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종려주일] 다 이루었다! (요 19:23~30)

  • 잡초 잡초
  • 237
  • 0

첨부 1



영국의 유명한 설교자인 스펄전 목사님이 한번은 서재에서 혼자 울고 계셨다고 합니다. 부인이 문을 열고 목사님의 우는 모습을 보시고 묻습니다. "목사님 힘든 일이 있습니까? 어려운 일이 있습니까?” 스펄전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무리 십자가를 묵상해도 내 마음에 감격이 없어. 내 심령이 이렇게 메마른데 내가 어찌 십자가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게 설교 할 수 있겠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십자가를 생각할 때 구원의 감격이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이 여러분 가슴 깊숙이 느껴지고 있습니까?

신앙생활의 최대의 위기는 외부로부터 오는 핍박이나 환란이나 어려움이 아닙니다. 우리의 심령의 무감각증입니다. 영적 불감증입니다. 감격에 상실입니다. 예배를 드려도 감격이 없습니다. 십자가를 보아도 느낌이 없습니다. 냉담합니다. 무관심, 무감각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의 가장 큰 영적 위기입니다. 오늘 이 종려주일 예배를 통해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다시 한 번 확인하시고 십자가의 사랑을 다시 한 번 체험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남편을 일찍 병으로 떠나보내고 두 아이를 힘들게 키워가는 한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한 아이는 다섯 살이고 작은아이는 세 살이었습니다. 생활의 대책이 없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동네 밖에 있는 신발공장에 가서 일을 하고 하루에 몇 천 원씩 벌어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아이가 문제였습니다. 남들에게 맡길 때도 없고, 돈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할 때는 두 아이를 데리고 가서 일을 했습니다. 공장 구석에 이것저것 쌓아 놓은 곳 그 먼지 구덩이에 아이들 둘이서 하루 종일 놀게 합니다. 그 아이들이 어머니 주위에 있으면 괜찮지만 가끔 아이들이 없어지면 아이들을 찾는 다고 고생을 합니다.

어느 날도 일하다고 주위를 둘러보니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공장밖에 나가보았습니다. 그런데 공장밖에 철로 변에 아이들이 공기놀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신없이 공기놀이를 하다가 기차가 오는 것도 모르고 공기놀이에 빠져 있었습니다. 엄마가 달려가서 이름을 부르면서, 다급한 김에 이 아이들을 철로 밖으로 내어 던집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미처 빠져나오지 못해서 기차에 치어서 죽고 말았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 어머니의 장래를 치러 줍니다. 그리고 이 두 아이들은 맡길 곳이 없어서 고아원에 보내어 졌습니다. 아이들이 고아원에서 자랐고 자라서 죽은 어머니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 무덤에 비석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비석에 이렇게 쓰여 졌다고 합니다. “어머니! 우리 어머니! 사랑하는 우리 어머니!” 이 어머니의 사랑의 절정은 무엇입니까? 일당 몇 천원을 받으면서 아이들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일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아이들을 위해서 자신은 굶으면서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그것이 사랑입니까? 아닙니다. 기차가 달려오는 이 위기의 순간에 자신의 몸을 던져서 아이들을 구원하고 자신이 희생당한 그것이 바로 사랑의 절정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사랑하는 어머니처럼 사랑 때문에 나를 위하여 대신 고난을 당하시고, 내 대신 값진 대가를 치루 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생각하게 됩니다. 그분은 내가 달려야 할 십자가에 내 대신 달리셨습니다. 내가 맡아야 하는 채찍을 내 대신 맞으셨습니다. 내가 흘려야 할 피를 대신 흘려주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고 평화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톨스토이가 쓴 ‘망각의 사랑’ 이란 책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진실 된 사랑이란 무엇이냐? 물에 빠진 아들을 구하기 위해서 자신이 수영을 할 줄 모른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물에 뛰어든 아버지의 마음이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내어주시면서 우리를 사랑했습니다. 그분은 종의 모습으로 오셨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셔서 한 주간을 보내신 후에 금요일에 십자가에 달리셔서 모진 고통 끝에 숨을 거두십니다. 그분이 남기신 마지막 절규가 무엇입니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는 절규였습니다.

