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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부활(復活)과 부흥(復興) (눅 24: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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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4장 13절~35절
제  목 : 부활(復活)과 부흥(復興) 

1. 부흥을 사모함

요즘 제 속은 “부흥”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1907年, 한국 교회에 일어났던 부흥이 100년 째 되는 올해, 부흥을 사모하는 사람들과 교회를 통하여 이 땅에 다시 한 번 부흥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부흥의 때입니다. 여기 저기서 부흥의 소문들이 들려옵니다.

이러한 부흥의 소문은 한편으로는 반갑기 짝이 없지만, 한편으로는 많은 부담이 됩니다. 왜냐하면 ‘이 부흥에서 저 자신과 우리 교회, 나아가 우리가 살아가는 지역이 제외 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이 제게 있기 때문입니다. 이 두려움의 이유는 ‘1907년에 일어났던 부흥이 평양으로부터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대구 이하로는 내려오지 못했다’는 역사의 증언 때문이며, ‘우리의 문제가 부흥을 가로 막지는 않을까?’하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이러한 두려움을 가진 제게 올 부활절은 아주 특별합니다. 그 이유는 부활의 소식이 제게는 부흥의 소식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활이 저와 여러분과 이 지역의 부흥의 소식으로 들리기 때문이지요. 그런 면에서 부활절인 오늘은 제 마음에 큰 위로이고 소망이고 확신입니다. 이러한 메시지는 바로 오늘 본문에서 얻은 것입니다.

2. 부활하신 예수님

예수님은 분명히 사망했습니다. 형을 집행한 로마 군인들이나 유대 지도자들 및 그 수하들이 거듭 거듭 그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사망을 확인하고 또 확인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가 살아있을 때 말한 대로 ‘혹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뭔가 일어날 것이다’라는 불안감 혹은 일말의 기대감 때문이었지요. 그러나 그가 죽는 순간이나, 그가 죽은 직후에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두 명의 강도와 함께 사형에 처해져 죽었고, 같이 장사됨으로서 모든 유대인들과 헤롯 가문과 로마를 긴장시켰던 ‘메시야 사건’은 단순 ‘사기사건’으로 마무리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는 죽었고, 그리고 그것으로 모든 것은 끝이 났습니다.

그런데 죽었고, 여러 사람이 몇 번이나 확인을 했던 그 사람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분명히 공개적으로 처형되었고, 수 천 수 만 명의 사람들이 확인했는데 말입니다. 심지어 시신을 염하고, 시신에 향료를 부어 세마포 수의를 입힌 후, 큰 바위에 만들어진 굴 속에 넣었으며, 로마 총독 빌라도의 이름으로 그 무덤이 봉인이 되었고, 군인들이 무덤 입구에서 지키기까지 했는데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만약 며칠 전에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면, 그것도 스스로 관을 부수고 그 관 좌우와 위로 무겁게 덥힌 흙과 높이 쌓인 봉분을 뚫고 나왔다면, 여러분은 그 사실을 쉽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죽었던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살아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은 조작될 수 없는 증거를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사신 그리스도를 목격한 증인들의 명단이 그것인데요.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바돌로매, 마태, 도마,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다대오, 시몬 등 주님의 제자들이 차례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500여 명의 남자들이 한꺼번에 주님을 만났습니다. 또 다른 야고보가 그를 만났고, 한 자리에 모여 있던 사도들이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도 주님을 만났으며,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다수의 여인들이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 가운데 몇 몇 사람들의 목격담이 오늘 본문에 소개되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부활을 부정하여 부활은 없었고 날조되고 조작되었다고 주장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빌라도와 유대 지도자들인데요. 그들은 무덤 문이 열리고 죽은 자가 살아난 사실을 보고 받고서 그것을 날조했습니다. 부활이 분명히 일어난 사실이기에 날조한 것이지, 없는 일이었다면 그들은 무덤 문을 열고 시신을 꺼내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 증거가 그들에게 없었기 때문입니다. 수의에 쌓인 채 썩어가는 예수의 시신이 그들에게는 없었습니다.

