필요한 때 필요한 은혜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주실 때 우리는 순교 현장에 그때 나갈 수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직계 제자들을 사도라고 부릅니다. 12사도입니다. 그 사도들의 제자가 된 사람들을 속사도라고 교회사에서 가르칩니다. 속사도의 제자가 된 사람들을 교부들이라고 불렀는데, 이 교부들 중 한 사람이 로마 정부에 골칫거리였습니다. 크리소스톰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기독교를 박해했던 아르카디우스 황제가 크리소스톰 한 사람 때문에 고민을 합니다. 모든 크리스천들이 그가 어떻게 하나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르카디우스 황제가 이 일을 잘 처리할 수 있는 장관 한명을 불렀습니다. “네가 크리소스톰의 문제를 잘 해결하라. 그리하면 로마에서 크리스천들이 없어질 것이다.” “어떻게 할까요?” “지독하게 고생시켜라. 아무도 없는 캄캄한 감방에 가두고 고독과 외로움에 지쳐 죽도록 지독한 고생을 시켜라. 그런데 죽지는 않게 생명 연장을 시켜가면서 그렇게 하라. 그러면 그리스도를 배반할 것이다.” “다 해봤습니다. 그는 혼자 있기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혼자 있으면 주님과 함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싱글벙글 웃으면서 무슨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하루 종일 주님과 더불어서 이야기를 합니다. 몇 달이라도 안 됩니다. 그에게 그것은 고생이 아니라 행복입니다. 주님과 대화할 수 있는 많은 시간을 제공하여줄 뿐입니다.” 그랬더니 아르카디우스 황제가 “로마의 흉악범들이 갇혀있는 감옥에 집어넣어서 그들에게 끊임없는 시달림을 받도록 고생시켜라.” “해봤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 감옥은 얼마 안가서 모두다 예수를 믿습니다. 그에게 신비한 능력이 나타나서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그를 만나면 그와 비슷하게 되어 버립니다. 그는 지금 그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면 당장 끌어다 목을 쳐 죽여라.” “황제시여! 크리소스톰이 가장 바라고 있는 것이 그겁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제일 큰 상급을 받게 된다고 얼마나 좋아하면서 순교 현장에 나가려고 하는지 그것을 보면 크리스천이 수없이 많이 증가할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듣는 순간 그의 얼굴과 눈동자는 찬란한 광채가 날 뿐이니 안 됩니다. 그러면 더 큰 문제가 옵니다.” “그러면 아무 방법도 없단 말이냐?” “제일 좋은 일은 그를 세상으로 내보내서 제 맘대로 살게 버려두는 것이 옳을까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건드리지 말아야 합니다. 건드리면 점점 커지는 괴물입니다.” 이것이 로마의 역사였습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다른 민족에 비해서 자랑할 수 있는 정신문화가 두 가지 특이한 것이 흐르고 있습니다. 하나는 임금님을 향한 옳은 마음의 충성심입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도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백설이 만건곤할 때 독야청청하리라.” 이 흐름이 우리 정신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또 하나는 사랑하는 님을 향한 여인의 정조 개념, 그것이 춘향전입니다. 암행어사가 되어서 군졸들을 거느리고 자기를 데려오기 기다렸는데 거지꼴이 되어서 돌아온 이몽룡을 향해서 “어이구! 내가 저런 것을 위해서 이런 고통을 받으며 기다렸는가?” 이렇게 말해야 되는데도 “잘났어도 내 낭군이요 못났어도 내 낭군이라.” 옳은 것에 대한 변하지 않는 마음, 이러한 정신문화가 우리나라에 흐르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믿고 사는 사람들은 이 하나만 잡아야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문화가 변해서 핍박 없는 시대에 살게 되므로 믿음이 나태해졌습니다. 여러분, 오늘 비가 이렇게 조금 왔으니까 그렇지 비가 많이 오면 교회 출석률이 몇 퍼센트는 줍니다. 비가 오기 때문에 교회 안 오는 겁니다. 날이 추우면 추위의 강도에 따라서 또 달라집니다. “야! 교회 국수 안준대! 배고프니까 가지마!” 이렇게 문화가 변했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이 교회에 와서도 상업주의 원리로 뭐든지 이익이 되어야만 행동합니다. 친구를 사귀어도 이익이 될까? 요즘의 결혼 문화를 보세요. 혼수 등으로 큰 문제가 생기기도 합니다. 손해가 날 일은 절대로 안합니다. 신앙도 이렇게 되어 버렸단 말입니다. 교회에 가서 내가 얻은 유익이 뭐야? 그래서 계산한 것이 들어맞지 않았을 때는 굉장한 불평과 불만을 토로합니다. 주님을 위해서 십자가를 진다는 개념은 다 사라지고 이기주의 중심의 문화로 신앙생활을 해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나와 복음을 위하여 버린 자는 이렇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손해나는 부분을 감수하는 것이 신앙이란 말입니다. 마지막 카드가 뭐냐? 죽는 겁니다. 지금 다니엘은 그 마지막 지점에 와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신앙의 마지막 카드를 쓸 때는 이때다. 죽이십시오.” “풀무불에 집어넣을 것이다.” “넣으십시오. 이것을 위해서 나는 살았습니다.” 여러분, 지금 온 세상이 이만큼 인간답게 살 수 있게 된 것은 옳은 일을 위해 순교자적으로 몸을 던진 사람들 때문에 된 것입니다. 그들이 희생되었기 때문에 진리를 위해서 희생된 그들의 아름다운 열매가 우리로 하여금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살게 한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정신입니다. “옳은 일을 위해서 죽음의 자리를 사양하지 아니했다.” 다니엘서가 있는 목적은 이것입니다. “너희는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그렇게 하라. 그것이 하나님 백성의 삶의 방향이다.” 지금 우리가 사순절을 지나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주님을 향한 나의 신앙의 불변성을 다짐하는 시기입니다. “내 인생의 최고의 가치는 이것이다. 나는 이 가치를 위해서 세상을 살고 있다. 이것을 빼버리면 나의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지? 이것을 붙잡고 나의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 오늘 풀무불 앞에서 최강대국의 임금이 명령하는 것을 거절하면서 예루살렘을 향해 무릎을 꿇었던 다니엘의 아름다운 신앙의 불변성의 모습을 보면서 ‘아! 이것만은 나도 이렇게 살아야지! 이것만은 내 인생의 최고의 가치다. 이것을 위해서 내가 태어난 것이다.’ 이렇게 영적 각오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신앙은 말할 수 없이 나태해 졌습니다. 아름답지 못한 저희들의 신앙을 용서하시고 성령님의 뜨거운 불빛을 어두워진 저희들의 영혼에게 비춰주시사 이것만은 나의 가장 살아갈 가치라고 다니엘과 같이 결정할 수 있는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본받는 사순절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는 자에게 약속하신 주님의 역사가 우리 주변에 나타날 것을 믿사오니 이 한주간도 믿음의 승리자가 된 기쁨과 은혜 속에 살게 해주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이필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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