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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늘의 고뇌 (렘 20:10~12, 벧전 1:18~21, 눅 9:57~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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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을 살아가면서 고통이 없이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상상을 여러분들 많이 하셨을 때가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저도 많이 그렇습니다. 고통이 없이 아픔이 없이 살수 있다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아마 살기가 힘들어서 기대에 못미처서 자조적인 고백을 하고 그렇게 살아갈 겁니다.

성경에 나오는 여러 위대한 인물들. 또 항상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눈물의 예언자다 이렇게 말하는 예레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예언자로 나서서 백성들에게 주님의 말씀 선포하는 책임을 맡았습니다. 선포할 때 좋은 일만 선포하는 게 아니라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심판도 선포합니다.

당연히 듣기 실어합니다. 얼마나 듣기 싫어했으면 예레미아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하나님 저 죽을 지경입니다. 왜 절보고 예언자로 택해서 아주 어려운 저주의 이야기를 심판의 이야기를 내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하라 하십니까. 백성들이 저를 어떻게 한줄 아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려고 성전에 들어갔더니 성전 문지기가 저를 발로차고 뺨을 때리고 창피해서 죽을 지경입니다. 그것뿐이 아니겠지요. 얼마나 예언의 이야기가 듣기 싫었으면 사람들의 반응을 얼마나 악독하게 보였으면 선지자 예언자가 하나님한테 이렇게 저주스런 예기를 했겠습니까.

하나님이 하도 말씀을 안들으시니까요. 예레미아가 17장18절에 보면 이렇게 써있습니다. 나는 생일이 있는 게 저주스럽다. 왜 나한테 생일이 있어야 하는가. 태어난 날 축제가 있는 날 행복한날 왜 저한테 생일날이 있어야 합니까. 차라리 내가 모태에서 죽어서 어머니의 뱃속이 나의 무덤이 되었던들 얼마나 좋았을까.

어찌 이 몸이 모태에서 밖으로 나와서 이처럼 고난과 고통을 겪고 내 생애를 마감하는 날까지 이런 수모를 받으며 지내야 합니까. 하나님. 이정도 고백이면요 인간의 고통이 예레미아의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예레미아에게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

별로 잘못도 없는 예레미아 선지자에게 예언만 맡기지 왜 이런 고통까지 주면서 예언을 하라고 하십니까. 비슷한 이야기 혹시 여러분 동감하십니까. 여러분의 생에 속에서 우리 생에 속에서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니면 부모가 미운 자식한테 자기 스스로가 너무 밉고 얄미워서 자책하는 목소리로 차라리 태어나지 말걸. 이렇게 생각해보신적 없으십니까.

차라리 어머니 뱃속에 내 무덤이었으면 좋았을걸. 예레미아는 그렇게 말하고 하나님께 혼났습니다. 혼났지만 결국 예레미아는 혼나면서도 하나님께 저항 섞인 호소를 합니다. 왜 제가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합니까. 잘못한 사람이 겪는 고난은 이해 할 수 있지만 제가 왜 고통을 겪어야 합니까. 의인이 겪는 고난에 대해서 우리 답변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예수님도 고통을 당하셨으니 여러분도 고통을 당하십시오, 하는 아주 일반적인 얘기를 합니다.

어느 분이요 아주 재밌는 얘기를 써서 제가 소개를 하겠습니다. 서양 사람이기는 합니다만 존스미스 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죄를 지어가지고 법정에 쓴 사람이 호송 줄에 묶여서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또 아픈 환자가 병원에 가서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서 붕대로 칭칭 싸놓는 아픔도 있습니다.

호송 줄로 묶인 아픔. 붕대로 싸매진 아픔. 둘의 차이가 뭔지 아십니까. 전자의 차이는 죄인의 고난이고 후자의 차이는 의인의 고난입니다. 죄를 지어서 죗값을  치르려고 묶인 아픔이 있으면 고침받기 위해서 새로운 삶을 살기위해서 불편하지만 칭칭 붕대로 감기는 아픔도 있습니다.

예레미아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 할 것입니다. 하나님 왜 저를 이렇게 사형수처럼 호송 줄로 묶어서 고난당하게 합니까. 하나님의 답변입니다. 그것은 네 백성이 고침받기 위하여 네 백성들을 내가 분노, 매, 아픔, 심판, 내 백성의 환부를 도려내기 위해서 내 백성을 붕대로 칭칭 감으면 아픔이고 그 아픔을 내가 그대에게 주노라.

