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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이 사람을 보라 (요 19: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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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부흥 시기에 화가들의 인물화는 현존해 있는 사람들을 그린 것이 아니고 가장 아름다운 사람을 상상으로 그렸다고 합니다. 그러한 그림들 중에는 유독히 예수님의 초상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 그림 밑에는 라틴어로 『 이 사람을 보라 』는 말을 써놓은 것을 많이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말을 써넣은 그 당시 화가들은 아마 예수님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인간, 인간 중의 인간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중에 빌라도가 예수님을 가리켜 『 이 사람을 보라 』라는 말은 화가들이 말한 것과는 다르게 아주 형편없는 인간을 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빌라도가 내 뱉은 이 한마디는 진리의 일면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한 그것은 놀라운 사람, 너희의 구주, 메시야를 보라는 암시가 있는 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사실 빌라도는 예수가 무죄하다는 것을 자신의 양심이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본문 19장 4절에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다 하더라』고 했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인을 향하여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노라』고 했습니다(요 19:6).

빌라도 총독 아내 역시 예수의 무죄를 증거 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19절에 『…그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라고 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아 주려고 힘썼다고 했습니다(요 19:12). 빌라도는 예수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21-22절에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빌라도가 대답하되 나의 쓸 것을 썼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을 보라'는 말은

Ⅰ. 이 세상 군주에게 고난당하는 예수를 보라는 말입니다.

본문 19장 1절 『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고 했습니다.
그 당시의 채찍은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금수를 부리는 일반적인 채찍이 아니라 가죽 끈 끝에 쇠로 만든 갈고리가 달린 살벌한 모양의 채찍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빌라도에 대해서 두 가지로 생각합니다.
첫째는 빌라도가 이 사람에 대해 제법 심문을 했다는 것을 무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여러 번 노력했는데 그냥 놓아주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심문을 해 보았지만 죄를 찾지 못했다는 것을 유대인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둘째는 이렇게 때리면 유대인들이 동정하지 아니하겠나하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빌라도의 솔직한 의도는 측은지심을 유발해서 예수를 석방하고 싶었습니다.

Ⅱ. 종교 지도자들에게 배신당하는 예수를 보라는 말입니다.

본문 19장 6절에 『 대제사장들과 하속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고 했습니다.
인간들이란 자기와 이해 관계가 없으면 잔인합니다. 사실 사람만큼 잔인한 동물도 이 세상에는 없을 것입니다.
예수에 대해서 당시 로마 황제 디베료 가이사에게 보낸 빌라도 보고서가 있습니다.

「로마의 황제 '디베료 가이사'각하에게 문안드립니다. 내가 다스리는 이 갈릴리 지역에 30대 가량의 젊은 사람이 있는데 그렇게도 마음을 잡아끄는 평온한 사람은 본 일이 결코 없습니다. 저는 총독청에서 글을 써 보내 예수를 한번 만날 것을 요청했습니다. 얼마가 지나서 총독청에 예수라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 제 다리는 쇳덩이로 붙잡아 매어 놓은 듯이 꼼짝할 수 없었으며 나사렛 젊은이는 혼자 있는데도 마치 나는 형사범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나는 말문을 열었습니다. "나사렛 예수여 지난 3년 동안 나는 그대에게 말할 수 없는 자유를 허락하였소.

그러나 나는 이 일에 대하여는 조금도 유감이 없소. 당신은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을 읽어보았는지 모르지만 내가 알기에는 그대의 설교는 단순하고도 장엄한 것 같소. 그러나 그대의 설교는 지금 민중에 대한 한계를 느끼고 있소.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대의 설교가 강력하고도 원한 깊은 적대자를 만들고 있음을 알려드려야 하오. 내가 그대에게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부탁하는 것이요. 그대가 회당에서 설교할 때 좀 온화한 말로 하시오. 다른 철학자들처럼 말이요. 그리고 청중들과 대적자들을 생각해서 하시오." 그러나 예수는 관심 없다는 듯이 근엄하고 엄숙한 미소를 띄우면서 "때가 이르면 그때는 땅 위나 땅 아래 어느 곳에도 인자를 위한 도피처는 없을 것입니다." 이에 도피처는 저기에 있다면서 하늘을 손으로 가리켰습니다.

