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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고난을 통한 본 (히 5: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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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Palm Sunday)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을 하셨을 때
군중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 펴면서
“호산나 다원의 자손이여” 하며 환호했기 때문에 거기서 유래한 말입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이 비록 군중들의 환호 속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지마는
      십자가에 죽으시기 까지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그래서 고난의 본을 보여주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고난주간을 경건하게 지내는 교우들 되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고 있으며
        당시 유대인 기독교 신자들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바울에 의해 복음이 점점 확산되자 유대인들은 심한 위기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이방인 신자들에게는 무어라고 말할 수 없고
    유대인 신자들을 향하여 심한 비난과
    심지어 로마 당국과 결탁하여 박해를 가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성도들로 하여금
  당하고 있는 고난을 이겨 나갈 수 있도록 격려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천사보다 유대인들이 존경하는 모세보다 다윗보다 더 위대하신 분으로
오늘 본문말씀에서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시는 분이라고 증거합니다.
오늘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게 눈이 뜨여지는 교우들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럼 대제사장은 어떤 분이십니까?
1. 대제사장은 어떤 분이십니까?(1-4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라고 할 때
  목자가 무엇 하는 사람인 줄 알아야 여호와를 바로 알 수 있듯이
대제장이 무엇하는 사람인 줄 알아야 예수님을 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럼 대제사장은 어떤 분이십니까?
구약의 대제사장도 역시 사람입니다.
1절 [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 취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가운데 특히 레위 지파에서 선택된 자여야 합니다.
출29장에 보면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아무나 제사장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선택된 사람
  즉 아론과 그 아들들만이 제사장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사장이 되려면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나야 합니다. 
그럼 대제사장의 직무가 무엇인가 하면                     
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보석을 가슴의 흉패에 달고 
일 년에 한 차례씩 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가서
      백성들의 죄를 속하는 제사를 드릴 수가 있었습니다.
구약에서는 오직 대제사장의 제사로 말미암아 백성들의 죄가 속해졌습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은 이스라엘의 최상의 정결함을 대표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그도 역시 연약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제사장을 삼지 아니하시고
  연약한 사람 중에서 제사장을 선택하였느냐?
2절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 ]
3절 [이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인간이기 인간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스스로 인간이 되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신학적으로 성육신이라고 합니다.
단지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이기 때문에
히4:15절에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 ] 라고 합니다.
그러나 [ 죄는 없으시니라 ]고 합니다.

구약의 대제사장도 역시 연약한 인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직무상 백성들을 위하여 제사를 드리지만
자신 역시 죄를 속함 받아야 하는 연약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단지 다른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4절 [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
대제사장의 직분은 인간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서 가능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택함을 입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입은
    인간으로 오신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 되신 분이십니다.
그럼 히브리서 기자가 왜 대제사장 이야기를 합니까?
2. 히브리서 기자가 왜 대제사장 이야기를 할까요?(5-6절)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대제사장이 되는 것은 
    스스로 된 것이 아니고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어 된 것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따라 대제사장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제사장 아론과는 다른 대제사장입니다.
5절 [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저더러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 하셨고 ]
대제사장 아론과 그리스도를 비교해 보면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입었다는 점에서는 유사성이 있으나
      우월적인 면에 있어서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왜? 그리스도는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3장에서 모세와 비교할 때에
모세는 하나님의 집에 사환으로 충성하였지마는
그리스도는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다고 하듯이
모세도 아론도 다 하나님의 집에 종이지마는
    그리스도는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시2:7절 인용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늘의 특권을 가지신 분이시며
    모든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우리의 대제사장이 된 것은
혈통을 따라 된 것이 아니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되었다고 합니다.
6절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시110:4절을 인용한 말씀으로서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보다 더 우월하신 대제사장 그리스도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대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대제사장이 되었다는 말은
멜기세덱 계통의 제사장이라는 말이 아니고
      멜기세덱과 같은 형태의 제사장이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멜기세덱에게는 후손이나 후계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멜기세덱이 누구입니까?
창14장에 보면 소돔 땅에 살던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엘람 왕 그돌라오멜에게 붙들려 갑니다.
그 때 아브라함이 사병 삼백십 팔 인을 거느리고 그돌라오멜을 물리치고
    조카 롯과 재물을 찾아 돌아옵니다.
그때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서 환영합니다.
그에 관해서는 창14:18절에
[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
  고 하며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그 얻은 것의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습니다.
거기에서는 멜기세덱에 관해서는 그 이상 어떤 언급이 없습니다.
그러나  히7:3절에 보면
[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다] 고 합니다.
