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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나 하나 때문에 (창 2:15~17, 롬 5: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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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표의 소중함은 역사적으로 증명된 사실입니다. 1645년 단 한 표로 올리버 크롬웰이 영국을 장악하는 권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1649년 한 표로 영국의 찰스 1세가 사형을 당했습니다. 1776년 한 표로 미국이 독일어 대신에 영어를 사용하도록 결정하였습니다. 1845년 한 표로 텍사스 주가 미연방에 편입되었습니다. 1868년 한 표로 앤드류 존슨을 탄핵 위기에서 구했습니다. 1875년 한 표로 프랑스가 절대왕정에서 공화국으로 탈바꿈했습니다. 1876년 한 표로 러더포드 헤이즈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1923년 한 표로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나치당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1941년 한 표로 미국이 징병제를 실행하였습니다. 1960년 4개구 선거구에서 단 한 표로 존 F. 케네디가 미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작은 한 표, 작은 하나, 작은 한 사람의 중요성을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건강한 조직이란 이런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 건강한 조직은 스스로 영리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둘째, 건강한 조직은 건강하지 못한 조직에 비하여 통상적인 충격에 대하여 훨씬 저항력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조직 내의 단 한 사람, 바로 조직의 우두머리만이 그 조직을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조직의 한 사람이 조직을 만들고, 조직의 성격을 만들어 갑니다. 한 사람에 의하여 죽고, 사는 것이 조직입니다.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 것이 지도자입니다. 리더는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입니다. 리더 한 사람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창세기 14장에는 소돔과 고모라가 전쟁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좋은 땅이라고 소돔을 택한 아브라함의 조카 롯도 전쟁의 희생자가 됩니다. 이 전쟁에서 롯이 포로가 되고 맙니다.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하여 아브라함은 자기 집에서 기른 318명의 개인병사를 데리고 전쟁에 나가 롯을 구해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롯 한 사람이 318명보다 더 귀합니다.

  하나님께는 한 사람이 굉장히 소중합니다. 하나님은 나 한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독생자를 보내 죽이십니다. 그렇게 소중한 사람이 우리들입니다. 마태복음 18:14에는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고 합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 말이 있듯이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다 소중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손가락을 다 아파하십니다. 로마서 5장에는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모두가 죄인 되었고, 사망에 이르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게 되었고, 의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한 사람의 소중함과 영향력을 다시 한번 새겨보면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십자가를 묵상하기를 바랍니다.

첫째, 한 사람 때문에 죽습니다.

  로마서 5:17에는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하였은즉”이라고 합니다. 19절에는 “한 사람이 순종치 아니하므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는 한 사람 때문에 죽은 사람들입니다.

  태초에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으므로 모든 사람이 죽게 되었습니다. 아담만 죽지 왜 우리 모두가 죽습니까? 죄의 유전 때문입니다. 죄에 대한 책임은 모두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이는 왜 아담 때문에 모두 죄를 짓게 만들었냐고 불평합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은 왜 예수님 한 분 때문에 우리 모두가 구원 받게 만들었냐는 불평은 하지 않습니다. 아담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분명히 죄를 지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에게는 본성적 죄의 성향이 누구에게나 다 있기 때문입니다.

  마틴 루터는 “세상은 술 취한 농부를 닮았다. 그를 말안장 한쪽으로 올려놓으면 곧 다른 한쪽으로 넘어가 버리고 만다”고 말하였습니다. 우리 역시 율법주의자와 도덕폐기론 중 한쪽에 치우쳐 있습니다. 우리도 육체적으로 탕자와 같은 명백한 불순종이나 아니면 장자와 같은 위선적 순종 둘 중 한쪽에 치우쳐 있습니다. 불순종과 위선적 순종 둘 다 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죄를 지으며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로마서 3:23에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합니다. 한 사람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죄를 지은 것입니다. 한 사람 때문에 모든 사람이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루스 베네딕트가 2차 대전 중에 쓴 ‘국화와 칼’이라는 일본인을 연구한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는 일본인은 죄의식이 없는 대신 수치의식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죄인이 죄의식조차도 없으면 이중적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를 깨닫지 못하는 죄가 있습니다.

