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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겟세마네의 기도(눅 22:4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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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세마네의 기도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눅 22:42-43)

I. 본문 설명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말할 때 십자가를 지고 피 흘리며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시는 그 고통의 장면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넓은 의미에서 보면 예수님의 생애 전체가 고난 받으시는 생애였습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신 것부터 시작해서 결핍과 고통 속에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존재했던 것, 그리고 율법 아래 복종하시며 우리 인간들의 종이 되어서 일생을 섬기며 사셨던 것, 마지막에 하나님이신 그분이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고 결국은 무덤에 누이게 되신 그 사건까지 전 생애가 고난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온갖 일로 봉사하시면서 자기를 희생하시고서도, 결정적으로 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제 사력을 다해 마지막 남은 진액을 짜서 기도에 헌신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이 예수님의 고난 가운데 흔히 잊기 쉬운 고난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기도 생활의 고난입니다. 더욱이 잡히시기 전날 밤에 자기를 드리는 헌신 속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드린 이 겟세마네의 기도는 단지 승리하는 사역을 위한 헌신적인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그 기도는 하나님과 예수님 자신 사이에 통로가 되었고 그 통로를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다음날 당신이 지셔야할 그 끔찍한 십자가의 고난의 형벌을 자신의 온 영혼으로 충분히 맛보셨습니다. 그래서 골고다 언덕에서의 죽으심의 고난이 육체(肉體)의 고난이었다고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 영혼(靈魂)의 고난은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헌신적인 기도를 통해서 이미 예수님의 마음속에 깊숙이 파고 들어왔습니다.

II. 감당하기 어려운 쓴 잔(盞)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기도 가운데 우리의 마음에 남는 기도는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는 대목입니다. 우선 예수님께서는 이 쓴 잔을 자신에게서 옮겨달라고 간청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뜻이라면”이라는 단서를 달고, 만약 이 십자가의 잔을 마시지 아니하고도, 내 육체가 십자가에 매달리지 아니하고도, 이 세상에 있는 사람을 구원하실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 하나님께 있기만 하다면, 의심할 바 없이 이 말씀은 십자가를 지지 말게 해달라는 청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 앞으로 점점 다가오는 이 십자가를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신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 뒤에 나오는 구절, 즉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하는 부분에 오히려 무게 중심이 실려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1. 이 잔을 내게서 옮기옵소서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는 구절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합니다. ‘하나님이신 그분, 곧 예수님의 마음속에도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이 있었구나!’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기도를 드리는 심정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죽는 것이 두려워서 하나님 앞에 죽지 않게 해달라고 매달리는 그런 기도의 차원이 아닙니다. 그분은 참 하나님이셨지만 연약한 육체를 지니신 참 사람이시기도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살아오신 그 온유하시면서도 전투적인 생애를 되돌아보면서 그분이 이 순간에 자신의 목숨을 두려워하셨을 것이라고 믿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사랑하는 제자들을 가르칠 때에 하나님의 나라의 영생은 목숨을 버림으로써 취하게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많이 가르쳤습니다. 게다가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다는 사실을 힘주어 강조하셨습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 10:39) 그러셨던 그분이 죽는 것이 두려워서 이 잔을 내게서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면 우리가 그 해석을 어떻게 신뢰할 수가 있습니까? 결코 그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평소에도 언제나 신중하게 하나님의 뜻을 물으면서 사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는 이 사건이 자기를 이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의 거룩한 구속을 이루는 결정적인 시점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 앞에 부복하여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2. 죽음보다 더 큰 고통

“이 잔을 내게서 옮기옵소서”라는 구절을 해석하는 문제는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죄 가운데, 죄 아래서, 죄를 짊어지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솔직히 주님을 믿기 이전에도 하나님의 진노 아래 살았고, 주님을 믿은 이후에도 하나님과 평화한 상태보다는 불화한 상태를 더 많이 경험하면서 살아온 것이 일반적인 그리스도인의 영적생활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제일 크고 무서운 것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경험해보지 못하신 순결한 어린양이셨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에는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셔야 합니다. 이것은 전지전능하신 성자 예수님께서도 단 한 번도 체험해보지 못한 쓰라린 잔입니다. 그것을 짊어지시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로, 예수님께서는 죄와 친숙하고 친화적인 부패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몸을 입었지만 사실은 죄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순전한 분이셨습니다. 그러니까 거룩하신 주님께서 죄를 짊어 지셨습니다. 인류의 죄가 그분의 죄로 전가(轉嫁)된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바로 그런 죽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에게 몇 번 죽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쓰라린 죽음이니, 그분에게 전혀 생소한 경험입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친교 속에서 사셨던 분입니다. 영원 전부터 그리고 바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그 순간까지 요한복음 8장 29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셨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 죄를 짊어지고 나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합니다. 그리고 그 심판은 단지 죽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매달린 그 극한의 순간에 하나님께서 그분을 외면(外面)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성부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斷絶)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도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것입니다.