그러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는 것은
    아론같이 혈통적인 제사장이 아니라
    멜기세덱같은 형태의 제사장으로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보내신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히6:20절에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들어갔다고 합니다.
라틴어 성경에는 제사장을 <폰티펙스>라고 합니다.
<폰티펙스>는 양쪽을 잇는 다리라는 뜻입니다.
마치 야곱이 꿈 가운데 본 하늘과 당을 잇는 사닥다리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죄로 말미암아 단절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잇는
          <폰티펙스>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고 영접할 때
    우리는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영원한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나 사이를 잇는 폰티펙스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딤전2:5절 [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시라 ]
오직 우리에게 구원을 얻게 할 분은 예수님 한분 밖에 없는 줄 믿습니다.

그럼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이 직무를 어떻게 감당하셨습니까?
3.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이 직무를 어떻게 감당하셨습니까?(7절)
고난 가운데 본을 보여 주었읍니다.
7절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
그가 육체에 계실 때에라는 말은
    고통 속에 신음하셨던 역사 속에 실제 인물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바로 고난의 삶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고난 속에서도 우리에게 신앙의 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신앙의 본이 무엇인가?
1) 눈물로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 자기를 능히 죽음에서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 라는 말은
죽음의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께 간구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대제사장 직무를 감당하시며
    우리에게 보여주신 신앙의 본입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7절 말씀을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장면에 대한 묘사라고 합니다.
눅22:44절에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하시는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읍니다. 
[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같이 되더라 ]
예수님은 고난을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로 이겨셨습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전에는 고난주일이라고도 했습니다.
오늘 고난주일을 맞이하여 성도가 당하는 고난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벧전2:20절 [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
    그러니 성도에게 고난이 있는 것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본을 보여 주십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는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 가운데 기도를 통한 신앙의 본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약5:13절 [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 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 ] 
성도에게는 기도만이 고난을 축복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방법인 줄 믿습니다.

거창고등학교 설립자 <고 전영창 교장>의
<검은 보자기에 쌓인 축복>이란 설교집에 보면 이런 간증이 나옵니다.
아버지는 3.1운동 때 옥사하고 어머니는 병으로 죽은 4남매가 있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양친을 잃고 고아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살기 위해서 어린나이지만 장남은 남의 집 장머슴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동리에 전염병이 퍼져 동생들이 앓아눕기 시작 했습니다.
약 한 첩 쓰지 못하고
막내 동생을 거적에 사서 지게에 짊어지고 공동묘지에 묻었습니다. 
배가 고파 얼마를 잤는지 앓는 소리가 나는데
두 아이 소리가 아니고 한 아이 소리만 나기에 손으로 더듬어 보니
  하나가 몸이 싸늘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날이 새기 전에 또 지게로 메어서 공동묘지에 묻었습니다.
사흘 후에 남은 동생 하나도 공동묘지로 가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세 동생마저 잃어버리고 문자 그대로 사고무친이 되었습니다.
우는 것도 너무 울고 나니 울 눈물이 없더랍니다.
    한탄하래야 한탄할 힘이 없더랍니다.
    낳은 보모도 원망해보고 하나님도 원망을 했답니다.
그래도 나아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더랍니다. 
그러나 부모에게 물려받은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머슴살이 하면서
    호롱불 아래서 세끼를 그면서 그 새끼줄 눈물로 꼬면서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합니다. 눈물 안 흘리게 해 달라고,
그런데 미국 선교사님이 이 기막힌 소문을 듣고
    형을 데려다가 학교에 보내 공부를 시켜주었습니다.
그 후 이분이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는데
서울에 유명한 목사님이 되었습니다.
몇 해 전에 기독교 방송 <새롭게 하소서> 시간에
    이 분의 간증이 나와요. 성함이 조 아무개 목사님이십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예수님께서 본을 보여주신 것처럼 눈물로 기도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고난 가운데 기도로 승리하는 교우들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왜 우리에게 고난의 본을 보여주었습니까?
4. 예수님께서 왜 우리에게 고난의 본을 보여주었습니까?(8-9절)
예수님의 고난의 본은 고난을 통해 온전케 되는 삶을 보여줍니다.
8절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절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이 말씀을 <메튜헨리>는
[ 예수님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룩하는 온전한 자가 되었고
  우리의 구원자가 되셨다 ] 라고 합니다.
고난은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성도는 고난을 통해서 소성케 됩니다. 고난을 통해서 온전케 됩니다.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룩해 나갑니다.