오늘도 불신의 영,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부인하는 사탄의 세력들은 부활을 “있을 수 없는 일”, “허무맹랑한 일”이라면서 사람들을 설득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지금 우리 사회는 과거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겨지던 일들이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우주과학으로 화성 금성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생명과학으로 장기를 복제하고 동물을 복제하고,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TV를 볼 뿐 아니라, 앞으로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듯이 전화를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최근 강원도 양양의 도로 공사 현장에서 발견된 7천 년 전의 신석기 유물 가운데서 발견된 식물의 뿌리에서 새싹이 났다고 합니다. 정상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인데도, 사람들은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인정을 합니다. 그런데도 유독 예수님의 부활 사건만은 끝내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부활을 믿지 않는 불신 세상보다도 더 큰 문제는 주님의 부활을 확실하게 믿지 못하고, 그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는 성도들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12사도는 아니지만, 예수님의 공생애를 초창기부터 함께 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서” 죽은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죽음의 목격자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재판과 사형 집행에 참여한 제자들은 겨우 한, 두 명 뿐, 나머지는 대부분 도피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보지 않았으면서도 그가 분명히 죽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그들의 꿈, 즉 21절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란 것을 포기하고 낙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고 단정한 것입니다. 그들 스스로도 ‘예수 사건’은 하나의 사이비 종교의 ‘해프닝’에 불과했고, 그들은 ‘실패한 거사’에 몸을 담았던 부끄러운 자라는 패배감으로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불과 삼일 전만해도 자신들과 함께 하시던 그 주님께서 이제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존경하고 신뢰했으며, 그에게 자신의 꿈과 미래를 걸었던 사람을 잃었다는 것 때문에 가슴 아파하고 안타까워하면서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들 뿐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갈 길로 가버렸습니다. 어부들은 다시 바다로 갔고, 어떤 제자들은 다락방에 모여 문을 잠그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으며, 가룟 유다는 목을 매어 죽어버렸습니다.

지금 그들이 향하고 있는 엠마오는 예루살렘에서 서쪽 방향으로 25리, 약 10 km 정도 되는 거리에 있는 도시였습니다. 그들은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쉬운 마음을 달래면서 지난 며칠 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에 모순이 있습니다. 즉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은 현장에 없었으면서도 믿으면서, 또 다른 소식, 즉 23절 “그가 살으셨다”는 소식은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자신들과 삼년 동안 동고동락했던 사람들, 예수단의 동지들이었던 사람들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원수가 말하는 죽음의 소식, 죽은 자가 살아나는 일은 없다는 것은 받아들이고, 믿음의 동지들이 말하는 부활의 소식은 거절하는 모순에 이들이 빠져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의 논리, 인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소리,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의 말을 들으십시오. 예수님을 살아나셨습니다. 그는 산 자로 오늘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이것이 부활의 메시지입니다.

3.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

그런데, 지금 여러분들 가운데는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에 대해서 의심하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이 거짓이라느니, 조작극이라느니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끔찍하게 처형당한 죄수를 둘러싼 수많은 잡음과 뒷 예기들을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문제는 주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인정하고 믿겠는데, 정작 “그것이 지금의 내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왜 주님의 부활이 부흥과 연관되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의 답을 오늘 본문 후반부가 주고 있습니다.

① 오늘 본문에서 부활을 믿지 못하고 엠마오로 가고 있는 제자들을 보면, 부흥을 필요로 하는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실패한 사람들, 그 실패로 인하여 절망하는 사람들,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면 ‘그럴 줄 알았다’며 손가락질 받을 것 때문에 그 걸음이 무거운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른 후, 뭔가 해볼 것 같고, 뭔가 이룰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에 가슴이 벅찼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기적은 자신들의 기대감을 더욱 확실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돌아가시자 그들의 기대는 물거품이 되었고, 주님을 따르고자 모든 것을 버렸던 자신들은 실패자가 되어 부끄러운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도 이와 같은 패배의식에 젖어있습니다. ‘해도 안 되더라, 나는 안 된다, 해봐야 안될텐데 ….’ 이런 사람들과 사회에 필요한 것이 바로 부흥입니다. 이런 상태에 있었던 제자들이 주님을 만난 것처럼 말입니다!

②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면, 그 눈이 어두워져 주님이 곁에 오셔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 귀가 닫혀 주님께서 늘 들려주시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상태에 빠집니다. 오늘 본문의 두 제자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다가 오셔서 저희와 함께 걸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눈이 가리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너무나 잘 아는 제자들이면서도 예수님을 몰라보았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주님을 보지 못하고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시대입니다. 주님을 알아보고 그 말씀을 깨닫는 것이 부흥입니다. 살아계신 주님의 능력을 그대로 경험하고, 그것을 세상에 보이기 위해 부흥이 필요한 것입니다.

