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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샘물(요 4: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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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온 것 같습니다.
지난주에 산에 가보니 진달래 꽃봉오리가 막 피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번 주에는 가는 곳곳마다 꽃들이 무리지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아파트 단지 앞의 개나리도 이미 핀 것을 보았습니다. 정확한 계절의 순환, 그리고 약속과 법칙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봅니다.
인생의 모든 것들은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운행되는 것을 봅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내 마음에 어떤 생각이 일어난다’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그 생각을 허락해 주셨고 또 그 생각이 이를 곳까지 우리의 마음을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온 것도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주셨고, 우리 마음에 그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의 의사를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결국 이 자리에 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보면서 이러저러한 생각들을 해 봅니다. 아침마다 꾸역이 나가서 저녁마다 꾸역꾸역 들어오는 사람들의 분주한 모습을 봅니다. 자신들 앞에 놓여 있는 시간과 환경과 능력이라는 징검다리를 밟으며 추구하는 삶의 목표를 향해 달려갈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 드는 생각은 저렇게 많은 수고를 해도 과연 그 마음의 소원을 이룰 수 있을까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아무리 열심히 수고해도 방향이 바르지 못하다면 그 수고가 어느 날 가슴 아프게 하는 마음의 상처가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바람에 펄럭이는 종이를 쫒아가 보았는데 그것이 집어보니 휴지에 불과했다고 생각하면 그 달려갔던 수고의 아픔을 어떻게 견딜 수 있겠습니까? 삶의 바른 가치를 향한 뜨거운 열정은 의미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내 삶의 모든 수고를 다른 방향으로, 다른 가치 있는 곳에 도달할 수 있도록 쏟을 수 있을까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믿음대로 살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4장> 전체의 배경 속에서 오늘 읽은 본문의 내용이 진행됩니다.
예수님이 어느 날 사마리아 지역의 ‘수가’라고 하는 마을을 지나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 수가성의 바로 우물곁에 예수님이 계시는데 한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먹을 것을 구하러 동네로 내려갔고 예수님이 우물가에 혼자 있는데 여인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인은 사마리아 사람이었고 이 사람은 제 육시라고 하면 정오쯤 되는 시간에 물을 길으러 왔습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의 사막기후에 쨍쨍히는 햇볕, 그 정오의 시간에 모든 것을 우리는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정말 어려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어려운 시간에 이 여인이 물을 길으러 왔다는 것은 뭔가 범상치 않다는 것입니다. 햇빛이 그을리는 새벽 오전 녘이나 아니면 저녁시간에 와서 물을 깃는 것이 정상일 텐데 쨍쨍히는 햇빛가운데 사람하나 다니지 않는 뜨거운 햇빛 속에서 물을 길으러 왔다는 것은 뭔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갑자기 물이 떨어졌을 수도 있지만 뭔가 이상한 느낌을 주게 됩니다.
예수님과 더불어서 대화가 시작됩니다. 예수님이 여인에게 말합니다.
“나에게 물 좀 주시오”그랬더니 여인은 갑자기 마음에 무슨 분노가 폭발하는지 “당신은 유대인인데 어찌하여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합니까?”라고 얘기합니다.
‘유대인인데 왜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는가?’ 하는 쏘아 붙이듯 비난하고 조소하는 내용은 다름이 아닌 역사적인 배경 속에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
예수님은 유대인이었는데 예수님이 지나가고 있는 땅은 사마리아였습니다.
사마리아는 어떤 지역이었느냐 하면 이스라엘이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나라가 분열이 됩니다. 마치 우리나라 남북처럼 분열이 되는데 이 남유다는 존속이 되고 북이스라엘이 먼저 앗수르라는 나라에 멸망이 됩니다. 그런데 이 앗수르라는 나라가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킬 때 거기서 생긴 혼혈민족이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사람은 이 사마리아 사람을 개 취급을 했습니다. ‘너희는 민족의 혈통을 더럽힌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와 같이 사람취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한편 남유다 조차도 조금 시간이 가서 바벨론이라는 나라에 멸망을 당했습니다. 그러니까 북이스라엘은 조금먼저 앗수르에게, 남유다는 조금 늦게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했는데 이 남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하고 포로로 사람들이 잡혀갔어요. 그런데 그 당시에 남유다를 지배하고 있었던 바벨론이 페르시아라는 나라에게 또 정복을 당했습니다. 페르시아가 근동의 패자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바벨론의 속국이었던 유대가 자연히 페르시아의 속국이 됩니다.

