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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이같이 전파하매 이같이 믿었느니라 (고전 1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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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이 전파하매 이같이 믿었느니라"
고린도전서 15장 1-11절

1988년에 공화당의 부시와 민주당의 듀카키스가 미국 대통령 선거전에 나섰을 때였다고 기억됩니다.
  그때 민주당에서는 당시에 유행하고 있던 Wendy 햄버거 회사의 유명한 광고를 인용한 'Where is the beef?'(고기는 어디 있나?)라는 문구를 사용하여 공화당의 알맹이 없는 정책 공약을 비판하며 선거운동을 벌였습니다.
  그러자 공화당 쪽에서는 그 'Where is the beef?'라는 문구에서 첫 글자인 'W'를 큰 'X'자로 지워 놓고 마지막의 물음표(?) 부호 대신에 느낌표(!)를 넣어서 'Here is the beef!'(고기는 여기 있다!)라는 문구로 바꾸어서 대항해 나왔었습니다.

  어쨌든 정치 세계에서는 상대방을 비난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 그 생리이겠지만, 그처럼 햄버거 광고 문구를 이용한 재치 있는 풍자로 서로 공박하고 반발하는 것은 제 눈에는 상당히 세련된 선거전으로 보였습니다.
  'beef가 없는 햄버거'를 우리나라 표현으로 옮기자면 '속빈 강정' 정도가 될 것 같은데, 하여튼 둘 다 정작 중요한 알맹이는 없이 겉껍질만 가지고 모양을 내고 있는 경우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우리 기독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선포된 구원의 진리, 즉 복음을 믿고 전파하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이 복음의 알맹이에 해당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 복음을 구성하고 있는 내용 중에서 만일 쏙 빼내어 버리면 정말 맛없고 영양가 없는 층층의 껍질만 남게 되는 것, 세상을 향하여 '기쁜 소식'이라고 전하는데 만일 그 한 가지 내용을 쏙 빼내어 버리면 아무 의미 없는 거짓 공약이 되어 버릴 수밖에 없는 그 진짜 알맹이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부활이 없으면 십자가를 통한 대속 은혜라는 것도 그야말로 껍데기만 남는 것이며, 부활이 없으면 천당이란 것도 아무 의미 없는 거짓 공약과도 같은 것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활을 복음에서 빼놓으려 하는 어처구니없는 이단 사상이 고린도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이 참된 신앙에 얼마나 결정적인 위협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그는 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특별히 부활 신앙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1절과 2절에서 그는 "1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2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지금까지 "전한 복음"이 어떤 복음인지를 다시 한 번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분명히 "알게" 해 주려 하고 있습니다.
  그 복음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의 부활이 핵심이 된 복음이었습니다.
  성도가 "굳게 지켜야" 할 복음, 성도로 하여금 "헛되이 믿지 아니하도록" 확실히 "구원을 얻게" 해 줄 진짜 복음에는 반드시 부활신앙이 그 중심에 들어 있어야 한다고 사도 바울은 재삼재사 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처럼 중요한 부활, 복음을 믿고 구원받고자 할 때 반드시 그 복음 안에 들어 있어야 할 이 부활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믿을 수 있게 됩니까?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사도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이 부활신앙을 가지게 되었던 증거들이 무엇인지를 본문 말씀이 '전파해 주는 대로 받아 믿음'으로써, 우리들의 신앙에 절대로 빼 놓을 수 없는 이 부활신앙을 다시 한 번 '굳게 지키고 또 그 가운데 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우리는 성경이라는 '기록 증언'을 통해 부활을 믿게 됩니다.

