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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진리가 당신을 자유케 할 것입니다 (요 8:3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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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꿈이 있을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제게도 꿈이 있다면 자유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고의 자유, 그것으로 인한 생활로부터의 자유, 다른 사람의 평가나 비난이나 칭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음, 행동의 자유가 보장될 만한 스스로의 절제력 등이 그것일 것입니다.
아직도 깨달아가고 있는 미완의 상태에 있지만 그래도 이전보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주변사람들, 그리고 삶의 모든 소유물 중에는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어주는 속성이 있는 것 중에 동시에 우리를 구속하는 이중적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을 봅니다.
쉽게 표현하면 이런 것입니다.
자동차는 우리들에게 매우 편리합니다. 먼 곳을 갈수 있게 하고 긴 시간을 줄여서 짧은 시간으로 만들어주어 먼 거리의 개념을 우리들에게 가깝게 만들어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사고의 반경이 넓어지게 하는 겁니다. 그러나 자동차는 이러한 편리함이 있을 뿐 아니라 교통사고라든지, 혹은 또 우리는 자동차를 가지고 가면 반드시 회수해 가지고 와야 하는 애씀이 있어야 합니다. 또 자동차를 사용하던 사람이 자동차가 없다고 생각하면 무척 마음에 허전함을 느끼게도 됩니다.

이것처럼 우리는 어떤 좋은 점이 있으면 거기에 대한 반대적인 개념이 있음을 봅니다.
텔레비전도 아주 유익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여러 가지 지식과 정보를 수집을 할 수 있게 되고 우리가 가보지 못한 여러 나라의 풍물과 풍습들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도 주어집니다. 하지만 텔레비젼을 자꾸 보다보면 그 텔레비전에 종속될 수도 있고, 그릇된 정보와 지식을 통하여 우리들이 왜곡된 지식과 사고를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돈도 마찬가지입니다. 돈 때문에 자유로움도 얻을 수 있고 남에게 무시당하지 않을 수도 있고 부당한 억압을 받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돈으로 말미암아 시간과 공간적인 자유를 확보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돈 때문에 우리가 얽매이게 될 수도 있습니다.
돈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고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고 그것 때문에 없으니 마음에 허전해하는 것들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어떤 한 가지를 주는 것은 반대로 어떤 어려움을 한 가지 주기도 합니다.

또 세상에서 우리에게 어떤 자유를 준다는 것은 완전하지 못하고 반드시 어떤 한계가 있음을 봅니다. 우리의 육신적인 것을 채워줄 수 있고 심리적인 것까지 채워줄 수 있지만 때로는 우리의 정신적인 것, 영적인면은 전혀 채워주지 못함을 봅니다.
우리 인간들은 이제까지 지긋지긋한 죄의 문제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지긋지긋한 죄와 고통의 문제로 말미암아 번민하였지만 세상의 어떤 것도 우리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는 배가 고파 죽은 것도 아니고, 추워서 죽은 것도 아니고, 그들은 더워서 죽은 것도 아니고, 하나님과 영적으로 분리됨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잃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에게는 하나님과 함께 함이 영원한 생명 ‘영생’이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에는 세상의 모든 부산물을 가지고 해결할 수 없는 영혼의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묻습니다.
“아니 우리는 종노릇하지 않고 남에게 노예로 있지 않은데 무슨 자유를 얻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우리는 이미 자유롭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죄를 짓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즉 이 말은 뭐냐 하면 ‘너희가 진리 즉 예수그리스도를 알게 되면, 예수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더 이상 죄에 종노릇 하지 않고 즉 죄를 짓지 않고도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진리 즉 예수가 너희가 죄를 짓지 않고 살아도 될 자유를 허락하여 준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성도님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마음에 평안함이 있고, 깨끗함이 있고, 자유함이 있습니까? 죄짓지 않고 살아도 될 능력과 자유함이 계십니까?
아니면 죄의 속박과 여러 가지 죄책감으로 인하여 고통당하고 있습니까?
오늘 주님께서는 진리를 알지니 즉 예수그리스도를 알지니 그 진리 예수가 우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이와 같은 내용을 조금 더 살펴보기로 합니다.