이때 페르시아의 고레스라는 왕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종교 유화정책을 썼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정복하고 있는 모든 지역에 유화정책을 쓰면서 그 중의 하나가 종교유화정책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사람들을 유다로 다시 돌려보내면서 그들이 가서 섬기는 하나님에 대해서 성전을 건축하고 ‘마음대로 하나님을 섬겨도 된다.’하고 자유를 칙령으로 내렸습니다. 유대인들은 기뻐서 바벨론 포로상태에서 해방되어서 본국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으로 왔고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게 됩니다.

B.C. 536년에 성전건축을 하게 되는데 그때 사마리아 사람들이 쫓아왔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자손의 피가 흐릅니다. 우리가 비록 이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되는 과정가운데 이렇게 생긴 민족이었지만 우리가 원해서 생긴 것도 아니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피가 흐르니 우리도 성전을 건축하는데 도움이 되게 참여하게 해 주십시오.”
그랬더니 교만한 유대사람들이 어떻게 했냐하면 “너희는 민족의 피를 더럽힌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가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면 하나님의 성전이 거룩하게 되지를 않는다. 너희는 안 된다.”하며 거절했습니다.

그랬더니 사마리아 사람들이 화가 나서 군사를 데리고 와서 예루살렘 성전건축 하는 것을 방해했어요. 그럼으로 말미암아 성전건축이 무려 14년이나 연기가 되었습니다. 14년이 연기되는 과정 속에서 그 뜨거웠던 열정이 흐물흐물 식어지고 그 성전건축의 열기가 식어지면서 민족의 구심점으로 성전을 짓고 민족의 부흥을 이루려고 했던 계획이 무너졌습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유대인들에게 사마리아 사람들은 더 눈에 가시처럼 여겨졌어요.

그런데 또 무슨 일이 일어났냐면 B.C.128년에 유대인들이 가서 그리심산에 있는 사마리아인들의 성전을 무너뜨렸어요. 왜냐하면 이 사마리아 사람들은 자기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는데 동참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따로 예배드릴 수 없으니까 그리심산에 성전을 세우고 거기에서 하나님을 예배했던 겁니다. 그런데 이 유대사람들이 두 곳에 하나님의 성전이 있을 수 없다고 해서 그리심산에 있는 사마리아 사람의 성전을 무너뜨렸어요. 그러니까 사마리아 사람이 얼마나 분노가 충천하겠습니까? 이런 관계와 긴장 속에서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들이 인근에 지역을 두고 있던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사마리아지역을 지나가면서 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니까 사마리아 여인인 이 사람이 탁 하고 튀어나온 겁니다.
"당신은 우리를 개처럼 여기다가 목마르니까 나에게 아쉬워서 물을 달라고 하느냐?"
이 사람은 갑자기 마음속에 있었던 분노가 예수님에게 쏟아졌던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개의치 않고 그 여인에게 편안히 천국의 복음에 대해 설명해 주신 겁니다. 그리고 그 여인에게 믿음의 고백을 받고, 그 여인에게 영원한 생명의 능력이 부여되고, 이 여인은 감격한 마음을 혼자 가질 수가 없어서 오히려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가서 사람들을 데려다 예수님 앞에 이끌어 와서 같이 구원을 받는 역사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이제 이와 같은 모습 속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주는 것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이다. 영원한 생명의 물이다."라고 얘기하심으로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수-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내용을 이 여인에게 가르쳐주신 내용을 좀 더 생각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첫 번째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은 육신의 필요 때문에 허덕거리는 인생의 모습과 예수님의 자비로운 모습입니다.