영원 전이나 혹은 죄악이 난무하는 이 세상에서 죄인들에게 에워싸여 계시는 그 순간에도 예수님께서는 한 번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그런 기도를 드리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밤이 지나고 나면, 그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에 직면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시옵소서”라고 할 때, 염두에 두셨던 견디기 힘든 고통은 육적(肉的)인 영역이기보다는 영적(靈的)인 영역에 속한 것입니다. 영생이신 그분에게 죽음은 그토록 낯선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 아버지의 진노 아래로 들어가서 형벌에 종속되는 것은 그분의 인성(人性)은 물론 신성(神性)에도 부합되지 않는 고통이었습니다. 그것은 굉장히 무시무시한 극치의 고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쓴 잔을 마셔야만 했습니다.

III.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기도

이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가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그 사건의 서막(序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튿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 못 박히신 그 사건은 그 전날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미 거두신 그 승리의 종막(終幕)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목숨을 건 절박한 사투의 기도를 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리셨습니다. 그리고 이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의 모습에서 엿볼 수 있는 진수는 바로 복종의 기도였다는 것입니다.

1. “그러나”의 기도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예수님께서 자기의 소원을 하나님께 피력하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말씀에서 “그러나”라는 접속사를 유념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복종의 기도를 먼저 드리셨습니다. 모든 기도를 드린 후에는 항상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보여주신 복종의 기도였습니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기도할 수 있고 하나님 앞에 해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아니면 절대 안 된다는 식으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의 올바른 도리가 아닙니다. 농구선구가 화려하게 드리블하며 공을 몰고 가다가 골대를 향해가서 집어넣으면 점수가 나오는 것처럼 “슛은 제가 쏠 테니까, 하나님 패스나 잘하십시오.”하면서 하나님의 뜻과 내 뜻 앞에서 끝까지 내 고집을 피우며 관철시키려 들어서는 안됩니다. 결혼을 위해 기도하는 청년들은 이상적인 배우자의 조건을 조목조목 나열하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하고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복하려는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소원을 올려드려야 합니다(단 3:18). 자신이 원하는 뜻과 하나님의 뜻이 충돌하면, “하나님, 내 뜻을 버리겠사오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내 인생의 길을 인도해 주십시오.”라고 고백해야합니다. 복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의 작은 뜻들조차도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노심초사(勞心焦思)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좋아서 하는 그 일은 십자가일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자신이 하기 싫은데 하나님의 뜻대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내려오실 때, 모든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대속제물(代贖祭物)이 되어야할 것을 미리 내다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생애는 그 십자가의 절정을 향해 달려온 생애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할 수만 있으면 그 잔을 자기에게서 지나가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죄인들을 섬기시던 성자 예수님께서도 “그러나”의 기도, 즉 온전한 복종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그분에게조차 하나님의 뜻에 자기의 뜻을 굴복시키시는 데에는 자기의 뜻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임이 필요했습니다. 하물며 죄인인 우리가 복종의 기도를 드려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2. 그대에게 십자가가 있습니까?

만약 우리의 마음 내밀한 곳에 하나님 앞에 내 뜻을 꺾어드리는 자기 복종의 세계가 없다면 우리의 삶에 십자가가 있을 리 만무합니다. 우리는 은혜를 많이 받으면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 쉬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지 않았을 때에도, 은혜를 받은 후에도, 죄 된 인간의 본성을 거슬려서 사는 일은 모두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다만 은혜 안에 있을 때는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로 그것을 이길 수 있을 뿐입니다. 죄 된 인간에게 신령하고 거룩한 삶이 자연스러운 삶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에게는 이런 “자기 깨어짐”(Paenitentia)의 세계가 더 많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이 몹쓸 사람이라고 고백하면서 많이 깨뜨려지고 자신의 결점을 수없이 발견하던 때에는 신기하게 죄 가운데 살 때가 아니라 은혜 가운데 살 때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사는 사람들은 항상 깨뜨려짐이 있습니다. 왜 깨뜨려짐이 있습니까? 이유는 오직 하나,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자 하는 신령한 욕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신령한 욕구와 자신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자신의 옛 자아의 욕구가 충돌을 할 때, 첨예한 갈등을 경험하게 됩니다. 거기서 궁극적으로 자기의 뜻을 완전히 꺾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할 때, 그때 자기 깨어짐을 경험하게 됩니다. 신자가 이 세상을 살면서 일생동안 지고 가야할 무거운 십자가는 바로 자기 자신, 곧 부패한 옛 자아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자기 꺾임의 길입니다. 자기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고 그런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경험해야할 고통을 인내함으로 감수하는 것, 그런 것이 십자가(十字架)입니다. 이것이 고난(苦難)입니다.

