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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진정한 왕 (눅 19:2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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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영화로운 상태를 ‘영광’이라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들은, 영광을 추구하면서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상 가운데, 가장 영예로운 상을 노벨상이라고 한다. 그래서 노벨상을 수상한 사람은, 영광스럽다고 한다.

  올림픽에서는 금메달을 영광스럽게 여긴다. 적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개선장군은, 모든 사람이 자기를 칭송함에 대하여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는 장면이다. 이때는 유월절을 며칠 앞둔 시점이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광복절이다. 애굽 땅에서 노예로 살다가 해방되었음을 기념하는 날이다. 그러므로 유월절이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 가운데는 “과거 우리 조상들이 애굽의 압제 아래 있었고, 지금 우리는 로마의 압제 아래 있으니, 모세와 같은 지도자를 하나님께서 보내주셔서, 오늘날 우리를 해방시킬 메시아가 오기를 원한다.”는 간절한 소망이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스가랴의 예언대로, 메시아의 모습을 하고 등장하셨다. 왕으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다. 사람들은 찬양을 부르며 노래한다. (38)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하며 외치기 시작한다.

  (마21:9)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하였다. 아마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느꼈던 영광은 대단했다. 이 모습을 보던 바리새인들이 (요12:19) “…온 세상이 좇는도다” 하였다. (눅19:40)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고 하셨다.

  기세로 보나, 숫자로 보나, 또 예언의 성취로 볼 때 “하나님께서 무슨 놀라운 일을 이루시겠구나!”하고 기대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행진이었다. 또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12:23)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그래서 정말 백성들은 “예수님께서 이제 세상 앞에 능력을 보이시고, 이 세상의 권세를 무릎 꿇게 하시겠구나, 세상 앞에 보란 듯이 천군 천사를 동원하시고, 로마 군병들을 몰아내시겠다.” 이러한 기대감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런데 백성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말씀들을 하셨다.

  (요12:24-2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원토록 보존하리라”

  (눅19:4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위하여 우시며,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또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쫓아내며, 너희는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구하는 왕과는, 너무나도 다른 왕으로 오셨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떤 왕을 원하는가요? 내가 원하는 왕이 오셔야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왕을 원하는가? 

1.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왕은?

(1) 진정한 왕은, 우리의 죄를 해결하도록 계획된 왕이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우연히 입성하신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안이 있었다. 구약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신다고 기록하였고, 신약성경에는 그 일이 성취되었다고 선포한다.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절기에, 자신의 백성들을 위하여 대신 죽어야 하는 어린양이었다. 온 세상의 죄를 짊어지시고, 그 죄 값을 지불하는 어린양으로 이 땅에 오셨다. 백성들은 몰랐지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사건이 기다리고 있음을 아셨다.

  (출12:3) “…이스라엘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이 달 열흘에 너희매인이 어린 양을 취할지니…” (출12:6) “이 달 십사 일까지 간직하였다가, 해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희생 될 어린 양을 유대력 1월 10일에 선택해서 간직하다가, 5일 만인 14일 저녁에 죽이도록 하였다.

  이는 예수님께서 죽으시기 위해, 유대력 1월 9일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는데, 유대교 지도자들이 죽일 계획을 세운 그 날이 바로 월요일, 1월 10일이었다. 그러므로 예언대로 5일 만에 죽어야 했던 어린 양처럼 예수님도 정확하게 5일 만에 죽으셨다.

  또 예수님은 입성하실 때, 나귀를 타고 들어가셨다. 이는 우연한 일이 아니라, 구약 성경에 예고된 일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520년 전에,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예고된 사실이었다. 따라서 성경의 정확성에 우리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슥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고 예언하였다.

  (눅19:30)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타셔야 할 나귀가 어디에 있었는지 정확히 알고 계셨다.

  (31)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마을 한 곳에 매여 있는 나귀 한 마리를 끌고 오라고 하셨고, “왜 우리 나귀를 가져가요? 당신 도둑 아니오?”라고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고 답하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 평범한 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전지하신 하나님이요 나귀의 진정한 주인이시다. 그 나귀를 만드셨고, 나귀의 운명을 다스리시는 주인이시다. 그 나귀의 주인이실 뿐만 아니라, 사람을 만드셨고, 사람의 운명을 다스리시는 주인이시다. 만유의 주인이시다.

  나귀 한 마리도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용하고자 계획하셨던 분이 우리 주님이시다. 나귀 한 마리에 대해서도 이렇게 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주님께서, 우리 인생에 대해 소중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지 않겠는가? 우리는 이 땅에 우연히 태어났다가 우연히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던져진 운명적 존재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뚜렷한 목적과 의미를 찾는 것을 체념한 채 인생을 살아간다.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이 인생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태도로 살아서는 안 된다. 나귀 한 마리의 생애를 준비하셨던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생애를 위해, 새롭고 놀라운 계획을 준비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란다. 주님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주시려고 이 땅에 오신 분임을 믿으시기 바란다.