이 여인은 뭔가 필요했습니다. 물이 필요했어요. 그런데 사람에게 나타나기 싫었어요. 왜냐하면 오늘 성경을 읽다가 그 이유의 내용까지 봐야 하는데 길어서 보지를 못하고 앞부분만 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네 남편을 데려와라." 그랬더니 이 여인이 뭐라고 대답했느냐하면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냐하면
"네 남편이 다섯이나 있지 않느냐? 그런데 하나도 네 남편이 아니니라." 그러니 그 여인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보는 것처럼 이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나 있지만 한 사람도 정식 남편이 아닌 부도덕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를 질시하고 비난하고 조롱하는 것이 너무 견딜 수가 없어서 아침녘이나 저녁녘에 물 길으러 올 수가 없고 대낮에 사람이 없는 틈에 몰래 물을 길으러 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피곤하고 짜증나는 삶이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피곤하고 짜증이 나면 날카로워집니다. 상처가 많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공격적이 됩니다. 작은 일에도 공격적이 되고 아무 이유 없이 분노합니다. 감정의 폭발 출구를 찾게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우물가에서 물 좀 달라고 하니까 '잘 걸렸다. 너 한 번 당해봐라.'
하고 예수님께
"당신은 유대인이 사마리아 사람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느냐?" 하고 감정이 폭발되었던 것입니다.
가뜩이나 화가 나서 죽겠는데 너 잘 걸렸다 이거죠.
우리는 사람을 보면 가엾습니다. 허덕거리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참 가엾습니다.
가끔 보면 남편들이 밖에 나갔다가 돌아와서 괜히 집에 짜증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짜증내는 것 가운데 제일 안 좋은 소리가 뭐냐 하면 아내에게 "당신은 집에서 매일 놀면서......" 이 이야기를 하면 부부관계가 깨지는 겁니다. 아내들 매일 놀지 않습니다. 집에서 살림하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괜히 짜증나니까 ‘집에서 매일 놀면서 뭐도 안해놨다, 냉장고도 정리 안해놨다.’ 이러면 이제 큰 일 나는 겁니다.
아내가 그 얘기를 들으면 정말 모든 마음의 감정이 폭발됩니다. 그런데 그 말하는 남편을 가만히 보세요. 얼마나 불쌍한가. 밖에서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고 오면 정말 아내가 싫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짜증은 나는데 다른 사람에게 풀 데가 없으니까 아내에게 꼬투리 잡을 것이 없으니까 괜히 그런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아내들은 남편을 이해해 주어야 합니다.
제가 말씀드렸지요? 오늘도 우리 다시 한 번 이해하는 연습합시다.
"환자구나." 늘 말씀드리지만 환자니까 그런 겁니다. 환자가 아니면 어떻게 그런 얘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환자니까 그런 얘기를 하는 겁니다.
환자가 아니면 그런 비정상적인 얘기는 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아내에게 '집에서 놀면서' 이런 얘기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환자니까 하지요. 언제나 말하지만 입 밖에 내지 말라고 얘기했죠? 속으로 환자구나 생각하고 입 밖에는 내지 마세요.
그리고 또 가끔가다 보면 남편이 집에 오면 아내들이 아주 짜증을 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남편들도 밖에서 얼마나 피곤합니까? 하기 싫은 소리해야 되고, 듣기 싫은 소리 들어야 되고, 가기 싫은 곳 가야되고 정말 힘든 삶이거든요.
집에 와서 위로 받으려고 했더니 집에서 기껏 있다가 또 아내들은 아내들대로 스트레스 받는 일들이 참 많죠. 그러니까 남편에게 괜히 짜증을 내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남편들은 또 어떻게 해야 됩니까?
아니 피곤하게 들어온 사람에게 왜 짜증내는 거야?
아내들이 어떤 일을 가지고 짜증을 내느냐하면 잘해준 것은 생각도 하지 않고 십년 전에 못해준 것 까지 생각해서 짜증을 냅니다.
그럴 때 참 난감합니다. 그때 남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가 성하면 그렇게 얘기하겠습니까? 성한 사람은 그렇게 얘기하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남편들도 자 연습 한번 합시다.
“환자구나!” 환자니까 그런 겁니다.
환자는 좀 봐주는 겁니다. 환자는 아픈 사람이니까 봐주잖아요.
여러분 제가 늘 주례를 할 때마다 결혼은 이해하기로 결심하는 예식이라고 하거든요. 이해하기로 이 악물고 결심하지 않으면 사람 같지 않아서 어떻게 같이 살 수 있겠습니까? 정말 이해하려고 결심하지 않으면 도저히 봐줄 수가 없는 겁니다.
“내가 당신을 이해하기로 결심합니다.”하고 각오하는 것이 결혼생활입니다.