예레미아가 이 사실을 깨달은 것은 한참 후에 였습니다. 우리는 고통을 당하고 묶임을 당하고 살고 있습니다만 저희들이 당하는 아픔을 혹시 호송 줄로 생각하시면 죄를 회개하시면 됩니다.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혹시 저를 묶어내는 것이 있으면 병원 붕대라고 한번 생각해보시지요. 저한테 주시는 모든 고통 아픔 제 민족이나 가족에게 주신이것들이 저한테 걸림돌이 된다고 하면 회개하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저의 미래를 위한 디딤돌이 된다고 하면 기꺼이 아픔을 참을 수 있습니다. 걸림돌을 죄 때문에 걸림돌이고 디딤돌은 그것이 실패든 고난이든 아픔이든 또 다른 생명을 위해서 주시는 미래를 위해서 주는 현재의 잠시 고난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얘기로 돌아가면 사랑하는 여러분 죄의 호송 줄로 묶여있지요 제가 풀어드리겠습니다. 단 저 자신이 여러분의 호송 줄로 저도 묶여야 됩니다. 피할 수 있지만 기적적으로 호송 줄을 풀어 줄 수는 있지만 그것은 죄를 회개하는 방식이 아니기 때문에 죄를 회개시키기 위해서는 악을 없애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여러분과 함께 여러분을 대신해서 죄의 호송 줄로 묶이고 고난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그 호송 줄은 호송 줄만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음 그 자체입니다. 제가 기꺼이 지겠습니다. 왜 지냐하면 십자가의 고난을 디디고 올라서서 여러분이 부활이라 이름하는 새로운 생명을 얻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꺼이 그길로 가겠습니다. 저는 오늘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고난이 반드시 있지만 그 고난이 저는 디딤돌과 같은 고난이었으면 하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저도 그렇게 고난을 견뎌내고 싶습니다. 지난 주중에 제가 급한 일이 있어서 잠시 제네바를 다녀왔습니다. 제가 맡고 있는 의료제단 일로 갔는데 세계보건국인 WHO에 과거 사무총장으로 계셨던 이종욱 박사라고 있습니다. 그분이 돌아가셨는데 세계에서 그분에 대한 추모와 물결이 많고 한국에서도 나라 이름으로 뭔가 상을 줄 필요가 있다 그래서 매년 10만 불씩 주기로 하는 상 제정 때문에 WHO사무총장이랑 만나서 하루 얘기하고 돌아왔습니다.

근데 그분이름으로 무슨 상을 주면 되나 얘기 하는 게 WHO사무총장이나 다른 분들 얘기가 이종욱 박사의 독특한 공헌 중에 하나가 아무리 애써도 치유 받지 못하는 질병들. 특별히 더운 나라 열대지방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 예컨대 문둥병부터 시작해서 기생충 요즘에 HIV 이런 병들 온갖 전염병들이 많은데 전염병에 시달리는 인구가 한 20억쯤 됩니다.

뭐로도 고칠 수가 없는데 이종욱 박사가 한 것 중에 하나가 이분들의 건강을 WHO가 책임져야 한다고 해서 구조조정까지 했습니다. 그러면 한국이란 나라가 이런 걸로 해서 봉사하면 어떻겠습니까. 세계가 걸머진 빈곤 때문에 날씨 때문에 허약한 체질 때문에 오는 우리가 소외시키고 돌보지 않고 우리가 정말 게을러서 돌보지 못한 열대지방의 질병들 그걸 위해서 애쓰는 사람 연구하는 사람에게 상을 줍시다. 그래서 그렇게 하자고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분들 말이 아프리카, 남아시아, 남미일부 이런 모든 지역. 북쪽으로 가면 네팔이나 이런 지역에서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전염병에 걸려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20억이 그 피해자입니다. 그분들 용어로 neglected tropical disease 그렇게 표현을 합디다. 그렇게 표현을 합니다. 우리가 별로 관심두지 못했던 열대지방의 질병들. 20억이면 세계인구 1/3입니다.

지금여기 병원도 있고 의사 간호사 질병 치료하는 많은 분들이 계십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상황의 문제 때문에 나면서부터 풍토 때문에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질병들. 저는 이 질병들이 이분들이 끌어안아야할 디딤돌인지 걸림돌인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제발 이것이 디딤돌이 되어 병에 당한 고난이면 새로운 치유의 기회를 줘야 되는거 아닙니까.

