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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누구의 호산나인가 (마 2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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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지금 입성하십니다. 입성 하시는데 호산나, 호산나 부르면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맞습니다. 저는 예배 때마다 특별히 찬양이 있을 때마다 너무나 진한 감동을 받습니다.

제가 음악은 잘 모르지만 오선지에 음표가 있고 음정이 있고 빠르게 늦게 강하게 약하게 등 모든 것이 기호와 부호로 기록이 되어있습니다.‘도 레 미 파 솔 라 시’가 있는데 그 도라는 음정이 어느 폭인지 아무도 제한을 두지 않습니다. 도만 내면 됩니다.

똑같은 음정을 가지고도 여러 가지 소리를 내고 감동을 전할 수 있다는 거 그래서 연주라는 것은 오르간 연주 성가연주 지휘 모든 것이 너무나 아름다운 하나님의 창조 중에 신비에 속하는 창조다 저는 늘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기호, 한 가지 부호, 한 가지 언어, 한 가지 글자, 똑같은 문맥 속에서 흘러나오는 연주하는 사람의 자유, 법, 헌신, 이 모든 것을 합하면 상상도 못할 아름다운 음악을 다시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작곡가는 작사자는 창조를 했지만 연주하는 사람의 재창조는 훨씬 더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제가 지금 무슨 얘기를 드리려고 하냐하면 우리가 읽은 성경말씀은 글자라 이른 기호입니다. 부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원문이 있고 번역이 있고 우리말로 까지 왔습니다. 그 글자가 우리에게 우리가 연주할 삶의 연주의 모범이 되어 있습니다.

그 글자를 읽고 제가 지금 제 매일같이 삶속에 성경에 써있는 기호로 된 글자를 읽고 제가 지금 몸으로 영으로 마음으로 연주를 하려고 합니다. 어떤 마음 가지고 연주 할 수 있습니까? 그 속에 담긴 진한 의미를 어떻게 제가 파악 할 수 있습니까? 무슨 심정 가지고 성전에 들어가야 됩니까?

하나님의 이야기 예수의 이야기 모든 선지자들의 이야기를 묶어 놓은 얼마 되지 않는 글자로 된 성경 속에 수천 년 동안 지금도 읽고 파악하고 느끼고 뽑고 펼치고 그리고 제가 삶으로 몸으로 연주하고 싶은 대목들이 오늘 종려주일 이야기에도 들어있습니다.

저는 역사를 잘 모르는데 젊을 때 읽었던 책 중에 '역사란 무엇인가.' E. H. Carr 란 사람이 쓴 아주 고전적인 책을 읽고 역사란 아주 중요하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과거에 쓰였던 어느 사건의 기록이 역사가 아니고 그 사건을 제가 다시 끌어와서 오늘 저의 삶과 대화하고 만나고 그래서 의미를 찾고 삶의 본보기가 되고 그러면 그 역사가 옛날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역사가 됩니다.

지금에 와서 모든 역사가들은 옛날 역사를 있는 그대로만 보지 않고 끌어다가 오늘의 눈으로 보고 다시 오늘 평가도 시키고 다시 오늘의 입장에서 옛날 것도 평가해 보고 그래서 저는 역사를 읽으면서 산 역사를 오늘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역사가 의미 있는 역사가 될 겁니다.

그래서 이 분은 영국 분입니다 만 역사라고 그냥 history라고 말하지 않고 history하는 말이 오늘의 삶과 연관돼서 의미를 붙이면 다시 독일말로 보람 있고 의미가 있고 뜻을 새겨서 오늘 제가 보기에 좋다고 느끼면 그런 역사를 Geschichte 라고 합니다, 그 뜻 생각 하고 TV에 나오는 사극을 보면 재미가 있더라고요. 그거 없이 사극을 보면 재미가 없습니다.

