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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가상칠언(架上七言)(1) :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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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칠언(架上七言) (1)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눅23:32-38

"멜 깁슨의 "그리스도의 수난"(The passion of the Christ) 감상.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주님이 나를 위해 죽임 당하신 골고다 언덕에 올라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은 주님이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은 이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꼭 기억해 두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을 흔히 복음서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일대기가 기록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서를 주의해서 보면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전체 분량의 1/3 가량이 예수님의 생애 중 마지막 한 주간인 고난 주간, 십자가, 죽음 등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네 제자가 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생애를 이야기할 때 십자가의 고난을 중심에 두고 다루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에 비하면 사복음서 모두 예수님의 탄생이나 부활, 승천과 같은 기사는 이상하리만큼 간략하게 다루고 넘어가 버립니다.

어느 주석가는 이런 말까지 했습니다. '복음서란 무엇인가? 복음서란 예수님의 생애 중 마지막 한 주간에 관한 모든 사건과 말씀을 기록한 연대기요, 그 나머지 모든 부분은 서론에 지나지 않는다.' 그만큼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는 중심에 있습니다. 복음의 중심이요, 은혜의 근원이요, 샘이 됩니다. 바울도 그가 복음을 이야기할 때에 '십자가의 도'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그는 소리쳤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는 자기 자신을 고백하기를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부활을 등한히 했다거나 예수님의 승천을 이야기하지 않았다거나 하는 말이 아닙니다. 다 중요하지만,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모르는 부활은, 그것은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만큼 십자가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있어서 불가사의의 지혜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서 패배하고 십자가에서 사형을 당하여 죽을 수 있는지 아무도 설명하지 못합니다. 십자가는 역설 중의 역설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죄인을 대신해서 죽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누가 그 역설을 우리 마음에 흡족하도록 설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십자가의 놀라운 진리는 한 번 들었다고 다 깨달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예수를 오래 믿었다고 해서 다 아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는 갈증이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십자가를 더 알고 싶은 갈증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 좀더 가까이 다가가서 그를 만나고 싶은 갈증입니다.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의 고난 당하신 그 발자국을 따라 걸어가 보면 예수님이 얼마나 참혹한 수치와 모멸과 모욕을 당하셨는가를 감히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매질을 당했습니다. 사지에서 선혈이 낭자하게 흐릅니다. 얼굴엔 사람들이 뱉은 가래침이 묻고, 뺨을 맞고,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나중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발가벗겨져서 십자가에 매달렸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부끄럽고 처량했는지 다윗은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십자가의 못 박히신 주님의 그 부끄러운 모습을 놓고 시편 22편에 보면 이렇게 예언합니다. "나는 벌레요 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시22:6) 왜 이렇게 말못할 수치를 예수님이 당하셔야 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십자가의 잔인함은 멀쩡한 사람을 십자가 틀에다 눕혀놓고 손발에 철 못을 박는 것만큼 잔인 할 수 있겠습니까? 톱으로 켜임을 당해 죽는 것은 5분이나 10분 정도 고통을 당하다 보면 까무러쳐서 그대로 죽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은 절대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습니다. 인간이 고통을 느낄 기력이 남아 있는 한, 모든 고통을 다 받게 하는 사형제도라 하는데 이 십자가 형벌의 잔인함이 있습니다. 못 박힌 손과 발에서 서서히 피가 빠져나가고 뜨거운 팔레스타인의 땡볕 아래서 고열과 함께 땀을 흘릴 때, 온 몸에서는 피와 수분이 같이 빠져나갑니다. 온 몸의 체중을 지탱하고 있는 손과 발에 못 박힌 상처의 고통도 극심하지만, 출혈로 인한 체내의 통증은 가히 살인적인 것이라 합니다. 그래서 죄수들은 십자가에서 혼절하다가 깨어나고 깨어났다가는 혼절하곤 하면서 서서히 죽음을 맞이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지옥의 고통 그 자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구약 시대에 미리 내다보고 예언한 다윗과 같은 사람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나는 물같이 쏟아졌습니다. 내 모든 뼈는 다 어그러졌습니다. 내 마음은 촛 밀 같이 녹아 내렸습니다. 내 힘은 질그릇 같이 말랐습니다. 내 혀는 이틀에 붙었습니다."(시22:14) 더 이상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십자가의 그 고통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전날 밤부터 온갖 고통과 수모를 당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는 극도의 긴장감으로 땀에 피가 섞여 나올 정도였습니다. 체포되신 후에는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불법 재판을 받으며 고통과 수모를 당하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채찍에 맞으시고, 가시면류관 쓰시고, 주먹질 당하고, 욕설을 듣고, ... 당시 로마 군병들의 채찍은 기다란 가죽 끝에 쇠붙이가 달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려치면 온몸을 휘감았습니다. 그리고 쇠붙이가 살에 박히며 살점을 뜯어내고 온몸은 피투성이가 됩니다. 가시면류관은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해 가시로 왕관처럼 만들어 씌운 겁니다. 그 가시가 예수님의 머리와 얼굴을 찔러 피범벅이 될 정도였습니다. 그 후에는 자신이 매달릴 60kg가 다 되는 십자가를 몸소 메고 빌라도 법정에서 사형장 언덕까지 1km 정도의 길을 걸어가야만 했습니다. 맨몸으로 가도 숨이 가쁜 언덕길을 그 무거운 십자가를 메고 가셨음을 생각하면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그 언덕 꼭대기가 바로 골고다입니다. '골고다'는 '해골'이란 뜻입니다. 멀리서 보면 꼭 해골같이 생겨서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갈보리'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둘 다 같은 말입니다. 골고다는 히브리어이고, 갈보리는 라틴어에서 유래합니다. 골고다 언덕에 올라간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을 당하십니다. 본문은 그 광경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그 고통의 와중에서도 마지막 우리에게 최후의 일곱 가지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그것을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 부르는데, 그 중에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본문 3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놀라운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그 고통의 한 가운데서 이렇게 기도하셨을까요?

