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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그리스도의 마음 (빌 2: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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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마음을 헤아리는 자식은 효자입니다. 생김새나 걸음걸이, 습관이나 직업 같은 것을 닮지 않아도, 그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이 귀합니다.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는 자녀란, 곧 부모의 마음을 닮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닮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처럼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모두 다 죄인인데, 누가 감히 예수님의 마음을 가졌겠습니까?

오늘 예수님은 어떤 생각을 하실까?
예수님께서는 오늘 나의 삶을 보시고 무슨 말씀을 하실까?
예수님이라면, 우리 주님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실까?
늘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사람, 그 사람이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사람입니다.

성경은 모두 “예수님에 대한 질문과 그 대답”을 품고 있습니다.
그것을 염두에 두고 성경을 읽노라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합니다.
날마다 예수님과의 대화의 시간입니다.

오늘 주신 본문을 중심으로 질문을 구성해 봅니다.
1.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2.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첫 번째는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의 신비입니다.
      성육신이란, 하나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사건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입니다. 
둘째는 십자가(十字架)의 신비입니다.
      성육신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신 사건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사순절 한 가운데 있는 우리가 마음에 품고 기도하면서 품어야 할 질문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을까?
      왜 그분은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셨나?
      왜 주님께서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으며, 승천하셨나?
      왜 주님께서는 다시 오신다는 약속을 주셨을까?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우리에게 주실 은혜는 무엇일까?
      오늘 나는 예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마땅할까?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때가 바로 사순절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 40일만이 아니라, 일평생 우리는 이 문제를 품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40일”은 일생 전체를 포함하는 기간입니다.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이 오늘 설교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립니다.

주님께서는
      1.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2. 죄에서 사함 받고, 구원 받기를 원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1. 죄 씻음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2. 이 세상을 참 자유한 사람으로 살면서, 복음을 전파하기 원하십니다.
      3.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고, 마귀의 시험에서 승리하기를 원하십니다.
      4. 천국 소망을 품고, 끝내 천국에 들어가기를 원하십니다.

말하자면,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내가 다시 올 때 준비된 사람으로 살다가, 나와 함께 천국에 가자!”
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이 세상의 덫에 걸려, 이 세상의 쾌락에 취하여, 주님 나라 사모하는 법을 잊어버리고 살아가, 그 날이 “도적”처럼 임할 때,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 어리석음을 당하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궁금한 점이 많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더 알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알아 가면 갈수록 우리 삶의 신비가 벗겨집니다.
      예수님을 알면 우리 자신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읽습니다.
      우리 뿐 아니라, 지나간 세월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만나 뵙는 은혜와      기쁨을 사모하며 성경을 읽었습니다.

어제 새벽예배 때 우리는 히브리서 4장 1-16절을 묵상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모습을 읽었습니다.

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Therefore, since the promise of entering his rest still stands, let us be careful that none of you be found to have fallen short of it.

2.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For we also have had the gospel preached to us, just as they did; but the message they heard was of no value to them, because those who heard did not combine it with faith.

3.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
Now we who have believed enter that rest, just as God has said, "So I declared on oath in my anger, 'They shall never enter my rest.'" And yet his work has been finished since the creation of the world.

4. 제 칠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 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For somewhere he has spoken about the seventh day in these words: "And on the seventh day God rested from all his work."

5. 또 다시 거기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And again in the passage above he says, "They shall never enter my rest."

6.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It still remains that some will enter that rest, and those who formerly had the gospel preached to them did not go in, because of their disobedience.

7.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
Therefore God again set a certain day, calling it Today, when a long time later he spoke through David, as was said before: "Today, if you hear his voice, do not harden your hearts."


8.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For if Joshua had given them rest, God would not have spoken later about another day.

9.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There remains, then, a Sabbath-rest for the people of God;

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for anyone who enters God's rest also rests from his own work, just as God did from his.

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Let us, therefore, make every effort to enter that rest, so that no one will fall by following their example of disobedience.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For the word of God is living and active. Sharper than any double-edged sword, it penetrates even to dividing soul and spirit, joints and marrow; it judges the thoughts and attitudes of the heart.