그러다보면 이해 안 되는 것도 이해되고 그러다보면 모든 것이 또 마음속에 순하고 부드럽게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부부만 그런 것이 아니고 애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애들도 괜히 부모에게 짜증내는 것 보면 애들도 뭔가 스트레스 받는 것이 있는 겁니다. 애들도 환자예요. 머리 쓰다듬어주면서 속으로 ‘환자구나!’하면서 애들도 또 이해해주고 애들도 또한 그렇습니다.
부모가 자기도 공부 못했으면서 애들보고 공부잘하라고 합니다. 성적표나 보여주면서 공부 잘하라고 하면 몰라도 부모는 성적표도 안 보여주면서 애들 성적표는 다 보고 공부 잘 하라고 그런단 말입니다. 그럼 애들도 부모를 이해해 줘야 하지 어떻게 합니까?
‘우리 부모가 스트레스 받았구나! 옆집 아주머니가 와서 자기애 공부 잘 한다고 자랑했구나!’ 하고 이해하고 ‘우리엄마가 또 스트레스 받겠구나!’ 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 엄마도 환자야. 우리 아빠도 환자야’ 하고 생각하면 또 이해가 되겠지요.
사람이 상태가 좋으면 너그러워 집니다. 자꾸 어려우니까 사람이 날카로워지는 겁니다. 이해해줘야 합니다. 왜냐하면 안타깝고 불쌍하잖아요.

오늘 본문을 보면 이 여인은 정말 가련한 여인입니다. 예수님이 한 눈에 그걸 모르겠습니까? 예수님은 그 마음을 훤히 보고 계시는데 한 눈에 그걸 모르겠어요.
예수님은 그렇게 탁 쏘는 여인에 대해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품으셨던 겁니다.
네가 만약에 나를 알았다면 나에게 물을 달라고 했을 것이다. 네가 나에게 그렇게 날카롭게 얘기하지 않고 다시 나에게 물을 달라고 했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라고 말씀했지요. 그러니까 네가 나를 하나님의 아들-하나님이신 것을 안다면 너는 나에게 무엇인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은혜의 샘물을 구했을 것이다. 그 샘물은 네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될 것이다. 하고 그 여인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랬더니 여인은 금방 변화가 됩니다. 그런 물을 내게도 주사 목마르지 않고 여기에 물 길러 오지 않게 하시옵소서. 그러면서 이상하게 생각했어요. 이상하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깨닫지 못하고 ‘야 나도 그런 물 먹어봤으면 좋겠다.’
영원한 생명의 영적인 물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데 이 여인은 그것을 육신의 물로 알아들었던 것입니다. 육신의 시각을 가지고 영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는 아직까지는 어리석은 상태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대하여 따뜻한 마음으로 다가갔던 겁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는 우리 주님의 사랑과 자비의 모습입니다.

그럼 두 번째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예수님께 설복당하는 여인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자비와 설복-그 은혜에 감복당하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주변에서 있는 사실을 가지고 그 여인에게 복음을 설명했던 것입니다.
전에 어떤 분이 제 방에 오셨는데 사회적 지위도 괜찮은 분인데 이상하게 왜 그렇게 떠는지 모르게 떠시더군요.
“왜 떠십니까?”하고 물었더니 “죄를 많이 지어서 그렇습니다.”라고 하시더군요. 농담으로 하시는 말이겠지요. 그런데 사실 죄를 많이 지었으니 떨 법도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설 때 좀 마음이 두렵고 떨리지 않습니까?
하나님 대신 목사 앞에 섰다고 생각하니 괜히 마음에 떨림이 있으셨겠지요.
그래서 그런 말 했어요. “저는요 아무리 들여다봐도 아무것도 안보입니다. 그러니 죄 지은 것 모르니까 괜찮습니다. 떨지 마십시오.”하고 제가 얘기했습니다. 저도 편안하라고 웃고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말씀을 드릴 테니 한 번 맞혀보세요. “제가 지금 목사 된지 18년 됐거든요. 그리고 이 교회에서만 16년 있었는데 제가 기도도 열심히 하고, 금식기도도 하고, 철야기도도 하고 여러분의 마음을 보면 보일 것 같아요, 안 보일 것 같아요?”
다시 한 번 물어 볼게요.
