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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더 좋은 믿음의 간증을 남기자 (히 11:3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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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에게 인정받게 되면, 참 기분이 좋지요? 그런데 사람에게 인정받음과 하나님께 인정받음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칭찬은, 아무리 명예로워도 곧 사라진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칭찬은 영원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인정받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란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이 좋다고 인정하시지만 않는다. 확실한 증거를 주신다. 네가 옳다는 증거,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증거를, 확실히 느낄 수 있는 체험을 주신다. 이런 체험이 있는 신앙생활을 하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난 간증이 있기에, 어떤 시련이 있어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인내할 수 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장인데, 믿음의 영웅들의 간증이 기록되어 있다. 구약의 믿음의 선배들은, 믿음으로 승리했다. 믿음의 선배들도 어려운 시련이 있었지만, 믿음으로 모든 역경을 다 이겨냈다. 또한 불가능한 일을 가능한 일로 바꾼 이적의 주인공들이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증거를 받았다. 아벨은 의로운 자라는 증거를 얻었고,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얻었다. 노아가 방주를 예비하여, 모든 가족이 구원받게 되는 증거를 얻었다. 모세는 출애굽의 증거를 얻었다. 이렇게 모두 다 믿음의 증거를 받았다.

  이러한 믿음의 증거가 있기에, 신앙이 흔들리지 않았다. 이 시대에 믿고 있는 우리는 구약시대의 성도들에 비해서, 훨씬 더 좋은 조건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니, 그들보다 더 좋은 믿음의 간증을 남기자는 말씀이다. 왜 더 좋은 간증을 남길 수 있나?

1. 구약의 사람들은 증거를 받았지만, 약속을 받지 못했다(39).

구약의 믿음의 선진들은, 약속을 받지 못했다. 그들이 받지 못했던 약속이 무엇인가? 33절 말씀을 보자.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여기서 우리의 선진들은, 믿음으로 약속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 본문 39절에서는, 그들이 약속을 받지 못하였다고 했다. 무슨 이유인가? 33절의 약속은 복수형으로 기록이 되어 있고, 정관사가 없다(ἐπαγγελιών). 즉 약속들이다. 하나님께서 개개인에게 주신 이런 저런 약속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다. 그 결과 그는 믿음으로, 약속의 아들 이삭을 선물로 받았다. 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여리고 성을 칠일 동안 두루 돌아라. 그리하면 여리고 성이 무너지리라.”

  여호수아는 하나님을 믿었다. 그는 믿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칠일 동안 여리고 성을 두루 다녔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여리고 성은, 그들의 눈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을 받았다.

  그런데 33절과는 달리, 본문에 기록된 약속이라는 단어는 단수이고, 그 앞에 정관사가 붙어 있다 (τὴν ἐπαγγελίαν). 즉 “그 약속”을 말한다. 많은 약속들 가운데 하나의 약속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특정한 약속을 말한다. 특정한 약속은 바로, 메시아에 대한 약속이다.

  (신18: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 (신18:18)에는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고 했다.

  (행13:23)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세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고 하였다. 따라서 이 약속은, 구세주 되신 메시아가 오신다는 예수님에 관한 약속이다. 구약 시대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메시아가 오신다는 약속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들은 메시아가 오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증거를 받았으나, 그들 당대에 메시아가 오심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메시아가 오신다는 약속은 하셨지만, 그 약속을 받지 못했다. 따라서 우리는 구약 시대의 성도들보다, 약속을 보고 믿으니 얼마나 큰 혜택을 받았는지, 말로 다 할 수 없다.

  우리는 약속하신 메시아를 기다리지 않고,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고 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놀라운 선언을 하셨다. (마13: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듣는 것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아를 오랫동안 기다렸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놀라운 메시지가 선포됨을 보았다. 그들 앞에서 말씀하시는 분의 목소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의 목소리였다. 그들은 얼마나 놀라웠고, 감격했을까요?

  제자들은 자기들 앞에 계신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보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친히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셨다. 목숨이 다 하도록 사모했던 메시아를 만난 후에, 그때부터 새로운 언약의 시대는 열리게 되었다.

  이처럼 시간과 공간 속에 찾아오신, 예수님에 관한 정확한 지식을 소유하고, 그리스도를 믿으며 살아가는 신약 시대의 성도들은, 구약 시대의 성도들보다 더 많은 특권을 받고 있다. 우리는 저들 보다 더 좋은 믿음의 조건을 가지고 있으니, 더욱 분발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자.