디베료 가이사 황제 각하!
본 총독은 그에게 명령했습니다. "당신은 설교할 때 좀 온화한 태도를 취하도록 하시오. 그대의 설교에 저항을 느끼는 무리들을 생각하시오. 당신은 현인이요. 부탁하오. 잘 가시오."
"땅의 군주여! 나는 이 땅에 전쟁과 질서를 파괴하러 온 것이 아니라 평화와 자비를 주러왔오."하고 투명한 영혼처럼 접견실 휘장 뒤로 사라져 갔습니다.」

라고 예수에 대해 '가이사 황제에게 보내는 보고서'에 기록했다고 했습니다.

Ⅲ. 유대인들에게 배신 당하는 예수를 보라 는 말입니다.

본문 19장 12절에 『 …유대인들이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라고 했습니다.
빌라도는 무리들을 향하여 "유대인의 왕을 십자가에 못박으랴"고 물었습니다.
빌라도는 내심 동족심에 호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는 왕이 없다고 소리쳤습니다(요 19:15).
종교 지도자인 서기관과 바리새인 대제사장들은 표면적으로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 죄를 다스린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자기들의 이익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에 예수를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군자는 의리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라는 말이 있습니다. 불씨를 미리 없애보자는 것이 이들의 속셈이었습니다. 예수가 자기들을 향하여 회칠한 무덤(마 23:27), 평토장한 무덤(눅 11:44)이라고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아주 경건한 사람들입니다.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간음도 하지 아니할뿐더러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는 자들입니다.
누가복음 18장 12절에 보면 『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에 '모든'이라는 말이 번역에 빠져있습니다. 원어에는 '모든'이란 말이 매우 강조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채소 한포기까지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이들은 철저하게 사는 것 때문에 교만해졌습니다. 교만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붙어 다니는 암세포와도 같은 것입니다.
그들의 금식일은 월요일과 목요일입니다. 이날은 예루살렘의 장날입니다. 금식하는 이들의 중심의 솔직한 의도는 누가 좀 봐주는 것입니다.

감사의 기도는 제일 좋은 기도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감사는 자기의 자랑이요, 자기 축하였습니다. 자기의 자랑을 실컷 해 놓은 끝에다가 감사를 갖다 붙이는 첨가물에 지나지 아니하는 감사였습니다.
이들은 종교를 이용해서 큰돈을 벌고 있는데 이것을 예수님이 공격하니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5절에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고 했습니다.
군중들은 이런 종교 지도자들을 따라 다니는 사람들인데 이들이 던져주는 몇 푼의 돈을 받아먹고 사는 저급한 인간들입니다.

Ⅳ. 하나님의 어린 양의 최후를 보라는 말입니다.

본문 19장 15-16절에 『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히게 저희에게 넘겨주니라 』고 했습니다.
빌라도와 함께 한 군인들은 예수님과 아무 이해관계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술 더 떠서 예수님을 때리고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욕을 했습니다. 비겁한 인간들입니다. 예수님을 마음대로해도 아무도 도울 사람이 없는 줄 알고 약자에게 횡포를 부리는 쓰레기 같은 인간들입니다. 특히 안나스의 종 같은 인간이 그렇습니다.

당시 총독이었던 빌라도는 예수님을 석방시키려고 노력했던 사람인 것은 분명합니다. 무리들이 빌라도를 향하여 '이 사람을 놓아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요'라고 외쳤을 때 그만 그는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마태복음 26장 24절에 『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대로 끌려가는 과정에서 여러 유형의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나름대로의 본성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되어 가는 과정에 악한 일을 하는 자는 벌을 받고 선한 일을 하는 자는 상을 받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일에 동참하는 그 자체가 복이 됩니다. 주님의 일이 전개되는 과정에 내가 동참하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도태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세계에서는 하나님이 선한 일을 쟁취하고자 하는 싸움이 치열합니다.

1) 하나님의 어린 양의 최후는 기도로 시작되었습니다.

요한복음 17장 1절에 『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라고 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사명 수행을 위한 기도입니다. 예수의 사명은 십자가에 순순히 못 박혀 죽는 것입니다. 그가 못 박혀 죽는 것이 그의 보람이요 만족입니다. 십자가는 곧 예수의 영광입니다.
요한복음 12장 23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를 앞에 둔 예수님의 기도는 요한복음 17장 전체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의 것과는 구별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이 받을 장차의 고난을 이미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픔을 초월한다든지 고통을 초월하는 못 박힘이 아니라 우리 인간과 똑같은 성정을 가지고 고통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에 『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고통은 인간의 고통과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사명 때문에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은 거룩한 행실 즉 구별된 행실이요, 주님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교회운동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사명은 십자가에 죽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명은 주 오실 날을 사모하면서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수고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어떠한 기도이셨습니까?

