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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부활의 주님을 만난 첫 인생 (막 16: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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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할렐루야!
지난주간 우리는 주님의 고난에 함께 동참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실패로 끝난 것 같았지만, 보십시오.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지 않습니까? 할렐루야! 이 시간! 우리는 모두 그에게 경배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는 우리의 생명의 주요, 만 왕의 왕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계심을 증거 하는 것만큼 신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울다가도 춤을 출 수밖에 없는 너무나 아름다운 메시지가 아닙니까?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을 가장 먼저 만난 인생은 얼마나 행복할까요? 우리는 성경에서 인류 역사상 맨 처음 부활의 주님을 만난 한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오늘 본문 9절에 보시면,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여기 이 여인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먼저 보이셨다'입니다. 자! 부활하신 주님이 자신을 먼저 누구에게 보이셨습니까? '막달라 마리아'라는 한 여성에게 먼저 보이셨습니다. 여기 막달라 마리아는 여러분 다 잘 아시잖습니까? 눅8:2에 보면 다른 청순한 마리아들과는 달리 본래 일곱 귀신들렸던 여인이었습니다. 한 귀신도 아니요 일곱 귀신이나 씌운 여인이었다는 것은, 도덕적 정신적 영적으로 철저하게 타락한, 영 육간에 썩을 대로 썩어빠진 인간의 생명을 갉아먹던 창녀였습니다. 그녀의 심령이 사막의 모래처럼 황폐한 여인이었던 것입니다. 사는 것 같으나 마지못해 살아가는, 참으로 불행한 나날을 보내던 여인입니다.

이 어느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한 여인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을 만나 새로운 생명을 얻었습니다. 주님 안에서 전혀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거듭난 이 후 그는 항상 주님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하나님의 은혜 앞에 아름답게 살았던 여인입니다. 그녀의 심령은 더 이상 황량한 사막이 아니었습니다. 주님 생시에 주님께로부터 들었던 생명의 말씀들이 고스란히 그녀의 심령 속에 담겨 있었습니다. 그 생명이, 그 생명의 능력이, 그 생명의 힘이 그녀로 하여금 다시 주님의 무덤을 찾지 않고는 베기지 못하게 했습니다. 무덤이란 무엇입니까? 죽음의 현장입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가 다함 없는 생명을 머금은 심령을 지니고 다시 주님의 무덤으로 돌아갔을 때, 그곳은 더 이상 무덤이 아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거기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친히 뵙고 주님의 음성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이것입니다. 이 여성들이 처음부터 부활을 잘 믿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묻혀있던 이 동산에 그 여자들이 올라왔던 이유는 차라리 단순한 이유였을 것입니다. 주님에 대한 단순한 애정, 단순한 감사, 단순한 충성심 때문에 그의 시체에 향유를 발라 드리려는 동기였지, 이 여성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했다는 흔적은 없습니다.

여기는 나와 있지 않았지만 요20:11에 보면 마리아는 "마리아는 무덤밖에 서서 울고있더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울다'는 동사 klaio는 단순히 울먹이거나 혹은 소리 없이 흘리는 눈물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땅을 치며 소리를 내어 통곡하는 것, 간장이 끊어지듯 애곡하는 것을 뜻하는 동사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으로 되돌아간 막달라 마리아는 땅을 치며 통곡하고 애곡하였습니다. 이른 새벽 아직까지 거의 모든 예루살렘 사람들이 잠들어 있을 시각에, 골고다 언덕으로부터 새벽의 정적을 찢으며 울려 퍼지는 막달라 마리아의 울음소리를 들어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가장 천하다는 창녀였기에 남편도, 자식도, 번듯한 친구 한 명도 없었을 그 가련한 여인이 울부짖는 애곡소리는 얼마나 애절하겠습니까? 이 눈물은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고 다만 시신이 없어진 것으로 인해 통곡을 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 기대하지 않았던 예수의 부활 사건을 접했을 때 여성들이 보여 주었던 반응은 어떤 반응이었습니까? 지금 막달라 마리아 뿐만 아니라 함께 같이 무덤에 갔던 여성들 역시 절망 속에서 슬픔에 잠겼을 뿐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8절에 그 반응이 나와 있지요? 자, 본문 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여자들이 심히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이것은 이 여인들이 받았던 충격이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예요. 그들에게 기대했던 흔적도 없고, 부활을 믿었다는 흔적도 없습니다. 제자들의 모습을 보시면 11절에 그들은 예수의 살으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뭐라고 그랬습니까? "믿지 아니하니라"라고 했어요. 처음에는 그럴 수 없다. 사람이 다시 살다니. 믿지 아니하니라. 그것이 당연한 거예요. 13절에 보시면 소위 엠마오 길에 두 제자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그것을 나머지 제자들에게 그 사실을 전했을 때, 이 부활의 소식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자, 13절에 보시면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고하였으되. 역시, 역시 역시나, 믿지 아니하니라"라고 했어요. 믿지 아니하는 것이 당연한 거죠. 14절에도 "그 후에 열 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믿지 않았다! 믿지 않았다! 이 구절이 되풀이되지 않습니까?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요20:25절에 보면 도마가 나옵니다. 그 역시 믿지를 않습니다.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주님께서 돌아가신 직접적 사인(死因)이 되었던 못 자국과 창 자국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믿을 수 없다는 말입니까? '주님의 부활'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죽은 사람이, 그것도 시신이 무덤 속에 장사되기까지 한 사람이 몇 일 지나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모두가 부활하신 주님을 믿지 않는 모습을 보게됩니다. 얼마나, 얼마나 안타까운 이야기입니까?

