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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부활은 명령이다! (살전 4:1-8, 13-18 ; 살전 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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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하나 드리지요. 나사로는 무덤에서 스스로 판단하여 걸어 나왔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주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죽었던 나사로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한 것입니다.
성경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 이야기가 여럿 있습니다.

      엘리야 때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 그랬고,
      엘리사 때 수넴 여인의 아들이 그랬습니다.
      예수님 때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그랬습니다.

무엇보다도 뚜렷한 증거는, 에스겔 37장의 “환상” 중에 나타난 부활입니다. 골짜기에 가득 쌓인 마른 뼈들이 군대로 일어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The hand of the LORD was upon me, and he brought me out by the Spirit of the LORD and set me in the middle of a valley; it was full of bones.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He led me back and forth among them, and I saw a great many bones on the floor of the valley, bones that were very dry.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He asked me, "Son of man, can these bones live?" I said, "O Sovereign LORD, you alone know."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Then he said to me, "Prophesy to these bones and say to them, 'Dry bones, hear the word of the LORD!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This is what the Sovereign LORD says to these bones: I will make breath enter you, and you will come to life.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I will attach tendons to you and make flesh come upon you and cover you with skin; I will put breath in you, and you will come to life. Then you will know that I am the LORD.'"
이에 내가 명을 좇아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
So I prophesied as I was commanded. And as I was prophesying, there was a noise, a rattling sound, and the bones came together, bone to bone.
겔 37:1-7

과부의 죽은 아들들, 마른 뼈들 모두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생명은 외부에서 난 것입니다. 안에서 자생(自生)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진화론’의 입장의 반대 편에 선 성경의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생명은 안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납니다.

모든 ‘부활’은 “명령”입니다. 따라합시다.

무덤에 계시던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풀어 살리셨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This man was handed over to you by God's set purpose and foreknowledge; and you, with the help of wicked men, put him to death by nailing him to the cross.
But God raised him from the dead, freeing him from the agony of death, because it was impossible for death to keep its hold on him.
행 2:23-24

물론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셨다”고 선언합니다. 생명의 본질을 드러낸 진술입니다.

생명은 밖의 자극에 대하여 안의 반응 형식으로 ‘존재’합니다.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생명의 신비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기독교’입니다. “가장 잘”이라고 ‘비교’ 형태로 말할 수 없습니다. 성경만이 생명의 신비를 바르게 드러냅니다.

칸트(Immanuel Kant)는 시계보다 정확한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그가 산책 나가는 길에 동네 사람들은 시계를 맞추었다지요, 아마?

칸트의 물자체(Ding as sich) 개념이 중요합니다. 기본적으로 ‘물자체’는 인간의 의식 밖에 존재하는 실체로서, ‘객관적 실재’입니다. 물자체가 우리 ‘인식’(감관과 오성, 경험과 사유)을 거쳐 “현상”으로만 주어집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물자체를 깨달을 수 없고, 그저 ‘현상’만 파악합니다. 본체는 모르고 ‘그림자’만 이해하는 인간의 한계를 말한 것입니다.

칸트를 활용해서 오늘 메시지를 풀자면, 물자체와 인간의 의식 중에 ‘물자체’에 주도권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조건’에 대한 ‘반응’이 인간의 깨달음입니다. 그것이 ‘생명’이기도 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은 칸트를 조건-반응의 대립구도로만 이해한 한계를 지적합니다. 변증법적 내지 사물과 내가 ‘하나’ 되는 어우러짐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생명의 신비는 ‘어우러짐’이 아니라 ‘대립의 긴장’에 있습니다. 깊이 묵상하셔야 할 대목입니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역사를 하나의 생명체로 보고, 우리의 역사행위를 ‘도전’에 대한 ‘응전’이라고 했습니다.

칸트의 물자체, 토인비의 도전 자체, 그것은 “말씀”이며 “명령”입니다. 말씀이 먼저 있고, 우리는 순종으로써 존재합니다. 어렵습니까?

지난 4월 5일, 한국일보에 난 기사입니다.
40대 후반의 중국인 부부에게 이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6개월 동안 뇌사 상태에 빠졌던 48세의 중국인 남자가 기적적으로 회생했습니다. 이 기사는 “음악”을 듣고 깨어났다고 했습니다.

한국일보 김성우 기자는 “식물인간 된 40대, 평소 애창곡 틀어주자 소생”이라고 타이틀을 올렸습니다.

기사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지난 95년 작고한 대만 가수 덩리쥔의 노래가 식물인간을 소생시키는 기적을 일으켰다.”

