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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부활의 능력 (요 20: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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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지만, 부활을 말하는 종교는 기독교 외에는 없다. 요즘 불교가 산에서 도시로 내려와, 여러 가지로 기독교를 모방하고 있다. 찬불가도 만들어 부르고, 불경 학교도 하고, 수련회도 갖고, 심방도 하고, 주일마다 정기 예불도 드린다.

  그러나 불교가 기독교의 좋은 점을 아무리 모방해도, 기독교의 핵심인 부활만은, 절대로 모방할 수 없다. 불교는 인간에 의해 만들진 종교요, 사상이요, 철학이기에,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다른 종교는 사망 권세가 다가오면, 이길 힘이 없기에,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부활이 어디 있느냐,

말도 안 된다며, 증명해 보라고 말한다. 그러나 아무리 부활이 없다고 우겨도, 부활은 있다. 왜냐면 예수님께서 분명히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1. 분명히 부활은 있다.

부활은 헬라어로 “ἀνάςτασις”(아나스타시스)라고 하는데, ‘다시 일으키다, 다시 살아난다’는 뜻이다. 잠에 들었다가 다시 일어나듯이, 죽음에서 다시 살아남을 말한다.

  메뚜기하고 하루살이하고, 하루는 논에서 즐겁게 놀았다. 저녁때가 되자 메뚜기가 하루살이에게 “하루살이야 내일 만나서 또 놀자”이렇게 이야기했다. 그런데 하루살이는 내일이 무엇인지 모르기에 “내일이 뭔데?”라고 했다.

  “내일은 우리가 지금 헤어지면, 이 땅에 어두움이 찾아오고, 저 하늘에는 반짝 반짝 별이 빛나고, 우리는 모두 잠을 자고 일어나게 되면, 아침에 밝아오는 세상이 온단다. 그게 내일이야.” 이와 같이 아무리 설명을 해도, 하루살이는 내일을 이해하지 못했다.

  오히려 메뚜기에게 ‘날씨가 무더우니까, 더위 먹고 정신 나간 소리한다.’고 놀려댔다. 하루살이는 내일이 있음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하루살이는 내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지만, 그러나 내일은 엄연히 존재한다.

  하루살이가 세상을 떠난 후에, 메뚜기는 논에서 개구리하고 놀았다. 한 여름에 재미있게 놀았는데 이제 가을이 다가왔다. 낙엽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개구리가 메뚜기에게 “메뚜기야! 이제 그만 놀고, 내년 봄에 다시 만나 놀자”그랬다.

  그런데 메뚜기는 ‘한 여름 지나면 다 죽으니까’ 내년을 몰랐다. “내년이 뭔데?” 메뚜기가 물었다. “응! 우리가 헤어지면 얼마 후에, 이 땅에 하얀 눈이 내려서 날은 추워지기에, 나무들의 잎사귀는 다 떨어지게 되지, 너무 추워지기에 땅속 깊은 곳에 들어가서, 오랫동안 잠을 자게 된단다.

  잠을 푹 자고 일어나면, 이 땅에 따뜻한 바람이 부는데, 그러면 나무들도 다시 싹을 내고, 꽃피어 세상이 아름다워진단다. 그게 내년이야. 그러니 우리 내년에 만나자” 이렇게 아무리 설명해 주어도, 메뚜기는 내년을 알 수 없었다.

  하루살이와 메뚜기처럼, 내일과 내년이 있음을 믿지 않아도, 분명히 내일과 내년이 있다. 이처럼 우리는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생명의 부활이냐? 심판의 부활이냐?’를 결정한다. 생명의 부활로 나오시기 바란다.

  기독교의 생명은 부활인데,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이, 부활 신앙을 소유하지 못하고, 부활 신앙을 자꾸 잊어버린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를 살리시면서 (요11:25-2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하셨다.

  마리아는 오빠를 다시 살리신, 예수님의 말씀을 잊었다. 그래서 막16:1절 이하를 보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 무덤을 찾았다. (요20:11)에는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다고, 마리아는 무덤 속을 보면서 울고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부활하신 주님이 아니라, 죽은 주님을 울면서 찾고 있다. 천주교는 십자가에 예수님을 계속 달아놓고, 무덤 속에 계신 주님을 찾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에선, 주님께서 3일 만에 부활하셨음을 강조하기에, 십자가의 모습이 비어 있다.

