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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다시 사셨기 때문에 (욥 14:13~14, 고전 15: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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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아침을 맞이하여 부활하신 주님의 축복이 우리의 가정에, 우리의 직장과 사업에, 우리의 사회에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영이 소생하고, 우리의 가정이 다시 살고, 우리의 사회가 다시 일어나는 부활의 기쁨이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절도 혐의로 잡혀왔습니다. 재판관은 “당신이 물건을 훔치는 것을 보았다는 증인이 최소한 4명은 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때 절도 피의자는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제가 물건을 훔치는 것을 보지 못했다는 증인은 적어도 100명은 데려올 수 있습니다.”라고 응수하였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어떻게 됐을까요? 4사람의 증언이 100사람의 증언을 이겼습니다.

  부활의 증거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수의 목격자들과 증인들이 다수의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을 이깁니다. 우리도 다 부활을 직접 목격하지는 못했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알고 믿습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부활을 부정하려고 했지만 부활의 소식은 확산되어 갔습니다. 이것이 부활이 가진 능력입니다. 부활의 소식은 앞으로도 계속 확산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두개인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두개인은 예수님 당시뿐만 아니라 그 전에도 있었습니다. 예수님 이전에도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두개인들 중에는 예수님께서 사람을 살리시는 것을 본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분명히 사두개인 중에서도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자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부활을 부인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보았다고 다 믿는 것도 아닙니다.

  부활은 논리로, 과학으로 증명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닙니다. 현대의 사두개인들도 많이 있습니다. 왜 부활을 믿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할까요? 이성과, 과학과, 논리 때문입니다. 인간의 이성이나 과학은 오히려 부활의 신앙에 방해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때에 무덤 안에 한번 들여다보세요. 예수님의 시체를 쌌던 세마포는 잘 개켜져 있었습니다. 헬라어 원어를 보면 요한이 사용한 “개켜 있다”는 단어는 ‘둘둘 말려 있다’, ‘그대로 접혀 있다’는 뜻입니다. 수의는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지 않았습니다. 본래 모습 그대로 있었습니다. 세마포는 전혀 손을 댄 흔적이 없었습니다. 말리고 접힌 그대로였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돌문으로 닫고, 열지 못하게 인봉하고, 시체를 훔쳐가지 못하게 로마 군인이 보초를 섰습니다. 이런 모든 일들이 부활하지 못하게 방해하려고 한 일이지만 오히려 부활의 증거가 되었습니다.
  토마스 아놀드는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류 역사상 가장 잘 입증된 사실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만큼 여러 가지로 더 좋게 더 많이 지지를 받았던 단일한 역사적 사건은 없습니다.

  당시 부활의 목격자들은 다양했고 많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여인들이 맨 먼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습니다. 베드로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예수님의 부활을 보았습니다. 이층 다락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도마와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보았습니다. 그 후에 갈릴리 해변의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산상에서 11제자가 예수님의 부활을 보았습니다. 후에 500명의 제자들이 일시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야고보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감람산에서 승천하실 때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다메섹 도상의 사울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 외에도 믿음의 눈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본 사람들은 수억이나 됩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부활을 목격하고 믿고 있습니다. 오늘 바울의 말씀을 통하여 다시 사신 예수님 때문에 가진 우리의 부활신앙을 다시 한 번 확인하기를 바랍니다.

첫째, 다시 사셨기 때문에 전파하는 것도 믿음도 헛것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5:14에는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라고 합니다. 부활이 없으면 전파하는 것도, 우리의 믿음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이나 전파하는 것의 근거는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제자들과 십자가의 관계를 보세요. 십자가는 그들을 두렵게 하였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겁쟁이가 되게 했습니다. 그들이 도망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을 보세요. 그들이 용기 있게 만들었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당당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이 죽음을 극복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전파하게 만들었습니다.

  벤 부렌이란 분이 말했습니다. “예수 부활 이전에는 그리스도인이 없었다.” 이 말은 예수님의 부활이 그리스도인을 만들었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게 만들었다는 의미입니다. 부활은 그리스도를 따르던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이 되게 한 사건입니다. 우리 모두 다 부활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지난 3월 20일에 ‘유다복음’ 출판 기자회견을 가졌습니다. 유다복음은 영지주의 입장에서 기록한 신빙성이 없고 가치가 없는 책입니다. 복음이란 말을 붙이기에도 아까운 책입니다. 이 책에는 예수님은 물위를 걷지 않았다, 물로 포도주를 만든 적이 없다, 유다가 은화 30냥을 받지 않았다, 유다는 오히려 배반당했다, 유다는 자살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책은 예수님의 동정녀탄생이나 부활을 모두 부정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한참 회자되던 ‘다빈치 코드’라는 소설도 어디까지나 소설가의 가상입니다. 성경에 전면 배치되는 이야기꺼리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소설을 가지고 예수님의 탄생이나 생애나 죽음이나 부활을 폄하하고 있지만 어떤 고고학자나 어떤 과학자도 예수님의 유골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세례요한이나 베드로나 바울의 유골은 있습니다. 진짜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유골이라고 합니다. 제가 지난번에 갔던 성 마카리우스 수도원에도 세례요한의 유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유골이라고 주장하는 예는 없습니다. 얼마 전에는 예수님의 무덤이 새로 발견되었다고 하지만 예수님의 유골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만일 예수님의 유골이 발견되면 부활은 거짓 증거일 것입니다. 박스터(Sidlow Baxter)는 말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유해 중 하나라도 발견되었다면 기독교는 이미 산산조각 났을 것이다.”