여기 본문 34절은 무슨 말로 시작됩니까? "이에"라는 단어로 시작됩니다. 여기서 "이에"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33절을 보면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이에")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그 순간 주님의 입에서 뛰쳐나오는 기도가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였습니다. 예수님을 땅 위의 십자가에 내려놓고 손바닥에 못박는 바로 그 순간에, 그분은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기도를 하실 수 있었을까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 나를 고통 속으로 빠뜨린 사람을 쉽게 끌어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감정은 쉽게 용납되지 않습니다. 내 삶 속에, 내 삶의 장에, 그리고 내 깊은 내면에 이런 상처, 이런 아픔, 이런 좌절, 이런 배신, 이런 괴로움을 안겨다 준 사람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어요? 그러나 주님은 지금 자신을 십자가에 매달은 저들을 향해 용서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말을 한 번만 하신 것처럼 되어 있지만 원문에 보면 이것은 십자가에 달려 6시간 내내 고통 속에서도 순간, 순간 이 기도를 드리신 것입니다.

왼손에 못이 박힐 때 그분은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오른손에 못이 박힐 때 또 기도하십니다./"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발목에 못이 박히는 바로 그 순간 또 기도하십니다./"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창자가 뒤틀리고 온몸에서 피가 역류하는 그 고통, 처절한 아픔의 한 절정에서 그분은 또 기도하십니다./"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그분은 지금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순종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용서의 기도는 순종을 위해서 영혼 깊은 곳에서 쏟아내는 절규였을 것입니다. 용서가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차원에서 생각해 보았습니까? 용서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용서하라!" 그것은 내가 상대방에게 용서할 마음이 생기거든 용서하라가 아닙니다. 용서할 만한 느낌이 있거든 용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용서하라!" 명령입니다. 명령 앞에는 한 가지 응답이 가능할 따름입니다. 그것은 순종입니다. 그 순종은 의지적입니다. 용서의 문제를 감정적으로 접근하면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도 용서 못 합니다. 그러나 용서가 나를 향한 하나님의 명령이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용서할 수 없는 내 감정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마음 상태에도 불구하고 용서해야 합니다. 의지의 순종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지적인 접근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 고통의 한 복판에서도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먼저 손을 내 밀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보십시오. 바울은 그 관계를 로마서 5:10에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하나님과 적이 된 관계를 어떻게 회복할 수 있습니까? 우리로서는 관계를 회복할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관계의 물꼬를 터 주시기 전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 말씀이 로마서 5장 10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의 원수로 살았을 때 그의 아들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우정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요한일서 4장에 나오는 위대한 사랑의 선언문을 아시지요?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한일서 4:10-11)." 이 말씀에서 '사랑'을 '용서'로 바꾸어 읽어 보십시요. "용서는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용서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용서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용서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한일서 4:10-11)."

