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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눅 2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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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우리 예수 구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부활하심으로 우리 인류를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에서 구속하신 부활절입니다.
우리 기독교에서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들에게 그의 귀한 은혜의 역사를 시작하신 성탄절과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이기신 부활절 이 두 절기를 가장 큰 기쁨의 절기로 여기게 됩니다.
지금 이 지상 곳곳에서는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뻐하고 감사하고 축하하는 예배가 진행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을 비로소 의미 있게 완결하신 완성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심으로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그 가운데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주심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부활의 소망을 베풀어주셨습니다. 또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에는 우리 역시 부활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을 믿기에 어느 누구와 헤어져도 우리는 소망을 가지고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이제 무덤에 장례를 치른 후가 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례를 치른 지 사흘째 되던 날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라왔던 여인들의 무리가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과 향유를 바르려는 소망을 가지고 무덤에 찾아오게 됩니다.

안식 후 첫날, 그러니까 요즘으로 따지면 주일날이 되겠죠? 예수님의 시체대신 그들은 부활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말씀을 다시 기억하게 됩니다.
이제 그 말씀을 들은 바대로 이 여인들은 사도들에게 가서 고합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전혀 믿지 못합니다. 그것은 이 여인들이 향품을 가지고 예수님의 시신에 바르러 갔던 이유와 동일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시리라는 것을 전혀 마음속에 생각을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전혀 체험해보지 못했고 그들은 전혀 알지 못했고 마음에 믿지 못하던 일이기 때문에 그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스쳐 보내게 되었고, 스쳐 보냈으니 마음에 전혀 남지 않았고, 그 결과 그들은 이와 같은 주님의 부활에 대한 것을 전혀 고려해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아 죽게 된 지 사흘만에도 부활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시신에 향품과 향유를 바르기 위해서 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전해 듣고도 제자들에게 와서 말했을 때 그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사실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했는데 그 중에 하나 베드로만이 뛰어가서 예수님의 부활한 현장을 목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읽은 본문 뒤에 나오는 내용은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이제 무엇인가 마음에 기대하던 소망이 다 무너지게 되고 갈 곳도 없고 목표도 잃어버리고 그 마음속에 좌절한 상태로 다시 그들의 있던 곳으로 내려가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영안을 열어 보여주시고 그들의 가슴에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헤쳐 설명해 주실 때 그들이 깨닫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고, 마음에 뜨거운 감동을 받게 되는 장면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이와 같은 <누가복음 24장>의 내용 중에서 오늘 본문에 나온 내용을 우리는 잠시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서 우리가 첫 번째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은, 자신의 한계에 갇혀 예수를 오직 죽은 자 가운데서만 찾고 있었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여인들입니다. 본문에 나온 여인들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는 일 즉 예수님의 시신만을 기대해서 그 시신에 향품과 향유를 붓고 바르려고 했던 그와 같은 계획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들이 비록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사실을 전혀 고려하지 못한 한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이 여인들이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매도할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여인들은 그래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때는 대단히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그리스도께 환호했습니다. 기적의 떡을 먹고, 능력의 역사를 보고, 병 고침의 장면에 참여하면서 그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의 역사를 환호하고, 그들은 예수님을 쫓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을 따라다니면 꿈이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했던 기대는 무너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힘없이 붙잡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게 되셨습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에 대한 모든 꿈이 깨어지고 그들이 바라보고 쫓아갈 대상이 없어지니 그들은 그야말로 방향을 잃은 자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해야 될지, 어느 곳을 가야 할지, 누구를 쫓아가야 될지, 그들은 모든 푯대를 잃어버린 사람이 되고 방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도 갈릴리 그 먼 길에서부터 예수님을 쫓아오던 그 여인들은 예수님의 무덤에 가서 예수님의 시신이라도 본인들이 수습해드리기 위하여 이와 같이 예수님의 무덤에 간 것을 보니 이들은 대단한 믿음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누가복음 23:55-56>을 보니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쫓아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둔 것을 보고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예비하더라 계명을 좇아 안식일에 쉬더라’ 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 예수님을 안치한 무덤까지 따라가서 그들은 예수님이 어떻게 안치되었는가를 보고 이제 그들은 예수님을 다시 섬기기 위하여 돌아와서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였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이 되어 그 다음날 쉬고 이제 그 다음날-말하자면 안식 다음날-요즘 말로 따지면 주일이 되어서 