우리도 도와야 되는거 아닙니까. 예수께서 오신다고 하면 저희들한테 그렇게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내가 함께 고난을 당할 수는 있으나 이 고난은 극복하기 위해서 서울에 있는 여러분들의 손을 필요로 합니다. 말씀하실 때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남의 질병이므로 모르겠습니다가 아니라 그게 바로 우리 세계에 가족이된 우리 전체 세계에 한 부분으로 알고 우리도 기꺼이 그 일에 동참하겠습니다. 예수님 말씀은 세상 모든 사람의 고난을 짊어질 수 없으나 고난을 배제하지도 않고 고난 속에 우리가 동참할 수 있다고 하면 여러분은 참으로 복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위대한 점은 무엇 때문에 그분이 오셔서 저에 질병을 저의 아픔을 함께 지셔야 합니까. 저보고 하시는 말씀이 내가 그대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 걸머 질 테니 나와 함께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이웃의 고통도 함께 지자. 그래서 함께 구원받자.

십자가란 저한테 주신 작은 십자가 내 이웃이 져야할 작은 십자가들 그리고 모든 것을 합해서 주님이 함께 지시고자 결단하신 큰 십자가가 오늘의 세계를 구원할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이분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십자가를 향해서 수난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중간에서 예수께 와서 요청을 합니다.

제가 예수님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저도 기꺼이 가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사람은 율법 교사, 서기관 이었습니다. 예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 나는 새도 복음자리가 있는데 인자인 나는 하나님의 아들인 나는 머리 둘 곳도 없다. 내가 머리 둘 곳 이라고는 단 한군데 갈보리언덕 십자가뿐인데 그래도 가겠느냐.

오늘 성경말씀에는 대답이 없습니다. 그냥 생명 하늘나라로 가는 줄 알았더니 머리 둘 곳도 없는 곳 죽음만이 있는 곳으로 갈 텐데 함께 가겠느냐. 둘째사람이 와서 묻습니다. 저도 주님의 그 길을 기꺼이 가겠습니다. 단 한 가지만 들어주십시오. 제 아버님이 돌아가셨는데 장사나 지낸 다음에 가게 해주십시오.

예수의 냉혹한 말씀입니다. 내가 죽으러 가는데 당신과 당신 죽은 아버지를 위해서 내가 죽으러 가는데 죽은 아버지는 딴사람보고 장례하라고 하고 나와 함께 또 다른 죽음의 길을 가자. 세 번째 사람입니다. 제가 기꺼이 따르겠는데 저의 집안사람들에게 작별인사나 하게 해주십시오.

예수님 말씀은 쟁기 들고 밭을 갈면서 뒤를 돌아다보면 안 된다. 소돔 고모라에 나오는 롯의 아내 얘기입니다. 소돔고모라가 지금 다 망하고 있는데 가다가 망하는 세상 고향의 아픔 패망을 아쉬워하면서 뒤를 돌아보지 말고 망할 소돔고모라는 버리고 앞에 주어진 승리를 향해 가라.

그러나 롯의 아내는 너무 안타까워서 아파서 뒤를 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다는 성경얘기를 잘 압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모든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내가 가고 있는데 뒤를 돌아다 보지 말고 죽음의 길을 갈 수 있느냐. 그 길을 가면 그게 죽음이 아니고 그게 디딤돌이 되어서 부활이라 이름한 당신의 부활 나의 부활 모두의 부활이라고 이름하는 새로운 생명을 줄 텐데 가겠느냐.

세상에서 살면서 아버지 장사를 당연히 치러야하는 효. 가족의 의무. 가족에게 인사라도 해야 하는 의무. 그러나 예수님 말씀은 너무 급해서. 세상을 구해야 하는 일이 너무 급하고 새로움을 만들어야하는 일이 너무 급해서 십자가의 고난을 미룰 수가 없어서 지금 가야 되겠는데 지금 수난의 길을 가야 되겠는데 나보고 지체시키지 마라.

하나님의 수난의 계획을 하나님의 시간을 인간된 이유로 지체하지 말라. 나는 가겠다. 따라오려면 와라. 예수님 말씀은 너무나 냉혹하고 너무나 칼날 같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런 방식으로 가야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이 있다고 생각해서 오늘 우리한테 얘기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의 고난을 앎에도 불구하고 가족도 장사를 지내야하고 인사도 해야 되고 그리고 내 일을 다  처리해놓고 가야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너무 급해서 자기 아들을 지금 보내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고난에 동참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인간의 고난을 다 묶어서 하나님 자신이 죽어야 되는 아픔 때문에 오늘 수난의 길을 하나님이 가시고자 합니다.