  아간이란 사람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을 접수하는 과정에서 여리고 전투에 나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리고를 점령하더라도 전리품을 하나도 가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여리고 전투는 하나님이 홀로 하시는 전쟁이지 사람들이 하는 전투가 아니었기 때문에 전리품을 가질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간은 여리고를 점령한 다음에 외투 한 벌과 1은 200세겔과 금 50세겔을 훔쳐왔습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다 나와 광야생활을 40년이나 했으니 얼마나 그것이 부러워보였겠습니까? 그러나 아간 한사람의 죄 때문에 하나님은 그 다음 전쟁인 아이성에서 300만 이스라엘 백성이 참패를 당하게 하셨습니다. 아간 한 사람 때문에 온 백성이 고난을 당한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불평했을 때에 하나님도 아간의 죄를 지적하셨습니다.

  사사기 19장에는 레위 사람의 첩이 행음하고 도망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한 사람의 죄로 65,130명이 죽음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다수가 피해를 보게 하셨습니다. 요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신탁을 거절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로 가라고 하였지만 요나는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불순종은 자기 판단 때문입니다. 불순종한 한 사람의 죄 때문에 배가 뒤집히게 되고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이 고생을 하였습니다. 한 사람의 죄가 모든 사람에게 미친 것입니다.

  독일의 히틀러는 싫어하는 것이 두 가지가 있었다고 합니다. 유대인과 여자입니다. 그는 유대인을 싫어하여 600만 유대인을 학살하였습니다. 그는 또 여자를 혐오하여 정식 결혼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히틀러가 어릴 때 아버지가 행상을 하였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한번 장사하러 가면 몇 달씩 집을 비울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가 이웃의 돈 많은 유대인과 눈이 맞아 가까이 지냈습니다. 어린 히틀러는 어머니께 눈물로 호소하고 말렸지만 그의 어머니가 듣지 않았습니다. 어린 마음이지만 엄청나게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의 삶에 살기가 돋아 있었습니다. 어머니 한 사람 때문에 그는 어릴 때에 상처를 받았고 이렇게 성장한 한 사람 때문에 역사상 엄청난 비극이 일어난 것입니다.

  열왕기하 21장에는 유다의 므낫세왕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착한 왕 히스기야의 아들이었는데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바알 제단을 쌓고, 앗세라 신상을 만들고 하나님 싫어하는 일을 행했습니다. 므낫세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과 유다에 재앙이 내렸습니다. 나라가 완전히 황폐하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자연에 대한 방송을 하면서 산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방영하였습니다. 미국 오레곤의 샤스타 산인지 다른 산인지는 모르겠는데 아주 높고 험한 만년설이 있는 산이었습니다. 자일을 타고 산을 오르다가 그 중 한 사람이 실수하여 위에서 떨어졌습니다. 함께 자일을 몸에 묶고 오르던 대원들이 차례로 떨어져 여러 사람이 죽고 부상당하고 떨어지면서 빙하 계곡인 크레바스에 빠졌습니다. 생생하게 촬영한 모습을 보니 얼마나 끔찍한지 모릅니다. 한 사람 때문에 전 대원이 고통을 겪고 죽은 것입니다.

  어떤 조직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 때문에 죽고, 다치고, 망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지도자 한 사람에 의하여 조직이 좋아질 수도 있고 반대로 나빠질 수도 있습니다. 지도자 한 사람은 추종자 모두 보다 중요합니다. 그래서 “노루가 통솔하는 사자의 군대보다 사자가 통솔하는 노루의 군대가 강하다”는 말도 있습니다.