“제가 목사 된지 18년 됐는데 18년 됐으면 성경도 어느 정도 봤을 거고 또 기도도 어느 정도 했을 것 아닙니까? 제가 열심히 금식기도하고, 열심히 철야기도하고, 여러분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여러분의 마음이 보일까요, 안 보일까요?”
그런 것도 모르십니까? 보여요? 안보여요?
안보입니다. 봐서 뭐해요, 여러분 다 죄인인데. 여러분 마음에 있는 더러운 죄를 봐서 뭐해요. 그렇죠? 우리 인간은 다 죄인이잖아요. 저는 아무리 봐도 안보이더라고요.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남의 마음에 있는 더러운 죄악의 모습을 봐서 뭐합니까? 그것 알아서 그 사람에 대해 자꾸 안 좋은 점만 보이면 어떻게 그 사람과 기쁘게 지낼 수 있겠습니까? 안 보이는 것이 축복입니다.

여러분 나는 기도하니까 당신의 마음이 보인다하고 얘기하는 사람은 100%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시면 딱 맞습니다. 안 보여요. 그게 하나님의 축복이니까요.
우리 인간은 원래 죄가 마음에 있어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죄를 용서받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인간은 원래 부패한 마음이기 때문에 죄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 마음 봐야 좋은 것이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마음을 못 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한테 오셔서 전혀 떨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라요. 예수님은 우리 인간을 만드신 분이고 인도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마음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여인에게 얘기하신 것입니다.
“남편을 데려오라.”
“없습니다.”
“네 남편이 다섯이나 있지 않느냐? 그러나 모두가 네 남편이 아니니라.”
예수님이 이 여인의 모든 것을 아는 것을 볼 때 이 여인은 깜짝 놀랐습니다.
“주여 당신은 선지자니이다.” 그러니까 당신은 모든 것을 아는 선지자라 - 이 여인은 예수그리스도가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야 구세주임을 몰랐고 선지자정도는 되리라 이렇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고백하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 번도 만난 적도 없고, 대화해 본 적이 없는 예수님이 나에 대해 다 알고 계시다는 것-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 여인은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다른 사람의 모든 면을 다 알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우리 교역자들에게 꼭 부탁을 드리는데 혹시 성도들하고 얘기할 때 “너무 많은 것을 알려고 하지 마십시오.”라고 꼭 부탁을 드립니다. 너무 많은 것을 알 필요가 없잖아요. 우리가 알 만큼만 알자는 그런 뜻이 아니고 정말 우리 인간들의 모든 모습들을 보고, 그 가운데 하나님을 사모하는 모습을 보고, 그 가운데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러분 어떤 집에 가서 깨끗이 도배한 것을 보고 ‘아! 도배 새로 했네, 아! 깨끗하다’ 하고 기분 좋게 살면 되죠?
그런데 도배한 것을 보고 저 속은 어떨까 하고 후벼보고 하면 좋겠습니까?
도배 깨끗이 한 것을 보고 속이 얼마나 더러웠을까 하고 뜯어서 한 번 열어보고 “아휴‘ 이렇게 더럽게 살았군요.” 하면 뭐가 좋겠습니까?
여러분 ‘우리의 의는 더러운 옷과 같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깨끗하면 얼마나 깨끗하겠습니까?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비한 마음을 가지고 주의 뜻을 이루는 것이 우리가 해야 될 유일한 일일 뿐입니다.
이제는 예수님께서 인생의 모든 모습을 아시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물을 다오 네가 나를 알았으면 나에게 물을 달라고 했을 것이다. 나는 너의 정체를 안다. 그리고 신령과 진정한 예배를 드려라 그리고 내가 주님이니 나를 믿으면 네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이것을 차례로 가르쳐주셨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인의 태도입니다. 처음에는 틀리기는 했지만 관심을 가지고 응답을 하고 열심을 가지고 시도를 했을 때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던 겁니다.
이 여인의 태도를 보면 우리 인간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적대적으로 예수님을 대했잖습니까?
“당신이 유대인인데 어찌하여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합니까?”
그리고 그 다음에는 적대적인 마음은 없어지고
“그럼 나에게도 그 물을 주세요.” 이와 같이 엉뚱한 대답을 했죠. 그리고 조금 있다가
“당신은 선지자니이다.”