예수님의 시신을 돌보기 위해서 갔던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기적과 능력을 행할 때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고통과 능력의 십자가를 지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곁을 떠났고, 예수님이 있어도 예수님에게 아는 표정 하나 짓지 못할 이때에 이 여인들은 눈물로 울며 예수님을 따랐던 여인들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비굴하게 멀리서 숨어보고 있을 때 이들은 예수님을 눈물로 따랐고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의 시신이라도 돌보려고 생각했던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아왔던 의리의 사람이요, 믿음의 사람이요, 신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한계가 있었으니 예수님이 하신 말씀 즉,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이 체험한 삶의 세계로써는, 자신의 경험의 영역으로는 자신들의 이해의 범위 내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것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고, 받아들일 수 없었고, 따라서 그 말씀은 스쳐지나가는 얘기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마음에 남았을 리가 없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혹시 예수님이 부활할 지도 몰라’ 하는 추측이나 기대조차도 전혀 가질 수 없었어요. 이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면 이제 그 시신에 향품과 향유를 바르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할 만큼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기정사실화하고 끝냈던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이해의 범주를 넘어선 것은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내 자신의 한계라고 생각하는 것을 넘을 수 없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에 대한 무지와 깨닫지 못함은 우리로 하여금 언제나 두려움으로 떨게 하고 주님의 길을 따르게 하는데 방해가 되게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인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예수님은 제자들과 식사를 나누시며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불과 며칠이 지난 이야기인데도 그 말을 기억하지 못하고 기대하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귓전으로 스쳐들었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았으니 그들의 마음에 새겨질 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이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니 모든 것이 종결됐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죽었고 우리는 죽으신 예수님에 대하여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끝이야’ 라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배를 버려두고 그물을 버려두고 그들의 생활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쫓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쫓아가던 예수님이 없어지니 그들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될 바를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주님과 동행하다가 주님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있음을 봅니다. 사람에게 실망하고, 일에 실망하고, 상황에 실망하고, 그 가운데 내 앞에 계신 예수님께서 그 문제를 해결해주시지 않는 것을 보니 예수님은 어딘가 내 곁을 떠났다하고 생각하고 혹은 예수님은 계시지 않은데 내가 허상을 믿은 것이 아닌가 하고 실망하여 예수님 곁을 떠나고 그들의 길을 다시 가는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짧은 생각이요, 우리의 그릇된 생각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려움을 겪을 때 우리 옆에서 보시며 그것을 도와주시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장 귀한 과정을 진행하고 계실 뿐입니다.

우리의 능력의 한계가 결국 주님의 은혜의 세계를 보지 못하게 만들 뿐입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야 될 사람들이 죽은 예수를 찾고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때로 우리 현재의 상태에서 이해되지 않을 뿐이지 항상 옳은 것입니다. 이해되지 않으면 이해시켜 줄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이해될 때까지 간구해야 합니다. 이해할 때까지 견딜 수 있는 힘과 능력을 구하며 하나님의 이해의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간 과연 내가 주님에 대하여 깨닫지 못함으로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일이 안되면 꼭 안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잘 개발하고 논리적으로 규명하고
그것을 설명합니다.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 되고 내 옆에 있는 사람도 나를 도와주지 못하고 내 주변에 있는 여건도 내가 안 될 수밖에 없었으며 내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형편 조건들도 결국 내가 일을 못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논리를 듣고 보면 명쾌하고 그럴듯해요. 그런데 그래서 무슨 은혜가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와 같은 어려운 상황과 여건과 지경과 내게 주어진 능력가운데서도 주님이 나와 함께 하셔서 그것을 통해 이룰 새 역사를 개발하고, 그리고 수고하고 애쓰고 주님의 은혜를 간구한다면 우리는 그 가운데에 새로운 은혜의 논리를 개발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실행에 대한 두려움이나 사고 구조가 행복과 기쁨을 누리기에 합당치 않은 부정적인 실패의 사고구조를 갖는 것보다 어떤 구조 속에서도 부활하신 주님처럼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은혜를 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고 믿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역사를 기대하는 것이 우리의 삶일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죽은 예수를 찾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셔서 나를 보시며, 내 문제를 아시며, 내 것을 해결해 주시며,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게 하실 그 예수님을 찾고 쫓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어려운 상태에서도, 어떤 고통의 상태에서도 우리는 부활하지 못할 곳이 없고 부활하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장 어두운 육신의 고통으로부터 우리의 모든 사고의 어려움으로부터 우리는 부활하여 마침내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영광의 역사를 이루시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사역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 관념속의 예수그리스도를 쫓거나 아니면 부정적인 생각 속에서 예수그리스도를 쫓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에게 함께 하셔서 어떤 상태 속에서도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는 예수그리스도를 쫓는 믿음의 백성입니다.

