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부활주일] 예수 부활의 증인 (행 10:34~43)

  • 잡초 잡초
  • 200
  • 0

첨부 1


 
  우리 기독교 신앙의 핵심 내용은 뭐니뭐니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생의 소망을 간직할 수 있게 되지 않았습니까? 때문에 우리는 이 믿음을 굳게 간직하고 있어야 합니다. 특히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믿음과 우리도 또한 부활할 것이라는 믿음은 항상 분명히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부활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고 또 불쌍한 존재가 될 것입니다. 일찍이 사도 바울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 15:19)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은 베드로가 가이사랴에 주둔하고 있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 고넬료를 찾아가서 설교한 말씀입니다. 고넬료는 비록 유대인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늘 기도하는 매우 경건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 온 족속이 그를 칭찬했습니다. 그의 하인들도 그를 가리켜서 의인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욥바에 머물고 있던 베드로를 오라고 초청했습니다.

  고넬료의 초청을 받은 베드로는 마음이 썩 내키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하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세 번씩이나 그에게 환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환상을 보여 주시면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행 10:15) 그래서 그는 마음을 고쳐먹고 가이사랴에 있는 고넬료의 집을 찾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아주 분명했습니다. 먼저 그는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을 알게 되었다고 증거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은혜에는 그 어떤 차별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유의 주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는 그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을 화평의 복음이라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그 예수님을 나무에 달아 죽였습니다. 왜 예수님이 그렇게 저주스러운 모습으로 죽으셔야 했습니까?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모독했기 때문에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저주스러운 모습으로 죽으신 까닭은 오직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기 위해서였을 뿐입니다. 그리하여 믿는 사람들이 모두 다 구원을 얻게 하시려고 십자가를 지셨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이라는 잣대로 사람을 판단하고 특히 이방인을 차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차별없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주위에서 여러 가지 형태의 차별을 볼 수 있습니다. 아직까지 남녀 차별이 있습니다. 학력과 빈부에 따른 차별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특히 외국인 근로자들을 차별하는 것은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교회 안에도 차별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난한 자를 업신여기고 초신자들을 무시하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잘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십니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것은 죄를 짓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를 외모로 취하셨을 것 같으면 우리는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아직까지 남아 있는 모든 차별을 중단하고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잘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화평의 복음을 강조한 것은 부활하신 주님이 주시는 평강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누려야 한다는 말로 이해해도 좋습니다. 일찍이 부활하신 주님이 문을 닫고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오셔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19) 그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도 참 평강을 주십니다. 사도 바울도 분명히 선포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엡 2:14) 때문에 사도 바울은 오늘 우리에게 분명히 권고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세상에서 평화를 찾기는 참 어렵습니다. 어디를 보아도 평화를 찾아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왜 참된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 까닭은 바로 죄 때문입니다. 죄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벽입니다. 그 벽 때문에 우리는 평화를 잃어버린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 바로 그 벽을 허무셨습니다. 주님은 나무에 달려 죽으셨지만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죄의 저주를 깨끗이 제거하시고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 주셨습니다. 때문에 오늘 우리는 주님의 부활이야말로 우리에게 참된 평화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참된 평화를 누리게 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 모두에게 전도의 사명을 주셨다고 오늘 베드로는 분명히 대답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바로 그 주님의 증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가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행 10:39) 그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행 10:42) 부활하신 주님의 관심은 오직 생명을 구원하는 전도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바로 이 화평의 복음과 부활하신 주님을 널리 전하고 증거할 사명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과연 부활하신 주님은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자이십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복되고 즐거운 소식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그보다 더 두려운 소식은 없을 것입니다. 성경이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9) 히브리서 기자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은 만민의 구주가 되실 뿐 아니라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재판장이 되십니다. 때문에 우리는 죄 가운데 멸망할 수밖에 없는 많은 사람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믿도록 증인의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주님은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때문에 우리도 모든 사람에게 차별없이 이 화평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삶의 현장에서 주님이 주시는 참된 평화를 이웃과 더불어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막힌 담을 헐고 부활하신 주님을 전하고 증거하는 일에 죽기까지 충성을 다함으로 말미암아 장차 어린 양 보좌 앞에 섰을 때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면류관을 받아 쓰는 참으로 복된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