  오래 전에 중국 관광할 때 들은 이야기입니다. 일본사람은 10명 중 1명이 말하고 9명은 듣습니다. 한국 사람은 2명이 말하고 8명이 듣습니다. 그런데 중국 사람은 9명이 말하고 1명이 듣습니다. 그 듣는 사람이 가이드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3억이 안 쪼개지고 한 나라인 것은 신통한 일입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흐린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잘못으로 주변의 다수가 욕을 먹고 매도당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일은 우리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일입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온 세상입니다. 우리는 아담을 탓할 것이 아니라 나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오지 않게 하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둘째, 한 사람 때문에 삽니다.

  로마서 5:17 하반절에는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리로다”고 합니다. 19절 하반절에는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고 합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온 것처럼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생명이 들어오고 의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한 분 때문에, 예수님께서 한 번으로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심으로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고 의인이 되고 구원받고 영원히 살게 된 것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므낫세 왕의 아버지 히스기야는 하나님께서 죽고 살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벽을 향하여 회개하고 결사적으로 부르짖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은 히스기야에 대한 계획을 바꾸시고 살려주셔서 15년이라는 생명을 연장시키십니다. 열왕기하 20:6에는 “내 종 다윗을 위하므로 이 성을 보호하리라”고 합니다. 다윗 한 사람 때문에 히스기야가 삽니다. 예루살렘 성을 보호하십니다. 한 사람 때문에 도시가 살고 사람이 삽니다.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하여 로마로 갑니다. 바울은 행선의 위험을 얘기했지만 백부장이 행선을 감행합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유라굴로’라는 태풍이 불어 배가 파선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밤에 환상 중에 하나님의 사자가 바울에게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손상이 없고 오직 배뿐이라”고 합니다. 배와 하물은 다 버리지만 바울 한 사람 덕분에 276명이란 많은 생명이 한 사람도 죽지 않고 다 살았습니다.

  예레미야 5:1에는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고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고 합니다. 의롭고 진실한 자 한 명이 성읍을 구합니다. 서울에 의롭고 진실한 자 한 사람만 있어도 서울은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 의롭고 진실한 한 사람만 있어도 하나님은 참으시고 멸망을 유보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강재구 소령을 기억하십니까? 그는 우리나라가 월남에 파병할 때 잊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월남해방의 방해꾼으로 전락합니다. 잊혀진 과거사의 인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맹호 사단의 중대장으로서 1965년 10월4일에 월남파병 훈련 도중 순직했습니다. 수류탄 투척 훈련 도중 한 사병의 실수로 수류탄이 중대원들 앞에 떨어지자 자신의 몸으로 수류탄을 덮어 산화하였습니다. 자기 한 사람의 죽음으로 전 부대원을 살렸습니다.

  ‘섀클턴의 서바이벌 리더십’이란 책이 있습니다. 성공한 리더의 위기탈출을 적은 책입니다. 영국의 탐험가 어니스트 섀클턴(Shackleton)은 아문센과 스콧이 남극점을 정복한 뒤인 1914년 대원 27명을 이끌고 남극대륙 횡단에 도전 했습니다. 그러나 섀클턴과 대원들은 남극해에 진입하자마자 얼음 사이에 갇혀 배가 파괴되었습니다. 섭씨 영하 80도를 오르내리는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며 죽음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선장인 섀클턴은 리더십을 발휘하여 2년 뒤에, 때로는 얼음산을 오르고, 보트로 거친 남극 바다를 항해하여 탐험대는 전원이 생환했습니다.2년 동안 얼음의 땅과 바다를 2,000킬로미터나 헤맨 다음이었습니다. 섀클턴 한 사람의 신앙과 지도력으로 모든 대원들을 살린 것입니다.
  영국에서는 오래 전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핍박이 이어졌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많이 죽인 ‘피의 여왕 메리’(Mary the Blood)는 무서운 여왕이었습니다. 영어로는 ‘피의 메리’(Bloody Mary)라고도 합니다. 메리 여왕은 그리스도인들을 얕보던 왕입니다. 그러나 유독 존 녹스를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녀는 “존 녹스의 기도는 100만 명의 군대보다 더 두렵다”고 친히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피를 뿌렸던 메리 여왕도 존 녹스 한 사람은 얕보지 못하였습니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이기고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다.