이제 고백하기 시작해요. 그러더니 예수님께서 천국의 비밀을 가르쳐주실 때 정말 그 비밀을 믿고 감동을 받고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러더니 나가서 다른 사람을 예수님 앞으로 인도해내는-기쁨을 같이 나누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을 보게 되면서 그 마음에 영원한 생수를 소유하게 되면 다른 사람까지 나누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겁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그와 같은 과정을 겪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들의 모든 마음을 아시는 분입니다.

<누가복음>을 보게 되면 베드로가 밤이 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어요. 그러더니 예수님이 깊은데 그물을 내려라 해서 내렸더니 고기를 많이 잡아서 자기 배에 채우고 남아서 친구의 배에까지 가득 채워줍니다. 땅에 내려와서 뭐라고 얘기 하냐면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고기를 많이 잡아서 감사한 것이 아니라 지기의 죄를 고백하고 주님을 인정했던 것입니다. 즉 우리 인생의 모든 일들은 인생의 일을 가지고 영원한 주님을 깨닫게 하는 과정임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일이 뭐냐 하면 생각을 고정시켜 놓으면 발전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을 고정시켜 놓지 말고 늘 우리들에게 변화와 진보를 위해서 사고의 개념을 열어놓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다보면 삶이라는 것은 이러저러한 많은 어려움도 기쁨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삶의 기쁨과 어려움을 겪게 되지만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변화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내가 어느 날 예수님에 대해서 매우 적대적인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 마음이 점점 누그러지더니 ‘아, 그런가?’ 그러더니 ‘아, 그렇습니다. 정말 그렇군요.’ 하고 다른 사람에게까지 예수님을 소개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가장 큰 축복은 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 저도 한 해 한 해 나이를 먹으면서 젊은 목사님의 푸릇한 아이디어가 많은 사고에 대해서 점점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제가 일 년, 이 년 교회를 섬기면서 느끼는 것은 목사가 아닌 성도들의 입장에서 보는 교회와 삶의 모습이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 시각보다 성도들의 시각을 중요하게 참고해야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점점 깊어지고 있는 것을 봅니다.
결국 우리의 삶 속에 우리의 생각이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하고 하나님께 대해서 내 마음의 문을 열어놔야 합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 하고 단정시키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지만 주님께서 나를 바꿔주시면 언제든지 나는 새로운 은혜를 향해 나아갈 수 있어.’하고 느껴야 합니다.

마지막 새로운 삶의 가치를 찾고 달려가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오늘 길어서 읽지 못해서 안타까운데 <요한복음 4장>뒤를 보게 되면 어떤 얘기가 나오는가 하면 이 우물가에 물 길으러 왔던 여인이 물동이를 버려두고 그리고 동네로 내려가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더니 사람들을 데리고 예수님 앞으로 데려왔어요.
예수님이 말씀을 전할 때 그 사람들이 같이 은혜를 받고 변화를 받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놀라운 변화입니다.
새로운 삶의 가치를 찾고 달려갑니다.
물 길으러 왔던 여인이 물동이 내려두고 새로운 삶의 가치를 가지고 달려간다는 말입니다. ‘절대 진리의 전파사명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따라서 합시다. [절대 진리의 전파사명성]
여러분들이 절대적인 진리라고 생각하셨으면 그것을 전파하고자 하는 사명성이 생깁니다.
절대 진리는 전파에 대한 사명감을 부여합니다.
여인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천국의 비밀을 깨닫고 하늘의 백성이 되고 마음이 기뻤습니다. 그냥 있을 수가 없어요. 동네를 향해 내려갑니다. 물 길으러 왔던 것 잠시 놔두고 동네를 향해 내려가요. 놀라운 변화입니다.
첫째, 이 여인은 부끄럽고 창피해서 사람의 얼굴이 보고 싶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본인이 직접 찾아갔어요. 얼마나 큰 변화입니까?
둘째, 이 여인이 사람이 보기 싫었던 것은 사람들이 여인을 인정해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에게 가서 같이 오라고 했을 때 사람들이 그 여인의 말을 듣고 예수님 앞에 왔다는 것은 사람들이 여인을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오늘 초청받아 오셨는데 옆에 초청한 사람이 거짓말만 하고 나쁜 사람이고 정말 형편없는 사람이면 그 사람 말을 듣고 여기에 오셨겠습니까? 절대 안 오셨을 겁니다.