무덤을 찾아가 그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하려는 믿음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이제까지 알지 못하고 체험해보지 못한 일이라도 그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하는 믿음이 우리들에게는 더욱더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에게 바로 이와 같이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주님을 기대하고 그 능력을 체험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우리가 두 번째 생각할 것은 주님은 스스로 하신 말씀을 이루시는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오늘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은 스스로 예고하신 사실을 이루셨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우리를 향하여 구원의 역사를 베푸시고, 구원의 역사를 베푸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것이고, 그리고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스스로 우리에게 하신 말씀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은혜와 은총과 축복과 권능 속에 그의 나라와 그의 복음을 위하여 증인 되는 것을 명령하셨고 우리에게 그 일을 감당하도록 우리에게 도우심과 은혜와 능력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들이 어떤 여건 속에서든지 주님이 우리들에게 힘과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말미암아 주의 뜻을 이루게 하심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만약에 그것을 믿으면 믿는 자답게 우리 생활 속에 주어지는 모든 어려움과 환란과 어려움을 극복할 마음의 각오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여건 속에서 마음을 바꾸면 모든 삶이 달라지는 것을 봅니다. 우리 삶의 시각에 따라서 모든 상황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는 것을 봅니다.

요즘은 교회 예배당에 비새는 일은 없는데 언젠가 몇 년 전에 예배당에 빗물이 뚝뚝 떨어졌어요. 아주 오래 몇 해 동안 그랬습니다. 10주년에 대대적인 공사를 해서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고 완전한데 한 몇 년 동안 예배당에 자꾸 물이 떨어져서 여름 되면 양동이를 갖다놓고 바쳐서 예배드리고 했는데 자꾸 공사를 해도 안 되는 것 같아요.
그 때 예배를 드릴 때마다 기쁘고 자신 있고 자랑스러웠습니다. 왜냐하면 예배당이 아주 화려하고 멋있는데도 불구하고 교인들이 없어서 텅 비는 것보다 예배당이 비가 새고 좋지 않아도 매번 1부에서부터 6부까지 가득차서 예배드리는 것이 훨씬 더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세계 여러 곳을 다녀 봐도 정말 심지어는 수백 년 전에 걸쳐 지은 예배당 건물, 심지어는 수많은 애를 써서 지은 예배당 건물인데도 불구하고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희귀한 이런 예배당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때마다 느끼게 되는 것이 우리는 비가 새는 예배당에서도 여러 성도들이 늘 시간마다 가득차서 예배드리는 것이 참 기쁘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좋은 여건에서 좋은 능력을 가지고 나를 꼭 도울 수 있는 사람과 더불어서 좋은 일을 하는데 누가 못하겠어요. 여건도 안 되고 내 능력도 부족하고 주변에 나를 돕는 사람도 부족하고 없었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그분들과 힘을 합해 주의 역사를 이루게 될 때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하다고 생각할 때 주의 은혜와 도우심을 간구하여 그 능력에 힘입어 주의 역사를 이룰 때 감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늘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황무지에 떨어지면 하나님께서 왜 나를 이런 곳에 나를 떨어뜨려 놓았을까? 하고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적어도 나를 이런 곳에 떨어뜨려 놓을 때는 나를 능력 있다고 믿으셨기 때문이고,
둘째는 내게 능력을 주셨고 그것을 하게 하셨을 것이고,
세 번째는 나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것이라는 것을 믿고 황무지를 개간하여 꽃을 피울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의 백성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의 말씀을 믿으며, 우리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증인 삼으며,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것을 믿고, 우리의 삶의 공간속에서 주의 역사를 이루는 믿음의 사람들이 돼야 합니다,