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Nothing in all creation is hidden from God's sight Everything is uncovered and laid bare before the eyes of him to whom we must give account.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Therefore, since we have a great high priest who has gone through the heavens, Jesus the Son of God, let us hold firmly to the faith we profess.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For we do not have a high priest who is unable to sympathize with our weaknesses, but we have one who has been tempted in every way, just as we are--yet was without sin.

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Let us then approach the throne of grace with confidence, so that we may receive mercy and find grace to help us in our time of need.


거룩함으로써 이 세상에서 우리를 지켜내야 합니다.
그런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은 두려움입니다.

사도바울은 바로 그런 두려움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No, I beat my body and make it my slave so that after I have preached to others, I myself will not be disqualified for the prize.
고전 9:27

3월 22일자 <오늘의 양식>은 인도의 의료 선교사 폴 브랜드(Paul Brand)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문둥병자들을 치료하는 데 특별한 사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말초신경에 통증을 느끼지 못하여, 손가락에 상처가 나도 상처를 방치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상처는 쉽게 감염되고 기형이 되었습니다.

불이나 날카로운 물질에 닿으면 경고음을 내는 기계를 고안했습니다. 환자가 통증을 못 느끼더라도, 부상을 당할 가능성이 있으면 기계가 소리를 냈습니다. 손가락과 발가락에 부착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농구를 할 때는 풀어놓았습니다. 그래서 농구장에서 부상을 많이 입었습니다.

우리의 신체에 대한 육체적인 고통과 마찬가지로, 정신적, 영적인 고통에 대해서도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모든 종류의 “고난”을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통증 경보기”입니다. 고난을 통해 지금 우리가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중단하라는 “STOP” 표시다.
      2. 인생의 우선순위를 재조정하라는 명령이다.
      3.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분명한 것은, 말씀에 사로잡힐 때, 인생의 고난은 모두 피해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말씀을 실천하는 한, 우리 인생은 “쾌속행진”입니다. 문제는 말씀이 없을 때입니다.

“안식”에 들어가는 문제는 히브리서 4장의 주제입니다.
그 안식에 들어가는 문제를 결론짓는 대목이 12-13절입니다.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For the word of God is living and active. Sharper than any double-edged sword, it penetrates even to dividing soul and spirit, joints and marrow; it judges the thoughts and attitudes of the heart.

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Nothing in all creation is hidden from God's sight Everything is uncovered and laid bare before the eyes of him to whom we must give account.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우리는 아무것도 감출 수가 없습니다.
벌거벗은 것 같은 부끄러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회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은혜의 샘이 바로 거기서 터져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세상에 노예가 되지 않고, 세상의 시험을 이기고, 천국에 들어가게 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물질의 세상입니다.
실망도 절망도, 모두 물질에서 납니다.
돈이 있는데도 지금 배우자와 같이 살겠느냐? 절반이 “다시 생각해 보겠다”고 한다지요, 아마? 물질만 의지하기로 하면, 세상에 아무것도 믿을 것이 없습니다. 사람도 변합니다. 돈 없을 때 겸손하던 사람이 돈과 함께 교만해집니다. 돈 없을 때 깨끗하고 양심적이던 사람이 돈과 함께 더럽고 추하게 변합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모든 신들은 물질신입니다.

      바알과 아세라
      다곤
      아스다롯

이들을 모두 하나로 묶으면 “물질”입니다. 그래서 신약에서는 한 가지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으로 “물질”을 놓은 것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No one can serve two masters. Either he will hate the one and love the other, or he will be devoted to the one and despise the other. You cannot serve both God and Money.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Therefore I tell you, do not worry about your life, what you will eat or drink; or about your body, what you will wear. Is not life more important than food, and the body more important than clothes?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Look at the birds of the air; they do not sow or reap or store away in barns, and yet your heavenly Father feeds them. Are you not much more valuable than they?
마 6:24-26


이 세상에 살면서 물질에 노예가 되면 안 됩니다.
      1. 물질이 부족하면.
          무엇을 먹을까?      먹을 것이 없어서.
          무엇을 입을까?      입을 것이 없어서.