그러면 ‘음악’을 칸트의 ‘물자체’라고 할 수 있고, 토인비의 ‘도전’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기사를 읽는 사람들은 ‘그 음악’을 찾아 나서겠지요.

기사를 가만 읽어보니, 그의 아내는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 남편의 곁에서 말을 걸면서 자문자답을 했습니다. 또 남편이 덩리쥔의 열렬한 팬인 점을 감안, 혹시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면 깨어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 매일 아침, 낮, 저녁에 최소한 한 시간씩 거르지 않고 틀어주었다고 했습니다.

병원의 주치의는 “덩리쥔의 음악이 환자의 뇌세포 신경에 자극을 주어 그가 깨어나고 빨리 회복하는 데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기자도 의사도 바른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하나, “물자체” 혹은 “외부의 도전”이 그를 깨어나게 하는데 영향을 미쳤다는 판단 하나는 옳습니다.

내가 이해하는 진정한 물자체며 도전은 그의 ‘아내’입니다. 아내의 정성과 사랑입니다. 남편이 뇌사 판정을 받았어도 그 곁을 떠나지 않고 소망을 품고 간호한 정성과 사랑입니다. 세상에 뇌사에서 소생한 사람들 이야기는 많지만, 단 한 경우도, 아무도 돌보지 않는데 ‘스스로’ 일어난 경우는 한 건도 없습니다.

이렇게까지 말씀드렸는데, “덩리쥔”이 누구야? 그 음악, 어디가면 살 수 있어? 이렇게 생각하는 분은 없겠지요?

남자들이 과로하는 세상입니다. 40대 50대, 위험합니다. 남편들에게 말합니다. 곁에 있는 아내에게 살짝 물어보십시오.: “믿어도 돼?”

그러나 그 아내를 움직인 동기를 생각해야 합니다. 누가 그런 ‘착한 마음씨’를 주었습니까?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소생을 하나님께 감사해야 옳습니다.

뇌사에서 일어나는 것은 오늘 “영적인 부활”과 패턴은 비슷하지만, 내용은 다릅니다. 정성과 사랑으로 뇌사를 극복할 수는 있지만, 그걸 가지고 “죽음에서 부활”을 이룰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일깨움입니다. 김춘수의 “꽃”은 유명합니다.

      내가 네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너는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름 불러주기”가 없었다면, 내게로 올 리도 없고, 와서 꽃이 될 리도 없겠습니다.

<부활은 명령>입니다.
주님께서, “나사로야, 나오너라!” 명령을 내리셨을 때, 나사로가 순종했습니다.
부활의 명령은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말씀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날마다 부활”의 명령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대단히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부활은 선택사항(option)이 아닙니다. 필수입니다. 부활이 있어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나중에, 죽음 이후에’야 관계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바로 오늘, 부활의 소망이 있는 사람의 삶은 차원이 다릅니다. 다른 삶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부활에 참여하는 복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부활이 없으면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Then those also who have fallen asleep in Christ are lost.
If only for this life we have hope in Christ, we are to be pitied more than all men.
고전 15:18-19

행복한 성도는 1. 하나님의 부활 명령을 듣고 (부활=생명임을 깨닫고), 2. 그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말씀은 능력입니다.
말씀은 창조의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이 세상을 지으셨습니다.
말씀은 치유의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모든 질병을 고치셨습니다.
말씀은 부활의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이제 묻습니다.
나사로를 살리실 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나사로야, 나오고 싶니?
      나사로야, 나올 생각이 있으면 나오려므나!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이렇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명령이었습니다. 죽은 자에게 부활은 ‘선택사항’이 아니었습니다. 반드시, 꼭, 순종해야 하는 명령이었습니다.

오늘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부활을 ‘선택사항’으로 압니다.
그러나 부활은 명령입니다.
복종해야 합니다.

거역하면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는 부활해야 합니다. “재림 때 부활”을 위해서는 “오늘 부활”이 있어야 합니다.

부활은 과거의 어느 때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변화’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부활입니다.

변화. 그것은 “중심이동”(中心移動)입니다.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그 중심이동의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날마다 부활을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은 부활의 소망을 가질 수 없습니다. 부활이 진정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소망이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하루살이일 뿐입니다.

하루살이는 내일이 없습니다.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은 ‘죽음’을 놓고 두 가지로 사람을 가릅니다.
죽으면 끝이라고 믿는 사람과, 죽으면 영생이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죽음으로 끝이라고 믿는 사람은 무서운 사람입니다. 그는 죽음의 세계로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차라리 죽어버리자!”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죽음의 세계는 ‘쓰레기장’이 아닙니다. 파묻어 버리면 그만인 세계가 아닙니다.