정말 우리에게 이런 꺾임이 있습니까? 주님을 안 믿었더라면 가지 않을 그 길을 주님을 믿었기 때문에 걸어가는 그런 삶이 있습니까? 정말 주님만 아니었다면 걸어갈 분명한 계획이 있었는데, 주님을 만나서 그 계획을 고통스럽지만 포기하고 아버지의 뜻을 쫓아본 적이 우리에게 얼마나 있습니까? 그런 동안에 우리는 불순종에 익숙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겉으로는 허울 좋은 신앙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의 삶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자기를 꺾는 순종 없이 살아온 삶이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머리 둘 곳 없는 생애를 사시고 결국은 사람들에게 버림받으셔야 했던 그 이유도 그분이 오로지 하나님의 뜻에만 복종하는 길을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일평생 주님의 일을 하면서 자기 꺾임이 없는 고통은 고생(苦生)일 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뜻을 포기하고 깨어져서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복종의 과정 속에서 고통은 고난(苦難)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성도가 아무리 헌신적인 삶을 살아도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 앞에 깨뜨려지는 그 복종의 실천이 없다면 그의 삶은 열매 없는 잎만 무성한 무화과와 다르지 않습니다.

IV. 복종(服從)의 삶

예수님의 생애는 철저한 복종의 생애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렇게 자기를 꺾으며 치열한 복종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뜻 앞에 자신의 뜻을 꺾으면서 물밀 듯이 밀려오는 육체와 영혼의 고난에 자기를 내어맡기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복종은 단지 이 겟세마네 동산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일생동안 살아오신 삶의 자세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분을 본받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 주신 최대의 소명이 성화의 사명이라면, 부패한 인간이 어떻게 거룩해지게 됩니까?

1. 성화(聖火)와 복종(服從)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오해하고 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은혜를 많이 받으면 자기가 성화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말씀의 은혜를 많이 받으면, 좋은 목회자를 만나면 자기가 성화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교육 시스템이 잘 되어 있는 교회에 들어가면 자기가 좋은 성도가 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어리석기 그지없는 생각입니다. 성화는 그렇게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만 모두 우리에게 부분적인 도움을 줄뿐입니다.
여러분들이 그 동안에 잘못 배워온 교리 가운데 하나가 소위 이야기하는 은혜의 교리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워치만 니(Watchman Nee)같은 사람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죄를 이기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는 모두 다 주님께 맡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아직까지 무엇인가 붙들고 있지 않나요? 모든 문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해결합니다. 모두 다 내려놓고 주님께 그저 맡기기만 하십시오.” 아직까지도 조국 교회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교리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진리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강의실에 모아 놓고 군대가 무엇이고 죽도록 충성해야 된다고 가르치면 저절로 군인이 됩니까? 신자인 우리 안에 중생과 함께 심겨진 생명의 성령의 법이 이 모든 거룩한 삶의 원천이 됩니다. 그러나 신자의 순종을 초월하는 성화는 없습니다. 신자의 순종 안에서, 그것과 더불어 성령님께서는 일하십니다. 매 순간 성령님의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 앞에 복종하는 삶의 과정, 그 속에서 자신의 삶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의 존재 자체가 거룩해져가는 것입니다.

신자는 끊임없이 자기 꺾임과 복종으로써 거룩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설교 많이 듣고 은혜를 많이 받으면 성화될 것이다.’ 잠깐 동안은 아마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리 우리에게 감화를 주어도 말씀이 우리의 목덜미를 붙잡고 질질 끌고 순례의 길을 가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순례의 길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가 걷는 것입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 10:38). 예수님의 생애를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늘 동행하셨습니다. 그분에게 성령님을 한량없이 부어주셨습니다. 그렇다고 그분이 그 은혜에 이끌려서 저절로 즐거이 복종의 삶을 사셨습니까? 아닙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에게조차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열렬해지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의 복종의 삶의 결여 때문입니다.

2.“아멘”의 생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종의 생애를 사셨기 때문에, 사도 요한은 그분의 별명을 “아멘”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계 3:14). 그분의 전 생애가 이와 같이 “아멘”의 생애였고, 그분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아멘”하셨기 때문에 가시밭길 같은 생애를 살아야 했습니다. 평생 동안 멸시와 천대와 모욕을 한 몸에 받으신 것도 아버지께 “아멘”하신 결과였고,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자기를 깨뜨리는 이 극심한 고난을 받으신 것도 아버지를 향해서 “아멘”하신 결과였습니다.