하도 멀어가지고. 근데 그 뜻을 생각하면서 오늘 저한테 무슨 말씀인가 제가 큰 배움을 얻었습니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또 한 분의 배움을 제가 얻었습니다. 과거 쓰여 있지만 오늘로 끌어온 역사. 그것을 Geschichte라고 한다는데 성경에 쓰인 모든 말씀은 끌어온 제가 감동 받을 수 있는 오늘의 살아있는 말씀의 원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역사를 말하면 그 원본은 과거에서 끌어온 게 아니고 성경이라 이른 원본은 사실은 미래에서 온 겁니다. 이 말씀에 주인이신 예수란 분은 이 천 년 전에 마구간에 태어났다가 선교활동 하시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셔서 승천하셔서 다시 오셨던 그 뜻이 아니라 본래 부터 우리가 가야할 미래의 나라 하나님 나라의 주인으로 계셨다가 미래의 주인인 그분이 오늘에 오셔서 오늘 우리한테 약속하시고 이 천 년 전에도 오셨고 지금도 오시는데 오신 그분은 미래 분이지 과거분이 아닙니다.

예수의 말씀은 과거의 의미를 찾는 것도 중요하나 그 말씀의 본래 출발이 우리가 가야할 미래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 하신 말씀입니다. 성경말씀은 미래의 언어가 오늘의 언어가 되었고 과거의 언어로도 쓰여 있습니다. 오늘은 과거의 살아있는 연속만이 아니라 미래를 앞당겨서 맛보는 미래의 현재화입니다.

제가 신학을 배울 때 몰트만 이란 학자가 책을 하나 썼는데 ‘역사와 종말’입니다. 이 작가가 가르쳐 주신 과거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오늘에 다시 재생 할 수 있습니다. 몰트만의 이야기의 본래 출발은 과거가 아니고 미래입니다. 미래가 있고 미래가 오늘도 오고 과거도 오고 계속해서 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고 있는 미래를 계속 감지하고 해석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성경말씀은 그런 겁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렇게 성경을 읽으시면 이 천 년 전에 말씀하셨던 예수의 말씀이 옛날 말씀 아니고 앞으로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를 미리 예표해서 당시 사람들이 알아듣는 언어로, 또 오늘 우리가 파악하고 이해하고 싶은 언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말씀이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렇게 제가 결단하고 읽으면 이 말씀 속에서 말씀하셨던 분이 저희 중심에 대고 다시 대화를 시작합니다. 오늘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시는 장면이 옛날 얘기 한토막이 아닙니다. 오늘 지금 예배시간에 나귀타고 오늘 우리한테 오신답니다.

그분이 오실 때 우린 어떤 사람이냐 하면 지금오시는 예수그리스도를 제가 맞이하겠는데 맞이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감격적이고 너무나 기대치가 컸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 뭐냐. 내가 가지고 있는 걸 다 드리자. 많은 사람들이 웃옷을 벗어서 겉옷을 벗어서 예수께서 나귀타고 가시는 길목에 깔았다고 합니다.

제가 제일 귀중하게 생각하는 제 옷. 저의 분신. 저의 이름값. 저의 체면. 저의 모든 것. 저의 identity가 옷이라는 상징 속에 있는데 그것을 벗어서 예수님께 드리면서 내가 당신께 헌신합니다. 그런가 하면 옷이 남루해서 겉옷 하나 벗으면 아무것도 남은 게 없는 사람 그 사람은 예수님에 대한 기대로 평화의 상징, 정의의 상징으로 상징되는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길에 깝니다.

나뭇가지를 깔던지 옷을 벗어서 깔던지 당신은 그냥 오신 분이 아니고 내 주님으로 맞을 수 있습니다. 당신이 오시면 내가 뭔가 변화합니다. 지금 오셔도 내가 변화합니다. 근데 그렇게 오시는 예수님은 걸어오시는 예수님이 아니고 미리 준비해 놓은 작은 나귀를 타고 오신다.

나귀를 타고 오시는데 나귀 옆에 작은 조랑말 같은 새끼 하나를 데리고 지금 오시는데 나귀에 타고 조랑말 옆에 들고 감람산에서 예루살렘 성까지 출발합니다. 거기서 예루살렘까지는 3킬로란 긴 거리를 나귀타고 오시면서 청중들과 얘기하고 군중들과 대화하며 오십니다.

오시는 분의 심정은 호산나 우리를 구하소서 하는 외침 속에 왕처럼 금의환향 하시는 분처럼 오시는데 오시는 분 속 맘은 예루살렘에 가면 빌라도를 만나야 합니다. 사형 언도를 내릴, 자기를 까닭 없이 고소해야 할 유대교 지도층을 만나야 됩니다.