어쩌면 정확히 말씀을 드리면 “하나님 우리에게 큰 은혜를 주십시오.” 라는 말은 좀 안 맞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는 큰 은혜와 작은 은혜의 구별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은혜주시면 왜 큰 은혜와 작은 은혜의 구별이 없냐하면 하나님이 워낙 큰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무리 작은 것을 주셔도 우리 인간들은 그것을 감당할 수 없는-헤아릴 수 없는 큰 은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가서 바닷물을 푼다고 가정합시다. 여러분들이 바닷물을 퍼온다고 합시다. 여러분 어떤 바다에 가서도 여러분들이 원하는 만큼 바닷물을 다 퍼올 수 있습니다. 다만 여러분들이 얼마나 큰 그릇을 가져가느냐에 따라서 여러분들이 그 바닷물을 퍼서 가져올 수 있을 뿐이지 바닷물이 모자라서 여러분들이 물을 푸지 못하는 경우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워낙 커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은혜를 주시면 아무리 적은 은혜라도 우리는 감당할 수 없는 큰 은혜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큰 은혜를 주시지 않아서 누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우리가 수용하여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정확한 기도를 한다면
“하나님! 하나님이 주시는 큰 은혜를 내가 수용하고 누릴 수 있는 내 마음의 은혜와 큰 은총의 그릇을 허락해 주십시오.” 라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이런 대기에서 편안하게 호흡합니다. 몸이 불편한 사람은 산소호흡기라도 의지해야 호흡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 살면서 은혜를 누리는데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지 않아서 못 누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우리의 내적인 요인 때문에 누리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마음을 바꿔서 “하나님! 내게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은혜와 은총을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기를 원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새로운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마음 바꾸면 생활도 달라지는 것을 봅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를 통하여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을 믿을 때-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주님의 역사를 기대할 때 우리는 결국 주님 앞에 담대한 마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제자들은 그들의 마음에 있었던 모든 꿈과 계획을 잃어버리고 이제 터덜터덜 그들의 이전의 길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살았던 고향으로 돌아가고, 그들이 살았던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주님께서는 엠마오 도상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 영안을 열어 그들에게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시며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 가슴을 뜨겁게 해 주실 때 그들은 삶에 용기를 가지고 새롭게 주님의 증인의 역사에 일을 감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고 우리들에게 은혜 주셔서 이루고자 했던 하나님의 계획이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을 믿을 때, 우리는 우리의 목표가 흔들릴 때 우리의 삶이 흔들릴 때 우리는 다시 우리의 마음을 다잡고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 말씀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직접 만남으로 인하여 자신의 한계를 깨우치고 주님이 주시는 무한한 기쁨과 은혜의 세계로 나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봅니다. 오늘 이 여인들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부활의 주님의 소식을 듣습니다.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그 말씀을 들은 바대로 제자들에게 가서 부활의 소식을 전합니다. 제자들은 믿지 않았어요. 그러나 그 중에 베드로는 급히 그 소식을 듣고 그래도 베드로가 믿음이 있었던 같습니다. 현장에 와서 그 사실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뿐만 아니라 엠마오로 내려갔던 이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말씀의 은혜를 깨닫고 주님의 은혜를 영안으로 깨닫게 될 때, 그들은 새로운 삶의 소망을 찾고 주님의 은혜를 향하여 달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한계, 나는 이것으로 끝이야, 소망을 잃었어, 내 목표는 없어졌어, 이전의 삶으로 내려가던 그와 같은 삶이 그리고 한계 속에서 예수님의 시신이나 수습하려고 왔던 여인들이 그들의 삶이 새로운 세계가 열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마음이 편합니다. 마음이 편해지고 바뀌면 행동이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지면 주변이 달라지고 삶의 작품이 달라져 마침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특별히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 삶의 색깔이 달라지는 겁니다.

