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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예수 부활의 증인들 (행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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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위대한 인물들이 하늘의 별과 같이 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석가나 공자, 소크라테스를 비롯해서 여러 성현들이 이미 죽어 한 줌의 흙이 되었지만, 우리는 지금도 그들이 남긴 가르침을 통해서 많은 유익을 얻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우리가 그 분들을 직접 만나 사귐을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제 지나간 역사 속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지나간 역사 속의 인물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계신 곧 현존하시는 분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며 그 분과 인격적인 사귐을 가집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다른 성현들의 차이점입니다. 어떻게 이런 차이가 생긴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에서 부활하셨으나, 다른 성현들은 하나같이 죽음에게 삼킨 바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위인들의 무덤을 치장하고 자랑하기를 좋아합니다. 석가모니가 죽자 그 몸을 화장해서 얻은 사리들을 진신사리라고 하여 부처를 모시듯이 정중히 모십니다. 불도들은 진신사리 앞에 합장하여 절합니다. 그리고 공자의 묘는 중국 산동성 곡부(曲阜)에 있는데, 매년 공자에게 성대한 제사를 지냅니다.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옳다고 믿는 바를 지키기 위해 감옥에서 독배를 마시고 죽었습니다. 그 역시 아테네의 어딘가에 묻혔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무덤이 없습니다. 부자인 아리마대 요셉이 준비해 둔 새 무덤에 장사되셨으나 삼일 만에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전파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것이 역사적인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부활하지도 않았는데, 부활 교리를 만들어서 전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중요한 교리라도 거짓에 바탕을 둔 것이라면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필요에 의해서 지어낸 것이 아니라 엄연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한 신실한 증인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 본 적이 없고 그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하지도 못했습니다. 우리와 예수님 사이에는 2천년이라는 시간 간격이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렇다고 당시 유대 나라에 살던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을 만났고 그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했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기회를 가진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데 지장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증인들의 말을 믿습니다.

우리가 매일 시청하는 방송이나 신문의 뉴스 역시 우리가 직접 현장을 가 본 것이 아니라 기자들의 증언을 믿는 것입니다. 기자들이 들으면 기분이 좋지 않을지 모르지만, 저는 요즘 기자들보다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더 신용하고 싶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하나같이 진실한 증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증언한 믿을만한 증인들입니다.

증인(witness)을 헬라어로 마르투스(ma,rtuj) 라고 하는데, 영어의 순교자(martyr)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증인은 목격자일 뿐 아니라 자기의 증언을 목숨을 걸고 보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순교자와 같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요한을 제외하고는 하나 같이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위해 순교했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요한 역시 노년에 밧모 섬에 유배되었고 순교와 다름없는 고난을 감내했습니다.

이 신실한 증인들인 사도들이 전한 복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언제나 함께 합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으나 다시 살지 못하셨다면, 그 사실만 가지고는 복음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죽으심으로 우리를 대속하셨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럴 경우, 예수님은 훌륭한 성현 가운데 한 분은 될 수 있어도 구세주로 인정받을 수는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이 같이 말씀합니다. “17)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러나 그런 걱정을 할 이유가 없으니,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복음서의 증언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의 일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들이 보낸 큰 무리가 밤중에 횃불을 밝히고 검과 몽치로 무장한 채 예수님과 제자들이 머물러 있는 겟세마네 동산에 들이닥쳤을 때, 제자들은 몹시 놀라고 두려워했습니다. 그 혼란스러운 와중에 다 주님을 버려두고 도망했습니다.

그러나 시몬 베드로는 잡혀 가시는 주님의 뒤를 몰래 따라가서 대제사장의 관저의 뜰에 들어가 모닥불을 쬐는 하인들 사이에 끼여 앉았습니다. 거기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되는가를 보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만 베드로는 정체가 드러나고 맙니다. 대제사장의 여종 하나가 베드로는 알아보고 “당신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니, 베드로가 부인하기를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고 했습니다. 가엽게도 그 자리에서 베드로는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그 날 이후로 제자들은 문을 닫아걸고 숨어지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철저하게 용기를 잃어버렸던 제자들이 그로부터 채 두 달이 되기도 전에 예루살렘 거리에 모습을 드러내고 ‘십자가에 못 박힌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라고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22)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23)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24)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 32)…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행 2:) 그들은 더 이상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어디서나 담대하게 나사렛 예수를 전했습니다.

예수 부활의 증거들

하루는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3시에 관습에 따라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는데, 성전 미문(美門) 곁에 앉았던 나면서 앉은뱅이 된 걸인이 두 사도를 보고 구걸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요한과 함께 그를 주목하고 말하기를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았습니다. 베드로가 말하기를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그 사람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랬더니 발과 발목에 힘을 생겨 뛰듯이 일어서서 걸으며 두 사도와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이를 본 백성들이 그 사람이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 때, 그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솔로몬 행각에 모였습니다. 이는 백성들이 두 사도의 해명을 듣기 위한 것입니다. 이에 베드로가 앞에 나서서 백성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저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행 3:12-16)

이처럼 두 사도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일으켰으며, 이를 보고 놀란 많은 백성 앞에서 나사렛 예수의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지 못한 백성들이지만, 그들의 눈앞에 서 있는 걸인이 앉은뱅이에서 온전해진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 날, 두 사도의 전도를 듣고 믿은 자가 남자만 약 오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러자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두 사도가 예수님을 전하는 것을 싫어해서 체포했습니다.