  복음 전파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까? 세상에서 헛것 때문에 목숨을 바칠 수 있습니까? 아무 유익이 없는 일에 내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버릴 사람이 있습니까?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절대로 그것 때문에 목숨을 내놓을 사람은 없습니다.

  사도들의 순교를 보세요. 베드로는 네로 시대에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했습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는 제자 중 최초의 순교자로서 헤롯 아그립바 1세에 의해 참수를 당했습니다. 안드레는 그리스의 파트라스에서 X자 십자가에 달린 채 창에 찔려 순교했습니다. 빌립은 헤리오폴리스에서 십자가 박힌 채 돌에 맞아 순교했습니다. 바돌로매는 인도에까지 가서 피부가 벗겨지고 돌에 맞아 순교했습니다. 도마는 인도의 마드라에서 칼에 찔려 순교했습니다. 마태는 아프리카 에디오피아에서 창에 찔려 순교했습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나무망치에 머리를 맞아 순교했습니다. 시몬은 페르시아에서 톱으로 그의 몸이 두 동강이 나서 순교했습니다. 다대오라 불리는 유다는 에데사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했습니다. 맛디아는 예루살렘에서 돌팔매질을 당한 후에 참수형으로 순교했습니다. 바울은 네로황제에 의해서 로마에서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요한을 제외한 모든 사도들이 다 순교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도 아닌데 거짓에 목숨 바칠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한센환자들이 있는 여수의 애양원에서 섬기셨습니다. 목사님은 환자들의 고름 나는 발을 빨아주셨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목사님을 세 번 놀란다는 의미로 ‘삼경’(三驚)이란 별명을 붙여주셨다고 합니다. 키 작아 놀라고, 키는 작은데 목소리가 커서 놀라고, 그리고 설교를 듣고 놀란다고 합니다. 목사님이 감옥에 있을 때에 항상 밥을 다른 죄수들에게 나누어주셨다고 합니다. “나는 몸이 작아 하나님께서 적게 먹도록 만들어 주셨어.”라고 하셨습니다. 추운 겨울밤에 담요 한 장을 덮고 자는데 키가 큰 사람은 담요가 작아서 발이 밖으로 나와서 추위에 떨었습니다. 목사님은 키 큰 사람들의 발을 자신의 가슴에 넣게 하여 다른 사람의 발을 품고 잤다고 합니다. 부활의 소망을 가진 복음 전파는 이렇게 힘이 있습니다.

  믿음, 이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생명을 얻었습니까? 헛것에 목숨을 바치고,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코넬리우스 밴더빌트는 미국의 대부호였습니다. 그는 해운업과 철도사업으로 억만장자가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내슈빌의 센트럴대학교에 엄청난 지원을 하였습니다. 그 학교는 이름을 밴더빌트대학교로 바꿀 만큼 그의 공헌은 컸습니다. 그는 신앙에 무관심한 사람이었습니다. 재물이 신앙이었고 그의 존재이유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마지막 임종의 순간을 맞이했을 때 그의 흑인 하녀가 찬송을 불러주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우리 찬송가 94장이었습니다. 그는 2절을 부를 때 크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약한 자의 강함과, 눈먼 자의 빛이시며, 병든 자의 고침과, 죽은 자의 부활되고, 우리 생명 되시네.” “죽은 자의 부활되고”라는 부분을 노래할 때 그의 입술이 떨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나지막하게 고백하였습니다. “주님, 저는 가난하고 천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지식, 명예, 재물을 다 포기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음으로 변화하게 만든 것입니다.

둘째, 다시 사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짓 증인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5:15에는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라고 합니다. 만일 부활이 없으면 우리가 다 거짓 증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의 법학자인 시몬 그린리프는 예수님이 실제로 죽은 가운데서 살아나지 않으셨는데도 제자들이 부활의 진리를 확고하게 끝까지 주장하였다는 것은 사실은 불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잠시 동안 억지 주장은 할 수 있지만 2천년을 이어오면서 주장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부활의 진실은 증인들과 순교자들에 의해 증명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거짓 때문에 목숨을 바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7에는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라고 합니다. 우리의 증언이나 증거는 순교를 각오한 일입니다. 원래 헬라어에서 증거라는 말과 순교라는 말은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짓 때문에 목숨을 바치지 못합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선인을 위하여 죽는 자도 혹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믿음을 가진 자면 누구나 알고 목숨을 바칠 만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죽어도 부활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설교에 나타난 부활을 보세요. 오순절 설교인 사도행전 2:24에서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베드로의 솔로몬 행각 설교인 사도행전 3:15에서 말합니다.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가이샤라의 고넬료의 집 설교인 사도행전 10:40에서 말합니다.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베드로는 설교 때마다 부활설교를 빼놓지 않습니다.