  이사야 60:22에는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고 합니다. 여호수아 23:10에는 “너희 중 한 사람이 천명을 쫓으리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한 명은 천명을 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한 사람은 세상을 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실 때에 빌라도의 관저에서 빌라도는 예수님과 바라바 중에서 한 사람을 택하여 사면하게 하였습니다. 이 때 백성들의 선택은 예수님이 아니라 바라바였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선택에 실패한 아담의 후손들은 다시 선택에 실패합니다. 바라바는 ‘바르’란 말과 ‘아바’란 말이 합성된 이름입니다. ‘바르’(Bar)란 말은 아들입니다. ‘아바’(Abba)는 아버지입니다. 바라바란 이름은 “아버지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진짜 아버지의 아들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진짜 아버지의 아들 대신 바라바가 아버지의 아들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대신 사면을 받고 있습니다. 요즘 말로 완전 짝퉁입니다.

  잘못 선택한 하나 때문에 사망이 들어옵니다. 한번 잘못 선택한 대가가 어떠했습니까? 그 후손들이 엄청난 고통을 당했습니다. 피 값을 자신들과 후손들에게 돌린 까닭에 후손들이 방황하고 유리하고 나라를 되찾았다고 하지만 지금도 팔레스타인과 매일 전쟁하며 살고 있습니다. 한번 선택은 영원한 선택입니다. 생명 선택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사망 선택은 영원한 사망입니다. 생명을 바르게 선택해야 합니다.

  토크쇼의 킹이라고 하는 래리 킹에게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당신이 딱 한 사람과 인터뷰한다면 누구와 하고 싶습니까?” 그는 “예수님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래리 킹은 유대인입니다. 그가 전 세계, 전 역사 속에서 한 사람과의 인터뷰를 예수님과 하기를 원한다고 했다면 그는 현명한 선택입니다. 우리 모두의 하나의 탁월한 선택은 예수님입니다. 한 분 예수님을 선택하는 것은 생명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12제자를 훈련하고 사도로 세웠습니다. 그 후 12사도로 말미암아 120명이 성령 충만을 받았습니다. 500여 형제가 한꺼번에 부활을 목격했습니다. 3000명이 하루에 회개하였습니다. 이제는 전 세계에 수십억이 함께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 한 분으로 말미암아 매일 거듭나고, 구원받고, 영생 얻는 자가 수없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결론

  내가 이 지구상에 있는 단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은 나를 위해 모든 질고를 짊어지셨을 것입니다. 나 한 사람을 위하여 예수님은 죽으셨을 것입니다. 나 한 사람을 위하여 예수님은 활하셨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한 분을 통한 구원은 나 한 사람을 위한 구원입니다.

  전 세계 65억 인구는 한 분 예수님 때문에 구원을 받습니다. 65억 명의 구원자가 필요한 것 아닙니다. 전 세계 인구가 65억 명이지만 나 한 사람을 위하여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치 나 하나만을 사랑하듯이 모든 사람, 65억을 사랑하십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이제 한 주간의 고난주간의 시작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므로 부활의 영광도 맛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 주간의 경건한 삶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얼마 전 인터넷에는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사자성어는?”이라는 학교 시험이 올라와 있었습니다. 네 개의 네모 칸에 답을 쓰기 위하여 제일 앞의 자를 “고”자를 써놓았습니다. 어떤 똘똘한 아이가 답을 썼습니다. “고이즈미”. 고이즈미도 아베도 다 믿을 사람이 못되지만 언젠가는 우리 민족에게 특히 정신대 할머니들에게 낙이 올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십자가의 고통 끝에 부활의 낙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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