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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다시 일어선 사람들 (눅 24:3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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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실의의 계절>
1998년 봄에 저는 오랫동안 숙망했던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신학으로 외국인에게 박사학위를 잘 주지 않는 학교에서
고생 고생해서 받은 학위였기 때문에 감회가 남달랐습니다.
저 때문에 가족들이 많이 희생했고,
또 받기 어려운 학위를 받았기에 그 감격은 남달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학위를 받은 다음이 정작 더 큰 문제였습니다.
아무도 와 달라는 데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 해 5월에 학위를 받았지만 11월까지 어느 곳에서도
와 달라는 말이 없다가 한 선배 교수님이 한국에서 꽤 알려진 대학에서
교수직이 하나 공고되었으니 지원해보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리하여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했기에 설레는 마음을 품고 한국에 왔습니다.

그러나 인터뷰부터가 아주 실망스러웠습니다.
심사위원들은 제가 무엇을 어떻게 공부해서 그 학교에 어떻게 공헌할 수 있느냐
하는 본질적인 문제보다 지엽적인 문제에 훨씬 더 관심이 많아 보였습니다.
결국 "혹시나" 했지만 결과는 "역시나"였습니다.
무참하게 떨어졌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다 제가 실력이 부족해서 떨어진 것인데,
왜 그런지 그 때에는 그렇게 생각이 되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는 생각에 몹시도 서러웠습니다.

한 1주일 간 한국에 와 있다가 다시 돌아가는
11월의 김포공항은 바람이 많이 불었고 쓸쓸했습니다.
배웅 나온 가족들과 헤어져 출국 수속을 밟을 때 바보 같이 눈물이 나왔습니다.
이제 내 운명은 한국에 다시는 못 돌아올 것만 같았습니다.
나는 이제 미국에서 살아야 하겠구나.
왠지 모르는 서글픔과 비장함까지 생겼습니다.

미국으로 돌아간 후 몇 달 동안 저는 참 많이 낙담했습니다.
무슨 일을 해도 기쁨이 없었고 세상이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렇게 씁쓸한 삶을 살던 저는 그 다음해 봄에 제가 개척해서 5년
동안이나 섬겨온 작은 교회를 떠나 백인 교회에 부목사로 가게 되었습니다.
부목사로 일하는 동안 한 1시간 정도 떨어진
감리교 대학에서 강의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신비하게도 한 길을 막으시면 다른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때 1998년에 제가 그 유명한 대학의 교수가
되었더라면 저는 굉장히 교만한 사람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더욱이 오늘 이렇게 목사가 되어서
여러분들을 만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새삼 잠 16: 9절의 말씀,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라는 말씀이 옳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낙망의 구렁텅이에 빠진 제자들>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기 전 제자들의 모습을 말씀드리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뒤, 아직 부활의 주님의 만나지 못했을 때
제자들의 모습이 꼭 9년 전에 제가 겪었던 그런 기분이 아니었을까요?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너무 좋아서 가족 친지
직업 재산 모두를 버리고 주님의 뒤를 쫓았습니다. 
그야말로 동고동락(同苦同樂)이 제자들 때문에 생겨난 말 같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한솥밥을 먹으며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이나 한 식구처럼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랐습니다.
뭔가 예수님은 특별한 분으로서 큰 일을 할 분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다만 한 가지,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길이 고난의 길임을 깨닫지 못하고 영광의 길로 착각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정권을 무너뜨리고 세상 권력을 잡는 것으로 오해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와 요한 형제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청탁을 하기까지 했습니다.
우리 큰아들은 국무총리, 작은 아들은 국방장관을 시켜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예수님의 길이 고난과 수치와 십자가와 죽음의 길인 것을 몰랐기 때문이지요!