하다못해 길거리에서 만나서 약속해서 온 분이라도 왠지 모르게 그 분이 믿을만한 사람인 것 같아서 온 것입니다. 나를 초청한 사람이 믿을만한 것 같으니, 아무도 모르는데 어디를 가겠어요. 사람 믿고 가는 거 아닙니까?
그렇다면 동네 사람들은 이 여인을 믿고 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동네 사람들에게 신뢰를 받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사람에게 질시 받던 여인이 사람들에게 순간적으로 신뢰를 받는 사람으로 바뀌어졌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지도 않는 사이에 사람들의 평가가 달라졌겠습니까? 이 여인이 그들에게 와서 예수님께 가보자 하는 말에 권세가 실려 있었던 것입니다. 능력도 바뀌어졌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도 바뀌고, 사람의 능력도 바뀌고, 할 수 있는 일도 바뀌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새로운 능력과 은혜의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여러분 여기 찻잔이 있는데 차가운 찻잔이지만 여기에 뜨거운 물을 부으면 어떻게 될까요?
따뜻한 차를 부으면 찻잔은 따뜻해집니다.
우리가 냉랭한 사람이지만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따뜻한 은혜를 부어주시면 우리의 마음도 따뜻해지는 겁니다. 물을 다 따라내면 찻잔이 또 식겠죠? 거기에 또 따뜻한 차를 부으면 또 따뜻해집니다. 우리가 식지 않을 때-끊임없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주시면 우리 마음이 이렇게 훈훈해지는 겁니다.

이제 오늘 이 말씀을 드리고 맺으려고 합니다.
밤에 설교를 쓰다가 밖에 나가보았습니다. 그 깜깜한 어둠속에서도 어두운 공간을 들여다보니까 뭔가 구별이 되더군요. 보다 더 어둠의 농도가 조금 옅은 데는 공간, 하늘같은 허공이고 어둠의 농도가 조금 더 깊은 데는 어떤 사물이 있는 곳입니다.
어둠속이라고 해서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어둠속에서도 최소한의 희미한 빛이 있기 때문에 뭔가 흐릿한 윤곽의 구별이 있습니다. 농담으로 구별이 됩니다.
여러분 한 번 보세요.
어둠속에서도 직시해서 보면 뭔가 구별이 됩니다.
여러분 점점 밤이 깊어지고 사위가 조용해지면 모든 소리가 잦아들면서 안 들리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텔레비전도 끄고, 전화기도 끄고, 그리고 주변의 시끄러운 소음도 없어지고, 사람의 얘기도 없어지면 안 들리던 소리들이 들립니다. 풀벌레 소리도 들리고, 나뭇잎 스치는 소리도 들리고, 바람 쓸리는 소리도 들리고, 풀잎 비벼지는 소리도 들리고, 이슬이 내리는 소리도 우리에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조용하면 아주 미세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삶이 너무 분주하다보니까 하나님의 세미한 아주 예리한 음성을 듣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어느 날 우리 마음에 고요를 이루고 하나님 앞에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정직히 우리 마음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우리 마음의 정적과 고요를 이룰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전까지 보지 못했던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그와 같은 것을 듣고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에는 눈에 보이는 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도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베풀어주신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그와 같은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주셨어요. 왜냐하면 우리 인간들이 죄 때문에 도저히 하나님께 갈 수가 없어요. 죄를 깨끗이 씻어내야 하나님께 갈 수 있는데 문제는 우리 인간의 능력으로는 죄를 씻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보내서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해서 지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으시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는 씻겨 지고,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셔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고, 주님의 의에 대하여 다시 살아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고, 우리마음에 끊임없이 솟아나는 생명의 물-영원한 생수를 마시며 갈증 없이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 이 자리에 처음 오신 분들, 예수그리스도를 믿으시길 바랍니다. 마음에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삶의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우리 주님으로 말미암아 용기를 얻고, 이 여인이 위축되었던 마음을 풀고 사람에게 달려갔듯이 사람을 피하던 사람이 그 사람들을 변화시켜 데려올 수 있는 능력이 생겼듯이 우리 삶에도 이러한 능력을 소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귀한 은혜가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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