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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어찐 일이냐? (행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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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어찐 일이냐?
(행2:1-13)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1. 최근 우리나라에 국제결혼이 급증하고 있는 가운데 지난해 결혼한 농·어촌 총각 10명 중 4명 가량이 외국여성과 결혼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결혼한 농·어업 종사 남성 중 35.9%(2885건)이 외국여성과 결혼했습니다. 이는 국내 총 혼인건수(31만6375건)의 13.6%에 해당합니다. 경상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이민규 교수는 “국제결혼 이민 여성들의 결혼 만족도를 결정하는 여러 요인 가운데 부부간의 의사소통 방식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고 “이들 여성의 한국 사회에서의 심리 사회적 적응을 돕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언어교육뿐만 아니라 한국인 남편·시어머니에 대한 의사소통 방식 심리교육이 필요하다.”고 지적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저명한 미래학자들의 예견대로 흔히 ‘단절의 시대’(피터 드러커)와 ‘불확실성의 시대’(존 갤브레이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가정의 이혼과 불행, 사회의 갈등과 분열, 각종 사건과 참사, 그리고 종족과 국가간의 모든 분쟁과 전쟁 등은 모두 그 원인이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다른 동물과 구별해 주는 행위가 의사소통입니다. 그렇다면 의사소통이란 단지 필요한 어느 언어를 능통하게 구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세계화(글로벌)시대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어만 잘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큰 오산입니다. 영어를 유창하게 말하고 발음이 좋으며 문법이 맞다고 해서 영어를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어를 잘한다는 것은 외국 사람에게 유창하게 말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뜻을 얼마나 정확하게 표현하고 상대방의 의도를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는 의사소통 능력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계화 시대에 요구되는 것은 어느 언어의 능통한 구사능력이 아니라, 언어는 물론하고 문화적인 차이, 세대 간의 차이 등을 서로 원만하게 적응하여 마음과 마음이 서로 통하게 소통의 능력입니다.

2. 최근 성경에서 따온 이름의 영화가 눈에 띄어 보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11장에 등장하는 바벨탑 이야기에서 따온 <바벨>이라는 영화입니다. 노아 홍수 이후 노아의 세 아들들이 번성하여 전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었지만 쓰고 있는 언어는 하나였습니다. 당시 세계 어디를 가나 언어가 하나여서 의사소통에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이들이 한 곳에 모여 하늘을 찌를 듯이 우뚝 솟은 초고층 빌딩, 하늘을 긁어대는 누각(樓閣)이라는 뜻의 ‘마천루’(摩天樓, Skyscrape) 곧 바벨탑을 세우고자 했습니다. 인간이 바벨탑을 쌓고자 한 목적은 자신들의 기술과 힘을 모아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름을 나타내고자 하는 교만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심기를 긁어놓는 것이었습니다.

(창11:4)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이같은 인간의 불손과 교만을 꺾고 더 이상 마천루, 바벨탑을 건설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내리신 형벌이 바로 언어를 혼잡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을 쌓던 사람들이 갑자기 의사소통이 막히자 서로 갈등이 생기고 분열되어 결국 전 세계에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바벨탑 건설은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창11:7-9)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 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이후 오늘날 ‘세계화’ 시대에도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 때문에 사람들이 전면적으로 소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지구촌의 현실입니다. 영화 <바벨>은 바로 이러한 ‘세계화’ 시대에도 여전한 바벨의 형벌(저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최첨단 시대에 살면서도 점점 더 고립되고 서로 단절의 아픔을 겪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 소통 단절에 따른 고통과 비극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화는 북 아프리카 모로코 사막을 여행하는 미국인 관광객 부부, 수전과 리처드의 대화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휴게소에서 남편 리처드가 아프리카 여행에 불만을 품은 아내 수전에게 “당신은 진심으로 날 용서했어?”라고 묻습니다. 아내는 원망 섞인 눈으로 고개를 젓습니다. 이에 리처드는 “나도 당신을 아직 용서하지 않았어.”라고 대응합니다. 이들의 심상치 않은 대화를 통해 이들 부부가 상당한 갈등을 안고 여행 중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부간 단절의 위기 극복을 위해 두 자녀들을 보모에게 맡기고 여행을 택했지만 감정의 골은 깊어만 갑니다. 그런데 이들 부부가 타고 가는 관광버스가 아이들의 장난으로 야기된 총격을 받았는데 공교롭게도 버스 창문에 앉은 수전의 어깨를 관통하여 큰 부상을 입게 됩니다.