오늘 아침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만약 사도신경에서 이런 구절이 빠진다면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아마 이런 고백도 불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십자가의 죽음이 없었더라면 예수님의 부활은 고백되어 질수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결코 생략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가 없이는 부활이 없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없이는 내일의 영광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해 영원한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희생당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는 교회의 위치를 알리는 상징물이나 기호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사랑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자기희생이고 자기 부인이고 구원의 증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에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십니다. 우리는 종려주일로 이 날을 지킵니다. 종려주일을 시작해서 우리는 한 주간을 고난주간이라고 부릅니다. 월요일에는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쫒으시면서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선언하십니다. 화요일은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십니다. 수요일은 조용한 묵상의 시간을 보내십니다. 그리고 목요일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최후의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나눕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밤이 세도록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 하셨습니다. “아버지여! 할 수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결국 예수님은 그 밤에 로마 군병들에게 체포 되시고, 제사장인 가야바와 안나스에게 심문을 받으시고, 빌라도에게 불의한 재판을 받으시고 바라바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게 됩니다. 바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분은 수치와 모욕과 아픔과 고통을 다 담당해 주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사셨습니다. “인자가 온건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하심이라.” “인자가 온 것은 사람들에게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죄 값으로, 속전으로 치루기 위해서 그분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당당히 그 길을 가셨고 우리에게 부활의 선물을 안겨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부활의 아침이 오기까지 고통의 기간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기 전에 법정에서 채찍질을 당하십니다. 이 로마 병정들이 때리는 채찍은 매우 무섭다고 합니다. 채찍을 맞다가 많은 사람들이 기절을 하거나 죽습니다. 그 채찍 끝에는 날카로운 쇠갈고리가 있어서 살이 찢겨지고, 뼈가 흩어지고, 선혈이 낭자하게 흐른다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에게 그 채찍이 가해졌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을 말씀합니다. “가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저와 여러분의 영혼이 치료받고 우리 육체가 치료 받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죄를 씻어내기 위해서 그분은 모진 채찍 가운데 자신을 던져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조롱과 희롱을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예수님을 조롱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습니다. 머리를 움직일 때 마다 면류관의 가시가 예수님을 깊이 찔렀습니다. 우리는 바늘에 찔러도 견딜 수 없는데 그 많은 가시들이 예수님의 머리를 짓눌렀습니다. 예수님이 달리셨던 그 십자가는 고통의 십자가요, 고난의 십자가요, 대속의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 밑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나요. 오늘 성경에 보니 로마의 병정들이 예수님의 속옷을 나누고 있었다고 합니다. 죽음의 순간에 그들은 제비뽑기 하면서 옷을 나누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옷이 귀했던 것 같습니다.  전쟁에 나가 승리하면 그들은 상대방의 옷을 벗기고 취했습니다. 장교들은 좋은 옷을 취했을 것이고 이 병사들은 속옷을 넷으로 나누어서 제비뽑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신의 마지막 속옷까지 다 빼앗기셨습니다. 하나님께 버림 받은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겨야 했습니다.

오늘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님의 어떤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먼저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의 모습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25절, 26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는 누가 있었습니까? 예수님의 어머니 오친 마리아, 그리고 이모,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있었습니다. 이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들렸던 여인인데 예수님으로부터 치유 받고 너무 감사해서 예수님을 따라 다녔던 여인입니다.

여러분 여기에 제자들이 있습니까? 요한 외에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주님을 버려도 나는 절대로 그러지 않겠습니다. 장담하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들은 다 도망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연약한 여인들이 마지막까지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예수님의 임종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진정 제자의 길은 무엇입니까? 평안할 때나 건강할 때나 어려울 때나 힘들 때나 끝까지 주님을 따르는 것이 제자 아닙니까?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제자들은 다 뿔뿔이 흩어졌지만 오늘 사랑하는 여인들은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의 임종을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교회를 향한 성도의 사랑입니다. 교회가 힘들고 어려울 때 끝까지 교회를 위해서 생사고락을 같이 하고, 시간과 물질을 드려서 주님의 교회를 지키는 마음이 오늘 십자가아래에서 예수님을 지키는 마음이라고 할수있을 것입니다.

특히 오늘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에게 이런 말씀을 합니다. “보소서. 당신의 아들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아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옆에 있는 요한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요한이 어머니를 모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온 인류를 위해서 대속의 일을 감당하시면서 자신을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어머니 마리아를 잊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세심한 사랑에 감동을 받게 됩니다.