  3절과 4절의 말씀에 기록하기를 "3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내가 받은 것"이라고 하는 것은, 그가 회심한 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직접 계시 받은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가 예수님으로부터 받았고 또 그대로 전해 왔던 복음의 핵심은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신" 사실과,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사실, 여기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과 사망 권세를 이기신 육체적 부활, 이 두 가지는 복음의 내용 중에서 그야말로 노른자위에 해당하는 부분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처럼 중요한 복음의 두 가지 핵심을 언급하면서 두 번 다 "성경대로" 그것들이 이루어졌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성경대로'라는 말은 구약 성경에서 메시아에 대하여 예언한 말씀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이사야 53장 5-6절의 말씀에 보면 "5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그리스도께서 대속적인 죽음을 맞게 될 것을 예언했습니다.
  또 시편 16편 10절 말씀과 같이 "10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라고, 그리스도께서 육체적 부활하실 것을 예언한 곳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사건을 논할 때, '누가 그것을 목격했다'라든지 '어떤 사람이 전해 주었다'라는 것보다도, 그 사건들이 오직 성경에서 예언하신대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가장 중요히 여겼고 그래서 여기서도 제일 먼저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게 만드는 가장 큰 증거가 바로 성경 말씀이라는 점은, 부활 사건을 직접 목격했던 제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 것이었습니다.
  안식 후 첫날 여자들이 먼저 예수님의 빈 무덤을 보고 놀라 제자들에게 알렸습니다.
  그때 베드로와 또 한 명의 제자가 그 말을 듣고 놀라 무덤으로 달려갔었습니다.
  하지만 그 빈 무덤을 보고도 베드로는 그 즉시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되지는 못하고 "그 된 일을 기이히 여기며 집에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그저 알쏭달쏭하기만 하고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하여 요한복음 20장 9절에서 밝히기를 "9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빈 무덤을 보고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던 이유는 다른 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가 아직까지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이 길 갈 때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바로 곁에까지 다가오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이신 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말하기를 "지금 당신은 예루살렘에서 최근 벌어진 빅뉴스도 못 들었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었는데 어떤 여자들은 그의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고 또는 그가 살아나셨다고 천사가 전해 주더라고 주장하는데,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우리는 모르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무어라고 하셨습니까?
  "25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5-27)고 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예수님을 알아본 그 두 제자들도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역시, 제자들을 향하여 그 무엇보다도 그들이 성경을 깨닫지 못한 까닭에 당신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것이라고 꾸짖으시면서, 그들로 하여금 성경 말씀을 통하여 부활신앙을 얻도록 인도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께로부터 또한 직접 계시를 받고 복음을 전한 사도 바울이었으니, 그도 역시 "성경대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그처럼 소리 높여 강조했던 것이었습니다.

  '빈 무덤'에 직접 들어가 본 제자들에게도 성경 말씀이 깨달아지기 전에는 부활신앙이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나란히 걸어가면서도 성경 말씀이 더디 믿어진 제자들에게는 아직 부활신앙이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바로 그 현장에 있는 것이나 그 당사자를 바로 곁에 두는 것보다도 오히려 더욱 확실한 증거가 바로 성경의 증언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더욱 그러합니다.
  '예수님께서 과연 부활했을까?,' '죽은 사람이 살아난다는 일이 정말 일어날 수 있을까?'라는 의심으로 시작하여 불신으로 빠지기 전에, 우리는 먼저 성경을 펴고 그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하는 바를 읽어 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 성경을 읽는 중에 성령께서 과연 어떻게 우리의 심령 속에 뜨겁게 역사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부활을 믿게 만드는지는 오직 체험한 자만이 알 수 있는 신비요 은혜입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부활을 믿도록 만드는 데 있어서 이보다 더 나은 길은 결코 없습니다.
  성경을 통한 성령의 역사는 사람의 논리나 어떤 증거물을 통한 증거 가지고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게 사람의 심령에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목사의 유창한 설교를 통해서가 아니라, 어떤 박식한 신학자의 논리 정연한 교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정확무오하게 기록된 성경 말씀의 확실한 증언 기록이 구구절절 전파해 주는 그대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신앙을 믿고 지키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우리는 제자들이라는 '목격 증인'을 통하여 부활을 믿게 됩니다.

  5절 이하 7절까지의 말씀에 "5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6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7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라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성경이라는 기록의 증거물 외에도 그것을 친히 목격한 수많은 증인들이 또한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게바" 즉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서 제일 먼저 부활하신 주님을 개인적으로 뵈었습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21장에 기록된 사건,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숫가에 찾아 오셔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어 주셨던 그 사건보다 먼저 있었던 일로서, 정확하게 어떤 식으로 일어났는지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수제자였고 또 그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잘못을 저질렀으니, 예수님께서 특별히 그를 먼저 만나 주신 것으로 짐작됩니다.

