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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우리 몸이 다시 사는 날 (요 5: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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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몸이 다시 사는 날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8-29).

“목사님, 이제는 골목을 다녀도 애들이 없습니다. 요새는 애들이 골목에서 안 놀아요.” 주일학교 어린이들을 전도하러 동네를 다녀 본 교사들의 고백입니다. 그러나 우리 어렸을 적에는 동내 골목이 아이들의 가장 좋은 놀이터였습니다. 그곳에서 별다른 도구 없이도 잘하던 놀이가 땅 따먹기였습니다. 골목 땅바닥에 널따란 원을 그려놓고 유리조각을 두 손가락으로 튕기면서 자기 땅을 차지하는 놀이였습니다. 정신없이 친구들과 땅따먹기를 하노라면 여름철 긴 해는 이내 기울고, 놀던 아이들의 그림자가 길어질 때면 집집마다 굴뚝에서 밥 짓는 연기가 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자기 아이들을 부르는 동네 아줌마들의 목소리가 골목 전체를 울립니다. “아무개야, 밥 먹어라!” 몇 살 때의 일인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날은 제가 가장 많이 땅을 차지한 날이었습니다. 골목의 그 큰 땅이 모두 내 것이 되었지만, 저녁때가 되자 같이 놀던 아이들이 하나둘씩 집에 불려 들어갔습니다. 텅 빈 골목에 홀로 서서 저는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이렇게 많은 땅을 내가 땄는데…….”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어린 마음에 밀려들어 왔습니다.

I. 들어가는 말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죽음이라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열심히 살지만 죽음의 그 순간이 오면 모든 것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인생에 대한 기쁨도 노래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허무(虛無)를 많이 생각하였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겐 죽음이란 단지 ‘무’(無), 곧 아무 것도 없는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음 이후에 또 다른 현실이 펼쳐진다고 가르칩니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8,29).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을 때 죽었던 모든 사람들이 부활하게 되는데, 어떤 이는 “생명의 부활”로, 어떤 이는 “심판의 부활”로 나아온다고 가르칩니다.

II. 다시 오실 그리스도

오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에 대해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낮고 천한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인간의 성품 속에 감추시고 그렇게 이 세상에 오셔서 일생을 사시다가 우리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셔서 일생을 결핍과 고통으로 가득 찬 인생을 사셨습니다.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고, 소외된 사람들의 이웃이 되셨습니다. 일평생을 섬기며 사시다가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자신을 화목제물로 드리시는 그리스도를 보면서 그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초림(初臨)”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재림(再臨)”을 약속합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살전 4:16). 그리스도의 초림은 초라하였으나, 다시 오시는 재림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영광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그 때에는 거친 보자기에 싸여 말구유간에 오신 초라한 모습이 아니라 천사장의 나팔 소리와 함께 호령하시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의 영광은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데서 극적으로 드러납니다. 이 세상에 아직 살아있는 자들과 이미 죽은 자들을 부활하게 하사 그들을 심판 하시는 것입니다. 그때에 죽었던 모든 사람들은 살아있는 사람들과 함께 이 영원한 심판과 영광에 적합하도록 완전히 다른 체질로 변화하게 됩니다. 이것을 가리켜 우리는 “몸의 부활”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이 부활이 무엇인지를 이 땅에 계실 때에 보여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요 20:20).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을 가지셨습니다. 그러나 이 몸은 단순한 몸의 재현이 아닌 새로운 체질로 변화된 부활체였습니다. 부활은 단순한 영혼의 부활이 아닙니다. 육체와 함께 이루어지는 부활입니다. 육체를 가지고 있으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 있고, 동시에 그 안에 나타날 수도 있는 그런 종류의 변화된 몸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몸은 생명과 심판을 위하여 모두 필요한 변화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자신의 수명을 누리며 살아가는 이 세상을 만드셨을 뿐 아니라 죽음 후에 그들 모두가 거할 수 있는 곳도 만드셨습니다. 죽음 이후의 심판을 통해서 어떤 사람들은 천국으로, 또 어떤 사람들은 지옥으로 보내셔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모순들을 해결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부활을 통하여 인간들은 최종적인 심판을 받게 되고, 각각 그 행한 대로 천국과 지옥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는 말하기를, 천국과 지옥이 있다 없다 말하기 전에 그것은 반드시 존재해야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왜냐하면 죽음 이후에 심판이 없다면 이 세상은 너무나 불공평하고 모순으로 가득 차 있는 세상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평생 악하고 불의한 삶을 살았는데도 평안히 죽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옳은 일을 위해 수고하고 애쓰며 평생을 이웃을 위해 살았지만 비참하게 죽어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불의(不義)와 야합했던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부를 누리지만, 정의를 위해 살았던 사람들은 비참하게 박해를 받고 죽어가는 이 끔찍한 인생의 모순이, 죽음 이후의 세계가 없다고 한다면 결코 해결되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의 인생이 이렇게 밖에 끝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제껏 우리 인류가 쌓아올렸던 변치 않는 그 교훈, 곧 착하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하늘이 반드시 복을 주고, 방탕하고 악하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벌을 내리실 것이라는 인류 대대로 내려오는 그 교훈은 빛을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우리들이 살면서 배운 인생의 법칙이 정확히 맞아 떨어지지 않는 일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이어지는 인간의 부활과 심판은 바로 이러한 인간 세상의 모순을 해결하시는 하나님의 도덕적인 통치를 완성하는 영광스러운 일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는 주님을 잘 믿었던 사람들만 그분을 뵈옵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끝까지 믿지 않고 거역했던 사람들, 그분을 모욕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던 사람들도 이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 하늘로부터 내려오시는 영광스러운 그분을 아주 똑똑히 목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는 창세 이후로 죽었던 모든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고, 죽음을 맛보지 않고 살아있는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전까지 지니고 있었던 몸과는 완전히 다른 체질로 변화하는 부활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부활은 믿는 자들이 경험하게 될 “생명의 부활”과, 불신자들이 경험하게 될 “심판의 부활”로 나누어집니다.