  우리는 예배하러 나올 때, 어떤 분을 만나러 나오는가? 지금도 살아 역사 하시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러 오나? 아니면 돌아가신 예수님을 만나러 오나? 무덤 속에 누워 계신, 죽은 예수님을 찾지 말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찾기 바란다.

  우리는 부활의 능력을 삶에 적용하여, 감사와 찬양하며 살아야 하는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부활의 기쁨을 모두 잊어버리고, 부활이 전혀 없는 듯이 살고 있다. 그 이유는, 부활을 2천 년 전 사건으로 생각하여, 기념식으로 끝내려고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우리의 부활로 삼아, 승리하는 삶으로 만들기 바란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제자들은 힘을 얻고 일어났어야 했다. 그러나 제자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벌벌 떨고 있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셔서, 하늘과 땅을 진동케 하고 계시는데, 제자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정말 비참하게 떨고 있다. 그런데 바로 이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요? 죽음을 깨뜨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다면, 작은 슬픔에, 작은 어려움에, 작은 시험에, 왜 그렇게 낙심하고 있나?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다(마28:18).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으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낫는 권세를 주셨다(막16:17-18).

  그렇지만 어려움이 두려워서, 스스로 어둠 가운데서 문을 걸어 잠그고, 떨고 있다.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면, 이처럼 과거에 매여 낙심하고 절망하게 된다. 그러나 부활신앙을 가지면 자신도 세상도 변화시키는, 능력의 종이 될 수 있다.

  따라서 과거에 기록된 역사가 아니라,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만나시기 바란다. 지금도 부활하여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는 믿음이, 진짜 믿음이다. 우리가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능력 있는 삶을 살도록, 우리에게 3가지 선물을 주신다.

3.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3가지 선물을 주신다.

(1) 완전한 평강(םוֹל󰚂)을 주신다(19-21).

제자들은 유대인의 습격을 두려워하여, 모두 방에 들어가 숨었는데, 주님께서 저들에게 나타나셔서, “평강이 있을지어다”하고, 연속하여 2번씩 축복해 주셨다(요20:19, 21).

  연속 2번 평안을 축복하신 이유는, 두려움 중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분명히 평강을 주시겠다는 약속이요 강조다. 그 말을 들은 제자들의 마음에는, 평강이 넘쳤다. 끊어진 모든 관계가 회복되었다.

  우리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평강이 넘치게 된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만나는 두려움이 있다. 병고의 두려움, 실패의 두려움, 죽음의 두려움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병든 자를 찾아다니시면서 병을 고쳐 주셔서, 병고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셨다.

  밤새도록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실패한 베드로를 찾아 오셔서,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명하셔서, 실패를 해결해 주셨다. 그리고 나인성 과부의 아들과, 야이로의 딸과, 나사로를 죽음에서 건져주셨다.

  우리 인생의 문제 중에서, 가장 어려운 죽음의 문제를 부활하심으로 확실히 해결해 주셨다. 따라서 예수님을 우리의 마음에 모시면, 두려움을 이기고, 평강을 얻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죽음을 이기는 평안이 있기에, 장례식장에서도 노래할 수 있다.

  장례식장에서 기쁨으로 찬송하는 종교는, 기독교 밖에는 없다. 주님께서 평강을 주시고, 소망을 주시기 때문이다. 죽음은 분명히 인류 최대의 적이다. 이 땅에 사는 그 어떤 사람도, 죽음만은 이길 수 없다. 죽음 앞에서는 돈도, 학식도, 사랑도, 권력도 다 필요가 없다.

  (히2:14-15)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라고 하였다.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죽은 후에는 심판이 있기 때문이다. (히9:29)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

  (요5:29) “선한 일은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했다. 그러나 부활의 능력을 가지신 주님을 만난 후에는,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15:55-57).

  부활의 주님을 만나자, 슬픔이 사라지고 기쁨이 샘솟았다.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20).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쁨으로 사는 비결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데 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아는 것보다, 부활의 주님을 지금 내가 만나야만, 똑같은 부활의 능력이 나타난다.

  따라서 낙심과 절망 중에 있다면, 부활의 주님을 만나서, 소망이 솟아나고, 활기찬 생활을 하시기 바란다. 사람은 죽으면 끝이라고 하지만, 죽음 후에는 심판이 있다. 영생과 영벌의 심판이다. 그때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겠는가?