여러분 어두움에서 색깔을 보면 색깔의 구별이 없습니다. 좀 더 짙고 좀 더 흐린 어둠의 색깔뿐입니다. 사물의 구별이 안 되는 겁니다. 색깔의 구별이 안 됩니다.
그런데 불을 켜게 되면 빨간 색도, 파란 색도, 노란 색도, 이제 색깔이 구별이 됩니다. 그리고 정확한 모습도 구별이 됩니다.
우리들에게 어떤 빛이 있느냐, 없느냐하는 것은 전혀 다른 세계입니다.

굉장히 오래된 얘기인데요, 제가 지금까지도 너무 선명해서 잊지 않고 있는 일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컬러텔레비전이 1980년대부터 나왔습니다. 제가 군대에 있을 때에 나왔으니까. 한참 더 지났는데 어느 노인 분을 만나서 얘기를 했습니다. 그 노인 분이 안과 수술을 했습니다. 그런데 깜짝 놀랐습니다. 뭐라고 얘기 했냐면 안과 수술하기 전에는 컬러텔레비전이 나왔는지 몰랐다고 얘기합니다. 텔레비전이 여러 색깔의 컬러로 나오는 줄을 모르고 흑백으로 나오는 줄 알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나라 텔레비전이 흑백에서 컬러로 바뀐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안과 수술을 하고 와서 보니까 텔레비전이 흑백이 아니라 컬러 여러 가지 색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전에는 그저 눈에 어른거리고 그냥 거뭇거뭇하게 사람도 보이고 텔레비전도 그렇게 보였을 뿐인데 비로소 눈을 깨끗하게 수술하고 나서 보니까 모든 색깔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것을 보고서 그때 마음에 생각을 해 봤습니다.
정말 우리 눈이 가려져 있을 때, 우리 눈이 어두워졌을 때, 우리는 모든 사물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겁니다.
내가 이거야 저거야 하고 분별하고 판단하는 것이 반드시 바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느 날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영안을 열어주시고, 내 마음에 밝음을 주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주실 때 우리 삶의 모든 색깔과 모든 모양과 모든 구도와 모든 형태가 달라지는 겁니다.
원근도 달라지고, 구도도 달라지고, 모양도 달라지고, 색깔도 달라지고, 모든 것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 인생이 새롭게 열려진다는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셨는데 우리가 어떤 어둠의 권세인들 우리가 거기서 일어나지 못하겠습니까?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주님께서 이제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생명의 부활로 우리들에게 역사하셨는데 우리가 어떤 고통과 어떤 어두움과 어떤 아픔 속에서도 우리는 반드시 부활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육신의 질고 속에서도 우리는 부활하게 될 것이며, 우리를 옥죄이고 있는 모든 아픔과 고통의 상황이 있어도 우리는 부활을 할 것이며, 우리는 내가 해결해야 하는데 해결하지 못하여 아파하고 괴로운 모든 삶의 상황에서부터도 우리는 반드시 부활하여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오늘 살아계신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의 은총을 생각할 때 우리 성도님들에게 하나님의 큰 은혜가 임할 것을 믿습니다.
이제 우리는 죽어있는 예수를 찾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예수님의 권능을 찾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예수그리스도의 권능과 은혜를 체험하는 겁니다.
우리의 말씀을 들어주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내 행동을 보아주시고, 그것이 어떻게 돼야 한다는 것을 알고 그대로 이끄시고 계시는 주님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주님의 권능을 힘입어 우리의 삶은 우리의 관념 속에서 이루어지는 생각 속에 사실이 아니라 우리의 실제의 역사라는 사실을 우리는 체험해야 됩니다.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
예수님은 과거의 사실이 아니라 현재의 실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이나 위로해주는 정도의 분이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실제를 변화시키는 살아계신 분입니다.
오늘도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계신 주님을 누리고 체험하시고 기뻐하시는 우리 사랑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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