그렇게 이제껏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짐승들로 제사를 드렸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제물이 될 수 있습니까? 그분은 죄가 하나도 없으셨는데 어떻게 죄 값을 받으실 수 있으며, 불의를 모르셨는데 어떻게 하나님 앞에 불의한 자로 지목되어서 하나님의 진노를 온 몸에 받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들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 길을 가신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것을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에서 우리를 위한 제물로 짐승처럼, 양처럼, 죽어 가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멘”하신 순종은 얼마나 놀라운 결과를 가지고 왔습니다. 한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죄가 물밀 듯이 밀려들어와서 온 세상에 가득하게 되어 도무지 아무런 희망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한 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멘”으로 복종의 생애를 사시고 십자가에서 자기를 제물로 제사드림으로써, 이번에는 생명이 물밀 듯이 밀려들어와서 죽었던 우리가 예수의 생명을 나누어 가진 산 자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3. 한 사람의 복종으로

우리는 한 사람의 복종의 위대함이 얼마나 많은 일들을 이룰 수 있는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 원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원리이지만, 우리 자신의 삶 속에도 얼마든지 적용될 수 있습니다. 내가 온전히 복종하고 주님 앞에 죽으면 나 때문에 내 가족이 살고, 내 교회가 살고, 내 민족이 살고, 죄로 말미암아 도탄에 빠진 내 형제, 자매들이 삽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사명(使命)을 다시 기억해야합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교회사(敎會史)를 보면 대체적으로 헌신된 수만 명의 사람보다 완전히 자기를 바친 한 사람이 더 위대한 일을 성취하는 예가 허다합니다. 하나님께서 누구를 찾으실까요? 하나님께서는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능력을 주시기도 하고, 힘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힘을 주시기도 하고, 은사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은사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복종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힘으로 억지로 굴복시키시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종하고자하는 사람들에게 복종할 힘을 주시고, 순종하고자하는 사람들에게 순종할 능력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항상 우리 다리 밑으로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우리를 밟고 지나갑니다. 이 세상에서 질그릇같이 연약한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훌륭한 도구가 되었던 아름다운 종들의 공통점은, 모두 주님의 말씀이라면 껌뻑 죽는 복종의 생애를 산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무거운 십자가도 주님의 뜻이기 때문에 마다하지 않았고, 죽음의 잔도 주님의 뜻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마시기를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그 위대한 구속사(救贖史)는 이렇게 당신의 뜻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자기를 다 드리고 복종의 생애를 산 사람들 하나, 하나를 밟고 지나온 놀라운 구원의 역사입니다.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보십시오. 나의 뜻을 버리고 주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 힘겹게 느껴질 때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끝까지 복종하셨는지 보십시오. 이제 그분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자신의 연약한 육체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옥체마저도 십자가에 매달아 갈가리 찢어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양식으로 나누어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14:22-26, 눅 22:7-23). 복종은 죄 없으신 그분이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게 하는 힘이었습니다. 우리가 복종하는 일이 아무리 힘겹고 고통스럽다고 하더라도 피를 흘리기까지 하지는 않았습니다(히 12:4). 그것은 죄를 모르시던 예수님의 온 영혼에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진노의 대상이 되는 것처럼 힘들고 어렵지는 않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본받아 날마다 나의 뜻을 버리는 것을 양식처럼 여기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 모든 일은 그리스도께서 기도에 헌신하심으로써 성취하신 바였습니다. 가장 큰 고통의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는 그 때에 그분은 땀이 핏방울같이 되도록 기도에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분은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을 가장 영광스러운 승리를 약속 받는 기회로 활용하셨습니다.

V. 결론과 적용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주간에 여러분들이 주님 앞에 드릴 최고의 선물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죄를 위해 모진 고초를 당하시고 치욕의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다시 부활하신 주님께 드릴 최고의 예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한 성도가 자기의 뜻을 꺾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여 드리는 것을 가장 큰 예물로 여기고 그 어떤 헌신된 제사보다도 더 귀하게 여기십니다. 여전히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께 복종되지 않는 수많은 거역들, 그것을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 우리의 마음의 완악함, 이것이 고난주간에 우리가 깨뜨려 드려야할 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번제보다도 귀한 복종의 기도를 하나님께 올려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핏방울같이 되도록 기도하시던 주님을 생각합시다. 우리도 항상 자기를 버리고, 길이 참고 묵묵히, 십자가를 짐으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해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착한 성도들이 됩시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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