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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주님의 부활 (마 27:57-2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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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부활 (마 27:57-28:20)-부활절 예배 

십자가와 부활은 복음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죄책을 벗기시고 죄의 세력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리고 부활을 통해서 그의 몸 된 우리로 썩지 않을 영광스러운 몸을 입고 영원히 주님과 함께 거할 소망을 주셨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부활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27:57-61절은 예수님께서 장사되신 일을 기록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기절했다가 다시 깨어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확실히 죽으셨기 때문에 빌라도는 그 시체를 요셉에게 내어주었고, 요셉도 그 시체를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을 막았습니다.

62-66절은 바리새인들이 무덤을 인봉하고 경비병들로 지키게 한 내용입니다. “예비일 다음날”(62)이면 안식일인데,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만든 까다로운 안식일 규례를 깨면서까지 무덤을 지켰습니다. 죽은 지 사흘 만에 살아나리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은 어느 제자들보다 잘 기억했으나 믿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발악을 해도 하나님의 역사를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안식 후 첫날 미명, 곧 주일 새벽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을 때,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무덤 입구를 막은 돌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아서 말했습니다.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5-6) 예수님은 죽으신지 3일 째 되는 날에 말씀하신 대로 부활하셨습니다. 천사는 예수 부활의 소식을 제자들에게 알리라고 했습니다.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무덤을 떠나 달려갔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평안하뇨”(9)하셨습니다. 여인들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어떤 것’을 사랑합니다. 열심히 주께 봉사하다가도 얻고자 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떠납니다. 12제자들조차 예수님을 통해서 이룰 수 있는 자기 야망과 꿈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야망이 깨어지고 꿈이 사라지는 현장에서는 달아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는 예수님 자체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통해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사형 현장과 장사되신 무덤 앞에서도 주님과 함께 있기 원했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운명하심과 장사되심의 현장 증인이었던 여인들은 이제 예수님의 부활에도 첫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잠언 8:17절에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오늘날도 주님을 통한 ‘어떤 것’을 얻으려는 현장에서는 먼저 처절하게 깨어지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절망과 한숨 속에서 주님보다 주님을 통한 ‘어떤 것’을 더 사랑했음을 깨닫고 눈물로 회개케 하십니다. 반면 주님 자체를 사랑하는 현장에서는 본문의 여인들처럼 애통함이 위로를 받고, 슬픔이 변하여 넘치는 기쁨이 되고, 시커멓게 타버린 가슴이 새 생명으로 약동하는 역사가 일어남을 봅니다. 그들을 통해 부활의 영광스러움이 증거됩니다.

이제 부활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예수님은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약 6시간 동안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돌아가셨습니다. 그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는 신비한 크로스(Cross: 교차)가 일어났습니다. 예수께서는 죄인으로 간주되시고 죄인인 우리는 의인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우리가 받을 죽음의 형벌이 예수님께 전가 되고 예수님의 영원한 의로움은 우리에게 전가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죄인들이 받아야 할 모든 죄의 책임(죄책)은 예수님께 돌리셨고, 의인이 받아야 할 모든 것을 우리에게 돌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택하신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추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주님께서 율법의 모든 요구를 완전히 이루셨기 때문에 죽음이 그분을 잡아둘 수 없었음을 선포합니다. 예수님은 참 생명을 얻으셨고, 부활의 그 생명을 택하신 자들에게 나눠주실 수 있으셨습니다. 부활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가 받아야할 모든 죄 값이 청산되었음을 하나님께서 승인하신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켰기 때문입니다(롬 8:1-2). 우리의 죄책은 사라졌고, 죄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분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는 아무런 공로 없이 의롭다는 칭함을 확정 받았습니다. 그리고 몸 된 우리도 장차 영광스러운 부활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죄 값을 다 갚으셨다는 말은, 성도가 어떤 불행한 일을 당할지라도 ‘내가 죄 값을 치르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 사실을 분명하게 마음에 새겨두지 않으면 갑작스런 사고를 당할 때, ‘내가 죄를 지어서 죄 값을 치르는가보다’라는 생각을 부지중에 하기 쉽습니다. 이는 십자가의 공로를 허물고, 자기 공로를 조금이나마 포함시키는 일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심지어 순수하게 주님을 따르지 않았던 제자들의 죄 값조차도 모두 갚으셨습니다. 제자들의 삶에 닥친 충격적인 사건과 그로 말미암은 절망과 탄식은 죄 값을 치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를 향한 아버지의 징계 혹은 연단과 같습니다. 결코 심판장이 범죄자에게 내리는 형벌이 아닙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을 전혀 죄인 대하듯 하지 않으시고 만나기 원하셨습니다. 그들을 만나서도 책망하시기는커녕 오히려 평안을 선포하시며 위로하시고 격려하셨습니다.