  "후에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사건은 도마가 없을 때 열 명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과 나중에 도마가 있을 때 도합 열 한 명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사건을 가리킵니다.
  사실 가룟 유다는 빠져 있는 상태였지만 그래도 '열두 제자'라고 한 것은, 이미 그 표현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집합적으로 부르는 대명사가 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신" 사건은 성경의 다른 곳 어디에서도 자세히 설명되어 있지는 않는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여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게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마 28:10)고 말씀하셨는데, 어쩌면 그 갈릴리에서 사람들을 만나셨을 때 오백여 신도들이 모였을지도 모릅니다.
  하여튼 이 오백여 명의 증인들을 사도 바울이 언급한 것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제자들과 여인들 몇 명끼리만이었다면 서로 짜고 거짓말을 지어내었다고도 하겠지만, 오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한꺼번에 다 구슬려서 같이 거짓말 하도록 각본을 짜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서신을 썼을 때는 예수님 부활 승천 이후 약 20년가량 지났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그 "오백여" 명 중에서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약 이백 오십 명이나 되는 사람들 중에는 고린도교회 교인들과 서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혹 그런 사람이 없었다 하더라도, 만일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이런 사도 바울의 증거가 의심스러우면 그 이백 오십 명이나 되는 사람들 중에 아무나 만나서 확인해 보려고 했더라면 얼마든지 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의 이런 증거를 들을 때 고린도교회 교인들로서는 정말 의심할 여지가 없었던 것입니다.

  7절 나오는 "야고보"는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가 아니라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입니다.
  사복음서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의 육신 형제들은 예수님의 공생애 당시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다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야고보는 오히려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의 위치에까지 이르게 되었는데, 그처럼 야고보가 갑자기 정반대로 바뀔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 그에게 나타나 주셨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를 가리키는 말로 짐작됩니다.
  나중에 맛디아가 가룟 유다의 자리를 채우는 사도가 되었을 때, 그 후보 자격을 두고 "제자들과 항상 다녔고 부활을 증거할 수 있는 자"라고 강조되어 있는 것을 보아서, 맛디아 역시 예수님 승천 때에 그 자리에 함께 있었음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증인들 중에 가장 특이한 사람은 바로 사도 바울 자신이었습니다.
  8절 이하 10절에 기록하기를 "8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9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10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했습니다.

  "맨 나중에"라고 말한 대로, 바울은 순서적으로도 다른 사람들보다 나중에 예수님을 뵈었으며,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을 육안으로 목격한 맨 마지막 사람이기도 했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정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사도였습니다.
  바울 스스로 다른 사도들과 비교해 볼 때,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과정이란 도무지 정상적이라 할 수 없는, 달도 채 채우지 못하고 태어난 아이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다른 그 무엇보다도 바울은 자신이 원래 "교회를 핍박하던" 박해자였다는 사실이 평생 가슴 아팠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까닭에 그는 남보다 더 열심히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하여 수고를 아끼지 않았으며, 자기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그 누구보다도 뜨겁게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처럼 열렬히 교회를 핍박하고 신자들을 체포하기 위하여 원정까지 불사했던 바울 같은 사람이 하루아침에 거짓말처럼 바뀌어 버린 것은, 단 한 가지 설명, 즉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게 됨으로써 그처럼 변화되었다고 밖에는 달리 해명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무엇을 자기 눈으로 본 사람은 그 목격한 바를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습니다.
  듣는 사람들이 믿지 않으면 더욱 열을 내어서 말하지 않을 수 없으며, 자기 입을 틀어막으려 하면 더 더욱 소리 높여 외치게 되는 것이 사람의 생리인 것입니다.
  오죽하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라는 말을 땅에 구멍을 파고서라도 그 속에다 대고 외치고 싶었겠습니까?