하나님을 훼방했다고, 군중들이 돌변해 십자가 처형이 이루어지던 날 예수를 못 박으라는 비난의 군중으로 바뀌는걸 알면서 나귀타고 오십니다. 벗어던져서 길에 깔았던 옷 고맙지만 이게 반역의 선두입니다. 그분들이 깔았던 종려나무 가지 아름다운 평화가 아니라 저주의 상징입니다.

그걸 끌어안고 지금 예루살렘에 입성합니다. 예수님 오시면서 이내 얘기했던 이야기를 다시 인용을 하십니다. 시온의 딸들아, 메시아가 오셨다. 이 시온의 딸들 이야기는 그냥 시적인 표현인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제가 유신시절에 남산 그러면 저한테는 정보보만 생각되었습니다. 남산이 산책로가 아니고요. 남산 갔다 왔냐, 그러면 정보부 갔다 왔냐. 모든 이름 속에 상징적 시적 의미가 다 들어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아들보고 남산가자 그러면 어린이 도서관도 가구요 산책로도 열려있고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당시 시온이면 뭐냐 하면 예루살렘에 있는 남산 비슷한 아름다운 언덕이 시온입니다. 예루살렘을 부를 때 예루살렘 하지 않고 시온의 사람들이여. 그러면 서울 사람들을 의미했습니다.

시온의 딸들아. 왜 하필 딸이냐. 이스라엘 백성은 주변으로부터 너무 많은 핍박과 침략과 압제를 받아가지고 제일 가슴속에 사무치는 원한이 있었는데 뭐냐니까 바빌론이 와서 사람들을 끌고 가면 우리 일본이 우리나라에 와서 여성들 끌고 가서 소위 정신대라 이름하는 비극을 만들었듯이 바빌론으로 와서 이스라엘 판, 바빌론 판 정신대를 무수히 양산했습니다.

그 다음엔 페르시아 왕국도 똑같은 우를 범했습니다. 마지막 로마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거기에 학도병으로 끌려가는 수많은 강제노역에 끌려가는 남성들, 오늘날 용어를 빌면 정신대로 끌려가는 수많은 여성들. 이스라엘의 마음속엔 외국, 강대국 그러면 비극, 좌절, 아픔. 얘기합니다.

그래서 그 표현을 시온에 있는 시온을 바라보며 울부짖는 강간당한 여성들의 불쌍한 사람들. 시온의 딸들아. 그 말속에 모든 것이 포함 되어있습니다. 민족이 포위당했습니다. 멸망했습니다. 짓밟혔습니다. 수치 당했습니다. 모욕을 당했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민족도 뺏겼습니다. 자 주님 오신다는데 옷을 벗지 않을 사람 누가 있습니까? 종려나무 가지를 깔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당신 우리를 좀 구해주십시오. 우리를 구하소서. 호산나. 그 말은 희랍어로 호산나 히브리말로는 호시안나. 어떻게 발음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호시안나. 호산나. 아마 당시 사람들은 호시안나 그랬을 겁니다. 성경 기록은 호산나로 나와 있지만. 호시안나. 우리를 구하소서. 당신이 누구냐 하면 우리한테 이런 비극도 주지 않고 우리가 남들 향해서 떳떳하게 살았고 큰소리 치고 살았고 하나님의 선민이고 우리나라를 통일시켜 주었고 이 나라를 부강하게 한 임금 다윗. 우리가 꿈꾸는 사극의 주인공은 다윗입니다.

다윗 왕은 당시 누구냐 하면 우리를 아름답게 지켜주었던 꿈의 임금님 대왕인 다윗. 다윗의 후계 자손으로 오시는 당신이시여. 우리를 구하소서. 호시안나. 이 호시안나 란 말은 요즘 말로 바꾸면 우리나라 말은 호시안나가 없는데 삼일 운동 때 너무 힘들어서 분노 때문에 대한민국 만세. 심정이 어떻습니까? 우리를 짓밟은 일본을 향해서 대한민국 만세. 만세에 모든 걸 맡기자.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우리의 주님이시여. 호시안나. 만세. 오늘이 만세 부른 날입니다. 종려주일이란 말은 종려나무가 중요한 게 아니고 초록색이 중요한 게 아니고요. 만세. 우리를 구하소서. 저를 구하고 민족을 구하시고 모든 걸 구하소서. 그분이 누구 이길래. 나귀타고 오시는 분. 만세. 다윗의 자손. 우리도 꿈을 이루자. 오늘부터 이루자. 다 모여라. 이루자. 이루자. 만세. 오늘 예수님이 오시면 그럴 수 있습니까?

