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종려주일] 종과 증인으로 삼으려 함이니 (행 26:15-18)

  • 잡초 잡초
  • 341
  • 0

첨부 1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사도행전 26:17-18)

  오늘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 최후의 마지막 주간을 보내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는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입성하실 때 수많은 백성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환영했습니다.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백성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신 영광스러운 날인 것 같지만, 예수님은 이 백성들이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칠 배신의 무리들임을 알고 계셨기에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입성하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군중들의 열광적 환영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로마의 압제 하에서 해방시켜 주리라는 기대가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습은 로마에 대항하려는 전투자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어린나귀를 타시고 평화로운 모습으로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우리는 종려주일과 함께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수난을 명상하면서 한 주간을 지내야 합니다. 뿐 만 아니라 ‘4.15 새 생명 전도잔치’를 앞에 두고 그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는 삶을 전하는 복음전파의 절대적 필요성을 깨달아야 합니다. 바로 복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진리를 믿고 받아드림으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 안에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 입니다. ‘구원을 받았다.’ 라는 말을 성서 가운데서는 다양한 말씀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또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라는 이런 여러 가지 표현들은 구원받은 사람의 삶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표현들입니다.

  바울은 복음으로 구원받는 삶이 무엇인지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는 분명한 체험을 가지고 구원의 확신을 증언했습니다. 바울은 “전염병 같은 존재, 유대인들에게 소요하게 하는 자,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는 자“(행 24:5-6)로 고발되었습니다.

  바울은 고발자들과 로마총독 베스도와 팔레스틴 지역의 분봉 왕 아그립바 앞에서 자신의 무죄변론과 함께 그가 만난 예수체험 사건을 담대하게 증언 했습니다. 이 증언가운데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부르신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울을 부르신 성서본문의 말씀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살아가는 목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도행전 26장 17-18절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주님께서는 바울을 구원하여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여 구원받게 하시는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럼 구원받은 자의 삶은 무엇입니까?

  새로운 눈을 뜨는 것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눈을 뜨는 것입니다. 새로운 세계를 보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 보지 못하던 것을 볼 수 있는 새로운 눈을 가지는 것입니다. 주님은 바울에게 구원받은 자의 복음전파는 눈을 뜨게 하는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보는 눈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내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내 자아로 보고 내 육신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가진 조건으로 보는 시각을 의미합니다. 때로 성경은 이것을 ‘육신의 안목’(요일 2:16)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또 하나는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내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의 방식과 다른 사람의 인생관의 시각으로 보는 것입니다. 배워 아는 사상, 내가 모방하려는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눈이 있습니다. 이 눈으로 볼 때 하나님의 세계를 깨닫게 됩니다. 이 눈으로 볼 때 우리 안의 죄를 보게 되고, 세상에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이 눈으로 볼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생명의 세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눈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습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판단하고 평가했으며 세상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해주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내 자아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내게 영향력을 준, 다른 사람의 사상과 인생관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은 불안한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구원받은 삶이란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22-23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냐?”
  예수님은 보는 우리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눈을 가지고 보고 판단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 자신도 새로운 눈을 뜨는 경험을 했습니다.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 바울에게 예수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율법을 역행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러기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가두기 위해 다메섹으로 향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다메섹을 향하는 길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드라마틱한 체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임재의 빛 안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그 빛 때문에 실명했습니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사람들의 인도를 받아 ‘직가’에 있는 ‘유다’의 집에 머물면서 식음을 전폐하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아나니아’가 환상 중에 예수님의 지시를 받고 찾아와서 안수를 해 주었을 때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이 일을 성경은 ‘즉시 사울(바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행 9:18)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기 눈으로 보고, 율법의 눈으로 보며, 다른 사람의 전통적인 영향력의 눈으로 보았던 바울의 눈이 예수님의 임재의 빛 안에서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눈이 열렸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6절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바울의 눈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눈을 가지고 세상을 보며 판단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의 다시 보는 눈은 새로운 눈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눈으로 보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보며 전하는 것이 그의 복음전파이며, 그가 보고 기록한 것이 그의 서신이 되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으로 보는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과 은혜와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는 눈이 열려 있습니다.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의 눈의 새로운 눈을 떠서 더욱 밝은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사람들의 신앙생활은 새로운 눈을 뜨고, 그 눈이 더욱 더욱 밝아져 가는 것입니다.