저는 믿는 자가 행복한 자라고 생각해요. 세계적인 심리학자 가운데 소위 '내담자 중심의 접근 이론'을 전개한 '칼 로저스'라는 심리학자가 있습니다. 본래 그는 20대에 신학교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나 신학교에서 공부하면서 그는 그의 머리 속에 몰려오는 많은 회의를 그는 극복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는 결국 신학교를 떠납니다. 나중에 그는 자기의 전기를 통해서 자기 신학교 시간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나는 내게 밀려오는 회의를 넘어설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신학교를 떠났다. 나는 불행한 사람이다. 나는 불행한 사람이다." 그는 심리학계에서는 존경을 받는 세계적인 석학이 되었고, 많은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신앙적으로는 그는 스스로를 불행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회의를 넘어 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또 다른 부분에서 자기 나름대로의 또 다른 독백을 첨부합니다. "내가 좀더 추구했었더라면" 이런 말을 덧붙이고 있어요. 내가 좀더 추구했었더라면. 좀더 계속해서 주의 은혜를 구할 수 있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저도 이 말이 너무 안타깝게 들리더라구요. 그가 만약 정말 좀더 추구해서 주님의 은혜를 받은 자가 되었었더라면, 그는 부활하신 주님의 붙들림을 받아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 나라의 사역자로 쓰임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그는 심리학자로 큰 기여를 한 것도 사실이지만, 다른 측면에서 위대한 신앙적인 기여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제일 불쌍한 사람은 못 믿을 것을 믿고 사는 사람이요, 그러다가 뒤에 후회하는 사람입니다. 거짓을 진실이라 믿고, 허상을 실상으로 보며, 없는 것을 있는 듯이,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을 소중한 것인 양 착각하고, 거기에 매달려 사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이보다 더 불쌍한 사람은 믿을 것을 못 믿는 사람입니다. 당연히 믿어야 하는 진실을 회의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도 괴로울뿐더러 남까지 괴롭힙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 부활 주일을 맞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다시 사신 이 부활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이 아니고 달리 설명할 길이 없지 않습니까?

자 본문의 6절에 보시면, 청년의 모습으로 나타난 천사를 여인들이 무덤에서 만납니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7절에,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 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중요한 동사가 둘이 나오는데, 하나는 가서 두 번째는 말하라 영어 성경에 보시면 Go and tell.. 가서 말하라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말하라.