이튿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다 모였습니다. 이들은 두 달 전에 예수님을 재판하여 사형을 선고했던 자들입니다. 그들이 두 사도를 가운데 세우고 물었습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그러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말했습니다.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8-12)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갈릴리에서 고기잡이하던 무식한 어부로만 알았다가 놀랐습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두 사도가 전부터 예수님과 함께 다니던 것을 알고 있었고 또 병 나은 사람이 두 사도와 함께 섰는 것을 보고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두 사도를 밖에 나가 있게 한 후에, 서로 의논하기를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저희로 인하여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저희를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다시 두 사도를 불러 “앞으로는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기를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여종 앞에서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던 베드로가 서슬이 시퍼런 산헤드린 공회에 서서 이처럼 담대하게 말하다니 놀랍지 않습니까? 그 동안 사도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처럼 딴 사람이 된 것일까요? 그것은 베드로의 증언에 나오듯이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되셨다가 삼일 만에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셨다는 사실은 두 사도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일으킨 것과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라고 증거한 것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것

사랑하는 성도님들, 베드로와 요한은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만남을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에 관해서 들어서 아는 것과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아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는 노무현 대통령에 관해서 알고 있습니다. 티비의 뉴스나 신문 기사를 통해서 노 대통령에 관해서 여러 가지 정보를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노 대통령을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에 관해서 아는 것은 어디까지나 간접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의 부인이나 자녀들은 노 대통령에 관해서 아는 것이 아니고 남편으로서 또는 아버지로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에 관해서 아는 사람들은 참 많습니다.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예수님에 관해서 나름대로 듣고 읽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아는 것은 실제로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노 대통령에 관해서 아는 것은 일방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에 관해서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그는 우리의 이름도 모르고 어디 사는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직업이 무엇인지, 취미가 무엇이며, 당면한 문제가 무엇인지 전혀 모릅니다. 아니 관심조차 갖고 있지 못합니다.

이는 예수님에 관해서 아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에 관해서 아는 사람들은 예수님과 실제적인 관계를 맺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실은 예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예수님을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우리가 예수님을 알 뿐 아니라 예수님 역시 우리를 아는 것을 말합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14)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친밀한 사이인지,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시다’(요 14:10)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서로를 온전히 아시는 관계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믿는 성도들도 서로를 온전히 아는 관계여야 합니다. 그러려면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시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은 우리 안에 계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관계를 포도나무 비유에서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1)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2)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3)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4)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살아계실 뿐 아니라, 그를 믿는 우리에게 생명의 원천이 되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와 멀리 떨어져 계신 것이 아니라 포도나무와 가지처럼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생명을 공유하는 친밀한 사이임을 의미합니다. 설교의 서두에서도 말씀하였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지나간 역사속의 인물이 아니라 지금도 현존하시며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십니다.

부활의 능력의 나타남

우리는 이 사실을 ‘거듭남’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거듭난 것은 그 분이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 증거입니다. 거듭나는 것은 죽었던 우리의 영이 살아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대하여 캄캄절벽이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고 믿고 섬기게 되었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에게 이 같은 존재적인 변화가 일어난 근거는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에 그를 믿는 우리가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영적인 세계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하던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고 섬기게 되었고, 썩어질 육신을 위해서만 살던 우리가 영원한 상급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게 되었습니다. 가치관이 달라졌고,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달라졌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내면에서 일어난 영적인 변화는 미문 곁의 앉은뱅이가 일어난 것보다 더 놀랍고 위대한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이르기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곧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까닭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가 죽음의 막강한 세력을 철폐하고도 남을 능력을 갖고 계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게 죽음처럼 두렵고 힘이 센 존재는 달리 없습니다.

오늘날 인간들은 참 대단한 능력을 소유했습니다. 원자탄에다 수소폭탄까지 만들고, 대양을 건너 날아가서 목표물을 맞추는 미사일도 만듭니다. 달에 우주인을 보냅니다. 산을 깎아서 평지로 만들어 도시를 건설합니다. 심장 이식을 하고 뇌수술을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정복하지 못한 무서운 존재가 남아 있는데 죽음이 그것입니다. 세계를 정복한 영웅들도 죽음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하고 삼키고 말았습니다. 지혜로운 자도 무지한 자나 마찬가지로 죽음 앞에서는 무력합니다. 부자도 빈자도 죽음 앞에서는 공평합니다. 그야말로 죽음은 천하무적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어 무덤에 장사되셨으나 삼일 만에 죽음을 정복하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1장 4절에 이르기를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의 핵심은 “능력으로”라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능력을 보여 준 것이라는 뜻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위대한 진리를 전해준 인류의 스승이지만 애석하게도 반대자들에 의해 죽임 당한 소크라테스와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무능한 분이 아니라 죽음을 이기신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 사함을 받고 천국 백성이 된 것 역시 그의 능력에 의한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이름을 힘입어 능력 있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위대한 특권을 주셨는데, 곧 “17)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막 16:)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명한 즉 귀신이 쫓겨나가는 것은 주의 이름에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낫는 것 역시 주의 이름에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위대한 주의 이름을 힘입어 능력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힘입어 복음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무대는 감람산입니다. 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지 40일이 되었을 때로서, 제자들과 오백 여 성도들이 주님의 지시에 의해 그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 때 제자들은 이제야 예수님께서 임금이 되시나 보다 생각하고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마치시고 모든 사람이 보는 데서 하늘로 올리워가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이 땅에 이스라엘 국가를 재건하는 것이 아니라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여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나가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구원 받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그만큼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주님께서는 그를 믿는 자들에게 성령의 능력을 주셔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삼기를 원하십니다. 예수 부활의 증인이 되려는 사람은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자기의 주님으로 모셔야 합니다. 그리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셔서 권능 있는 증인으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오늘 부활절을 맞이해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 돌리기 위해 예배에 참석하신 성도님들에게 부활의 능력이 함께 하셔서 죄와 마귀와 세상을 이길 뿐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의 증인들이 되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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