(2)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요20:22-23).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숨어 있는 곳에 나타나셔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22).
성령님께서 임하면,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여 변화된다. 어떻게 변화되었는가?

① 오순절에 성령 받기 전의 제자들의 모습은, 본문에서와 같이 두려워 문을 잠그고 있었다. 그러나 오순절에 성령 받은 제자들은,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담대히 열심히 나가서 외쳤다(행4:31). 두려움에 떨던 사람이, 하나님의 평강으로 채워지자, 하나님의 군대가 되었다.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에게 생기를 명할 때에, 살아 일어나 큰 군대를 이름과 같이, 벌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자, 하나님의 능력이 임한 제자들이 되었다.

② 성령 받기 전 제자들의 모습은,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해서 쩔쩔맸다.
그러나 성령을 받은 후 “예루살렘 근읍 허다한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행5:16). 데리고 나오는 자마다, 다 나음을 얻었다.

③ 죄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성령님께서는 죄를 인식시켜 주어서, 깨끗하게 만들어 준다. 성령님께서는 죄와 불의와 더러움을 몰아내시는, 생명의 바람, 거룩한 바람이시다.

④ 성령은 주님의 증인이 되도록 만들어 준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성령께서 임하시면, 교회를 넘어 땅 끝까지 나가게 된다.

  성령의 권능은, 죄를 사하는 권세를 말한다. (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죄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말이다. 이는 제자들이 해야 할 사역의 핵심이, 죄 문제를 다루는 것임을 말씀한다.

(3) 믿음을 주신다.

제자들이 주님을 만나고 있을 때, 도마는 그 곳에 없었다(24). 자신이 그 곳에 없었다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다는 말씀도, 본 사람들의 증거도 믿지 못했다.

  지금도 혹자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말씀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는 간증도 믿지 못한다. 이런 사람들이, 도마와 같이 의심 많은 사람이다. 도마는 똑똑했지만, 공동체 안에 없었기 때문에 의심이 생겼다. 공동체를 떠나면, 시험에 빠지게 된다. 공동체를 떠나면, 꼭 다른 짓을 한다.

  따라서 예배의 자리를 떠나지 말라. 주님께서는 인자하게도, 도마의 믿음 없음을 치유해 주신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7)고 하셨다.

  믿음이 중요하니까, 믿음의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다. 믿음의 공동체를 떠나서 네가 무너졌으니, 나는 네 믿음이 회복되기 원한다는 말씀이다. 신앙은 보고 느끼고 만져서 믿는 것보다, 하나님 말씀 중심으로 믿어야 한다. 말씀은 언제나 환경보다 앞서간다.

  부활의 사건이 있기 전에, 먼저 말씀이 계셨다. 하나님의 역사는 즉흥적이 사건이 아니라, 먼저 말씀하시고 그대로 이루어지는 사건이다. 예수님께서 (마12:40)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고 하셨다.

  그땐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을 하셨지만, 그대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산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뱀과 전갈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셨음을 믿는가?(눅10:19).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면, 하나님의 축복이 창고에 넘치게 됨을 믿는가(말3:10).

  목사만 아니라, 성도가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낫는다는 말씀을 믿는가? 다른 것을 모두 다 믿어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거나, 자신의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구원받을 수 없다.

  (롬10:9-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라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부활)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바울은 헛된 믿음을, 성경대로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믿지 못하면, 구원이 없다고 했다(고전15:2-4). 따라서 부활 신앙이 없으면, 구원받을 수 없고, 능력 있는 삶도 살 수 없다. 성경을 기록한 이유는,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함이다.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을 주기 위해 성경을 주셨다.

  결론이다. 주님은 자신의 부활을 먼저 증거 하시고, 우리에게 가라고 말씀하신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1). 인류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보다, 더 큰 뉴스는 없다. 뉴스는 전파되어야 한다. 특종일수록 더 빨리, 더 크게, 더 정확히 전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의 복음을 들고 가야 한다. 그러나 그냥 가면 안 된다. 또한 갈 수도 없다. 먼저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한다(행1:4-8). 성령 충만하여, 부활의 소식을 힘을 다해 전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19-20)고 하셨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 평안하고, 성령 충만하고, 믿음의 사람이 되어, 사명을 감당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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