예수께서 살아나셨다. 그리고 갈릴리에서 먼저 가서 기다리실 것이다. 이 사실을 가서 전하라, 가서 전하라. 물론 기대하지 않았던 예수그리스도의 부활 사건 앞에 이 여인들은 황당해 할 수 밖 에 없었고, 차라리 그들은 겁에 질려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순종을 결단합니다. 10절에 보시면, 마리아가 뭐라고 했습니까? '가서'라고 했어요. 더 이상 통곡하지 않았습니다. '가서' 이것이 순종이예요. 자, 믿는 것으로 부족합니다. 믿고 나서 우리가 순종하기 시작할 때, 그때부터 우리의 생애 중에서 놀라운 일들은 벌어집니다. 여러분! 이것은 마리아에게만 주셨던 명령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그 다음 제자들에게, 그리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의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도 계속적으로 유효한 명령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이라고 부릅니다. 이 마가복음에서 나타난 지상명령은 어떤 식으로 표현되어있습니까? 15절을 다 같이 읽어보세요.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달리 말하면, 너희는 온 천하, 모든 곳에 가서 내가 만난 부활의 예수님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섬김의 승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그 아들이 누구입니까?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신 분입니다. 아들이 누구입니까? 죄와 사망의 권세를 발로 짓밟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분입니다. 아들이 누구입니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소유하신 만 왕의 왕이십니다. 그렇다면 누가 부활의 증인으로 나의 삶을 기꺼이 주님께 드리겠습니까?

이 아침 묻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힘이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요?'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를 우리는 믿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아니면 믿는다 면서도 우리의 삶에 '타성'에 젖어 살지는 않습니까? 요즘 우리가 흔히 쓰는 단어 가운데 매너리즘(mannerism)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단어는 사전적으로 "일정한 기법이나 형식이 습관적으로 되풀이되어 독창성과 신선한 맛을 잃어버린 상태"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타성'과 거의 같은 말(뜻)이라고도 할수 있을 것입니다. 본래 이 단어는 예술세계에서 사용되던 말로서 "독창성을 잃어버리고 평범한 경향으로 고정되어 감동을 상실함으로 사실상 퇴보해 가는 전통주의"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단어는 우리의 삶 전반에 걸쳐 매우 보편적으로 사용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예컨대 오늘날 직장생활의 최대의 적은 매너리즘이라고 지적되고 있습니다. 매너리즘에 빠지면 직장생활의 활력을 상실합니다. 의욕도 독창성도 상실한 채 월급만 받기 위해서만 존재하게 됩니다. 그런데 저는 매너리즘가운데 가장 무서운 것이 신앙생활의 매너리즘이 아닌가 싶습니다. 교회에 주일마다 빠짐없이 참여하고 예배에도 익숙하게 적응하지만 일종의 습관에 불과합니다. 부활절이 오면 또 하나의 기독교 명절이 왔구나 생각하고 부활절 행사에 참여합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우리의 존재를 뒤흔들어 깨울 엄청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날을 "부활절이 왔구나-세월 잘 지나가는 구나"이런 식으로 맞이합니다. 매너리즘에 빠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독교의 역사를 돌아볼 때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부활 주일을 그저 1년에 한번 있는 연례행사 정도로 생각하고 그 기간 동안에는 예수님 이 죄와 사망을 이기고 부활 하셨다고 찬양을 하고 말씀도 듣고 하지만 나머지 기간 동안은 예수 부활과는 관계가 없는 삶을 살던 시대를 보십시오.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사셨다는 이 메시지가 부활주일을 위해서 읽어야 하는 하나의 대사로 전락해 버린 시대를 보십시오. 그런 시대에는 교회의 등불이 가물가물 하게 꺼져 갔고 많은 성도들 이 세상에 유혹되어서 하나님 의 자녀로서의 생명을 상실한 어두운 시대가 이어졌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날마다 고백하고 자랑하고 찬송하며 그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가지고 사는 성도들이 많이 일어났던 시대에는 교회의 등불이 이 세상을 환하게 비추어 어두움을 몰아내는 대 부흥의 역사들이 일어난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 만난 막달라 마리아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본래 인간의 생명을 갉아먹던 창녀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인간을 살리는 생명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그 변한 참 생명의 모습을 보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왔겠습니까? 사람을 살리는 그녀의 여생이 얼마나 값지고 보람되었겠습니까? 사람을 살리는 그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웠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그녀야말로 진정한 교회요, 참된 교회였습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라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즐겨 행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성경을 보십시오.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나고 안 변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기독교 역사를 보십시오. 아니 가깝게 우리 교회 안을 보십시오.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우리나라 기독교 역사는 이 부활주일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난 날 이 땅에 복음을 들고 제물포 항에 첫 발을 디뎠던 두 선교사를 아십니까? 1885년 4월5일 부활절 아침 벽안의 선교사 언더우드가 인천항에 도착했습니다. 소망이 없던 조선 땅에 어둠의 권세가 득세하던 조선 땅에 빛의 자녀 된 언더우드 선교사가 입국한 것입니다. 저는 부활절을 앞둔 이 시점에 언더우드 선교사를 떠올려 봅니다. 그는 마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님처럼 조선에 소망을 주기 위해 이 땅을 밟았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현실을 바라본 언더우드 선교사는 그의 시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와 앉히셨습니다. 그 넓고,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 한 이곳,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지금은 우리가 서양귀신, 양귀자(洋鬼子)라고 손가락질을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만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 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지켜주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조선 땅, 가난과 인습에 묶여있는 조선사람... 120년 전의 우리의 모습이었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땅에, 언더우드는 새문안교회를 세우고 YMCA를 조직하고, 연희전문학교를 세웠습니다. 그 후 조선에는 희망의 싹이 돋아 오르고, 지금은 선교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120년 전 언더우드와 같이 부활의 예수님을 믿고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임"을 믿음 하나가 오늘 찬란한 부활의 열매가 이 땅에 맺히지 않았습니까? 이제 이 은혜를 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은 역전의 원리를 가르쳐 줍니다. 인생은 얼마든지 역전될 수 있다는 진리를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십자가만 바라본다면 좌절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뒤에 있는 부활을 바라볼 때 희망이 샘솟게 됩니다. 인간은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희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희망은 최후의 승리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최후의 승리자가 되셨습니다. 일시적인 패배 앞에 굴복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최후의 웃는 자가 최후의 승리자가 된다는 사실을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고통 중에 있는 여러분, 낙심하지 마십시오. 끝나기 전까지는 끝난 것이 아닙니다. 조금 더 기다리십시오. 기도하며 기다리십시오. 희망을 가지고 기다리십시오. 인생은 거칠기 그지없습니다. 십자가에서 고통 당하신 주님은 우리가 당하는 인생의 고통을 아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 인생이 주님과 함께 역전될 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소망을 품고 하루 하루를 살아가십시오. 이 땅에 버림받은 한 여인에게 다가오신 그는 그의 인생을 묶어 놓았던 흉악한 결박을 풀게 하셨고 또 그 여인의 섬김의 향기를 받으시고 마침내 그에게 가장 먼저 부활의 기쁨을 주었습니다.

