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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사망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 (고전 15:5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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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사망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
본문 : 고전 15:50-58.

제 상담실에 짧은 글 하나가 올라왔습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무지 바쁘시거나 나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는 것처럼 느껴집니다.>라는 내용의 글이었습니다. 무엇인지 그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삶이 힘들고 피곤하고 답답하고 꼬이고 있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문제가 좀처럼 잘 풀리지 않고 있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리고 ‘때때로’라는 이름으로 그 글을 올린 것을 보면 그와 같은 일이 처음 있는 일이 아니라 주기적으로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글을 읽으면서 저는 그와 같은 문제가 비단 그 글을 쓴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 중에 그와 같은 생각을 한 번도 안 해 보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생명의 근원이시고 축복의 근원이신 분이십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는 것은 자신의 삶이 생명과 축복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느낌을 받는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삶이 곤고하고 피곤하고 자신의 삶속에 생명과 복이 역사하지 못하고 사망과 불행이 역사하고 있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일을 당할 때 우리들의 대부분은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시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관심이 없으셔서 멀리 계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성경의 말씀대로 하나님은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졸지도 않으시며 우리를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문제는 우리들이 하나님이 떠난 것입니다. 우리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한 이후 아담과 하와가 제일 먼저 한 행동은 하나님을 피하여 숨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숨으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을 피하여 숨은 것입니다.

태양은 언제나 그 자리에 동일한 모습과 조건으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짙은 구름이 껴서 그 빛을 가리듯 하나님은 언제나 그 자리에 동일한 모습으로 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들의 죄악이 너무 관영하여 하나님을 가리고 있는 것입니다. 지상에는 비가 오고 해가 보이지 않아도 비행기를 타고 구름 위를 올라가 보면 항상 밝은 태양이 비치듯 우리 죄의 구름을 걷어낼 수만 있다면 항상 임마누엘 하시는 하나님을 느끼고 뵐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못 살게 하고 불행하게 하고 힘들게 하는 것은 가난이 아닙니다. 그와 같은 문제는 가난한 자들에게만 나타나는 일이 아니라 부요한 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물론 가난함도 우리를 힘들게 하고 어렵게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나에게서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짐이 우리에게 주는 어려움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행복과 불행, 생명과 사망의 문제는 돈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어도 부자는 될 수 있습니다. 죄를 지어도 부자로 살 수는 있습니다. 죄를 짓고도 얼마든지 세상적으로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 죄가 관영하기 때문에 오히려 세상을 닮아 적당히 죄를 짓고 사는 것이 세상을 사는 요령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죄를 짓고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는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 하나님을 피하여 숨었듯이 그와 같은 행동이 우리에게도 언제나 나타납니다. 죄가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느낌이 우리를 힘들게 하고 불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죄의 삯이 사망이라는 말씀이 옳습니다. 우리를 못살게 하고 불행하게 하는 것은 죄입니다. 우리들의 죄가 우리를 못 살게 하고 힘들게 하고 불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우리가 다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우리는 죄를 짓기만 할 뿐 지은 죄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장로교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우리 인간을 구원에 관한 한 전적으로 무능력한 존재로 이해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죄를 지었을 때 죄를 지은 사람은 그 죄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과 기회는 내가 죄를 지은 상대방에게 있습니다. 그가 용서해 주기 전에는 어떤 방법으로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용서를 구하기 위하여, 사과를 하기도 하고, 보상을 하기도 하고 하지만 그것 때문에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그와 같은 가해자의 행동을 보고 그를 용서해 주기 때문에, 합의해 주기 때문에 문제가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사과하지 않는다면, 그에 합당한 피해 보상을 하지 않는다면 용서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기가 사과하고 보상하지 않으면 용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그것을 용서 다시 말해 구원에 대한 능력으로 이해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물론 사과와 보상이 없다면 용서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용서 받지 못함의 원인 즉 책임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과와 보상만 있다면 언제나 용서 받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용서와 구원의 능력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지은 사람에게는 용서와 구원에 관한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죄인은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하여, 그 죄 사함에 대하여 전적으로 무능력한 존재인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 즉 생명과 성공과 행복에 관한 한 전적으로 무능력한 존재입니다. 죽는 게 당연한 일이고, 죽도록 힘들게 사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답답하고 고통스럽고 불행하게 사는 것이 우리의 운명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실존인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운명적인 현실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우리의 운명을 깨트리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치르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셨습니다. 죄는 우리가 지었는데 그 죄 값은 대신 하나님이 치르셨습니다. 남은 일은 우리의 회개 뿐 입니다. 믿고 회개하는 것 뿐 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요한복음 3장 16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고 우리의 그 영원한 생명 즉 영생을 확인 시켜 주시기 위하여 무덤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오늘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은 우리 기독교 최고의 그리고 최대의 계시입니다. 부활은 계시입니다. 우리의 죄 사함과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이십니다. 말씀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회개만 하면 됩니다. 죄를 뉘우치기만 하면 됩니다. 거기서 돌아서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치르신 대가가 너무 커서 세상의 그 어느 것도 우리를 그 구원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사탄도 그에 대하여 시비 걸 수 없습니다. 송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로마서 8장 31절에서 33절의 말씀입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시겠느냐.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 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 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아멘.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때문에 우리 모두는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죄로 말미암은 모든 사망으로부터 부활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불행과 역경과 실패와 좌절의 사슬을 끊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고백이 오늘 부활의 아침 우리 모두의 고백의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빌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아멘.

사망에 대하여 큰 소리 칠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세상의 그 어느 것으로도 죄의 그늘로 인해 생기게 되는 모든 사망과 불행과 실패와 고통을 이길 수 없습니다. 사망과 불행과 고통과 실패는 우리의 운명이었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그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를 결박하고 있는 모든 고통과 불행과 역경과 어려움은 그 뿌리가 죄입니다. 한 마디로 해서 죄의 사슬입니다. 죄의 결박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운명과 같아서 스스로 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우리 죄의 결박을 푸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피를 대가로 지불하시고 우리를 그 모든 사망과 고통과 실패와 불행으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부활로 우리의 부활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약속해 주셨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지금 여러분을 얽어매고 있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환난이십니까? 곤고함이십니까? 박해이십니까? 기근이십니까? 아니면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십니까? 그것은 본시 우리의 운명이었으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운명을, 그 결박을 풀어 주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꽃은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우리의 부활을 믿는 것이 신앙의 결국입니다. 바울은 그와 같은 믿음으로 사망에 대하여 큰 소리를 쳤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그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현재 우리를 결박하고 있는 그 모든 것들에게 대하여 바울처럼 한번 외쳐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든 환난과 곤고와 박해와 기근과 적신과 위험과 칼에 대하여,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외쳐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모든 사망에 대하여 여러분이 부활할 것임을 승리할 것임을 믿음으로 선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도 부활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셨습니다. 우리도 승리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모든 사망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실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김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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