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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십자가, 그 완전한 사랑 (롬 8:3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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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그 완전한 사랑
로마서 8장 31-39절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
 
오늘 아침에 아내가 골라 준 넥타이를 보는 순간, 왠 붉은 넥타이? 하였다가, 아 고난 주간 컨셉이구나!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 주간이 시작되는 종려 주일입니다. 십자가의 그 놀라운 능력과 영광을 그저 말로만 듣지 않고 실제로 우리가 그 깊은 은혜 속에 들어갈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부터 시작해서 한 주간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놀라운 은혜를 부으시는 주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는데 도대체 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했습니까? 빌라도입니까? 로마 병정입니까?  아닙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이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작정하시지 않았다면 그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자체가 충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죄와 저주로 멸망하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보다 더 한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31절) 했습니다. 십자가를 보면 너무나 감격스럽고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는 할 말을 잃을 정도입니다. 그 놀라운 사랑! 사실 그 엄청난 충격, 이것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삶을 변화시키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정말 사랑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무 두려울 것도 부족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내 편이시고 나를 그처럼 사랑하신다는데 걱정할 것이 무엇이 있고 누가 나를 무시할 수 있으며 무엇 때문에 우리가 무너질 수 있겠느냐 말입니다.
(31절)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절)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사도 바울 처럼 무서운 시련과 연단을 겪은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35절-36절에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맡은 사도 바울의 삶이 도살 당하는 양같은 처지였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도 바울의 삶은 고난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37절에서 사도 바울은 고백합니다.
“이 모든 일에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사도 바울이 그 엄청난 박해와 시련 중에도 넉넉히 이기는 승리를 경험했고 이런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이길 수 없는 고난이 없었습니다. 견딜 수 없는 연단이 없었습니다. 그는 넉넉히 이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아버지가 되신 증거를 아십니까?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자식을 기르는데 부모가 아니면 그 아이 똥 하나 치우는 것도 힘듭니다. 그러나 친부모는 자식을 위하여 죽을 수도 있습니다.
십자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의 확신이고 큰 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가 아니시라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염려할 것도 없고 두려워할 것도 없고 조급해 할 것도 없습니다. 그 누가 나를 무너뜨릴 수가 있습니까?
봄이 오는 길목에 꽃샘 추위가 있어도 우리는 분명히 봄이 올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듯이, 십자가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자는 어떤 시련이 있고 고통이 있어도 "더 이상 염려할 것 없다! 두려워할 것도 없다! 조급할 것도 없다! 누구도 나를 건드리지 못한다! 빼앗지도 못한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여러분의 이야기입니까? ‘완전한 사랑을 십자가에서 보았기 때문에 내가 이제는 어떤 일을 당한다 하더라도 넉넉히 이길 수 있다!’고 하는 고백이 내 고백이냐 하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똑같은 십자가를 바라보면서도 허전해 하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넉넉히 이기기는 커녕 견디기도 어려워하는 분들을 봅니다. 시련 앞에서 두려워하고 문제 앞에서 염려하고 조금만 어려운 일이 생겨도 무너지는 일이 무슨 까닭이냐는 것입니다. 분명히 사도 바울은 어떤 환란이 올지라도 어떤 시련 앞에서도 넉넉히 이긴다고 했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허전하냐 말입니다. 십자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서 그럽니까? 날마다 주님이 함께 하시는 분명한 체험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엄청난 세상 복을 받은 것도 아니니 십자가만으로는 확신할 수 없는 것입니까?

  어떤 교인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목사님, 저는 아무리 십자가를 보아도 그 뜨겁다는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아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도 여전히 부족해 하고 조급하고 염려하고 낙심한 모습은 왠 일까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도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확신하기는 커녕 하나님이 자신의 좋은 것을 가져가시는 분으로 여기는 이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완전한 순종이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서는 큰 일 날 것 같습니다.

여러분, 십자가만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이보다 더한 사랑을 보여주실 수 있습니까? 영원한 멸망의 지옥으로 갈 수 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 말고 우리가 더 증거를 보아야 하는 것인가요?
그것은 십자가만으로 충분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보면서도 마음으로는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듣기는 했지만 느껴지지 않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는 제 마음에 세상이 가득한 때였습니다. 목회의 목적도 성공을 위하여 하던 때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만으로는 뭔가 부족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 속에 세상이 들어와 있기 때문 입니다.

형편이 어렵고 살기가 너무 힘들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믿을 수도 없다는 말도 자신을 속이는 말입니다. 사랑하면 고생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떤 청년에게 사랑하는 여자가 생기면 어떤 어려움도 희생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 여자를 위하여 고생할 일이 생기면 오히려 기뻐한다니까요!