첫 번째 ‘진정한 자유의 상태는 어떤 상태인가’ 하는 것입니다.
자유라는 것은 내가 어떤 것을 선택할 수도 있고,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는 선택의 자유입니다.
즉 내가 무조건 일을 해야 한다. 그건 자유가 아닙니다.
내가 일을 해서는 안 된다. 그것도 자유가 아닙니다.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것이 자유입니다.
마약 중독자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마약을 복용하지 않으면 그는 편안함이 없기 때문에 꼭 마약을 복용해야 되니까 종속되어 있어 부자유한 사람입니다.
알콜 중독도 마찬가지입니다. 알콜에 종속되어져 있는 겁니다.
정욕에 심취되어있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안 그러고 싶은데 자꾸 육신에 정욕이 생기면 그것을 이기지 못하니까 어려운 겁니다.
습관적인 허영과 공명심, 그리고 자유롭지 못한 자기 자신의 인기와 자랑에 얽매여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이러지 말아야 하는데 하고 생각하지만 늘 그것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마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그런 사람이 없겠지만 화투에 매여 있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언젠가 사람 사는 모습을 보니까 교제라는 것이 이상하더군요.
“안녕하세요?”하고 인사하더니 화투치고 “안녕히 가세요.”하고 인사하더라고요. 이 사람들은 화투가 없으면 교제가 안 되나 봅니다. 그것은 화투에 종속된 사람이겠지요.
이처럼 우리의 삶에는 무엇인가 종속된 것, 그것을 하지 않을 수도 있고 할 수도 있는 자유로움이 없는 상태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유라는 것은 조금 더 나가면 보다 더 공익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내가 손을 뻗을 수도 있고 접을 수도 있는데 내가 뻗을 수 있는 것이 남에게 피해를 준다면 그것은 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현재 우리가 무지하여 깨달아 느끼지 못하는 억압된 것으로부터 그릇된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야 진정한 자유의 상태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즉 예수 안에 자유를 얻으리라고 말씀했는데 사람들은 자기가 종노릇 하고 있다는 것도 몰랐어요.
우리는 자유로운 사람인데 뭐 자유라고 얘기합니까? 원래 자유로운 사람인데.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노릇한다. 즉 너희가 죄의 종노릇하는 것, 죄를 범하면 너희는 자유롭지 못하니 진리 안에서, 예수 안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그 자유를 누리라는 말입니다.
원래 우리는 죄 짓지 않고 자유롭게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을 세상에 창조하실 때 ‘의로움’과 ‘진리’와 ‘거룩’이라는 것을 가지고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고 즉 죄를 범하므로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되는 영적생명을 이르는 죽음의 상태에 이르러서부터는 사람들은 이와 같은 자유를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삶에 있어서 언제나 죄에 종속되어 있어요. 내가 죄 짓지 않으려고 하는데 나도 모르게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오염되어져 있고 우리의 모든 삶의 분위기가 죄로 말미암아 흔들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자유의 상태라는 것은 바로 그런 흔들리는 죄의 상태-죄로 오염된 상태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은혜의 상태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예수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어서 우리의 죄를 송두리째 감당해서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고 그가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자유의 상태라는 것은 우리의 그릇된 상태를 깨닫고 어떻게 해서든지 그것을 떨쳐버림으로 온전한 기쁨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유를 요약하면 죄 안 지어도 되는 자유라는 말입니다.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어야 되는 사람, 죄를 안 지을 능력이 없는 사람-이런 사람은 죄를 안 지을 능력이 있으려면 바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의 모든 전반을 다시 개선해야 한다는 겁니다.

언젠가 기사를 보니까 남의 주머니에서 지갑을 훔치는 훈련을 받은 사람이 있었어요. 이런 생각하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해도 자꾸 남의 주머니만 보면 지갑이 눈에 훤해 보이고 손만 뻗으면 그 지갑이 내 손에 닿을 것 같아요. 그래서 너무 괴로워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무엇인가 하지 않아도 될 자유가 있는데 그것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사단의 머리를 깨뜨리고 그 백성을 죄에서부터 자유를 허락하여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 뭔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고 계십니까?
뭔가 마음에 원치 않는 것을 안 하고 게십니까?

