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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은 있다 (막 12: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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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에 대한 치열한 공세가 계속됩니다. 놀라운 것은 예수님에 대하여 공격하면 공격할수록 공격자의 문제점만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된다는 점입니다. 거울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자신의 모습이 더 분명하게 비치는 것처럼 말입니다. 한편 예수님은 공격에 대응하시면서 그 때마다 매우 중요한 진리를 가르쳐주시는 기회로 삼으십니다. 오늘 공격자는 부활이 가져올 모순을 들추어냄으로써 부활을 증거해오시던 예수님을 웃음거리로 만들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부활은 있다'는 놀라운 진리를 다시 한번 명쾌하게 확인해주십니다. 그 과정에서 사두개인들이 안고 있는 문제점들이 무엇인지 만천하에 드러나고 맙니다.

오늘날에도 부활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입술로는 부활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 의미에 있어서나 실제생활에서 부활의 진정성과 역사성을 부인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과 사상에 담겨있는 근원적 문제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깨닫고 부활신앙을 새롭게 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합니다.

1.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18-23)

그 동안 산헤드린의 대표 격인 대제사장, 율법학자, 장로들 그리고 바리새인과 심지어는 헤롯당까지 나서서 예수님의 권위를 무너뜨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모두 오히려 창피만 당하고 물러섰습니다. 오늘은 사두개인이 전면에 나섭니다. 사두개인이란 이름과 그 기원에 대하여는 다양한 해석이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들은 주로 부유층에 속하는 사람들이었고 대부분 제사장들이었습니다. 특히 최고위층 제사장은 거의 예외 없이 사두개인출신이었기 때문에 예수님 당시 산헤드린의 중심세력이었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의 지지를 많이 받지는 못했습니다.

이들은 모세오경만이 영원히 유효하다고 믿었습니다. 부활신앙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이사야서(26:19)나 다니엘서(12:2) 같은 책들의 권위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현재의 삶에 주목하였고 현재의 번영과 몰락 여부는 자신의 자유로운 도덕적 선택의 결과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성공은 언제나 자신이 선한 삶을 살기로 선택한 결과라는 것이죠. 현세에서 부와 영화를 누리고 있는 이들로서 자연스럽게 주장할 수 있는 바라고 여겨집니다. 그들은 굳이 부활의 소망이 없어도 이렇게 이 세상에서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충분히 행복을 느끼며 살 수 있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을 생각하면서 자신의 삶과 신학적 입장이 긴밀한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됩니다. 흔히들 일인당 국민소득이 7000불을 넘어서면 교회가 쇠퇴하기 시작한다고들 합니다. 배가 불러지면 부활신앙의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않게 된다는 것이죠. 그렇다고 단지 부활신앙을 유지하려는 동기만으로 스스로 가난한 자리로 내려가는 것은 적절치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누릴 수 있는 것을 한껏 다 누리고 즐길 수 있는 것 다 즐기면서도 부활을 확고히 믿어 바른 길을 걸어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어렵다는 것만큼은 마음에 깊이 새겨두어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부활신앙의 진정성을 견지하기 위해 항상 보다 낮고 천한 곳으로 내려가려는 마음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사두개인들은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죠. 오히려 반부활이라는 신학적 입장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부활신앙의 우스꽝스러움을 들추어내기 위해 그럴듯한 질문을 들고 예수님께로 나옵니다. 그들의 질문의 근거는 성경과 논리입니다. 그들은 결혼한 형제가 자식 없이 죽으면 죽은 자의 형이나 아우가 그 미망인과 결혼해야한다고 규정한(역연혼) 신명기 25:5-10에 주목했습니다. 이 법이 제대로 작동하면 결과적으로 부활이 아주 우스꽝스럽게 된다는 데 착안한 거죠. 7형제를 가진 맏형이 결혼하여 그만 자녀를 갖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7형제들이 신명기규정에 따라 차례로 형수와 결혼했습니다. 불행하게도 모두 자녀를 갖지 못한 채 죽었습니다. 형수도 결국 죽었습니다. 사두개인의 질문은 이런 것입니다. '자, 8형제와 미망인 모두 부활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미망인은 누구의 아내가 되는 것입니까?' 부활을 믿는 다는 것이 갑자기 우스꽝스러워 보이려는 순간입니다.

그들의 깊은 문제는 예수님의 대답을 통해서 곧 조목조목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잠시 후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우선적으로 생각해 볼 점은 성경과 논리가 얼마나 교묘하게 왜곡되고 오용될 수 있는가하는 점입니다. 성경과 논리에 근거하여 우리의 생각을 전개해나가는 것은 매우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바른 길로 간다는 것을 100% 보장해주지는 못합니다. 인간에겐 성경과 논리를 교묘하게 이용해서 자신의 잘못된 주장과 행동을 얼마든지 정당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그런 함정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 점을 마음에 새겨 두고만 있어도 함정을 피하기가 훨씬 수월해집니다. 사두개인들의 문제는 너무 방심한 것입니다. 자신들이 성경과 논리를 따라가고 있기 때문에 결코 잘못된 길을 갈 수 없을 것이라고 자만했습니다.