  제가 어릴 때는 케잌은 1년에 한번 먹어 볼까 말까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릴 때, 참 케잌을 많이 먹어 보았습니다. 그것은 이모가 많아서 그랬습니다. 이모들이 결혼할 때가 되니, 이모를 좋아하는 총각들이 이모를 만나러 집에 올 때마다 비싼 케익을 사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명이 너무 힘들다고 탄식하였습니다.
(예레미야 20장 7-8절) “...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여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다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마음 중심이 얼마나 뜨거운지 다시 말씀을 들고 나갔다고 했습니다.
(9절)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며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
힘든데 왜 합니까? 고통스러운데 왜 그만두지 않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은 힘들고 어려운 것이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교회 부흥회를 인도했는데, 하루는 너무 비가 많이 왔습니다. 그래서 적은 인원이 모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비가 쏟아지던 날 가장 많이 모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고 나면 힘든 것이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원주 어느 교회 부흥회를 인도하러 갔는데 부흥회 기간 중에 사찰 사택에 불이 났습니다. 시험될 일이었지만 오히려 사랑의 설교를 실지로 체험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고 간증하였습니다. 여러분, 힘들고 어렵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브라질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시골 마을에 남편이 병들어 죽고 딸만 데리고 사는 마리아라는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딸 크리스티나는 어려서는 어머니의 말씀을 잘 들었고 공부도 잘했습니다. 그런데 십대가 되면서 친구들과 어울려 가끔 주말에 큰 도시에 나가 어떤 때는 자고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아무래도 걱정이 되던 어머니 마리아가 딸 크리스티나에게 말하기를 "조심해야 한다. 도시에 가면 도둑놈도 많고 험한 사람이 많으니 집에 있어야 한다. 나쁜 친구를 사귀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를 했지만 어느 날 가출해 버렸습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딸이 갔을 것이라고 예상한 세계 유흥 도시 향락 도시 리오데자네이로로 갔습니다. 크리스티나가 가서 있을 곳이 뻔했기 때문에 그 곳에 있는 호텔, 나이트 클럽, 또 술집, 도박장 이런 곳을 찾아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는 찾아 나서기에 앞서서 자기 사진을 사진관에 가서 여러 장 복사를 했습니다. 좀 확대해서 복사를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서 자기 딸이 갔을 만한 그 나쁜 지역 사방을 돌아다니면서 그 사진을 부착했습니다. 화장실에도 붙이고 또 전화 박스에도 붙이고 그리고 현상금 붙은 죄인 수배하는 그런 사진 옆에도 갖다 붙이고 방탕한 사람들이 갈 만한 곳에다가 자기 사진을 갖다 붙였습니다. 그리고 그 사진 뒤에 메모를 남겨두었습니다. "네가 무엇을 했던지 지금 네가 어떤 형편에 있던지 나는 상관하지 않으니 돌아오렴!" 그리고서 지치고 돈도 떨어진 마리아는 다시 시골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몇 주 후 그의 딸 크리스티나가 나이트 클럽에서 밤새도록 춤추고 호텔을 전전하면서 피곤하여 쓰러질 듯 건물 층계를 내려오고 있었는데, 지치고 취한 자기의 눈에 언뜻 익숙한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무의식적으로 가까이 가 보았더니 어머니의 사진이었습니다. 얼른 그 사진을 떼었습니다. 그 동네에 사진이 붙는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부끄러운 얼굴이 팔리기 때문에 사진을 뜯었습니다. 뜯고서 앞면 뒷면을 살펴보았더니 메모가 있었습니다. "네가 무엇을 했던지 지금 어떤 형편에 있던지 나는 상관하지 않으니 돌아오렴!" 부끄러워서 옆에 누가 있나 없나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부끄러워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딸의 이름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 얼굴만 팔린 것이지 자기는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도록 자기 이름도 쓰지 않았습니다. 집을 나간 딸을 찾으려면 딸의 사진을 붙여야 할 것인데 어머니 자신의 사진을 붙여놓았습니다. 메모를 남겼지만 딸의 이름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평생을 선량하게 살아온 이 어머니가 딸을 대신하여 온갖 우범 지역에 자기 얼굴을 내어다 팔았던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말할 수 없는 수치와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죄인 중에 죄인이 되셨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사야 53장 4-5절)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환란이 커서도 아니고 큰 복을 못받아서도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어려워서도 아닙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도 듣고도 우리가 마음을 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세상의 미련을 버리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는 세상이 너무 그립고 세상에 사랑하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아무 느낌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빈틈을 만들었습니다. 그 빈틈으로 인해 우리는 영적인 공허함과 온갖 시험과 인생의 처절한 좌절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어중간한 믿음, 어중간한 순종, 어중간한 헌신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더욱 희미해지는 것입니다.