(2) 진정한 왕은, 평화의 왕으로 오셨다.

주님께서는 승리를 상징하는 말을 타고 오시지 않았다. 나귀를 타고 오셨다. 그래서 (마21:5)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를 메지 않은 나귀를 탔도다 하였느니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동등 됨을 취하지 않고, 이 땅위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다. (빌2:5-6)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평화는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가 될 때, 평화라고 한다. 어떤 부분이라도 깨지면, 평화를 누리지 못한다. 인간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평화가 깨졌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화평케 하셨다(롬5장).

  (사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예수님은 인간과 하나님의 화평을 위하여 오셨다.

(3) 진정한 왕은, 우리를 위해 울어 주신다(41).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기 전에, 주님께서 하신 일이 하나 있다. 이 말씀은 오직 누가복음에만 나온다. 예수님은 자신을 왕으로 맞이하는, 환호성의 찬양 소리를 들으시면서 우셨다. 왜 우셨는가?

  예레미야나 자기 백성들을 위해 울었던 다른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도 자기 백성에 대해 한탄하시면서 소리 높여 우셨다. (42)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 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대하는 메시아는, 정치적 압박에서부터, 물리적 힘으로 그들을 자유케 하는 메시아였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일을 이루기 위해, 세상에 오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정한 평화를 주시는 분을 알지 못했기에, “그대들의 눈에는 숨기었다면서” 주님께서 한탄하신다.

  이렇게 참 평화를 주시는 놀라운 예수님이, 그들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죄에서 구원하는 영적인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43-44)에 슬픈 예언을 하신다. 예수님을 거절함으로 심판을 피할 수 없었던 사람들과 예루살렘 도성이 파멸한다는 말씀이다.

  AD 70년 디도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 성은 완전히 파멸되고 말았다. 예수님의 예언대로 돌 위에 돌 하나 남기지 않고, 모두 무너졌다. 예루살렘 군중들은 잔혹한 로마 군인들의 말발굽에 짓밟혔다. 예수님의 예언이 실행되었다. 예수님은 이 모습을 미리 보시고 우셨다.

  진정한 평화의 왕이신 주님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된 예루살렘과 군중들을 바라보시면서, 전능하신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 왜 예수님께서 우셨을까요? 십자가의 고통이 두려우셨기 때문일까요? 아니다. 주님께서는 자신 때문에 울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위하여 울지 말라.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23:28)고 하셨다. 구원받아야 할, 안타까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시면서, 주님은 십자가 앞에서 울고 계셨다. 주님께서 그렇게 우셨기에, 우리의 인생이 바뀌게 되었다. 주님의 눈물이 우리를 살렸다.

  그렇기에 이제는 우리가 울어야 할 때이다. 이 민족을 위해 울어야 할 때이다. 우리가 울면, 사랑하는 사람들이 살아난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방황하는 안타까운 이웃들을 위해서, 우리가 눈물을 흘리면, 이 땅이 다시 살아난다. 우리 한국교회가 다시 운다면, 이 민족이 살아날 줄 믿는다.

  안타깝게도 예수님을 모르고 방황하는 이웃들을 위해서, 이 민족을 위해서 눈물 흘릴 수 있나요? 지금 한국 교회는 울어야 할 때다. 우리가 울면 우리 민족이 살아난다. 새로운 역사가 이 땅에 다시 임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온다.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울자.


2. 진정한 왕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쓰시기 원하신다.

본문은 나귀지만, 주님께 귀하게 쓰임을 받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나귀보다는 귀하게 쓰임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사람이나 물건이나 할 것 없이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그 값이 변한다. 유럽의 경매장에서 경매하는 내용을 보면, 나폴레옹이 썼던 숟가락, 빗, 심지어는 잠옷까지 등장한다. 그러나 사용했던 분이 유명했기에, 그가 사용했던 용품들까지 유명하여, 역사적인 값까지 계산되어서 고가로 팔린다.

  이는 물건만 아니라, 사람도 마찬가지다. 똑같은 요리사이지만 청와대에서 있으면, 대중식당에서 일하는 요리사와는 전혀 다른 권한을 가진다. 똑같은 운전기사이지만, 대통령을 모시는 기사가 국무총리를 모시는 기사에게 큰 소리를 친다.

  문제는 ‘누구 밑에서 일하느냐?’가, 그 사람의 가치를 결정한다. 시몬 베드로는 많이 배운지 못한 별 볼 일 없는 어부였다. 그러나 주님에게 쓰임 받으면서, 그는 기독교의 핵심 인물이 되고 말았다. 이 세상에 베드로보다 더 잘나고, 더 배운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에게 쓰임 받았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가운데 한사람이 되었다. 이처럼 누구에게 쓰임을 받느냐에 따라, 인생의 가치가 달라진다. 따라서 교회에서 집사 직분을 임명받은 분들은, ‘에이 그까짓 집사’하고 시시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충성스럽게 여기시고 일꾼으로 임명하셨음을 기억하고 감사하시기 바란다. 이 당나귀는 흔히 볼 수 있는 당나귀였다. 다른 당나귀보다 더 잘생긴 것도 아니었다. 다른 당나귀보다 더 큰 것도 아니고, 이렇다 할 것이 전혀 없는 보통 당나귀이다.