(1) 간절한 기도입니다
마태복음 26장 37절에 『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38절에 『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5장 7절에 『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44절에 『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 』고 했습니다.
(2) 마침내 승리하는 기도입니다
마태복음 26장 39절에 『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라고 했습니다. 고통을 안 당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달라는 요구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 기도가 중요합니다. 계속해서 『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은 자기의 고통을 극복하고 아버지의 뜻을 더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승리의 기도입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원하는 것을 확실히 해놓고서 기도합니다. 우리가 결심해 놓은 것은 하나님도 깰 수 없고 하나님은 심부름꾼으로 생각하는 기도를 드릴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부자가 된다는 것, 우리가 출세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일로 생각하고 기도할 때가 많습니다. 마치 우리는 입법부가 되고 하나님은 행정부가 되는 기도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여기에 우리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은 인본주의나 자연주의 종교가 아니고 신본주의 신앙입니다. 사람이 하는 일을 하나님이 조금 도와주는 신앙이 아니고 자연적으로 진리를 구하는 종교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뜻이 사람에게 나타나는 타율(他律)종교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유익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제목이 절대가 되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자기에게 나타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잠언 19장 21절에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고 했습니다.

(3) 확신에 찬 기도입니다.
마태복음 26장 46절에 예수님은 확신에 찬 소리로 『 일어나라 함께 가자 』라고 했습니다. 고통을 극복하고 이길 준비가 된 확신의 기도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확신에 넘치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어린 양의 최후는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30절에 『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고 했습니다.
당시 공관복음에 나타난 유대인들의 시간은 지금과 좀 다르게 표시됩니다. 0시를 오전 6시, 삼시를 지금의 오전 9시, 육시를 지금의 12시(정오), 구시를 오후 3시로 말합니다. 오전 6시를 전후하여 예수님은 잡히십니다.
가야바의 집에서 심문 당하시고 빌라도 앞에서 심문 당하시고 헤롯에게 보내지고 다시 빌라도에게 와서 사형선고를 받게 됩니다. 제 삼시 지금시간으로 오전 9시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사람들의 조롱 속에 십자가 상의 七言이 있었습니다.

①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한편 강도가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할 때
②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했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비참할 때, 볼품없을 때 주를 시인하는 강도의 고백은 값진 것입니다. 성도가 교회가 어려울 때 애써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은 값진 것입니다.
③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육시(정오)에서 구시(오후 3시)까지 온 땅에 어두움이 임했습니다. 이 시간은 하나님께서 성도를 택하시고 예수님을 실제 죄인으로서 버리시는 아사셀 양이 되는 시간(레 16:9∼10)입니다. 구시(오후 3시경)에
④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⑤ 내가 목마르다.
⑥ 다 이루었다.
⑦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십자가의 七言 외에 십자가 사건과 관련된 5대 기적이 있었습니다(때가 6시쯤 되었습니다. 정오입니다).
① 온 땅에 3시간 동안 어두움이 임했습니다.
②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③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④ 무덤이 열리고 죽은 자들이 일어났습니다.
⑤ 여섯 시간 만에 주님이 운명하셨습니다.

주님이 운명하신 후 군병 중 하나가 창으로 그의 옆구리를 찌르니 피와 물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금요일 오후 6시 전에 아리마대 요셉은 빌라도에게 매장 허가를 받았습니다. 군인들의 입회 하에 시체를 십자가에서 내려 세마포로 싸고 새 무덤에 예수님을 장사했습니다. 장사가 끝난 것을 지켜 본 로마 군인들은 무덤을 막은 돌에 인봉하고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지켰습니다.
인간의 죄가 얼마나 크냐고 묻는다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죄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것은 인간의 죄를 사해주시기 위함입니다.
인간은 원죄로 말미암아 자범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타락한 인간들의 윤리와 도덕은 이미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양심이 아닙니다.

만약 짐승들이 이성적 표현이 가능하다면 인면수심(人面獸心)이란 말에 항거하여 인간에게 수면인심(獸面人心) 이라고 비웃을 것입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죄인입니다.
로마서 3장 23-24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이 땅에 사랑의 의미가 공개되었습니다.
요한일서 3장 16절에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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