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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악역을 거절하라(눅 22 :4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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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영화, 모든 드라마, 모든 극에는 악역을 맡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예를 든다면 심청전에 뺑덕어미, 춘향전에 변사또, 흥부전에 놀부와 같은 역할들입니다. 그런데 악역은 늘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영화나, 드라마나 극을 더 흥미진진하게 하고 활기가 있게 하고 재미를 더하는 약방의 감초와 같은 역할을 할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악역은 조역이며 엑스트라일뿐입니다. 

  주인공은 이런 악역의 사람들에 의해서 시련을 당하지만 결코 실패하지 하지 않습니다. 결코 주인공은 죽지 않습니다. 죽더라도 반드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작가는 주인공에 의해서 극을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인공에게는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는 것입니다. 주인공이 죽으면 막을 내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믿음의 주인공들로 불러 주셨고 복음선교의 주역들로 우리를 불러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비전의 주역으로 여러분들과 나를 불러주셨습니다. 스스로를 엑스트라로 여기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인생에는 엑스타라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생들을 자신들의 인생에 있어서 주인공으로 살아가도록 창조하셨고 그리고 생명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꼭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인공에게는 언제나 악역을 맡은 이들을 통하여 찾아오는 고난이 있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영국 사람들은 청어를 매우 좋아합니다. 북해에서 잡은 청어를 런던까지 수송하는 사람들은 신선도에 따라 전혀 다른 값을 받습니다. 가장 저렴하게 팔리는 청어는 냉동차에 운반돼온 것들입니다. 두 번째는 물탱크에 넣어져 계속 먹이를 받아 먹어가며 수송된 것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방법으로 런던에 도착한 청어들 중 절반 이상은 죽습니다.

  그런데 항상 신선한 활어를 런던의 시민에게 제공해 큰돈을 번 상인이 있었습니다. 그 비결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한번은 그 아내가 넌지시 비결을 물었습니다. 상인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청어들 틈에 커다란 숭어 몇 마리를 넣어두지. 숭어가 청어를 잡아먹으려고 입을 쩍쩍 벌리면 청어들은 필사적으로 도망을 다녀. 긴장한 청어들은 런던에 도착할 때까지 싱싱한 상태를 유지하는 거야."
  그렇습니다. 청어 속에 숭어를 넣는 것은 청어를 죽여 값을 낮추거나 청어가 숭어에게 잡혀 먹히게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청어가 싱싱하게 살아 움직여 더 높은 값을 받고자 한 것입니다.

  어디 이런 일이 청어에게만 있는 일이겠습니까?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빛나게 하시려고 가치를 더 높여주시려고, 더 능력 있게 하시려고, 더 넓은 곳, 더 높은 곳에 세우시려고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입니다. 인생에는, 우리의 영혼의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은 결코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일이 우리의 성장을 도와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악역에 의해서 고난을 당할지언정 우리 스스로가 악역을 자처하거나 악역을 맡아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모든 소설과 연극, 드라마에서도 악역이 등장하는 것처럼, 실존적 우리의 인생에도 우리의 삶에도 악역이 있습니다.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적 통찰력이 부족합니다. 그리하여 현실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억울하게 보이는 일들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며 오직 논리적으로, 합리적으로만 생각하여 본능적으로 반응합니다. 그래서 아파하고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살펴보면 영적 통찰력을 가지고 보면 고난에는 뜻이 있습니다. 고통에는 반드시 의미가 있습니다. 시련에는 숨겨진 보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과 고통과 시련을 믿음의 눈으로 해석하고 믿음으로 다루어가는 영적인 실력을 갖추어야 하고 그럴만한 믿음의 실력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 구원사역에는 악역을 맡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비난하는 사람들, 예수님을 은 30에 판 가롯 유다, 예수님을 잡으러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경비대장들과 장로들, 온갖 무기를 들고 예수님을 잡아 끌고간 로마군병들, 잘못된 판결을 했던 빌라도와 공의회 그리고 평강의 왕, 구원의 왕을 버린 군중들, 이들은 모두 악역을 맡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은 이들의 악역을 통하여 구원사역을 완성하셨습니다. 
  이 풍랑, 이 악역을 통하여서 구원의 여망이 더 빨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결코 악역을 맡은 자가 잘했다고 칭찬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악역을 피해야 합니다. 악역을 버려야 합니다. 악역을 거절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으 구원사역에서 악역의 대표적 역할을 맡은 인물은 역시 가룟유다일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주님의 지근지간에서 3년 6개월 동안 주님을 섬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로마의 군병들과 군호를 짜서 예수님을 그들에게 넘겨주는 악역을 맡았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이 백성들의 지지와 성원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예수님을 어떻게 조용히 체포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을 때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악역을 자처하고 나선 인물이 바로 가룟유다였습니다. 이 악역을 맡고 은 삼십을 받은 것이 유다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누가는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 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라고 쓰고 있습니다.

  유다는 죄의 유혹이 왔을 때 피하지 않았습니다. 죄와 싸우지 않았습니다. 사단이 그 마음에 쑥~! 들어왔을 때 대적하지 않았습니다. 사단은 모든 가능성과 기회를 포착하여 믿는 사람일지라도 실족케 하는 자입니다. 우리는 사단이 우리를 주관할 가능성과 기회를 가지지 못하도록, 악은 그 모양이라도 버려야 하겠습니다(참조, 살전 5:22). 그리고 죄와는 피흘리기까지 싸워서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가룟유다는 배신자의 상징입니다. 세계적인 사전인 [웹스터 사전]에 보면 그의 이름이 나오는 난에 보면 "반역자, 특히 우정을 가장하여 배신한 반역자"라고 정의를 내렸습니다.

  성경은 그에 대해 분명하게 '도적'(요12:6), '멸망의 자식'(요17:22), '마귀'(요6:20)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룟유다에 대한 증오와 기피심리가 서구사회에서는 일종의 생활감정으로 응용이 되어 유다의 빛깔하면 붉은 머리를 가리키고, 유다의 나무하면 유다가 그것에 목을 맨 것으로 전승이 된 자색 꽃나무를 가리키고, 도살장을 향해 선두에서 인도하는 양을 가리켜 '유다의 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위장된 배신자의 우정을 가리켜서 '유다의 키스'라고도 합니다. 심지어 간방에서 죄수를 감시하는 창구를 가리켜 '유다의 창'이라고 부릅니다.

  주님은 가룟유다에게  "인자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그사람에게는 큰 화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굳이 유다가 아니더라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은 이루어지는데 유다의 탐심과  악함이 스스로 멸망을 자초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악역을 거절하시기를 바랍니다. 악역을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악역을 통해서 비록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악역을 맡아서 행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보응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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