종려주일에 온 예루살렘 시민들이 겉옷을 벗어 길에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면서
대대적인 환영을 할 때까지만 해도 이들은 어깨가 으쓱해졌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이루어진 일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실망스러웠습니다.
이스라엘의 해방자, 새 권력을 한 손에 움켜쥘 줄 알았는데 너무나 무기력했습니다.
심문을 당하고 재판을 받고 온갖 수치와 모욕을 당하고 급기야 그 당시 가장 큰 죄를
저지른 범죄자들을 처형하던 십자가에 매달려 무참히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그 때부터 제자들의 꿈은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이제는 스승과 제자간의 인연을 떠나 자기 목숨부터 살려야 할 판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산지사방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주님이 죽으면 자기도 따라 죽겠다면 항상 큰 소리를 치던 베드로도 다를 바 없었습니다.
자기 목숨 하나를 살리기 위하여 예수님을 도무지 모른다면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가 이 모양이나 다른 제자들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예수 공동체는 와해되는 듯이 보였습니다.
제자들은 다 뿔뿔이 도망쳐 깊은 곳에 몸을 숨겼습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말이 있듯이 제자들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난 듯이 보였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보냈던 3년의 세월이 그저 아련한 추억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들이 예수님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보여서 생명의 안전을 구하는 일이 시급했습니다.
입에 풀칠이라도 해서 먹고사는 문제 또한 중요했기에
앞으로 뭘 해서 먹고살까 그 걱정도 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이틀 동안 제자들은 깊은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습니다.
'PANIC,' 정신적인 대공황 상태에 빠진 것이지요!
자기들이 기대했던 대로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한 실망과 분노,
스승을 버리고 배신했다는 자괴감, 미래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 이 모든 것이
복합되어서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대공황 상태에 빠져 들어갔을 것입니다!

<몸으로 부활하신 주님, 제자들에게 주신 당부와 약속의 말씀>
그런데 바로 이 때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깊은 절망과 두려움과 염려, 실망이 뒤섞여 탄식만 하고 있던
제자들 앞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가룟 유다를 제외한 11제자들이 다락방에 모여서 앞날을 위한
대책을 강구하고 있었을 바로 그 때 나타나신 부활의 주님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두 가지를 강조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부활은 철두철미 몸의 부활이라는 사실입니다.
둘째로, 제자들이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한 지시와 약속입니다.

먼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11제자들 앞에 나타나셔서 "샬롬!"하고 인사말을 건네셨을 때
제자들은 너무도 깜짝 놀라고 무서워서 유령, 즉 귀신인 줄로 생각했습니다(37절).
이렇게 아직 믿음이 부족해서 의심하는 제자들을 주님을 꾸짖습니다.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38절).
주님은 두려워 떨며 의심하는 제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하여
이제 당신의 몸을 직접 보여주시고 만지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39-40절을 보세요.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주님의 손과 발을 직접 보고 만져보라는 것입니다.
영, 즉 귀신은 살과 뼈가 없지만 주님은 있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육체성을 강조하는 것이지요!

여러분, 우리 기독교의 부활은 몸의 부활을 말합니다.
플라톤을 비롯한 희랍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영혼불멸성 그 이상입니다.
희랍 철학자들은 영혼은 불사적(不死的)인데 출생시 몸 안으로
들어왔다가 사망시 신에게로 돌아간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영혼의 부활만이 아니고
생생한 몸의 부활이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희랍 철학의 영혼 불사성을 뛰어넘는 것이지요!

이렇게 주님께서 부활하신 몸, 즉 손과 발을 그들에게 직접
보여주셨지만 제자들은 아직도 믿음 반 의심 반이었습니다.
41절 말씀 그대로 그들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두 번째로 당신의 몸의 부활을
확증하시기 위하여 이제 먹을 것을 찾으십니다. 
주님의 손과 발을 보고 만지는 것으로 의심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아예 그들 앞에서 뭔가 음식 먹는 모습을 보여주어서 설득시키려는 것이지요!
42-43절 말씀을 보면 제자들이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렸더니 제자들 앞에서 잡수셨습니다!
이 모든 행위가 예수님의 몸의 부활을 강조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을 비롯한 모든 인류의 부활은 영혼의 부활, 정신의 부활이 아니라
영혼과 육체가 다 합쳐진 신령한 몸, 즉 영체(靈體, spiritual body)로서의 부활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당신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확증시킨 뒤,
44-49절 말씀을 보면 세 가지 중요한 당부와 약속을 하고 계십니다.