물질이 부족하면, 이렇게 물질에 마음을 빼앗기고 마는 것입니다.

      2. 물질이 풍성하면
          무엇을 먹을까?      먹을 것이 너무 많아서
          무엇을 입을까?      입을 것이 너무 많아서

물질이 풍부해도, 물질에 마음이 빼앗기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잠언은 이런 기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내가 두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Two things I ask of you, O LORD; do not refuse me before I die: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Keep falsehood and lies far from me; give me neither poverty nor riches, but give me only my daily bread.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Otherwise, I may have too much and disown you and say, 'Who is the LORD?' Or I may become poor and steal, and so dishonor the name of my God.
잠언 30:7-9

이 세상은 살만한 곳입니까?
그래서 천국을 가기는 가되, 조금이라도 늦게 가고 싶습니까?
그렇다는 생각은 누가 준 것입니까?
마귀의 생각입니다.

하루를 살면 하루만큼 죄를 짓습니다.
그러므로 “주여, 하루속히 천국으로 인도하소서!” 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의 시험과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 시민권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가야, 세상에 정 두고 마음 두었다가, 거기서 실망하고 낙담하지 않습니다. 또, 세상에 취해서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살게 되지를 않습니다.

톨스토이 <인생 우화> 중에 '구덩이 빠진 사람'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사자에게 쫓겨 도망치다가 구덩이 빠졌습니다.
다행히 칡넝쿨에 걸렸습니다. 아래는 커다란 구렁이가 입을 벌리고 있습니다. 위에는 사자가 안 가고 지키고 있습니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습니다. 고민이었습니다.

그런데 벌이 꿀을 쳐 놓았습니다. 손가락으로 따 먹는 재미가 생겼습니다. 탐닉했습니다. 자기의 문제를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위에서 두 마리의 쥐가 교대로 칡넝쿨을 쏠아먹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한 마리는 하얀 쥐, 다른 것은 검은 쥐였습니다.
흰 쥐는 낮을, 검은 쥐는 밤을 말합니다. 그래서 밤과 낮이 가면서 칡넝쿨이 끊어질 때가 가까워오고 있는 것입니다.

흰 쥐는 또 ‘기쁨’을, 검은 쥐는 ‘슬픔’을 말하기도 합니다. 기쁨과 슬픔 중에 이 세상이 가는 것입니다.

벌꿀은 “이 세상의 쾌락”입니다. 거기 취하면 “현실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사람이 현실을 직시해야 기도하고, 말씀 읽고, 은혜를 사모할 텐데, 현실을 잊어버리니, 하나님 나라 생각은 없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다가, 그냥 땅에 묻히고 말면 그뿐이 아닙니다.
영원한 세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천국이냐, 지옥이냐, 갈림길에 설 것입니다.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안식에 들어가지 못할까, 걱정하고 두려워해야 합니다.

천지창조 때  제7일에 안식하셨습니다.
이것을 확대하면 제7일은 곧 “천년왕국”입니다.
구약 4000년, 신약 2000년으로 계산던 사람들이 2000년도에 들어서서 곧 “천년왕국”이 올 것이라고 야단했었습니다. 예수님 탄생의 연도가 6년 정도 앞당겨졌다고 해서, 1994년을 종말의 해라고 계산하기도 했습니다. 다 부질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세대주의적으로 계산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주님 오실 날은 아버지만 아시는 날입니다.

그렇기는 해도, 주님께서 곧 오실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이 세상의 삶은 ‘분리’와 ‘채움’의 삶입니다.
분리에서 성도는 거룩함에 이르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채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이 있어야 합니다.
은혜와 사랑의 삶입니다.

이렇게 해서 “제7일 안식일”이 “영원한 안식의 나라”의 그림자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질의 노예가 되어, 이 세상에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자고 경제활동을 합니다.
우리는 천국 가자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천국은 “안식의 나라”입니다.