예수님은 비록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고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룩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독일신학자 <에릭 사우어>는 십자가의 의의를 3가지로 나누어서 말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죄에 대한 강한 부정이요
      우리 편에서 볼 때 하나님의 사랑의 최고확증이요
      예수님 편에서 볼 때 아버지의 권위에 대한 절대 순종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빌2:6절 이하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렇게 십자가의 고난은
아버지의 권위에 대한 절대순종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고난을 통해 죄를 멀리할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에 순종함으로
    우리의 인격과 삶이 더 온전케 되어지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시119:71절에
[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라고 합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는 [고난은 하나님의 확성기] 라고 합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룩해 나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전 영창 교장이 1963년에 미국을 가게 되었는데
그때는 미국 가기가 얼마나 힘들 때였습니다.
당시 미국을 갈려면 미국인 가운데 누가 제정보증을 써 주어야 했습니다.
전영창씨의 제정보증을 써 준 분이 계시는데
국민학교 겨우 졸업했지만 자기 이름 사인하나 제대로 못할 정도로
    I. Q가 낮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무식하여서 어디 취직도 못하고
광산을 조금하다가 실패하여 농사를 지었는데 그것도 실패하였습니다.
그 다음에 제재업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성공하여 일약 거부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호의호식 하며 잘 살았습니다.                       
그런데 좀 살만하니 심장이 좋지 앉아 50도 못되어 일을 놓아야 할 형편입니다.
이때가지는 자신도 어려운 가운데 자랐고 살아왔지마는             
        자기 외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건강을 잃고 나니 할 일이 없습니다.
하루는 자기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고등학교에서 한국영화를 한다기에
    자기 부인과 함께 구경을 갔습니다.
그 영화는 밥 피얼스라는 미국인이 6.25 동란 때 찍은 것으로
한국 전쟁의 참상을 보여주는 것인데
그 중에는 고아들이 한강 철교 있는데서 쓰레기통 속에서
  음식물 찌꺼기를 들추어  먹는 광경이 나왔습니다.
이 분이 그 광경을 보고는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드디어 그날 밤 한국 고아들을 데려다 기르기로 결심했습니다.
1955년 가을에 한국에 와서 보니
    고아들 가운데서도 혼혈아들이 제일 불쌍했습니다.
그래서 혼혈아 열두 명을 데리고 와서
    8명은 자기가 키우고 4명은 자기 동생들이 기르기로 했습니다.
이 사실이 미국 신문에 실렸습니다.
그랬더니 전국 각지에서 어떻게 하면 나도 한국고아들을 데리고 와서
      키울 수 있느냐는 문의 편지가 일주일 만에 4000통이나 왔습니다.
이 분이 바로 홀트 제단을 세운 <헤리 홀트>입니다.
그가 건강을 잃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순종하였기에
    그는 더 건강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고난당한 성도 있습니까?
그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하여 기도하세요.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순종하세요.
그래서 그 고난을 때문에 더 온전해지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고난 가운데 순종의 본은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룩하셨고
그 순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홀트씨가 자신의 건강을 잃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뜻에 순종하므로 많은 고아들이 삶의 보금자리를 찾게 된 것입니다.
오늘 나의 고난도
    나의 삶과 이 사회를 더욱 온전케 하는 축복이 되기를 바랍니다.

불란서의 최대의 천문학자 하수엘이
      20세 때 친구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 친구여, 우리가 이 세상에 왔다가기 때문에
  다만 조금이라도 우리가 사는 곳이 보다 살기 좋은 곳이 되도록 하자 ]
그래서 그는 자원해서 남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에 가서 어렵게 살면서
    천체도를 완성했기 때문에 무역과 상업이 발달하게 되었고
    복음전파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된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나로 말미암아 나의 주변이 조금이라도  바뀌어져 가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 영향을 주고                     
    이 세상으로 하여금 우리의 말을 듣고 온전케 되는 방법도
    바로 고난 가운데 당당한 우리의 삶을 통해서 입니다.
고난 가운데 기도하고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순종함으로 
    나의 삶과 주변이 더 온전케 되어지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고난으로 순종함을 보여준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5. 예수님께서 고난으로 순종을 보여주신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10절)
10절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으니라]
이 말은 9절 하반절
    [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 란 말씀처럼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셨습니다.
즉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 즉 구원의 주가 되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본을 따라가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고난 가운데 기도하셨고
      고난 가운데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룩하는
      온전케 하신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도 고난주일을 맞이하여
    고난당했다고 낙심하거나 흔들리지 말고
앞서 고난의 본을 보여주신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고난을 기도로 축복으로 바꾸어 놓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뜻에 순종함으로 나의 삶과 주위가 더 온전케 되어지는
          역사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성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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