오늘 부활의 이 아침! 부활의 능력을 입혀달라고 기도해야합니다. 여기 모인 우리 모두가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안에 타성에 젖은 모든 묶여 있는 것들이 무덤을 가르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으로 풀려져야합니다. 질병에 묶인 것도 풀려지기를 원합니다. 물질과 사업이 묶인 것도 풀려지기를 원합니다. 이제 성령의 바람이 불어서 이 바람이 우리 가정과 한국교회와 우리사회를 흔드는 모든 세속의 바람들을 무력화시키는 거룩한 태풍이 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의 증인 자로 값진 인생을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땅에 내 생명이 남아 있는 한, 나의 삶의 한 복판에서 나 하나 때문에 모든 것을 다 희생하신 그 사랑을 세상 앞에 쏟아 놓는 삶이 날마다, 날마다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아-멘.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 주님이 부활하셨음을 찬양합니다. 주님이 사망을 이기셨음을 찬양합니다. 주님이 우리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심을 찬양합니다. 주님 때문에 우리도 부활하게 됨을 찬양합니다. 주님 때문에 이 세상의 죽음이 정복됨을 찬양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면서 우리 마음에 추호라도 의심이 남아 있으면 이 시간 철저하게 그 의심을 씻어 버려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부활의 사건을 믿는 믿음이 우리의 삶 전부를 지배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누구를 만나든지 어디를 가든지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우리의 구원자가 되셨음을 기쁘게 증거하는 자가 되게 하시고, 어떤 상황에서도 부활하신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맛보게 해 주시옵소서. 한시도 우리를 혼자 두지 않으시는 살아 계신 주님과 동행하는 행복과 기쁨과 충만함을 맛보면서 이 세상을 이기고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되도록 우리를 축복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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