이 세상은 쉼이 없습니다.
피곤하기가 그지없습니다.
누울 때도 일어날 걱정을 해야 합니다. 불을 끌 때도 켤 때를 생각해야 합니다.
세상에 이렇게 복잡한 것을, 그래도 세상이 좋습니까?

이 세상에 남달리 평안하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가라앉은 물처럼, 한번 휘저으면 온갖 더러운 것이 다 올라오는 현상과 같습니다. 그만큼 잊어버리고 사니까 그렇지, 실제로는 얽히고 설킨 문제들로 가득합니다.

잔치 집에 가면, 모두 즐거움에 사로잡힙니다. 그런데 가만 보면 이런 일도 생깁니다.
구석에서 전을 부치던 아낙네들끼리 말로 싸웁니다.

      그때 순이 엄마가 그랬잖아. 나 정말 섭섭했어.
      아니,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 이렇게 좋은 날 이게 다 뭐야?

우습지요? 생각 안 하니까 모르지, 이 세상은 쉼이 없습니다.
영원한 안식의 나라로 가야 합니다.

      아침에는 예수로 눈을 뜨게 하시고
      저녁에는 예수로 잠을 자게 하시네.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주님 주님 오시마고 가신 내 주님
      오늘까지 안 오심은 어찜인가요?

이런 소망은 40년대 일제와 50년대 한국동란 때를 살던 분들의 소망만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소망입니다.  그래야 합니다.
그래야 오늘 물질주의적인 절망과 쾌락과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나는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천국소망”을 품고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세상에 속한 자로 사는 것이 아니라, 천국의 시민으로 사는 것입니다.
고리타분한 신앙이라고, 새 시대에 걸맞지 않은 신앙이라고 반박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은 변해도, 믿음은 변치 않는 것입니다.

천국을 생각하면, 우리는 ‘죄를 용서받아야’ 함을 알게 됩니다.
이 죄를 그대로 품고는 천국에 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이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는 사순절에 있습니다.
다음 주일에 종려주일을 맞습니다.
부활주일까지 꼭 두 주일 남았습니다.
어떻게 보내야하겠습니까?
두려움입니다.

사도 바울은 두려움 속에 지냈습니다.
베드로도 그랬습니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Since you call on a Father who judges each man's work impartially, live your lives as strangers here in reverent fear.
벧전 1:17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Dear friends, I urge you, as aliens and strangers in the world, to abstain from sinful desires, which war against your soul.
벧전 2:11

나그네와 행인 같은 사람은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한없이 이렇게 살아가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목적지가 있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기차를 타고 갑니다.
차 안에서 “왜 가는가?”를 생각하고, 내려서 만날 사람을 준비해야 합니다.
      사업이라면, 구상을 해야 합니다.     
      결혼 허락을 맡으러 가는 길이라면, 예상문제를 놓고 연구해야 합니다.
도박판을 벌여놓고, 거기서 싸움하면서 시간 다 보내고 났을 때, “부산역 곧 정차합니다!” 라는 차내 방송을 듣게 될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머리는 다 헝크러졌고, 와이셔츠는 구겨지고 이런저런 음식물이 묻었습니다.

우리는 천국으로 향하는 열차에 탑승해 있습니다.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무슨 생각을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를 영원한 안식으로 초대해 주신 예수님 생각을 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고, 기도로써 묵상하는 여행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나그네입니다.
      나그네에게 요구되는 자세는 “두려움”입니다.
      성령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거룩함을 ‘지키는’ 자세가 두려움입니다.

천국을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를 이겨야 합니다.
천국을 바라보는 사람은 세상을 이겨야 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영적인 싸움입니다. 여기서 승리해야 합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영원한 안식”을 꿈꾸시고, 기도 중에 확증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사랑하는 주님.
저희들의 소망을 천국에 두게 하시옵소서.
거룩함의 행실로 날마다 새롭게 하옵소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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