죽음 이후에는 “영생”이 있습니다.
소망이 없다면 무서운 일입니다. 지옥에서 영원히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소망이 있다면 기쁘고 감사한 일입니다. 우리 주님과 함께 영원토록 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부활은 바로 오늘 여기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그 날에 이뤄집니다.
오늘 부활을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은 영원한 부활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데살로니가전서 4-5장에서 났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는 1. 부활과 2. 재림에 대한 말씀입니다.
재림 때 부활 명령이 떨어집니다.
성도의 생활은 재림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언제 “부활”의 명령이 떨어질까?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재림 때만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부활을 경험하는 사람에게 재림 때의 부활이 낯설지 않습니다.
달리 말하면, 재림 때 부활을 맛보려면 지금부터 날마다 부활을 경험해야 합니다.
날마다 “부활명령”을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부활은 ‘죽음에 머물지 않음’입니다. 생명으로 일어섬입니다.

1.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거룩함”입니다. ‘거룩함’은 ‘부활’입니다.
2. 부활의 때는 주님의 강림하실 때입니다. “나팔소리”가 울릴 때, 우리가 부활하는 것입니다.
3.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것입니다.
4.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르실 때 온 영과 혼과 몸이 흠 없이 보전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의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자!”입니다.

부활절 아침입니다.
오늘 아침에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을 생각합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성육신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께서는 1. 이 천한 세상에 오셔서, 2. 모진 고난을 다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셨으며, 3. 부활하셨을까요?

이것은 성도들을 이 세상에 속하지 않게 하시고, “거룩하게 구별”하시고, 그리고 “천국으로 인도”하시려는 것입니다.

언제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입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흠’ 없이 주님 앞에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을 위해서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또한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성도들이 가져야 할 마땅한 ‘소망’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세상에서 ‘영원히 잠들지 않고’ 주님을 따라서 영의 몸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부활에 있습니다.

그 부활은 언제 이루어집니까?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면서 기다리는 바로 그 부활의 때는 언제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는 그 주제가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의 삶입니다.

성도(聖徒)란 무엇입니까? “거룩한 무리”입니다. 거룩하게 구별된 무리입니다.
거룩(聖)은 무엇입니까? “분리”입니다. 그냥 따로 떼어놓는 모든 분리를 거룩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편에 분리된 것”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 편에 분리되었다 함은 무슨 말입니까?
세상의 속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을 닮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영이신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우리의 거룩함은 “신령”과 “진정”으로야 가능합니다.
신령은 곳 “성령”이요, 진정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는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중요한 일이 다 그렇듯이, 마땅한 준비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준비해야 하겠습니까?

성령과 말씀으로써 거룩함에 거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예수님의 부활은, 지금부터 2,000년 전에 일어난 하나의 사건을 기억함에 그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의 “거룩함”입니다.

거룩함은 “하나님 중심의 삶”입니다.
부활로써 거룩하게 된다 함은, “나 중심”을 벗어 던지고, “하나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부활을 경험한다고 할 때, “하나님 중심”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나의 감정, 여건, 환경에 따라 움직이던 삶을 벗어 던져야 합니다.
시골 사립문은 “돌쩌귀”가 있습니다. 문은 돌쩌귀를 따라 돌아갑니다.
나를 중심으로 돌던 문이면, 하나님 중심으로 바꿔야 합니다. 

그런데 그 거룩함에는 “항상성”이 있어야 합니다.
언제나 그래야 합니다.
항상, 쉬지 말고, 범사에 그래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1. 기뻐함, 2. 기도함, 3. 감사함입니다. 
이것은 거룩한 성도의 마땅한 삶의 태도입니다.

나는 ‘한결같은’ 사람을 좋아합니다.
나는 “언제나 한결같은” 부모님을 만났습니다.
나는 “언제나 한결같은” 사람을 만나서 결혼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또 “언제나 한결같은” 아들을 낳았습니다.
나는 내 아들이 제 어미처럼 “언제나 한결같은” 여자를 만나기 위해 간절히 기도  드리고 있습니다.