총상을 입고 급히 모로코인 어느 마을에 실려가 응급처치를 받지만 이 미국인 부부는 언어의 단절이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어 더욱 안타까움을 사게 됩니다. 이 사고는 미국 샌디에고에 있는 리처드와 수전 부부의 두 자녀에게도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두 아이를 돌보고 있는 멕시코인 보모 아멜리아가 사고 때문에 제 때에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되자 멕시코에 살고 있는 아들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두 꼬마와 함께 멕시코 고향 마을로 갑니다. 결혼식을 마치고 미국 국경을 넘던 도중, 운전하던 조카 산티아고가 국경수비대와 순조롭지 못한 대화 끝에 도주하는 바람에 국경 사막 지대에서 두 아이들과 함께 곤경에 처하게 됩니다. 사막을 헤메다 붙잡힌 멕시코인 보모는 위압적인 미국 공권력과 대면하면서 불법체류자라는 약자의 신분에 따른 의사소통의 장벽을 경험하게 됩니다.

비슷한 시간, 일본 도쿄에서 어머니의 자살로 충격을 받은 청각장애 소녀 치에코가 아버지와 갈등, 그리고 청각 장애로 인해 주변 사람들과 심각한 단절감을 느끼면서 마약 청소년들과 어울려 그들에게 몸을 내던져 단절의 아픔을 이겨보려고 시도합니다. 심지어 아버지의 총기 관련 사건 수사를 위해 찾아온 형사에게까지 몸을 던져 교감을 시도합니다. 그러나 청각장애인 치에코는 장애로 인한 의사소통의 단절이라는 멍에를 지고 깊은 밤 높은 베란다에 외로이 서 있습니다.

이 일본 농아 소녀의 이야기는 거대한 바벨탑같은 도쿄의 마천루 속에서 한 개인이 얼마나 고립돼 있는가를 역력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편 모로코에서의 미국인 관광객 총격 사건은 양치기 아이들의 단순하고 우발적인 장난에서 비롯된 것임에도, 911사태 이후 정치적 테러리즘으로 오인되어 총상을 입은 수전의 치료를 더디게 할 뿐만 아니라, 사태 수습이 복잡하게 진행됩니다. 모로코 당국의 경찰은 테러분자의 소행으로 수사를 벌여, 어느 일본 관광객에 의해 전달된 것을 파악하고 총기 소재를 파악하던 중 총격 사건에 연류된 것을 알고 도망치던 아버지와 아이들을 추격, 한 아이를 사살하고 경찰 한 명 또한 사살당합니다. 이 또한 대화 단절로 빚어진 순박한 모로코 농촌 마을의 비극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총기는 모로코에 사냥 관광했던 치에코 아버지가 선물했던 것으로 밝혀집니다. 피습사건이 벌어진 모로코, 이들 부부가 어린 남매를 남겨두고 온 미국, 남매를 돌보는 멕시코인 보모가 아들의 결혼식에 참석하게 되는 멕시코, 총격사건에 사용된 사냥총을 모로코인에게 선물한 일본인 사업가와 그의 청각장애인 딸이 사는 일본 등 4개국을 오가며 사건이 전개되어 언뜻 각각 사건들이 별개의 것으로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들은 모두가 다 ‘나비 효과’를 연상케 하는 것으로 서로가 톱니바퀴처럼 하나로 맞물리면서 일관된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언어도 영어, 아랍어, 스페인어, 일본어 등 무려 6개나 되는 가운데 의사소통의 단절이 가져다주는 비극, 21세기 바벨의 저주를 전하고 있습니다. 바벨탑 사건에서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창11:9)는 말씀은 단지 언어 구조가 달라 말이 통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건은 인간과 인간의 기본적인 소통이 단절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과의 소통도 단절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 단절의 비극을 현대적으로 풀어낸 것이 바로 <바벨>입니다.

3. 현대인이 겪고 있는 바벨의 저주와 불행을 말끔히 해결하는 사건이 2000년 전, 이스라엘 땅에서 일어났습니다. 다름 아닌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입니다. 오순절은 이스라엘의 3대 절기 중 하나로 유월절(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절기) 이후 50일째 되는 날입니다. 이 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날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 오순절에 하나님의 영, 성령이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예루살렘에 모인 120명의 무리들에게 강림했습니다.(행1:15) 성령 강림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예언하신 것입니다.