사랑을 용서로 바꾸어도 말이 되는 것은 사랑과 용서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 같기 때문입니다. 동전의 양면은 서로 새겨진 무늬가 다릅니다. 그래서 별개의 것으로 보이지만 모두 한 동전의 다른 면을 보여 주는 것뿐입니다. 사랑과 용서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사실입니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용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하려고 하면 필연적으로 용서의 문제에 부딪칩니다. 용서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랑할 수 없는 벽에 부딪치게 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직책을 화목하게 하는 직책이라고 했습니다. 화목의 사역은 필연적으로 용서를 요구합니다. 용서가 없는 곳에는 화목의 사역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화목이라는 것이 사이가 좋은 곳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적대관계에 놓인 사람들에게 일어나야 하는 것 아닙니까?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나를 해칩니다. 그 악독이 나를 해칩니다. 미워하고 있으면 잠이 오지 않습니다. 미워하고 있으면 마음의 평화가 깨집니다. 용서하지 못하고 있으면 태산을 지는 것 같은 무거운 인생의 걸음을 걸을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서 못할 일은 용서 못하는 마음이 아닙니까?."

예수님은 그런 의미에서 화목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23-24절에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이렇게 보면, 용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성패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데도 실패합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사랑도 할 수 없고,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화목의 직책도 수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예배에도 실패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기도생활도 할 수가 없습니다. 주기도문에서도 마6:12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용서의 문제는 이렇게 중대합니다. 단순히 그 사람 하나를 용서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틀려집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성공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해결 방법은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처럼 먼저 용서의 손을 내 미는 것입니다. 먼저 화해의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그 방법 밖에 없습니다. 이 문제를 뒤집어서 말하면 그 사람 하나 용서함으로서 우리는 성공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게 됩니다.

전에 전도사 시절, 섬기던 교회에 제직 수련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1월 달에 삼각산에 있는 감람산 기도원에서 열렸는데, 도착 예배 후 저는 제직을 인솔하여 산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한 조용한 곳으로 올라가 기도자리를 배정하고 저는 좀 높은 자리를 찾아 바위에서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가 한 오후 5시쯤 되었을까요. 제가 기도하는 자리에 누군가가 나를 보는 것만 같은 이상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갑자기 오싹한 생각이 들고 그 때부터 기도를 하려는데 기도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를 십여분 지났을까요, 정말 근처에서 무슨 짐승인지는 모르지만, 바위를 긁어대는 소리가 납니다. 내 주변에는 아무도 없지요. 산 속이지요. 잔뜩 겁을 먹고 있는데 그래도 전도사 체면에 그럴수록 더 큰 소리로 기도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도저히 불안해서 눈을 뜨고 주변을 보니까 아무것도 없고 짧은 겨울 해는 서서히 산자락 속으로 사라져버리고 있었습니다. 아래에서는 장로님들과 제직 4-50여명이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헛소리를 들었다 싶고 또 마귀가 기도하지 못하게 방해한다는 생각이 들자 부끄러워지더라구요. 그래서 다시 찬송을 몇 곡을 부르고 기도하는데 내 옆에서 아까 그 소리가 더욱 크게 나는데 야! 뭐 더 이상 기도할 수 없는 공포가 밀려오는데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벌떡 일어나서 '나 살려!' 하고 뛰어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밑에서 기도하던 분들에게 지금 짐승이 나타났으니 다 피하라고 했습니다. 체면이고 뭐고 가릴 것이 있나요? 기도원까지 어떻게 달려왔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뒤에 보니까 아까 함께 기도하러 같던 분들이 열외 일명 없이 다 내 뒤를 따라오더라구요. 나는 지금까지 목회하면서 그런 100% 순종하시는 모습을 아직도 보지를 못했습니다. 그 순종의 아름다움!?! 바위를 넘고, 산을 내려오는데 단숨에 다 뛴 것입니다. 성전에서 기도하시던 목사님이 이 갑작스런 우리들의 행동에 얼마나 당황하셨겠습니까? 자초지경을 듣던 목사님이 갑자기 우리 일행을 모아놓고 호통을 치십니다. "기도하러 간 사람들이 나무뿌리는 뽑지 못할망정 이게 무슨 망신이냐"고, 평양신학교를 나오신 분이라 평안도 사투리로 야단을 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뚫어지게 보시더니 나보고 다시 올라가 기도하랍니다.