2. 신약 시대의 성도들이, 구약 시대의 성도들보다, 더 좋은 특권은 무엇인가?(40上)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1)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구약시대의 성도들보다, 더 확실한 그리스도 관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 절기, 제사법, 가죽옷, 방주, 놋뱀, 도피성처럼, 모형이나 약속 또는 예언을 통해서, 장차 오실 메시아를 희미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역사 속에 찾아오신 예수님에 관한, 확실하고 구체적인 지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성경이 우리에게 그리스도에 관해서 증언하는, 분명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구약 시대의 성도들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희미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고도 그리스도를 믿는 놀라운 삶을 살았다면, 신약 시대의 성도들은, 확실한 그리스도 관을 갖고 있으니, 구약 시대의 성도들보다, 더 아름답고 충성한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어느 시대의 사람들보다, 복이 많은 시대에 살고 있다.

(2) 신약 시대의 성도들은, 구약 시대의 성도들보다, 더 확실한 구원관을 가지고 있다.

물론 구약시대의 성도들도, 오실 메시아를 믿음으로 구원받았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을, 오늘처럼 확실하게 듣고 보지 못했다. 죄를 짊어지고 가실 메시아를 바라고 있었다.

  그 그림자인 속죄양에게, 모든 죄를 다 짊어지게 한 후에, 잡아서 피를 흘리고 하나님께 바쳤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사는 우리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가신 예수님을, 분명히 소유하고 있다. 구약시대의 그들보다, 확실한 구원에 대한 계시를 받았다.

(3) 신약 시대의 성도들은, 성령님께서 내주 하신다.

성령님께서 내주하심은, 구약 성도들이 경험하지 못했던 특권이다. 물론 구약시대의 성도들에게도 성령님께서 임하셨다. 어떤 사람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그들은 하나님이 맡기신 사역을 감당했다.

  그렇지만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신 다음에 떠나가셨다. 그래서 성령님이 함께 하심이 얼마나 좋은지, 성령님을 거두어 가지 마시기를 간구 하였지만, 신약시대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이런 기도를 드릴 필요가 없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실, 성령님을 보내 주셨다.

  성령님은 임의대로 오셨다가, 기분 나쁘면 떠나 가셨다가, 적당한 기회에 다시 오시는 분이 결코 아니다. 성령님은 언제나 우리 안에 내주 하신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항상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시므로,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영광스런 성전이 되었다.

(4) 신약 시대의 성도들은, 구약 시대의 성도들보다, 우주적인 교회관을 가지게 되었다.

구약시대의 성도들은, 택한 백성이라고 하면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했고, 그 밖의 사람은 이방인이요 구원과는 상관없는 사람들로 알았다(엡2:12).

  그러나 신약시대의 교회는, 이스라엘 백성을 중심으로 한 교회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다.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역사는, 팔레스타인 사람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면, 구약시대에도 이방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다.

  이는 구약시대에도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관심을 가지고 계셨음을 말씀해 준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와 관심은 이스라엘 중심이었다.

  그렇지만 신약시대에는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위대한 복음이 선포되어,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족속, 모든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하나님의 영광스런 교회가 되었다.

(5) 구약 시대의 성도보다, 신약 시대의 성도는, 미래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

구약 시대에도 내세에 대한 사상이 있었지만, 다소 희미했다. 구약에도 내세에 대한 증언이 있지만, 신약 성경에서처럼 그렇게 뚜렷하지는 않았다.

  우리가 죽은 후에, 어떻게 부활하는지에 관한 확실한 메시지는, 신약성경을 통해 받았다. 그래서 하늘나라에 대한 뚜렷한 믿음과 소망을 갖게 되었다. 이처럼 말씀을 통하여, 영광스러운 하늘나라의 거룩한 믿음과 소망을 가지게 된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정말 복되다.

  그러므로 구약 시대의 성도들은, 우리보다 불리한 여건 속에서, 아직 오시지 않은 메시아를 고대하며, 하나님을 신뢰하며 놀라운 삶을 살았다고 하면, 이렇게 좋은 여건 속에서 새로운 언약을 받은 우리는 얼마나 더 좋은 믿음의 간증을 남기자는 말이다.

3. 우리는 온전함을 이룰 수 있다(40下).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우리”와 “저희”가 서로 대조되고 있는데, 우리는 신약의 성도들이다. 약속을 받은 새로운 언약의 백성들이다.

반면에 저희는 구약의 성도들, 옛 언약의 백성, 아직도 약속을 받지 못한 자들이다.

  우리는 여러 면에서, 저들보다 나은 상황에 있다. 구약의 성도들은, 자신들의 죄 사함을 받기 위해 매번 짐승을 잡아, 피를 흘려야만 했다. 그러나 신약의 성도들, 새 언약의 백성들인 우리들은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단번에,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한 속죄 제물로 드리셨기 때문이다.