③ 부흥이 필요한 또 다른 이유는 우리 자신과 우리 시대가 변화를 필요로 할 뿐 아니라, 변화를 요구하는 또 다른 위협 앞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장차 하루가 다르게 빨리 변하는 시대를 살게 될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의 강림과 매일 수천명의 사람들이 주님을 믿으면서 새로운 교회 공동체가 탄생되고, 그 이후 곧바로 이어지는 교회에 대한 대대적인 핍박, 그리고 이방인 선교와 이방인 교회의 설립, 바울 등 새로운 지도자들의 등장 …. 이 엄청난 변화를 수용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 변화에 눌리기보다는 변화를 이끌기 위하여 제자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현실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과 FTA가 곧 협정될 것입니다. 그러면 농업을 비롯한 우리 사회와 경제에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 국가들 등 많은 나라들이 계속 해서 FTA를 요구해 올 것입니다. 즉 새로운 시대가 우리에게 변화와 새로움을 요구할 뿐 아니라, 또 다른 거대한 세력들이 우리에게 변화를 요구해 올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에 제대로 응답하고 그 변화에 눌리지 않기 위해서도 우리에게는 부흥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 일어나는 부흥은 어떤 모습일까요?

4. 부활은 부흥의 전주곡(前奏曲)

두 제자는 드디어 엠마오 가까이까지 왔습니다. 두 제자는 자신들의 목적지에 가까이 왔으나, 예수님께서 더 가려하는 것 같아서 강권하여 부탁했습니다.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 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29).” 그래서 예수님은 저희와 함께 어느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그때에야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가 곧 예수님인 줄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예수님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그들은 서로 말하기를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라고 했습니다. 자신들과 걸으면서 성경을 풀어주신 분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라는 것을 그때에야 비로소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곧장 열 한 사도와 다른 성도들이 함께 모여 있는 곳으로 가서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 불신으로 좌절과 절망에 빠진 제자들이 주님을 만나자 긴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텅빈 마음, 실패자가 되어, 누군가 자신들을 향해서 말할 비난과 조롱이 부끄러웠고, 앞날이 불안했던 그들의 마음이 주님을 만남으로서 뜨겁게 타올랐습니다(32).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의 텅빈 마음이 채워지고, 차가워진 마음이 다시 뜨거워지고,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 것, 바로 이것이 부흥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활을 곧 부흥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은 “곧 그 시로 일어나(33)”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날은 이미 어두워졌으나, 그들의 마음에는 커다란 등불이 켜졌습니다. “주님이 정말 살아나셨다”, “우리가 그 주님을 만났다” 는 이것이 그들의 마음의 등불이 되어 또 다시 10km의 밤길을 달리도록 만든 것입니다. 부활은 아픔의 자리, 실패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다시 시작하게 만듭니다. 바로 이러한 모습이 부흥을 필요로 하는 이 시대와 저와 여러분 속에 일어나야 합니다. 실패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게 하는 힘, 다시 시작하게 하는 힘, 지친 몸이 힘을 얻어 밤길을 달려도 피곤치 않게 하는 힘, 이것이 부활을 경험한 성도의 모습이며, 부흥의 모습입니다.

세 번째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은 35절에 있는 대로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증거함으로서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신 것을 증거하고, 주님을 만난 체험을 자랑하는 일, 바로 이것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성도의 모습입니다. 바로 이런 것 때문에 우리가 부흥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활은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흩어졌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로 용기를 얻어 강력한 영적 군사가 되어 새로운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비겁한 베드로는 용감해졌고, 잔인하던 요한은 사랑의 사도가 되었으며, 의심 많던 도마는 확신의 사람이 되어 땅끝까지 나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주님을 만난 수많은 사람들이 거룩한 교회 공동체가 되어 로마를 정복하여 새로운 역사의 문을 열었습니다. 이와 같이 부활을 믿는 교회와 성도는 오늘의 새 역사를 창조하는 새로운 주인공들이 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이 곧 부흥이라는 것을 기억합시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경험하는 것이 부흥의 시작임을 기억합시다. 실패, 낙심, 아픔, 가난, 병듦의 마음 상태가 다시 채워지고, 의욕으로 불타고, 새로운 각오로 박차고 일어나는 것이 부흥입니다. 인생을 살맛나게 만들어 다시 시작하고, 다시 뛰게 하는 것이 부흥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경험하고, 경험한 그 주님을 자랑하고 전하는 것이 부흥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러한 모습은 부활의 주님을 만날 때 가능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으시고, 그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교회와 이 땅의 부흥의 초석을 놓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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