참 부끄럽기도하고 뭐 어떻하겠습니까? 그 날 따라 겨울 산에 진눈깨비가 앞을 가릴 정도로 쏟아지는데 정말 난처하더라구요. 안 갈 수도 없지 않습니까? 발걸음이 안 떨어지지만, 밤에 혼자 산에 올라갔습니다. 기도가 되겠습니까? 가뜩이나 겁을 먹은데다 또 억지로 왔는데 얼마나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모릅니다. 그리고 왜 그렇게 무섭습니까? 한 밤에 진눈깨비에다 세찬 바람이 섞여 볼을 때리는데 그 순간, 차라리 꿈이었으면 했습니다. 기도가 안 나와요. 찬송도 했지만, 목구멍에서 맴돌다 말아요. 한 두시간이 지났나봐요. 그런데 말입니다. 제 앞 맞은 편에서 바람을 타고 낯이 익은 기도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바로 담임 목사님의 기도소리입니다. 저를 보내놓고 목사님도 저의 뒤를 따라 맞은 편 골짜기에서 기도하신 것입니다. 야! 눈물이 확 쏟아집니다. 얼마나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때부터 어떻게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한참 기도하다보니까 목사님이 그 깊은 산 속에서 내 곁에 서서 계시는 것입니다. 한 젊은 전도사가 사역의 현장에서 실수한 그것은 정말 잘 못한 것입니다. 제직을 연초에 계획을 세우고 산에 왔는데 두려움 때문에 모든 것을 헝크러 놓은 것은 어쩌면 책망 받을 만한 일이 아닙니까? 그러나 목사님은 기도의 자리에서 다시 실패하지 않기 위해 그렇게 노년임에도 불구하고 눈물로 나를 위해 기도한 것입니다. 사랑입니다. 그때 그 사랑의 배려가 없었다면 나는 아마 전도사 사역을 접었을지도 모릅니다. 용서의 긍극적인 목적은 사람을 살리고 세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이 가장 강합니까? 무엇이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까? 무엇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까? 썩은 밀알이 되는 것처럼 자기를 던져 희생하는 그 사람의 힘이 사람을 바꾸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은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십자가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앞에서 은혜 받으면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사람이 됩니다. 십자가 앞에서 은혜 받으면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려 헌신하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나 같은 것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는데 그 은혜가 너무 감격스러워 이제는 주님을 위해서 자기 생을 드리겠다고 하는 사람으로 바뀌어요. 아까운 것이 없어요.

주일 날 그저 한두 시간 내어 교회 와서 예배드리는 것도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하십니까? 아직도 십자가의 은혜를 모르는 분입니다. 헌금 몇 푼 하면서 그것 가지고 아까워하십니까? 주님을 위해서 헌신해야 될 일을 빤히 보면서 손가락 하나 까딱 안하고도 마음에 가책이 없습니까? 아직도 십자가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에 아직도 사로잡히지 못한 사람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에 사로잡히면 여러분은 그렇게 머물고 있을 수 없습니다. 순종하게 만듭니다. 헌신하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십자가에는 강하신 하나님께서 스스로 약해짐으로 죽음의 고통을 스스로 흡수 해 버린 신비한 사랑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 사랑에 우리가 한번 접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전부를 소유하게 됩니다. 그 사랑 때문에 텅텅 비었던 가슴에 놀라운 기쁨과 평안이 차 오르게 되고 그 사랑 때문에 이 세상을 두려워하던 사람이 담대함을 갖게 되고 그 사랑 때문에 불만족에 휩쓸렸던 사람들이 날마다 용서하며 찬송하고 기뻐하며 살 수 있게 됩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랑을 체험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십자가의 죽음은 능력이 있어서 우리에게 영원한 속죄를 안겨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순종하고 헌신하게 만들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의 손에 꼭 사로 잡혀 살게 만듭니다. 여러분, 진정한 용서가 어디 있는가를 알기를 원합니까? 갈보리로 올라갑시다. 예수님이 핏자국을 남기면서 걸어 가셨던 그 길을 따라갑시다. 그리고 마지막 숨을 거두시던 그 십자가 옆에 조용히 서서 그분의 피 묻은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을 한번 들어 봅시다. '하나님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옵소서. 저들이 자기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하나이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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