  어느 우수한 공군 조종사가 뜻밖의 사고로 비행기와 함께 추락하였습니다. 기능이나 비행기 여건으로 보아서 최우수급, 사고 원인 불명이어서 군 수사 당국에서 사고 원인을 추적했습니다. 그 조종사 숙소를 점검했더니, 늘 깔끔하였던 그가 그 날은 숙소가 어지럽게 정리되지 못한 채 비행기에 탑승했음을 발견했습니다. 무엇인가 그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던 것이 있었던 것입니다. 영적으로 이런 상태에 있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우리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면 십자가의 사랑은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용도목사님은 뜨거운 밥상을 받아들고 기도하면서 “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없으셨는데.” 하시며 울었다고 합니다.
  제가 처음 이 일기를 읽고 이용도목사님이 경험하는 이 사랑이  정말 부러웠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느낄 수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이해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이용도목사님은 하나님을 향하여 완전히 돌아선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 속에 살 수 있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선교사였던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아프리카에서 일생을 헌신하였습니다. 그런데 말년에 잠비아의 깊은 밀림 속에서 연락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1871년 헨리 스탠리라는 탐험가가 리빙스턴을 찾아내기 위해 아프리카로 들어갔습니다. 1년 만에 겨우 밀림 속에서 병들어 앓고 있는 리빙스턴을 만났습니다. 식료품과 의약품이 거의 다 떨어진 채 심한 열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스탠리는 그에게 간절히 권면했습니다. "선교사님, 아프리카의 복음 사역을 위해서 30년간 헌신해 오셨으니까 이제 그만 하시고 저와 함께 본국으로 돌아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 말을 듣던 리빙스턴은 아주 유명한 대답을 했습니다. "아닙니다. 제게 있어서 아프리카 선교 사역은 헌신이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큰 특권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이 영광스러운 일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벅차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로부터 약 1년이 지난 1873년 5월 1일,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리빙스턴은 침대 곁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깍지낀 채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으로 고요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장래의 영광을 바라보는 사람은 고난을 하나님께서 주신 특권으로 생각합니다.

성도 여러분, 십자가로 충분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완전히 드러났습니다.
“그러니 무슨 말하리요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38-39절)

“하나님이 나를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셨으니 나도 하나님을 목숨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이렇게 고백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시는데 “나는 믿습니다.”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사랑으로 응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은 뜨겁게 체험되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1907년에 경험한 평양 대부흥 운동은 역사적으로 두 개의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1904년 영국 웨일즈의 부흥과 인도 카이사 지방의 부흥입니다. 1906년 경 인도 카이사 지방에 부흥이 찾아왔을 때 어린 아이들도 부흥을 경험하였습니다. 당시 기록을 보면 어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다는 소식을 들은 어린아이들이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했습니다요. 그래서 자기들끼리 모여서 기도하였습니다. 그 때 그 아이들이 물밀듯 밀려오는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흐느껴 울음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 아이들을 보고 어른들이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십자가의 예수님은 우리를 많이 사랑하셨는데, 우리들의 마음 속에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요. 그래서 가슴 아파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미 부흥이 임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방황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굳게 서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시간이 찾아와야 합니다. 그 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오늘 1부 예배를 드리러 엘리베이터에 탔는데, 경비 아저씨가 쓰레기 봉투를 들고 같이 탔습니다. 저를 보고는 물으시는 것입니다. “[나는 죽고 예수는 살고] 제자 훈련 교재를 보았는데, 목사님 내가 죽는 것이 잘 안되요! 자꾸 내가 살아서 역사해요. 그 때마다 후회하지만 어떻게 내가 죽을 수 있나요?” 저는 경비 아저씨 안에 이미 부흥이 임한 것을 느꼈습니다. 내가 안 죽은 것 같은 안타까움이 큰것은 복인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교제는 우리 모두에게 허락된 일입니다.
“주 예수님만 원합니다.”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전에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느껴집니다.
아직 아니라면 구하십시오.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불타게 하소서!

오늘 우리가 고난 주간을 시작하면서 십자가 앞에 섰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완전한 사랑을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오늘 성찬을 받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을 향하여 서시기를 바랍니다. 그 십자가를 향하여 “하나님, 저도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고백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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