여러분들이 죄 짓지 않는 자유를 누리고 계십니까?
선을 행하고 게십니까?
내가 원하는 것을 뭐든지 할 수 있고 내가 하기 싫고 좋지 않다고 생각하면 그것을 안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자유를 얻으셔야 합니다.
이 자유는 우리 스스로는 얻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본성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힘으로 할 수 없을 때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역사를 이룰 수 있는 사람들이 돼야 합니다.

그럼 두 번째로 '근본적으로 구체적으로 자유로워야 될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자유이지 구속과 속박이 아닙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억지로 이 자리에 나왔다면 그것은 불행한 것입니다. “한번 가주지 뭐.” 이것은 아닙니다. “내가 여덟 번만 나가면 돼.” 이것도 아닙니다.
마음이 기쁘고 즐거워서 주님 앞에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근본적으로 어려운 것은 죄책감입니다. 사람은 뭔가 죄를 지으면 그 마음에 자기도 모르게 죄책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근본적으로 자유롭다는 것은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17절>을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으면 새것이 됩니다. 이전의 모든 것은 지나갔고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우리는 새것이 되었도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예수 믿으십시오, 교회에 나오셔서 예배드리고 예수 믿으십시오.’라고 얘기하면 첫 번째 나오는 얘기가 “나는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데요. 나는 죄를 많이 짓는데요. 정리 좀 하고 나가겠습니다. 내 죄를 좀 씻고 나가겠습니다.” 하는데 그와 같이 얘기하는 것 자체가 바로 죄책감 때문입니다.
내가 한 번 죄를 지으면 죄에 대한 책임이 있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죄책감에 눌리는 것입니다. 사단이 우리를 끌고 다니는 것입니다.
예전에 언더그라운드라는 영화가 있었는데 전쟁 중에 사람들이 지하에 방공호를 파고 살아요. 위에 조그만 맨홀 뚜껑 하나 뚫어놓고 그 뚜껑을 열고 어떤 사람이 밖으로 와서 세상을 보고 내려가서 소식을 전해줍니다. 그런데 가만히 있다가 보니까 결국 그 정보를 독점하고 있는 사람이 권력자가 되는 것입니다.
밖의 전쟁이 끝났어요. 사람들이 매일 물어봅니다.
“전쟁이 끝났습니까? 상황이 어떻습니까?” 그러면 이 사람은 “전쟁이 끝났습니다. 다 위로 올라갑시다.”하고 얘기해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권력을 놓기가 싫었습니다. 그래서 전쟁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합니다. “아직 안 끝났습니다.” 그리고 매일 갔다 와서는 전쟁이 안 끝났다고 얘기하면서 그 사람들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부리고 있는 겁니다. 사단이 이런 겁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육신의 자유, 정서적인 자유, 정신적인 자유, 영적인 자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우리가 자유가 없는 사람처럼 우리를 억누르고 있단 말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예수그리스도를 알지니 예수그리스도가 우리를 자유케 하고, 죄 짓지 않아도 되고, 죄로부터 자유롭고,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울 텐데 우리를 영원히 너는 죄 지은 사람이야. 네가 무슨 교회 나갈 수 있어? 네가 무슨 예수를 믿을 수 있어? 너 과거에 나쁜 일 했는데 너 같은 사람이 무슨 예수 믿고 착하게 되겠다고 얘기해? “ 하며 우리를 끌고 다닙니다.
우리에게 자유가 주어졌는데 자유의 통로를 막아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인생에서 과거에 얼룩진 내 삶이 있어도 한 장 한 장 벽돌을 새롭게 쌓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새로운 역사를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우리들은 습관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죄의 습관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처음엔 인간이 습관을 만들지만 시간이 지나면 습관이 사람들을 끌고 다닙니다.
늘 말하는 사람은 입을 다물지 못해요. 늘 불평하는 사람은 그 불평을 다물지 못해요. 늘 남을 비난하는 사람은 그 비난을 버리지 못해요. 늘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은 늘 감사하지 못하고 살아요.
제가 보니까 행복은 성향인 것 같아요. 행복한 사람은 늘 행복한데,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늘 불행합니다. 여러분 주변의 사람이 늘 여러분들에게 짜증내고 불평하면 거기에 대해 실망하지 마세요. 그 사람은 어디가도 그런 사람입니다.
내가 뭐 부족해서 나한테 짜증내고 그러나보다 하고 생각하지 마세요. ‘저 사람이 원래 그래.’하고 생각하세요.
옆 사람과 한 번 인사해 봅시다. “환자시군요.” 이렇게 생각하라고 얘기했지요. 말하지 말고 속으로 그러라고 했습니다.
환자니까 그렇습니다. 환자는 원래 불평하는 겁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죄의 습관이 우리를 그렇게 나쁜 길로 몰아넣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잘 아는 얘기인데 신라의 김유신장군이라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그 사람이 어느 날 결심을 하고 ‘내가 이제 기방 출입을 하지 말아야 되겠다.’ 그리고 끄덕끄덕 졸았습니다. 그런데 말이 기방 앞에 자기를 또 내려놓았습니다. 자기 의사와는 상관없이 말이 늘 가는 대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칼을 들어 말의 목을 쳤어요. 자기 목을 치지 왜 말의 목을 칩니까? 말이 뭘 잘못했다고. 말은 늘 자기가 하던 대로 가는 거니까 주인이 조니까 아 가는대로 가는구나. 이 사람이 너무 소심해서 자기 목은 못 치고 자기 말의 목이라도 쳐서 결국 내가 이렇게라도 결단해야 하겠다는 얘기겠죠.