한국교회가 자정능력을 점점 상실해 가며 부패의 늪으로 빠져드는 이유도 상당부분 바로 이런 자만에 있습니다. 자기 생각이 성경적으로 논리적으로 한번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면 요지부동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듣지 않습니다. 자기가 결코 틀릴 수 없다고 우깁니다. 자기 입장과 다른 사람을 극단적으로 매도합니다. 물론 우리가 너무 지나치게 열려있어 어느 한 시점에 아무런 확신도 없이 풍랑에 휩쓸리는 배처럼 요동치고 흔들린다면 그것도 문제이겠죠. 그러나 한국교회의 문제는 거기에 있다기보다 자기 확신이 지나치게 넘치는데 있습니다.

우리교회 안에서도 가끔 이런 저런 사안에 대하여 이견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지난 번 조용기 목사 은퇴철회건과 관련해서 표면으로 드러났습니다. 대화를 바라보는 저의 마음이 조마조마한 순간도 있었습니다. 저는 교회 안에 특정 사안에 대하여 다양한 의견이 있는 것은 그렇게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좋은 성숙의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단 그런 성숙은 진지하고 열려 있는 대화를 통해 의견이 서로 소통될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자기 입장에 대한 성경적 논리적 확신이 넘친다고 해도 상대방이 들어올 수 있는 여백을 언제나 남겨놓아야 합니다. 이 여백을 통해 진리의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들어오셔서 이견을 조정해 주실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에겐 그런 여백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 여백을 만들어 비집고 들어가시려 노력하십니다.

2. 부활이 있다고 가르쳐주시는 예수님(24-27)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에게 부활을 믿을 수 있도록 다양하게 접근하십니다. 먼저 그들이 부활을 믿지 못하는 근원적 이유를 밝혀 주십니다. 즉 신명기규정과 부활이 충돌할 것이라는 추측은 그들이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하는데서 비롯된 오해라고 말씀합니다. 사두개인들은 성경을 알되 제대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곧 살펴보겠지만 자신들이 유일하게 인정하는 모세오경마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신명기 25:5-10은 잘 이해한 반면 출애굽기 3:1-6이 담고 있는 깊은 뜻은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성경을 자기 기호에 따라 부분적으로 알고 좋아하면 오해하게 됩니다. 성경전체를 보는 눈을 길러야 합니다.

책을 읽다보면 자신이 선호하는 책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런 습관이 성경읽기와 풀이에도 적용되기 쉽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가치나 생각을 일종의 선험적 진리로 고수합니다. 거기에 일치하는 성경을 좋아하고 거기에 몰두합니다. 그것과 다른 진리를 가르치는 말씀들은 그냥 스쳐 지나갑니다. 값싼 은혜나 기복신앙 혹은 왜곡된 야베스의 기도가 한국성도들의 마음을 무섭게 사로잡고 있습니다. 이런 주제로 쓰여진 책은 그야말로 불티나게 팔립니다. 책이 없어 못 팔죠. 수년사이에 몇 백 쇄를 찍어냅니다. 대박이 터지는 것이죠. 그러나 정말 예수님의 정신과 삶이 담겨있는 책은 대형교회의 목사들이 읽다가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는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한국교회의 성경에 대한 편식은 정말 심각한 문제입니다. 저도 종종 편식한다는 말을 듣습니다. 한국교회의 편식으로 말미암아 부족한 영양분을 채우려다 보니 그렇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저에게도 또 다른 위험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느낍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성경 전체적으로 균형을 잃지 않아야겠다는 다짐을 기도가운데 했습니다. 저는 『성경과 진리』라는 책에서 읽은 우리시대의 저명한 복음주의신학자 J. I. 패커(Packer) 교수의 글을 잊을 수 없습니다.

"적어도 생각에 관한 한, 복음주의신학에 선험적 주장은 없습니다. 그 어떤 것도 '이미 받아 들려진 것'은 없습니다. 즉 신학적으로 도전 받고 성경적으로 재평가 받을 가능성에 열려 있지 않은 그 무엇도 없습니다. 거기엔 심지어 복음주의자들의 성경관도 포함됩니다."
 
우리에게 이런 진지한 겸손과 반성적 성찰의 자세가 늘 필요합니다. 자기 확신과 생각을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을 읽는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반대로 자기 확신과 생각을 교정 받기 위해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성경 앞에선 완전히 무장해제가 되어야 합니다. 어린 사무엘의 고백이 너무나 아름답지 않습니까? 사무엘이 하나님의 전에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이 사무엘을 불렀습니다. 사무엘은 엘리가 부르는 줄 알고 그에게 달려갑니다. 그러기를 세 번 반복하고야 비로소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무엘을 다시 불렀습니다. 이에 사무엘은 대답합니다.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 3:4-10). 바로 이런 자세가 우리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에 종의 심정으로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자신의 모든 확신과 생각을 일단 내려놓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잘못된 것은 교정해주시고 부족한 것은 채워주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경을 제대로 알게 됩니다.