여러분한테 오신다는데 어떻게 찬양 부르시면 됩니까? 오늘 입성하시는 무슨 말씀으로 위로하실 수 있습니까? 내가 그분을 무슨 심정으로 맞이할 수 있습니까? 나사렛에서 난 예수 예언자라는데 이분이 돌변하여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답니다. 만세. 호시안나. 오늘 이 사람을 맞는 사람들의 심정은 비탄의 심정에서 마지막 호소입니다. 당신밖에 없습니다.

오시는 분의 심정을 오늘 성경말씀 뒤에 읽어보면 이렇게 써있습니다. 빌립보서를 통해서 사도 바울은 그때 오시던 분은 어떤 분이냐 하면 다윗의 자손이기는 한데 승승장구하고 승전가를 부르고 입성하는 그런 분이 입성할 때는 강한 말을 타고 뛰어왔는데 진실로 호시안나의 주인공인 예수는 말 타고 온 게 아니라 나귀를 타고 오셨습니다.

나귀는 말처럼 강한 말이 아니고 나귀는 순종의 상징. 낮음의 상징. 그리고 힘이 없는 것의 상징. 귀엽고 착하고 아름다운 것. 누구도 아직 타보지 않은 작은 조랑말. 빌립보서는 본래 예수는 강하시고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셨으나 우리 때문에 십자가를 지고 죽어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가장 높은 곳에 계신분이 낮아지셔서 너무나 겸손하게 낮아지셔서 그분이 우리한테 오셨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가장 높은 분이 낮아지신 모습으로 우리한테 오신 이유는 말 타고 오신 임금님이 아니라 나귀타고 오신 아주 험난한 모습으로 오신 분입니다. 그게 오늘 오신 호시아난의 주인이십니다. 상징적으로 그분은 말 타고 오지 않으시고 나귀를 타고 오셨습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그러나 사람들은 다윗의 자손이여 만세. 예수님의 만세소리를 예수님은 이렇게 듣기를 원하셨을 겁니다. 만세. 제발 일주일만 기다려라. 금요일 날은 엄청난 사건이 벌어질 거고 만세 부른 당신들이 날 반역하겠지만 제발 일주일만 기다려 다오. 내가 죽음을 당하고 그리고 주일날 아침에 부활하거든 그때 다시 호시안나 해주어라.

사람들은 그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습니다. 사두계파 사람들, 젤로당 사람들, 에세네파 사람들, 바리세파 사람들 누구나 할 거 없이 오늘 호시안나의 주인으로 오시는 분. 우리를 당장 구하소서. 조직할 수 있습니다. 나라를 살릴 수 있습니다.

예수는 아무 대답이 없습니다. 그리고 목요일 밤 제자들을 모아놓고 마지막 이별 식사를 합니다. 최후의 만찬. 금요일 날 빌라도 법정에 가서 사형언도를 받고 아침부터 시작해서 저녁까지 피 흘리며 죽어갑니다. 호시안나의 백성들. 예수를 못 박아라. 바리세파, 서기관들, 제사장들 우리를 구하소서, 하던 그 입에서 예수를 못 박아라. 배신의 연속. 우리가 오늘 배신을 살아갑니다. 깔아 논 옷 속에 던진 종려나무 가지 속에 배신이 물신 묻어납니다.

그 예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나는 지극히 낮아져서 십자가의 현장으로 가야 한다. 당신들 때문에 저 때문에 우리들 때문에 가야 한다. 그러나 만세는 불러다오. 주일날 새벽까지만 유보하십시다. 그날이 되면 아침이 와서 다시 호시안나. 그날 한번 함성을 질러 봅시다. 율법으로 인간의 이성으로 모든 정치적 지휘로도 해결할 수 없는 것. 예수님이 주일날 아침 부활하신 사건 하나로 일시에 해결 하십니다.

그분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나는 오늘 당신들과 함께 경동교회라 이름 하는 서울이라 이름 하는 예루살렘으로 행진해 들어가겠습니다. 같이 죽읍시다. 같이 삽시다. 부활절 날 아침 호시안나 함께 부릅시다. 주님이 오늘 주시는 말씀입니다. (박종화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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