A. 생명의 부활

이미 죽은 사람들은 그 날에 모두 몸의 부활을 경험할 것입니다. 부활의 날을 위해 어떤 사람들은 화장(火葬)을 반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과는 아무 상관없이 죽었던 모든 사람들은 부활하게 됩니다. 땅에 묻힌 사람들, 시신이 모두 부패해서 사라진 사람들, 화장을 통해 뼛가루가 공중에 흩어져버린 사람들, 그 어떤 죽음을 맞이한 사람이든 그들 모두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몸의 부활을 경험하고 심판으로 나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죽지 않고 살아있는 사람들은 살아있는 상태에서 몸의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때,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은 영원한 천국에서 살기에 적합한 몸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이것을 “생명의 부활”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단지 멸절되지 않고 살아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교통하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을 염두 한 것입니다. 이 생명의 교통은 곧 사랑의 교통입니다. 이 사람들은 세상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을 믿으며 그리스도 예수의 중보를 통해 구원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일생을 창조 목적인 선(善)을 따라 산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단지 도덕적으로 착하게 된 사람들의 삶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이 나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것을 믿을 뿐 아니라 그분께 접붙여져 생명을 부여받아 교회와 한 몸을 이룬 사람, 그래서 성령의 은혜 안에서 진리의 말씀을 따라 창조 목적을 위하여 살아가던 사람들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던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아가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신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부활로 나아갈 특권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믿는 우리가 이 땅에 사는 이유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우리에게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순종하는 것이며, 풍성한 생명을 누리며 은혜 안에서 창조의 목적을 구현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과 동일하게 사업을 하며 공부를 한다 할지라도 그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만을 위해 물질을 벌어들이지만 신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이것을 추구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만족을 위해 공부하지만 신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위해 연구에 힘씁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랑을 아는 사람들의 삶입니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이 그날에 생명의 부활로 나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섬기며 걸어갔던 이 세상 삶은 너무나 고달프고 아팠지만 마지막 날, 이 부활의 영광에 참여함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섬기며 살았던 그들의 생의 발자취를 기억하시고, 각각 행한 대로 그들에게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이 부활과 함께 누리게 될 그 생명의 영광을 더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이러한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견고하게 서 가야 하며, 더욱 더 주를 섬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니라”(고전 15:58).

하나님은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시고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이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을 알게 하셨습니다. 벌레와 같고 더러운 쓰레기와 같은 우리 인생들을 위해 자기의 몸을 십자가에서 버려서 피 흘리심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은혜를 입었기에, 잠시 머물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우리는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받았기에, 예수님이 이 세상에 살면서 몸소 보이셨던 그 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은혜를 주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왜 신자들이 이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신자들은 이 세상에서 적당히 손해 보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썩어질 이 세상의 자원을 위해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내어놓는 저들과 똑같이 산다면 우리가 소망하는 부활은 무엇입니까? 부활의 날까지 이 땅에 머무르게 하신 주님의 뜻을 기억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에 늘 감격하며 주를 기쁘시게 하는 착한 삶을 살다가 가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살았던 성도들의 부활은 얼마나 영광스러울까요? 저 공중에 구름이 일어나고 큰 나팔소리가 들려오며, 천사장의 호령소리가 있고 믿음 안에서 죽은 당신의 사랑하는 성도들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올 그 때에,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부활을 경험하게 될 것이고,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십자가의 죽음을 부활로 장식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능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은 그냥 먹고 마시는 인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생각도 없이 하루 하루를 살며 세월을 낭비한다면 이는 마치 죽기 위해 태어난 이성 없는 짐승과 같은 삶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우리 앞에 흰 이빨을 드러내고 삼킬 듯이 달려오는 죽음을 향해서도 우리가 담대할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우리들이 신앙의 용기를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믿음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믿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주와 함께 죽으면 또한 주와 함께 다시 살리라 하는 부활의 소망입니다.