여러분 죄의 유혹은 너무나 끈질깁니다.
사도바울이라는 큰 사도가 마음에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내 마음의 육신의 사망의 법이 생명의 성령의 법과 더불어 쟁투한다.”고 얘기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싶은 마음과 인간의 죄악의 욕망을 이루고 싶은 마음이 둘이서 쟁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과 같은 대 사도에게서도 이와 같은 죄악과 하나님의 법이 싸우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 범인들에게 그 마음의 갈등이 얼마나 대단하겠습니까?

사람의 마음은 미세한 차이만 있어도 한 쪽으로 쏠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파도가 아무리 세도 바위는 끄떡없이 그 자리에 버티고 있는 것처럼 바람이 불면 나뭇잎이 흔들리고 가지가 흔들리지만 굳건한 둥지와 그 뿌리는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굳건히 서 있으면 우리는 어떤 어려움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유롭다는 것은 죄로부터 자유롭고,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롭고, 죄의 습관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으면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로워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죄의 책임으로부터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사람이 늘 왠지 모르게 마음에 초조와 불안과 우울이 있는 것은 다 죄책감 때문에 그렇습니다. 왠지 모르게 내 마음이 눌린 것 같다. 라는 것은 죄책감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언제든지 죄에 대한 습관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우리는 죄를 버림으로 자유를 획득하고 그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는 죄를 버림에 대한 두려움과 상실감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사람이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습득해야 하는데 죄를 버린다고 생각하면 사람들은 뭔가 매우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내가 즐거워하던 모든 것, 나를 지켜주던 모든 것이 없어져버리는 것 같아요. 어느 날 여러분들이 툭 털어버리고 훨훨 날을 수 있는데 그것을 버리지를 못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솔직히 생각해 보세요. 죄를 즐기고 계십니까? 어쩌다 죄 짓는 경우도 많지만 죄를 즐기고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니까 버리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선택하는 순간 이전의 것들이 너무 하잘것없이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런 것을 그렇게 붙잡고 있었나?’

우리 어렸을 적에 아주 유치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그것이 전부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정말 더 고소한 것을 배우고 나서는 이전의 것이 너무 유치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보석이 많은데 가면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이죠? 주머니를 비워야 그 속에 가득 담아올 수 있죠. 내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내 속에 있는 더러운 것들을 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죄를 버려야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눈앞에 보이는 현상과 실제는 다릅니다.

여러분 비가 부슬부슬 내려요. 심하게 내리지 않고 부슬부슬 내립니다. 자동차가 60Km로 달리면 그냥 부슬부슬 내리는 비가 느껴질 텐데 한 120Km 정도로 달리면 부슬부슬 내리는 비가 창문에 마치 흩뿌리는 것처럼 강력한 비로 느껴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과 눈에 나타나는 현상과는 좀 다른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실과 현상의 다른 차이를 반드시 인식해야 합니다.
내게 이렇게 느껴진다고 해서 그것이 사실은 아닙니다.