그 길을 같이 가겠냐고 묻습니다. 저는 우리가 예수님의 수난을 길을 같이 갈수는 없으나 그러나 그분이 가시는 길을 우리 자신이 갈 수 있는 만큼만 줄여서라도 같이 갈수 있으면 수난절이 저희들한테 기쁜절이 되리라 믿습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제가 언젠가 드린 얘기 같은데 탈무드에 나오는 목동 다윗 얘기를 다시 드리겠습니다. 사울 왕이 하프연주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연주가들을 많이 왕궁에 초청해서 연주를 들었는데 그때마다 사울왕의 귀에는 가슴에는 모든 연주가 그렇게 감동적이지 못했습니다.

마지막 즐거운 연주를 꼭 듣고 싶은 사울의 요청에 의해서 목동으로 있었던 다윗이 자청합니다. 왕에게 와서 제가 하프를 연주하겠습니다. 사울이 할 수 있겠느냐. 꼭 좀 하게해주십시오. 그래서 연주를 했습니다. 결과는 다윗의 연주에 사울은 너무나 감동을 하여 눈물을 흘리고 기뻐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이름은 골리앗죽인 작은 장군의 얘기가 아니라 하프 연주가로 더 유명합니다. 사울이 묻습니다. 어떻게 연주를 했기에 네 연주는 그렇게 좋으냐. 다윗의 답변입니다. 저는 연주를 하기 전에 하프하고 대화를 했습니다. 하프의 마음을 제가 읽으려했습니다.

첫 번째는 나뭇가지에 새들이 다 몰려와서 앉아서 지저귀는 이야기를 하프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나뭇잎이 햇살을 받아서 햇빛을 바라고 양분을 바라고 새들이 올라앉고 지저귀고 놀고 햇빛비치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하프보고 같이 연주하자고 했더니 하프가 그렇게 연주해서 임금님이 제가 그 부분을 연주할 때 얼마나 기뻐서 웃으셨습니까.

두 번째 대목은 사람들이 그 좋은 나무를 못질하고 대패로 찍고 칼로 찢고 마지막에는 나무를 잘라버립디다. 잘린 나무의 고통이 얼마나 아프고 서글프고 힘든지 그 나무보고 울라고 했습니다. 잘린 나무의 울음 고통을 제가 나누자 고해서 그렇게 제가 연주했더니 임금님도 우셨지 않습니까.

제가 마지막에는 나무한테 이렇게 위로했습니다. 잘린 나무는 땔감으로 쓰는 게 아니라 잘린 나무가 바로 하프의 악기가 되었다. 죽음이 결코 헛되지 않다. 하나님이 선택했다. 잘렸지만 하프가 되어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 하게 된 기쁨을 연주하자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프가 기뻐했습니다. 왕도 기뻐했지 않습니까.

살아가면서 우리는 태어난 기쁨. 세상을 사는 기쁨. 새들이 지저귀는 아침의 경험 우리는 매일 기대하고 살아갑니다. 그렇게 하나님하고 연주할 수 있으면 아름답습니다. 혹시 창에 찔리고 욕 듣고 침 뱉음 당하고 심지어 중대한 질병에 허덕이면서 마침내는 죽음이라고 이름하는 나무의 잘림을 기억하십니까. 경험하셨습니까. 보셨습니까. 그러면 슬퍼서 울면 되지요.

마지막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잘려도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은 그걸로 땔감이 되는 게 아니라 악기로 다시 만들어진다. 십자가란 나무에서 죽은 예수를 그냥 땅에 묻는 게 아니고 그것을 예수로 구세주로 다시 부활시키는 하나님의 기적으로 태어난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죽은 다음에 새로운 사람으로 새로운 악기로 새로운 구세주로 태어나게 시키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여러분에게 선물로 드립니다. 하프만 그런 변화를 경험하는 게 아닙니다. 인간도 살아있는 생명체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 경험을 예수께서 먼저 하시면서 하시는 말씀. 나와함께 이 길을 갑시다.

하나님의 아픔은 여러분을 구원하기위한 아픔입니다. 그 길을 가시겠습니까. 부활이라 이름하는 새로운 세계가 새로운 미래가 내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기고 극복하면서 가십시다. 부활의 아침 그날까지. 이 길이 우리 디딤돌의 길이 되길 진심으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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