웃자고 드리는 말이 아닙니다.
한결같음이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입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께서 “언제 오실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날은 도둑이 밤에 뚫고 들어오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 날과 그 시를 아무도 모릅니다. 오직 하나님만 아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으로서 대비하는 가장 좋은 전략은 “항상성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군대 생활할 때 “경계근무”의 중요성에 대해 배웠습니다.
작전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가 됩니다. 그러나 경계에 실패한 군인은 결코 용서가 없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항상성”을 잃어버린 군인은 용서할 수 없는 군인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부활주일 아침입니다.
우리는 성도의 거룩함을 어떻게 이룰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과 말씀입니다.
방언입니다.
언어생활을 바꾸는 것입니다.
남이 듣든지 안 듣든지, 항상 똑같이 말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1. 항상 기뻐함
      2. 쉬지 말고 기도함
      3. 모든 일에 감사함

1. 항상 기뻐하십니까?
사람이 어떻게 ‘항상’ 기뻐하고만 살 수 있습니까?
슬픈 세상입니다. 매운 음식이 매력이 있듯, 우는 노래가 유행합니다. 그런데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모든 짐을 예수님께 맡기면 가능합니다.
죄의 짐을 지지 않으면 항상 웃을 일 뿐입니다.
실천해 보십시오.
주님께 맡겨 드리십시오.
그러면 웃을 일밖에 안 남았습니다.

따라합시다.
      나는 이제부터 웃을 일밖에 안 남았다!

믿어지십니까? 아니라구요? 믿으셔야 합니다!

2. 쉬지 않고 기도하십니까?
응답이 있어야 합니다. 응답 없는 대화는 한 두 번입니다. 계속하다가는 미칩니다. 그러므로 “쉬지 않고 기도”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응답이 계속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늘 응답하십니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겠습니까?
말씀읽기입니다.

교회는 “말씀읽기”를 대단히 크게 강조합니다.
오늘부터 교회는 오후 1-2시 성경공부가 열립니다.
교회 성경공부의 교재는 ‘성경 자체’입니다.
성경을 읽자고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시간에 한 장을 읽어도, 읽고 묵상하고 그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늘 가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혼잣말처럼 해도 응답이 있어야 합니다. 

따라합시다.
      나는 기도할 때마다 좋으신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십니다.
      나는 기도를 쉬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나는 언제나 기도드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나는 기도할 때 제일 행복합니다.
      나는 이 세상에 기도하러 태어났다고 생각합니다.

3. 모든 일에 감사하십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은 언제나 선하시다!”고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내게 문제가 닥쳐왔어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선하게 바꾸어 주십니다.

따라합시다.
      나는 선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나는 실패할 때조차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습니다.


<대화 1>
마르다  :  예수님.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났습니다. 썩어서 냄새가 납니다.
예수님  :  누가 그 죽은 시체 걱정 하라더냐?
          시체가 그냥 일어나지 않을 것은 나도 안다.
          이제 네가 믿어야 할 것은 내 능력이다. 내가 하는 것을 믿느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산다.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대화 2>
어떤 사람  예수님. 저 사람은 안 됩니다. 돈도 없고, 건강도 안 따라줍니다.
          성질도 고약합니다.
예수님    누가 저 사람 걱정하라고 했느냐?
          나도 그 사람 안 되는 것 잘 안다.
          너는 내 능력, 내 사랑, 내 관심, 내 기도를 믿어라.

<대화 3>
당신      예수님. 저 안 돼요. 저 겉보기와는 달리 문제가 많아요.
예수님    누가 네 걱정 하라더냐?
          내가 네 겉모습에 속고 있는 줄로 아느냐?
          속아서 여태 네 곁에 있는 줄로 아는구나?
          너, 아직 죄 짐을 들고 있구나?
          그거 나한테 맡기라고 하지 않았느냐?
          내가 널 사랑한다. 내 사랑을 믿어라.

결론

예수님은 우리 곁에 서 계십니다.
우리 마음 문 바깥에 서 계십니다.
주님의 명령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마음 문을 두드리십니다.
명령에 순종해서, 문을 열어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 마음 앞에 무릎 꿇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다시 오십니다.
그날은 언제일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 날을 안다는 사람은 거짓말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알려주시지 않으실까요?
“항상성”을 갖게 하시려는 목적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항상 똑같이 일정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믿습니다.
나는 여러분을 소개할 때 늘 그렇게 말합니다.
내가 속고 있는 것입니까?

좋은 사람은 기분파(氣分派)가 아닙니다.
기분파를 만나 교제하다가는 큰 코 다칩니다.
우리 중에 기분파가 있다면, 빨리 성질을 고쳐야 합니다.
곁엣 사람을 다 불행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정말 좋은 사람은 늘 일정한 사람입니다.
나는 이렇게 일정한 여러분이 정말 좋습니다.

주님 안에서 이렇게 귀한 만남을 허락하신, 부활하신 우리 주님을 찬양합니다.

기도 Prayer

은혜로우신 주님.
오늘 저희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온전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일정한 마음을 가지게 하옵소서.
겉과 속이 항상 일치하게 하옵소서.
말과 행실이 다르지 않게 하옵소서.
부활하신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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