첫째로, 제자들에게 성경을 깨닫게 하시려고 그들의 마음을 열어주셨습니다.
44-47절 말씀을 보세요.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여기 보세요.
주님은 제자들이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기록된 모든 일들이
당신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것도 깨닫게 하시려고 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구약 성경을 통하여 예언된 모든 말씀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도록 제자들의 마음을 활짝 열어주셨던 것이지요!

둘째로, 제자들이 이 모든 일에 증인이 될 것을 당부하십니다.
48절에 보면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제자들이 해야 할 중요한 사명은 증인의 사명입니다.
구약 성경의 약속의 말씀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성취되었는데
이제 제자들은 이 사실을 적극 알려야 할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증인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자기가 듣고 본 것을 있는 사실 그대로 증거하는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지켜본 그대로 온 세상에 전해야 하는 것이지요!

셋째로, 위로부터 오는 능력, 즉 성령의 능력을 받을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49절 말씀을 보세요.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이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약속하신 성령을 받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했다고 해서 곧바로 밖에 나가서 증거하라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받은 뒤 그렇게 하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해서 사도 행전은 어떻게 해서 제자들이 오순절 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는지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11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모든 것이 끝났다며 크게 낙심하고 절망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 때문에 그들은 다시 일어섰습니다.
오늘 여러분 가운데 크게 낙심하고 실망한 분들이 계십니까?
무엇을 어떻게, 도대체 어디부터 일을 다시 시작할지 몰라서 망설이는 분들이 계십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영접해서 다시 일어서시기 바랍니다!

낙심했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한 뒤 새로 일어섰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나 본 뒤, 더 이상 옛날의
그 비겁하고 무기력한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뭘 먹을까, 뭘 입을까 육신의 안전만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목숨을 걸고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사명을 깊이 자각했습니다.
그리하여 베드로를 비롯한 대부분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면서 진리와 생명되신 주님을 위하여 장렬하게 산화했습니다!

<오늘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부활의 주님>
여러분, 오늘 이 부활절 아침에 한 번 생각해보세요.
만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베드로를 비롯한 11제자들이
체험하지 못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베드로는 아마 고향 갈릴리 어느 곳에 몰래 숨어살면서
깊은 한을 안고 고기나 잡으며, 혹시 누군가 자기의 과거라도 알까봐
전전긍긍하며 평생 자기 이름을 숨기며 살다가 쓸쓸히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베드로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2천년 동안 성경이 전파된 곳은 예수님의 이름 다음으로
베드로의 이름이 항상 따라 다니지 않습니까? 
부활의 체험이 사람을 이렇게 바꾸어 놓았던 것이지요!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11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뒤, 그 부활신앙으로 3년 동안의 예수님의
공생애와 십자가 사건을 돌아보니 모든 것이 선명하게 이해되고 납득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출발점은 놀랍게도 십자가가 아닌 부활이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사도 바울은 고전 15: 12-19절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기독교의 생명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있다는 말이지요!
여러분, 오늘도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특별히 낙심하고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셔서
당신의 손과 발을 보고 만져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도 부족하면 옆구리의 창자국을 확인해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낙심하고 앞길이 막막해도 우리에게는 아직 소망이 있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부활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11제자들을 다시 일으켜 세워주신
부활의 주님이 여러분도 세워주실 것입니다.

힘을 내세요!
다시 한번 시작해보세요!
부활의 주님께서 항상 여러분 곁에 함께 계시면서 여러분들을 도우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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