  나는 무엇을 볼 수 있고, 또 무엇을 보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내가 잘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얼마나 잘 볼 수 있는 것입니까? 어두운 눈을 가지고는 인생에 대해서 논해보아도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습니다. 주님의 눈으로 볼 수 있을 때에 참된 삶의 가치를 보는 눈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이 눈이 밝아지시기를 바랍니다. 이 새로운 눈을 가지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이 눈을 뜨게 해주는 복음 전파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삶의 영역이 바뀌는 것입니다.

  구원은 삶의 영역이 바뀌는 것입니다. 구원은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탄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영역으로 삶의 영역이 바뀌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저와 여러분은 사탄이 주관하는 삶에서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삶으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의 영역은 무엇입니까? 구원받은 자는 어두움이 주관하는 영역에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삶과 인격이 사탄과 어두움이 지배하는 것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늘 불만으로 불평하고 미워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기쁨과 감사와 함께 사랑의 영역에서 살아야 합니다. 교만함, 무례함 혈기, 방종한 삶에서 겸손과 온유함과 화평의 영역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사탄의 휘둘러대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삶입니다.
  하나님의 영향을 받는 삶을 살고 있는가를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얼굴의 평화가 없는 모습에서 평화가 가득한 모습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사탄의 기만에 놀아나는 삶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닙니다. 열심히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고 하면서, 그 삶이 사단의 영역에 머무르는 것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종교적 행위 속에 있으나 하나님의 영역에 살아가는 것이 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사탄의 기만 속에 있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의 삶은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것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예수님의 영역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받은 사람의 삶입니다.

  ‘W. 헛셀 포드’ 의 ‘마귀의 풍자적 팔복’ 으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교권쟁취의 챔피언은 복이 있나니 마귀가 충성된 종에게 주는 면류관을 받을 것임이요. 예수 이름으로 자주 성내는 자는 복이 있나니 지옥의 시민권을 얻을 것임이요. 온갖 이유를 들어 교회출석과 헌금을 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나니 지옥의 준회원이라 일컬을 것임이요.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사람을 미워하는 자는 마귀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가난하고 불행한 자들에게 복음대신 예수 이름으로 증오와 분노와 고발과 싸움을 심는 자는 복이 있나니 지옥의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임이요. 사업이 너무 바빠서 기도할 틈이 없는 자는 복이 있나니 지옥의 신입회원증을 받을 것임이요. 자기의 부와 명예를 과시하기 위해 교회에 나오며 세속에 물든 발을 씻지 않는 자는 복이 있나니 지옥이 저희 것임이요. 예수 이름으로 인도와 사랑과 자유와 정의를 설교하되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최대한 탈색해 버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악마의 명예제자가 될 것임이요.” 
이 글은 우리 신앙의 영역이 무엇인가를 자문하게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어둠에서 빛으로 우리를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빛의 사람으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둠의 영향을 받지 아니하고 빛의 영향을 받고 사탄의 영향을 받지 말고 주님사랑의 영향을 받고 살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자의 삶의 모습니다. 그러고, 이 삶을 나누어 주기위하여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삶의 목적이 바뀌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의 삶은 삶의 목적이 바뀌는 것입니다. 주님은 바울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사람의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이 죄 사함을 받음으로 이 세상의 삶의 기업에서 하나님의 기업을 얻기 위한 삶으로 바뀌어 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업을 얻기 위한 삶으로 삶의 목적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1장 2절에서 “우리로 하여금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또 바울은 에베소 교인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기를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의 무엇임을 알기 원하노라”(엡 1:18)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기업은 무엇입니까? 이 기업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약속의 땅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기업과 같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약속은 하나님 자녀의 영광과 축복입니다. 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셔서 하나님자녀의 축복으로 살도록 하시며, 죽음을 앞에 두고 있으면서도 영원한 시간을 기다리며 살게 하시고, 죽어서도 약속된 천국의 기업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이 은혜를 세상사람 들에게 전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전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심이라.“(벧전 2:9)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들은 하나님 자녀의 목적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자녀의 기업의 역사를 위하여 복음을 전하는 일꾼이 되었다는 자부심과 함께 하나님 자녀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구원의 삶을 바로 살 것을 말씀했습니다. 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빌립보 교인들에게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받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삶을 분명하게 이루어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자는 것입니다.
  새로운 눈이 더욱 밝아짐으로 빛의 삶을 사십니다. 어두움과 사탄의 영역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분명한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님 자녀의 기업을 누리며 차지하는 축복과 천국영광의 목적을 이루며 살자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삶을 세상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복음을 전파하는 복음의 종이 되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