  (히10:11-12)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히10:18)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우리 죄를 깨끗하게 씻어 주셨기 때문이다. 구약 성도들은 약속을 받지 못했다. 그들은 오실 메시아를 멀리서 바라보면서도, 믿음을 지켰다. 말하자면 그들은 메시아에 관하여, 눈으로 보는 증거로 얻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구약의 성도들이 바라는 메시아를, 실상으로 얻었다. 구약의 사람들은, 그 약속을 보지 못했지만, 우리는 그 약속의 증거로 얻었다. 하나님의 언약은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이루어졌다. 성경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다.

  구약시대에는 도저히 허락되지 않았던 언약이, 신약시대에 이루어졌다. 이것이 더 좋은 하나님의 계획의 성취였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행하셨다. 죄인 된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속죄양으로 내어 주기까지, 이행하시고 성취시키셨다.

  말하자면 구약 성도들의 믿음이, 우리들에게 와서 온전하게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은, 그들의 믿음보다도 훨씬 더 좋아야 한다. 성경은 신구약 66권으로, 이미 완성되었다. 우리는 여기에 더할 수도 없고, 뺄 수도 없다. 온전한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런데 하늘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계속해서 기록되기를 바라는 성경이 두 곳이 있다.

(1) 사도행전이다.

사도들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에 의해서 복음이 전파되어, 하나님의 나라가 점차로 확장되어 나가는 내용을 기록한 성경이 바로 사도행전이다. 이 역사는 우리를 통해서 계속되어야 한다.

(2) 히브리서 11장이다.

“믿음으로 아벨은, 믿음으로 에녹은, 믿음으로 노아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모세는…”
이와 같이 “믿음으로 누구는”하면서, 우리 모두도 믿음의 행진을 계속해야 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성경의 기록이 끝났으니, 성경에 기록될 일은 없고, 나 같은 사람의 삶을 누가 기록하여 기억하겠는가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하늘나라에는 지금도, 우리 평생의 생활과, 언어와 생각까지 모두 다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 장을 기록하기에 앞서 (히10:37-38)에 “잠시 잠간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기록하였다.

  우리가 믿음에서 후퇴할 때,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살다보면, 시련을 겪을 때가 있다. 무거운 십자가를 져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의 믿음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에 대한 믿음만 있으면, 우리는 얼마든지 시련을 이겨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기뻐하신다. 따라서 우리 믿음이 더욱 돈독해짐으로, 믿음의 행진을 날마다 계속하시기 바란다. 믿음의 역사를 체험하면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믿음으로 우리가 바라는 것을 실상으로,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증거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

  결론이다.

  16C 영국을 다스렸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인품과 덕망이 깊은 여왕이었다.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여왕이었다. 그러나 그의 집권 초기에는 내란이 있어서, 다소 어려움이 겪기도 했다. 그때 되어진 일이었다. 한 여자 자객이 경비병처럼, 남장으로 변장을 하고, 몰래 왕궁 속으로 잠입했다.

  여왕을 암살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사전에 발각되어, 그 자객은 여왕을 암살하지 못하고, 체포를 당하고 말았다. 여왕은 직접 그 여자 자객을 심문했다. “너는 왜 나를 죽이려고 했느냐?” 이 자객은 이미 여왕의 깊은 인품에 감화를 받고 난 뒤였다. 자기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있을 때였다.

  그는 이렇게 대답을 했다. “제가 못된 사람의 꾀임에 빠져서, 엄청난 실수를 저지를 뻔했습니다. 그러나 여왕 폐하의 자비로운 은총에 따라서, 저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왕이 그에게 물었다. “내가 너의 말대로 너를 살려준다면, 너는 그 대가로 무엇을 하겠느냐?”

  그러자 그 여자 자객은, 뜻밖에도 담담한 어조를 이렇게 대답을 했다. “폐하, 조건이 있는 은총은 참된 은총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여왕은 사려 깊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깊이 생각한 끝에, 여왕은 그 여자 자객을 석방시켰다. 그의 말대로 아무 조건 없이 석방했다.

  뒤에 그 여자 자객은, 스스로 여왕의 몸종이 되었다. 그 여종만큼 신실하게 헌신하며, 여왕을 잘 섬긴 사람은 없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총을 무조건적으로 받은 사람들이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약속을 받았다. 우리에게는 임마누엘의 예수님이, 언제나 함께 하신다. 우리에게는 보혜사 성령님도 계신다. 우리에게는 완성된 성경도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새 하늘과 새 땅, 찬란한 새 예루살렘을 바라보면서 살아가고 있다.

  구약의 성도들은 약속을 받지 못하였지만, 핍박과 환난 속에도 믿음을 굳세게 지켰다. 그렇다면 이미 약속을 받은 우리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총을 무조건적으로 받은 우리들은, 당연히 그들보다 더 나은 신앙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믿음 위에 굳게 서서, 믿음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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