  거짓 때문에 목숨을 바치는 사람은 없습니다. 거짓을 진실이라고 오인하는 경우는 있지만 거짓이라고 아는 한 목숨을 바치지 못합니다. 증인들은 “진실을 말하고 진실대로 말하며 오직 진실만을 말할 것을 선서합니다.”라고 합니다. 증인의 본분은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증인이 할 일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진실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 외의 일은 증인이 할 일이 아닙니다.

  증인은 진실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증인입니다. 증인은 진실을 말할 때만 증인입니다. 거짓 증인이란 말은 맞지 않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증인은 거짓을 말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증인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만 말하면 됩니다.
  그런데 법정의 증인과 그리스도의 증인은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습니다. 법정의 증인은 증언이 끝나면 증인석에서 내려오지만 그리스도의 증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은 증인석에 한번 올라가면 내려오지 않습니다. 목숨을 걸고 증언해야 합니다. 한번 증인은 영원한 증인입니다. 죽을 때까지 증인입니다.

  배달꾼의 사명은 배달사고 내지 않고 정확하게 배달하는 것입니다. 증인은 배달꾼입니다. 보고 들은 것을 정확하게 배달사고 내지 않고 증언해야 합니다. 복음의 증인이 그렇습니다. 내가 듣고 보고 경험한 것을 배달사고 없이 정확하게 배달하는 것이 복음의 증인입니다. 간증이란 하다보면 과장하기도 합니다. 간증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것을 가장 조심해야 합니다. 유진 피터슨은 “그리스도인의 소임은 증언이지 변명이 아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믿는 것을 그대로 증언해야 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두 가지 부활이 있음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생명의 부활이요 또 다른 하나는 사망의 부활입니다. 우리가 믿고 소망하는 부활은 생명의 부활이요 새 하늘과 새 땅으로의 부활입니다. 생명의 부활에는 매우 중요한 두 가지 개념이 있는데 그것은 회복과 부흥입니다. 생명의 부활 속에는 회복의 능력이 있습니다. 부활을 통하여 모든 것들이 회복됩니다. 영혼의 메마름이 회복됩니다. 육체의 건강이 회복됩니다. 깨어진 가정이 회복됩니다. 사회와 경제가 회복됩니다. 이것이 부활의 능력이며, 부활의 은총입니다.

  성경의 부활 이야기는 부활을 경험한 사도들의 부활에 대한 증언입니다. 복음서나 서신이나 다같이 부활을 경험한 저자들의 증언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옛날의 지나간 사건이 아니라 현재적 사건으로 생생하게 적고 있는 것입니다. 훼일(J. S. Whale)이란 분은 “복음서가 부활을 설명하지 않고 부활이 복음서를 설명한다.”고 하였습니다. 부활은 거짓이 아닌 살아있는 현재적 사건입니다. 이것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결론

  베드로가 하늘나라의 진주문에 새로 도착한 세 사람을 만났습니다. 베드로는 진주문에 도착한 사람들에게 질문을 하면서 천국 오리엔테이션을 시작했습니다. “장례식에서 가족이나 친구들이 당신에 관해 무슨 이야기를 해주기를 바라는가?” 첫째 사람은 유익한 삶을 산 의사요, 가정적인 남자라는 소리를 들으면 만족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둘째 사람은 훌륭한 교사요 현모양처이며 지역 사회의 보배라는 소리를 들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셋째 사람은 내가 듣고 싶은 소리는 “이것 봐, 이 사람 살아서 움직여!”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누구나 다시 살아나는 것이, 부활이 가장 듣고 싶은 소리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의 예표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에 세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야이로의 딸은 소녀이며 죽자마자 주님이 “달리다굼”하셔서 살리셨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은 청년이며 장례행렬 도중에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하시므로 살리셨습니다. 나사로는 장년이며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썩어 냄새가 났지만 “나사로야 나오라”고 하시며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 모든 종류의 죽음도 다 부활시킬 것입니다. 부활은 우리에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정결한 신부로, 건강한 영적 육체로, 흠이 없는 하나님의 피조물로 거듭나게 할 것입니다.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우리의 삶이 새롭게 부활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이 부활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영이 부활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사회가 부활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는 사업도, 학업도, 꼬인 문제들도 다 부활의 은총으로 생명력 있게 새로워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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