  또 잘생겨봐야 당나귀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당나귀가 유명해진 이유는, 주님에게 쓰임을 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들도 주님께 쓰임 받는다면, 잘난 것이 없어도, 특별한 재능이 없어도, 주님께 쓰임 받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귀한 존재가 되고도 남는다. 주님께 귀하게 쓰임받기 바란다.

그러면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하실 때,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나?

(1)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하실 때, 즉시 응답해야 한다.

(마21:3) 주님이 쓰신다고 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셨다.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하면, 즉시 보내야 한다. 즉시 응답해야 한다. 주저할 필요가 없다.

  세상일은 깊이 생각하기 위해, 시간을 두고 천천히 결정하는 것이 좋다. 그래도 실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의 일을 하는 데에는, 시간을 끌어서는 안 된다. 끌다보면 그동안 사탄이 와서 우리를 유혹하기 때문이다.

(2)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하실 때, 주님께로 풀어 끌고 와야 한다(30).

“…풀어 주님께로 끌고 오너라.” 사람들은 누구나 얽매여 있다. 가정에 얽매여 있고, 직장에 얽매여 있고, 환경에 얽매여 있다. 여기저기 얽매여 있다. 우리는 교회 일을 할 만큼 한가한 사람이 없다.

  어디엔가 얽매여 있으므로, 자기 자신을 풀어서 주님께로 끌고 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풀어야 한다. 죄의 끈, 세상의 끈, 이기주의의 끈, 구습의 끈, 고집의 끈을 풀어야 한다.

(3)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하실 때, 겉옷 위에 예수님을 모셔야 한다.

예수님을 태우려면, 자신의 겉옷을 벗어서, 당나귀 위에 얹어야 한다. 겉옷은 계급장과 같다. 자신의 체면의 옷이다. 나의 옛사람의 옷이다. 이것을 벗어야 한다.

  우리가 주님을 태우려면, 계급장을 떼어야 한다. 체면의 옷을 벗어야 한다. 옛날 이승만 대통령이 정동감리교회에 나왔을 때, 목사님께서 “이 앞으로 오셔서 앉으시지요!”했을 때, 거절하면서 “저는 여기 대통령으로서 오지 않고, 성도로 왔다”고 했다고 한다. 바로 그런 자세 없이는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계급장을 다 떼시기 바란다. 떼지 않으면 주님께 쓰임 받을 수 없다. 겸손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쓰시지 않는다. 모세를 쓰실 때도 겸손하게 만든 다음 쓰셨고, 베드로를 쓰실 때도 겸손하게 만든 다음 쓰셨다. 하나님은 무능한 사람은 쓰셔도, 교만한 사람은 쓰시지 않는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신 몸인데, 이 몸을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내 고집대로 쓴다면, 별로 가치가 없지만, 내 몸을 주님께 드리면, 주님께서 우리를 귀하고 값있게 써주시며, 주님이 받으시는 영광을 함께 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몸을 불의에 병기로 바치게 된다면, 마귀에게 종노릇하다가 결국 마귀가 가는 지옥에 함께 가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을 나귀처럼 주님께 드려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자! 진정한 왕께 쓰임 받는 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 나라는,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유대 나라는 로마가 임명한 왕, 헤롯이 통치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당시 유대 땅에 살고 있던 백성들은, 새로운 통치자, 새로운 왕이신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메시아의 직분 중에는 왕의 임무도 있었기 때문이다.

  (렘23:5)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라고 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을 기다리고 있었다.

  예루살렘 군중들의 환호 속에 입성하시던 그날, 백성들은 예수님께서 왕으로 등극하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입성하시자 백성들은

  그 당시 백성들은 참된

  옛 독일 프러시아 제국시절에, 프레더릭이라는 대왕이 어느 날, 시골길을 행차하게 되었다. 그런데 왕의 행차에도,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한 노인이 있었다. 왕은 행렬을 멈추게 하고, 그 노인에게 말을 건넸다. “노인장은 누구시오?” 그랬더니 뜻밖에도 그는 “나는 왕이요”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어느 나라 왕이시오?”하고 묻자 “나는 나 자신의 왕국을 거느리는 왕이오.”라고 대답했다. 그 뜻을 알아차린 왕은 웃으면서 “나라 살림은 잘 되어 갑니까?”라고 묻자, 그 노인은 “바로 그것이 문제요”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프레더릭 대왕은 “노인장은 나와 똑같은 문제를 가졌군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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