사두개인들은 또한 하나님의 능력도 제대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창세기를 믿었을 테니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믿고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은 자를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고 몰랐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자신의 논리와 이성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였습니다.

이런 어리석음을 인간은 다양하게 범해왔습니다. 현대인들은 계몽시대에 접어들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이성의 한계 내에 복속시키려 하였습니다. 소위 이신론(deism)을 주장하는 철학자들은 하나님은 자연법칙에 따라 세상을 만드신 다음에 그 법에 따라 돌아가도록 맡기시고 더 이상 간섭하지 않으신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 사상에 시공간에서 일어나는 물리적 부활이 있을 자리가 없습니다. 그런 부활이란 자연법을 뛰어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활도 새롭게 해석하려는 시도가 있어 왔습니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이 자신들의 예수신앙이 새로워지는 것을 경험하면서 이를 신화적인 용어인 부활이란 표현으로 묘사했다는 것이죠. 진정한 부활은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실존적이고 내면적인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결국 부활이 없다는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습니다. 현대인들이 이성의 한계 내에 갇혀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 무지해진 결과입니다.

그러나 사실 세상과 인간은 이성과 경험에 근거한 자연법에 의해서 도저히 다 설명이 되지를 않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영원과 초월을 그리워하는 종교성과 사랑을 존중하는 인격성입니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의 이성의 한계를 뛰어 넘는 그 무엇인가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가르쳐줍니다. 더구나 탈현대주의는 이성과 경험을 진리의 절대적 기준으로 삼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확실하게 증명했습니다. 그러나 탈현대주의라는 것도 그렇게 자랑스러운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이는 인간이 진리를 알지 못한다는 것을 자인하는 수준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유명한 체코의 유머에 등장하는 천사의 입장과 흡사합니다. 그의 예언은 매번 빗나갑니다. 빗나갈 때마다 그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글세, 모든 것이 계획된 바이지. 걱정 말게나. 모두 다 계획에 들어 있는 거래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이성의 한계를 뛰어 넘는 능력을 갖고 계신 분이십니다. 이는 물론 증명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할 때만이 세상과 나를 바로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은 우리의 이성과 경험의 한계를 뛰어 넘어 능력을 행하시는 분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당대의 젊은 지성 중의 한 사람이었던 사울을 사로잡아 놀랍게 변화시켰습니다. 이제 더 이상 이성의 한계에 갇혀 있지 말고 그 굴에서 나옵시다. 하나님의 능력을 향해 여러분들의 마음과 사슴을 활짝 여시기 바랍니다. 부활은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신명기규정과 부활이 전혀 충돌한 이유가 없다고 설명해주십니다. 성경이 말하는 부활상태는 이 세상의 삶의 단순한 연속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변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더 이상 결혼관계가 필요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결혼이 필요한 것은 인간이 죽기 때문입니다. 대를 이어나가기 위해 남녀가 만나 결혼을 해 아이를 낳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죽음이 사라졌습니다. 아무리 좋은 관계라고 해도 그런 배타적인 관계가 더 이상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렇다고 결혼이 주는 아름다운 사랑마저 끝난 것은 아니죠. 예수님은 우리가 모두 천사처럼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서로를 사랑하는 아름다운 존재가 될 것입니다. 결혼이 주는 행복과 즐거움보다 더 아름다운 것을 우리는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선입견을 해소하면 이렇게 새로운 해석과 조화의 길이 활짝 열리게 됩니다. 이런 가능성에 대하여 우리 마음을 활짝 열어 놓고 살아갈 수 있길 바랍니다. 아직 안 풀리는 문제가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 문제는 우리가 주님을 얼굴로 볼 때 풀릴 것입니다. 안 풀린다고 어느 하나를 포기하는 것은 바른 선택이 아닙니다.

셋째, 예수님은 출애굽기 3:1-6을 깊이 있게 해석해주십니다. 그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는 너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이라고 말씀하신 것에 주목합니다. 즉 하나님은 모세를 안심시키기 위하여 자신이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과 깊이 교제하시는 분임을 밝히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약속한 것을 이제 이루어 주기 위해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애굽의 압제에서 해방시켜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당연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부활했다는 증거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언뜻 보면 비약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매우 깊이 있는 해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와 진실로 사랑하다보면 '영원히 사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이 사랑의 자연스러운 갈망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에겐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원조이신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수 백년 전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하십니다. 그렇다면 그만큼 그들을 사랑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에게는 사랑하는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에게 약속해 놓고 그들로 하여금 약속의 결과를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아무개의 하나님이시라면 하나님의 속성상 본질상 그 아무개를 죽도록 내버려 둘 수 없는 분이심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죽은 자의 하나님이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확실히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약속하시는 분이고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결코 죽도록 내어 버려 두실 수 없지요.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끊어지도록 놔둘 수가 없습니다. 아들 예수님을 죽음에 던질 정도록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다시 죽음에 내어줄 수 없습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은 확실히 있습니다. 부활신앙으로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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