  사도들과 초대교회 성도들 역시 꼭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그들도 복음 전도하다가 박해를 받고 체포를 당하고 채찍에 맞아도 그럴수록 더욱 소리를 높여서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라고 한 입처럼 외쳤던 것입니다.
  예수님 부활하신 모습을 분명히 자기들 눈으로 똑똑히 보았고, 그 부활하신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었고, 함께 앉아 식사까지 했으니, 도무지 그 사실을 전하지 않으려야 않을 도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증거가 그 사도들이 평생을 바쳐 전도하는 동안 내내 그 복음의 유일한 '알맹이'가 되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죽기 직전까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에 관하여 너희에게 증거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라고, 유언 대신 이 부활복음을 한 번 더 확증하고 순교 당했습니다.
  사도 요한 역시 죽음만 남아 있는 밧모섬의 귀양살이 하면서도 "일찍 죽임을 당하시고 이제 보좌 우편에 앉으신 어린 양"을 자신의 눈으로 목도하고 있다고 증거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말들이 천하에 없는 거짓말쟁이들이 무슨 악에 받쳐서 죽기까지 지른 소리일 수가 있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처럼 제자들뿐 아니라 다수의 평신도들이 목격했으며, 평소에 예수님을 '버린 형제'처럼 대하던 야고보가 옹호하게 되었으며, 이전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발 벗고 나서서 핍박하던 바울이 오히려 뜨겁게 변증하게 되었으며, 그 모든 증인들이 자기 목숨과 바꾸기까지 하면서 한 목소리로 증거했으니, 이것이 어찌 거짓말일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도 성경을 통하여 이 순교의 목격자들이 우리 귀에 생생하게 들려주는 증거를 통하여, 그들이 '보고 들은' 이 예수님 부활 사건을 자신의 심령을 통하여서도 꼭 같이 목도하고 확신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세상의 법정에서도 증거문서와 증인, 이 둘이 합쳐지면 정말 강력한 증거가 됩니다.
  아무 기록 남은 것 없이 그저 '저 사람에 내게 이렇게 약속했다.'라고 주장하든지 무슨 현장 사진 한 장 없이 '저 차가 내 차를 받았다.'라고 말로만 주장하는 것은 그리 큰 설득력을 가질 수 없습니다.
  또한 그저 진단서만 증거문서로 제출하는 것보다는 그 진단서를 쓴 의사가 증인석에 직접 출두해서 증언하면 훨씬 더 강력한 증거가 될 수 있으며, 교통사고가 났을 때에도 나중에 도착한 경찰관의 보고서보다는 그 사고 목격한 증인이 더 신빙성이 있기 때문에 '아무 날 아무 시에 어떠어떠하게 생긴 두 차들이 충돌하는 사고를 목격한 사람은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플래카드를 그 현장에 달아놓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증인 없이 문서만 있거나 문서 없이 증인만 있을 때의 증거라는 것은 그 양자가 다 있을 때의 증거의 효력과 강도에는 도저히 비길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 부활 사건에 대하여서는 바로 '기록 증언'과 '목격 증인'이라는 이런 의심할 바 없는 확실한 증거들이 둘 다 있는 까닭에 11절 말씀은 "11그러므로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고 필연적인 결론을 내려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구약에 예언된 말씀과 더불어 그 성취된 사실을 기록한 신약의 말씀을 통하여, 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야말로 기독교 복음의 빼놓을 수 없는 알맹이라고 오늘도 여전히 "전파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나 다른 증인들도 꼭 같이 "이같이" 전파했습니다.
  즉 그들이 부활을 증거한 말들은 기록된 성경 말씀과 조금도 모순 없이 정확히 '일치되는' 것이었으며 그래서 그 많은 사람의 증언들이 조금도 서로 차이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아 있는 순서는 오직 "이같이 믿는" 것뿐입니다.
  2절 말씀을 다시 보면 "전한 그 말을...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부활 믿지 않고 예수님 믿는다는 것은 구원 얻을 수 없는 헛된 믿음이 될 뿐이라는 뜻입니다.
  반면에 "이같이 전파하매... 이같이 믿었느니라"는 말씀대로, 그저 전파된 대로 예수님 부활을 믿는 것만이 참된 믿음일 따름입니다.
  오직 성경 말씀이 증거하는 대로, 오직 선지와 사도들이 전파해 준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복음을 믿음으로써, 이 믿음에 약속된 영생구원의 부활을 꼭 함께 누리시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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