B. 심판의 부활

그러나 오늘 성경은 또 하나의 부활을 말합니다. 그것은 “심판의 부활”입니다. 만약 인간의 평범한 육신의 몸을 지옥에 집어넣는다면, 들어가기도 전에 인간은 죽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영원한 형벌에 처하겠노라 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할 수 없는 끔직한 고통을 지옥에서 당하되 그 고통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죽지 아니할 변화된 몸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불신자들이 맞이하게 될 심판의 부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살아계실 때에 우리에게 끊임없이 죽음과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상기시키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생의 날만이 죽음 이후의 날을 준비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느냐 하는 문제는 삶의 문제만이 아니라 죽음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골목에서 놀던 많은 아이들이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욕설과 때로는 주먹다짐을 하면서 싸우다가도 저녁 식사를 하라고 부르는 엄마의 음성에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떠나가는 것처럼, 우리가 힘쓰고 애쓰는 인생사도 죽음 앞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일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있지만 항상 죽음이라는 빛을 받고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이 말하길 악한 사람들이 지옥을 간다고 하지만, 보다 더 정확하게 이야기 하자면 생각 없이 살다 간 사람들이 지옥으로 갑니다. 영원을 향해 결단할 수 있는 단 한 번의 기회가 인생 가운데 있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디에서부터 왔고, 왜 살며, 또 어디로 갈 것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여유도 없이 먹고 마시고 연락(宴樂)하는 삶을 살던 사람들, 자기만족에 빠져 허우적대던 사람들이 가는 곳이 지옥인 것입니다. 자기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는 대신에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며 살았던 허무한 인생들이 가는 곳이 지옥인 것입니다. 영원한 운명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들, 교회당 문을 두드리며 도움을 청할 수 있었던 사람들, 돌이킬 수 있었던 기회를 번번이 거절하였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그날에 모두 일으키십니다. 심판의 부활로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와 두려운 형벌을 받기 위해 심판을 향한 부활로 나아오게 됩니다. 동일한 부활이지만 신자들의 “생명의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완전히 본받은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가지고 영원히 예비하신 그 나라에 들어가 한없는 축복을 경험하게 될 부활이고, 불신자들의 “심판의 부활”은 하나님의 두려운 진노 가운데 영원한 고통과 절망의 형벌 속으로 들어가게 될 부활입니다. 그 얼마나 절망스러운 날이 될까요? 그들의 형벌은 기한의 만료가 없는 영원히 계속될 형벌이고, 두 번 다시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도 없는 확정된 형벌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우리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입고도 그분의 창조 목적을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을 대적하며 방종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래서 결국은 심판의 부활로 나아올 수밖에 없는 그런 자들에게 죽음 이후에 있을 엄연한 이 사실을 알려야 합니다. 잠시 머무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하나님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야 함과 당신을 위해 피 흘려 죽으신 우리 주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죄를 고백하고 구원을 얻지 않으면 자신들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엄중하게 말해 주어야 합니다.

이 세상은 잠시 지나가는 나그네 길과 같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종착역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래로부터 누군가가 죽었을 때에는 ‘돌아가셨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왔던 그곳으로 돌아갔다는 의미를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기쁘게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아주 진지하게 질문하고 싶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혼을 취하시면 부활의 그 때에 여러분들이 맞이할 부활은 생명의 부활입니까? 심판의 부활입니까?

6.25 때의 일입니다. 낙동강까지 전세가 밀려 여러모로 힘든 때에, 뺏고 뺏기기를 거듭하는 최악의 격전지로 곧 파병될 병사들이 하나님께 마지막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나라를 구해주실 것과 모두 살아서 가족에게로 돌아가게 해달라는 소원을 가지고서 말입니다. 천 여 명이 넘는 군인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었지만 이 사람들 중에 대부분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날 자들이었기에, 군목되시는 목사님은 이 마지막 예배에서 무엇을 설교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결단하기를 죽음 이후의 진실에 대해 단 한 번이라도 듣게 하는 것이 이 영혼들을 위한 가장 중요한 섬김이라고 믿고 천국과 지옥에 대해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천국에 대한 설교와는 달리 지옥에 대한 설교를 듣던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한 장교가 손을 들고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목사님, 질문이 있습니다. 지옥에 불이 있다구요? 그러면 우리는 그 불에 다 타버리겠네요.” 그 말을 들은 모든 사람들은 목사님을 비웃기라도 하듯 박장대소(拍掌大笑)하였습니다. 사람들의 웃음이 거의 멎었을 때 쯤, 성령의 감동을 받은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지옥에 불이 있는지 없는지, 그리고 그 불길 속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는 너무 궁금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잠시 후 당신이 직접 경험하게 될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엄연한 진실입니다. 이 온 우주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하는 것보다 더 분명한 진실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죽은 사람들이 결국은 심판의 부활을 통해서 영원한 불길 속에 떨어진다는 것, 영원히 죽지 않는 상태에서 끝없이 고통을 당하게 된다는 이 사실은 창조주의 권위를 가지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진실입니다.
세월은 끊임없이 흘러갑니다. 인간의 사상과 풍조는 시대에 따라 옷을 갈아입습니다. 그러나 시대는 변천한다 해도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 방법은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십니다.