어떤 분들은 큰 사랑은 소중히 여기지만 작은 사랑을 소월이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몇 억의 인구를 구원해야 된다고 소리치지만, 저 중국의 10억의 인구를 구원해야 한다고 소리치지만 자기 가족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의 아들, 자기의 아내, 자기의 남편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십억의 인구를 말하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내 옆에 있는 같은 성도도 사랑하지 못하고, 질투하고, 미워하면서 어떻게 큰 사랑을 할수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큰 사랑을 행하면서도 작은 사랑도 소홀이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진정한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고난주간을 보내면서 잃어버렸던 사랑을 회복하시고 형제와 가정과 이웃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나눌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내가 목마르다고 하십니다.
28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주님께서 “목마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상에서 일곱 마디 중에 한 마디가 “내가 목마르다.”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상에서 격은 모든 고통을 한 마디로 평가하는데 그것이 “내가 목마르다.”라는 표현입니다.

여러분 피가 흐른다는 것은 수분이 빠져나간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몸에는 약 70%정도의 수분으로 되어있습니다. 인간은 물이 없으면 못 삽니다. 예수님은 이 수분이 다 빠져 나가면서 “내가 목마르다.”라고 소리치십니다. 여러분 이 목마름은 결코 낙심의 소리만은 아닙니다. 이 목마름은 어찌 보면 승리의 외침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경험해야 할 목마름을 주님께서 대신 당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나사로의 비유가 나옵니다. 지옥에 갔던 한 부자가 지옥에서 물 한 방울이 없어서 물 한 방울을 구하고 있습니다. 목이 타서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옥의 목마름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지옥에서 목마를 것을 대신 고통당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역설적입니다. 우리를 부요하게 하기 위해서 그분이 가난해 지셨습니다. 우리를 기쁘게 하시기 위해서 그분이 슬픔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를 행복을 주기 위해서 그분이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우리의 목마름을 예수님이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주님의 목마름, 그것은 바로 나의 목마름이었습니다. 주님이 모든 목마름을 다 담당하시고 우리 인간의 목마름을 대신 해결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수가성에 한 여인을 만났을 때 그 여인은 모든 것에 목마른 여인이었습니다. 재물에 목마르고, 정욕에 목마르고, 모든 것에 목말랐던 여인입니다. 그래서 늘 갈증을 느끼고, 인간관계도 갈등 속에 있었던 여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또 목마르지만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들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 하리라.”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서 그분이 대신 그 목마름을 감당하셨습니다. “내가 목마르다.” 그것은 곧 구원의 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30절에 주신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신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오늘 성경에서는 “다 이루었다.” 고 마지막 말씀을 하십니다. “다 이루었다.” 이것을 헬라어로 보면 ‘테텔레스타이’입니다. 이는 ‘모든 것을 성취했다.’ 라는 의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예수님이 우리의 죄값을 다 치렀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이루었고, 죄 사함을 이루었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마지막 선물이었습니다. 우리의 죄를 마지막 하나까지 다 그분이 해결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그분은 우리에게 “내가 너희 죄를 해결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경건하게 기도 많이 하는 성도 한분이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등에 무거운 배낭을 메고 끙끙대며 어디를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양손에 가방을 들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의 죄의 짐을 지고 올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의 부드러운 손이 그의 손에서 가방을 다 들어 주는 것입니다. 뒤돌아 봤더니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의 모든 죄가 다 사함을 받았느니라. 내가 너의 죄 값을 다 치러 주었다.” 그것이 바로 다 이루었다는 말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우리를 구속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그분은 성취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고통의 절규가 아니라 승리의 외침이었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승리의 길을 열어주는 주님의 승리의 선포였습니다.

노르웨이에 가면 양의 문 교회가 있다고 합니다. 그 이름이 붙여진 전설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성전을 건축하고 있는데 한 인부가 발을 잘 못 헛디뎌서 높은 곳에서 떨어졌습니다. 모두가 큰일 났다고 하는데 마침 건축공사장 밑에 양떼가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인부가 어린양 위 등에 떨어진 것입니다. 놀랍게도 양은 죽었는데 이 인부는 살아났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기념해서 그 교회는 양의 조각품을 교회에 만들어 놓고, 이름을 양의 문 교회라고 지었습니다. 바로 어린양 되신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원받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을 보라.”고 세례요한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구원을 다 완성하셨습니다. 우리의 죄 값을 다 치루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그 주님의 마지막 말씀이 얼마나 희망적인 말씀이고 놀라운 말씀입니까? 저와 여러분의 죄 값이 다 치러졌습니다. 천국에 나아가는 길이 활짝 열렸습니다. 구원의 길이 열리고 생명의 길이 열렸습니다. 이제는 우리는 이 고난주간을 통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그 놀라운 십자가의 사랑을 다시 깊이 묵상하면서 주님이 가셨던 그 고난의 길을 함께 걸어가며 회개하고 그 사랑을 깊이 묵상하는 그리고 그 사랑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복된 한주간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