여러분 사실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봐야 합니다. 죄의 실제를 봐야 합니다. 나에게 기쁘고 즐겁고 재미있는 것 같았지만 사실 그것은 우리에게 유익을 끼치지 못했습니다.
죄의 습관, 쾌락의 습관, 우리는 모든 것들-정말 이 세상 모든 것들을 버리면 못살 것 같지만 어느 날 문득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순간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교회 다니면 아무것도 못하잖아요. 주일마다 예배당에 와야 하죠. 우리가 교회에 와서 무엇을 합니까?” 그런데 무엇을 할 수없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더 큰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번 예배드리면 “야 나 한 시간 잘 참았다. 괜찮지” 하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조금 지나면 참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이 그렇게 기쁘고 감사하고 즐거워지는 겁니다.
여러분 운동을 해도 처음에는 숨만 차고 힘만 들어요. 그런데 차차 익숙해지면 숨만 차고 힘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즐겁고 기쁘고 우리들에게 유익이 있음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아픈 부위 있으면 수술하면 그 수술하는 고통이 있고 흉터는 남을지 몰라도 그것으로 말미암아 더 큰 고통 속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자유로울 수 있다면 우리들의 마음에 새로운 기쁨이 임하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천국을 볼 것임이요’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느 날 죄를 버리면 우리 마음이 깨끗해지고 자라는 심령이 되어 주의 은혜를 사모하게 될 때 천국이 우리의 것이 된다하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우리가 누리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은혜의 역사가 있게 됩니다. 제가 좋아하는 구절 가운데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님의 말씀이 마음에 늘 새겨져요. 미국에 가면 이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님의 길이 참 많아요. 여러 주에 가면 거의 많은 주에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로드’라고 길이 있습니다. 그 이름이 너무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이름이 되어 버렸습니다.

미국에 우리가 잘 아는 흑인 민권 지도자입니다. 아깝게도 삼십 몇 세에 세상을 떠난 아주 젊을 때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 목사님이 하신 말씀 중에 자 우리 한 번 따라서 하십시다.
“마침내 자유케 되리라.”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님은 늘 이 말을 외쳤습니다.
불과 삼십 몇 세 때 총탄에 맞아 세상을 떠났지만 요즘에는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님을 기념하여 공휴일도 정해졌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자유케 되지 못하면 영원히 죄에게 종노릇하고 끌려 다니게 됩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 나오신 분들은 참 복된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름다운 세상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누릴 수 있고, 내가 선택해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자유입니까?

여러분 오늘 스스로 선택해서 이 자리에 오셨죠?
“아니에요. 나 억지로 끌려왔어요.”하는 분 있습니까? 사람을 억지로 끌어올 수는 없습니다.
결국 우리 마음이 움직여야 올 수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오라고 했으니 여러분이 그 자리에 응하신 겁니다.
여러분 그 이유는 무엇이죠?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주시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중에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라는 시가 있는데 한 번 읽어 드릴 테니 들어보세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 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이 세상을 ‘아름다운 소풍’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소풍 끝나는 날 하늘나라에 가서 ‘참 세상이 아름다웠다’ 이렇게 얘기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을 그렇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세상 끝나는 날 정말 고통스러운 세상이었습니다. 이렇게 말해야 하겠습니까? 정말 이 세상 끝나는 날 소풍 마치고가서 ‘정말 세상은 아름다웠습니다’ 라고 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을 고통스럽게 살 필요 없습니다. 왜 고통스럽게 사십니까?
우리 기쁜 것, 감사한 것, 하나님 앞에 즐거운 것 누리고 살다가 주님 앞에 갈 때 주님 세상 참 감사했습니다. 어려운 일도 이길 수 있었고, 기쁜 일도 누릴 수 있었고, 그리고 여러 가지 힘든 일도 감당할 수 있게 해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소풍 잘 갔다 왔습니다. 내 나라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하고 하나님 나라에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 자유로우시길 바랍니다.
자유로 기쁨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자유로 하나님의 은혜를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자리에 새로 오신 분이 참 많으시거든요.
여러분들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자유로 주의 능력과 영광을 체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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