III. 영원을 잇대어 살자

오늘 이 말씀은 여러분이 누구인가에 따라 이중의 적용을 갖습니다. 아직 주님을 영접하지 않고 살아가는 불신자인 경우와, 이미 주님을 영접하고 신자로서 살아가는 경우입니다.
첫째로, 거듭나지 못한 불신자의 경우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구원을 얻지 못한 사람이라면, 오늘이 바로 영원한 생명에 관해 가장 정확하고 분명하게 들을 수 있는 최초이고 마지막 기회인지 모릅니다. 오늘 이 시간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에게 주셨습니다. 또 여러분들로 하여금 죽음 이후의 부활의 진실에 대해 생각하게 하심으로 여러분들의 삶이 정말 구원받은 삶인지를 돌아보도록 만들어주십니다. 아직까지도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영광스러운 그날에 생명의 부활로 나아올 자신이 없는 사람들은 이 시간 주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 앞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 처절한 고통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믿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거룩한 보혈의 흔적은 믿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분을 의지할 마음을 주고, 용서받고자 하는 소원을 불러일으킵니다. 그 십자가를 바라보고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용서해주십니다. 그리하여 심판의 부활을 맞이할 운명의 사람들을 생명의 부활로 나아오게 하시고, 영광스러운 부활의 그날을 기다리며 주님께만 소망을 두고 이 땅을 살아가게 하십니다. 아직 주님을 믿지 못하셨던 분들은 정직하게 이 복음 앞에서 주님을 영접하십시오. 그리고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해달라고 주님 앞에 겸손히 매달리십시오.

저는 21세 때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그전에도 교회는 다녔으나 쉴 때도 있었고, 하나님이 살아계실지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은 했지만 생각만 하면 언제나 기분이 나빴습니다. ‘이 불길한 예감이 맞아 떨어지면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라고 말입니다. 그래서인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도 저를 감동시키지 않았습니다. 그 십자가의 의미를 생각하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고,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지금처럼 살면 안 된다는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인데, 그러한 결단을 내리기 싫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 들려온 십자가의 복음은 저의 모든 것들을 변화시켰습니다. 예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죽으신 것이 나를 지극히 사랑하시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그 십자가는 더 이상 기분 나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하나님의 품으로 나를 인도하셨다는 사실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무한한 소망이 되었고 한없는 위로가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만큼 나를 사랑한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이 감격으로 다가오는 놀라운 마음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정직하게 바라보면서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주님이 십자가에 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잠시 이 세상에 살지만 나의 인생의 끝이 심판에 이르는 부활이 아니라 생명의 부활로 나아오게 해달라고 탄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이 구원의 초청을 받아들이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거듭난 신자의 경우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미 영접했다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에 선을 행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살아 숨 쉬는 동안에 주님이 주신 생명과 젊음과 건강과 물질과 기회를 가지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면서 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 안에 거한다 할지라도 세상에 희망을 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희망을 둔 사람, 물질이 있어도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고통 받는 불쌍한 이웃들을 위해서 사용하는 사람,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이 세상 재미를 목적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보람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IV. 결론

우리의 인생은 풀잎 위에 앉은 이슬과 같고 해가 뜨면 사라지는 안개와 같으며, 겨울이면 말라 살라지는 지푸라기와 같습니다. 주를 위해 살지 않는 인생은 불쌍합니다. 우리의 손과 발은 주님을 위하여 움직이기에 더 귀하고, 우리의 머리는 주님을 위하여 생각하기에 가치가 있으며, 우리의 가슴은 주님을 사랑하는 뜨거움이 있기에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의 남은 날 동안 이 영원을 바라보며 온전히 주님을 섬기며 삽시다. 눈물과 고통뿐인 이 세상에 새 소망과 부활의 희망을 넣어주는 헌신된 삶을 삽시다. 사랑하는 우리 주님이 영광중에 다시 오실 때, 우리는 부활의 기쁨으로 그분을 뵐 수 있을 것입니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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