그러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는지 살펴봅시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까지 40일 동안 이 땅에 계셨습니다. 성경은 그 기간 동안 11번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사건을 기록합니다. 첫 번째가 막달라 마리에게 보이신 것이고, 다음으로 예수님의 무덤에서 돌아가는 여인들에게, 다음으로 베드로에게,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도마를 제외한 10명의 제자들에게, 도마를 포함한 11명의 제자들에게,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는 제자들에게, 갈릴리 산에서 열한 명의 제자들에게, 500여 형제에게, 야고보에게, 베다니 근처 산에서 열한 제자들에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이중에 다섯 번째 까지는 부활하신 그 날에 나타내 보이신 것이고, 여섯 번째는 일주 일 후에, 그리고 나머지 다섯 번은 나머지 기간 동안에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이 40일 동안에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로 부활이 성도가 도달하게 될 가장 영광스런 종착점임을 알려주신 일입니다. 우리가 접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땅에 소망을 두고 살아갑니다. 예수님께 3년 동안 집중 교육을 받았던 12제자들도 끝까지 이 땅의 소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예수 믿으면 이 땅에서 잘된다는 소망을 심어서 전도하는 방식은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 믿고 이 땅에서 잘되는 일이 많지만, 예수님 믿기 때문에 처참한 순교자로 죽어가는 일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헌금하고 헌신하는 목적이 이 땅에서 더 잘되기 위한 소망 때문이라면 우상 숭배자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썩어질 세상에 소망을 두게 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상반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부활의 세계를 소망하게 합니다. 이 세상에 속한 모든 것들은 결국 사라질 것이므로 사랑하거나 소망 둘 것이 못 됩니다. 우리의 몸조차도 약하고 욕되고 썩어질 몸입니다. 그러나 부활로 인해 강하고 영광스럽고 영원히 썩지 않을 신령한 몸으로 홀연히 변화될 것입니다(고전 15:42-44). 부활이 성도의 참 소망입니다.
 
부활하신 주께서 두 번째로 하신 일은 성경을 풀어 가르쳐서 십자가와 부활을 가르치신 일입니다. 부활하는 순간을 생중계 보듯 목격한 증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최초의 부활의 증인들도 부활의 결과인 빈 무덤과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알았습니다. 그러나 40일 동안 열 한번이나 나타내셨으나 승천 직전까지도 “오히려 의심하는”(17, 망설인다는 뜻) 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엠마오 도상으로 가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행하며 대화를 하면서도 주님이신 줄 모르다가, 나중에 가르쳐 주신 말씀이 마음에 뜨거워졌던 것을 기억하면서 부활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천사도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에게 “말씀대로” 살아나셨음을 증거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다른 어떤 증거로도 확신에 이르지 못합니다. 다만 주님의 말씀이 마음에 뜨겁게 살아날 때 확신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세 번째로 하신 일은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신 일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비록 우리가 제자 삼는 일을 하다가 깊은 상처를 받았고 이제는 제자라는 말만 들어도 진절머리 난다 할지다고 이것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께서 교회에게 주신 명령임은 분명합니다. 어떤 이유로도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기에 어떤 모양으로든 순종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사명은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18-20)는 약속이 함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십니다. 그분은 성도의 영적 상태에 따라 들락날락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함께 하십니다. 그러나 이 약속이 사명과 함께 연관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실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밀쳐두고 빈둥거리거나 엉뚱한 일에 힘 쏟는 사람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주님은 항상 멀리 계시는 것 같습니다. 그에게 이 약속은 그냥 종이에 기록된 약속에 불과합니다. 반면에 주께서 주신 사명을 힘써 감당하는 사람은 주님의 함께 하심을 강하게 느낍니다. 한 사람이 제자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살아 역사하시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강하게 맛보며 살아갑니다. 그에게는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신다는 말씀이 단지 약속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실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심을 실제적으로 누리는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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