(요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요16:7-8)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도 성령 강림을 예언하시며 예루살렘 성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눅24:49-53)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이렇게 약속하신 말씀에 따라 120명의 제자들이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마음을 같이 하여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전혀 기도에 힘썼습니다.” 마침내 오순절날이 이르자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가 나더니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보이며 각 사람 위에 임했습니다. 그러자 모두가 다 성령 충만함을 받아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에 전 세계에 흩어져 살면서도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이 오순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와 있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각각 자기들의 방언(유대인들이 살고 있던 지역의 언어)으로 말하는 것을 크게 놀라게 되었습니다. 이 제자들이 외국어를 전혀 배운 적이 없는 갈릴리 사람들인데 각 나라에서 온 유대인들에게 어떻게 그렇게 각 나라 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 놀라서 서로 묻는 것이었습니다. <이 어찐 일이냐?, What does this mean?>”
이스라엘 민족은 약 2500년 전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고, 그 후 페르시아와 로마의 지배를 당하면서 전 세계에 흩어져 살게 되었습니다.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면서 그 나라 언어를 배우고 문화에 익숙하게 살다가 비록 나라 민족이 망했지만 믿음을 지키기 위해 민족적인 절기를 지키고자 그 먼 길을 마다하고 고국 예루살렘으로 달려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오랫동안 외국에서 살다보니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았고, 서로 다른 문화생활에 젖어있다 보니 같은 동족이지만 서로를 이해하며 마음의 원만한 교류가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게 되자 의사소통이 이루지기 시작하며 서로의 막힌 담이 무너졌습니다. 도저히 통할 것 같지 않던 사람과의 소통이 이루어졌습니다. 인간의 교만이 무너지고 하나님과의 막힌 담이 무너졌습니다. 이렇게 인간과 인간과의 담이 무너지고 하나님과의 막힌 담이 무너지자 제자들이 마음을 같이 하여 모이기를 힘쓰고, 서로 사랑의 애찬을 나누며,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通用)하는데 거리낌이 전혀 없었습니다. 성령 충만하게 되자 단절되었던 모든 관계가 소통되고, 분열되었던 모든 것들이 하나로 통합되었습니다. 성령을 통해 소통이 이루어지자 많은 기적들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성령을 통해 하나가 되자 온 백성으로부터 칭송을 받게 되었습니다.(행2:42-47) 성령이 충만하면 가정이 하나되고 교회가 하나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게 되면,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그렇게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성령의 역사로 의사소통이 원만하게 이루어지며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정에도 이같은 성령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경 고린도 전서 12:13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12:13) 

2000년 당시 ‘유대인과 헬라인’은 극과 극이어서 하나되기가 불가능했습니다. 유대인은 피지배 민족이고 헬라인은 지배 민족이었으며, 그들은 서로의 혈통이 다르고 문화가 다릅니다. 유대인은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는 유일신 신앙을 가졌고, 헬라인은 다신교 신앙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은 사상적으로 신본주의이고 헬라인은 인본주의였습니다. 유대인은 기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식을 찾았습니다.(고전1:22)

이렇게 서로 다른 민족이 하나가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탄생한 초대교회는 유대인과 헬라인이 하나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서로의 생소한 언어와 문화 등을 뛰어 넘어 마음과 마음, 영혼과 영혼을 이어주는 성령의 역사로 막힌 담이 무너지고 하나가 되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출신 지역이 달라도, 사회적으로 뛰어넘을 수 없는 신분의 차이가 있음에도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에 따라 가정과 교회가 하나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로마 당시 노예제도 아래에서는 주인과 종의 신분의 차이는 절대로 뛰어넘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역사로 종과 주인의 차이를 뛰어 넘어 한 몸이 되는 역사가 초대교회에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를 신약성경 빌레몬서가 증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당시 감옥에 갇힌 몸인데 거기서 오네시모를 만났습니다. 오네시모는 골로새에 사는 빌레몬의 집의 종이었는데 주인의 돈을 훔치고 로마로 도망 왔다가 바울을 만나 예수 믿고 새 사람이 되어 사도 바울의 아들처럼 되어 바울의 복음 전도에 있어 너무나 유익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예수 믿고 바울에 있어 둘도 없는 심복이었지만 그는 도망친 노예신분이었습니다. 당시 도망친 노예를 잡게 되면 본래 주인에게 돌려보내야만 했습니다. 주인에게 돌려보내진 종은 주인에 따라 어떠한 처벌도 행할 수 있었습니다.

빌레몬은 바울에게 있어 신실한 동역자였기 때문에 오네시모를 보내지 않고 빌레몬의 양해 아래 그냥 데리고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종이 아니라 사랑받는 형제”(몬1:16)로 받아 줄 것을 부탁하며 간곡한 편지를 써 보냅니다. 이것이 바로 빌레몬서입니다. 훗날 교회사에 오네시모가 훌륭한 감독의 이름으로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빌레몬이 과연 오네시모를 “사랑받는 형제”를 받아들인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령은 주인과 종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시는 기적을 보여주었습니다. 성령은 당시 사회 제도나 법이 할 수 없는 민족과 사상, 그리고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고 한 몸되게 하시고 하나되게 하시고 통일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바벨의 저주를 축복으로 바꿔 주는 거룩한 하나님의 영입니다. 성령은 단절의 아픔과 고통을 소통의 기쁨과 행복으로 바꿔주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성령은 민족과 문화, 언어와 사상을 뛰어넘어 하나되게 하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성령은 예수 믿고 구하는 누구에게든지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영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충만하시므로 여러분 가정과 교회, 나아가 우리 사회와 민족이 하나되는 하나님의 은총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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