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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더 이상 어떤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고전 15:5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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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 (고린도전서 15장 55-58절)

여러분, 성경에 가장 자주 나오는 명령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더 많이 사랑하라"  "죄짓지 말라" "교만하지 말라"가 아닙니다. "두려워 말라" 입니다. 성경 학자가 그 말씀을 성경에서 찾아보니 총 366번 등장합니다. 윤년까지 계산하여 매일 한번은 말씀하시는 셈입니다.
특히 부활절 메시지의 핵심은 더 이상 두려워 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이상한 것은 이렇게 “두려워하지 말라”는 성경 말씀을 읽고, 해마다 부활절 예배를 드리면서도 우리는 제대로 한번 담대한 믿음으로 살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활 신앙을 가졌다고 하면서도 끊임없이 염려하고 두려워하며 살아왔습니다.

  지난 주간 목사님 모임이 있었는데, 한 목사님이 "교인들에게 변화되라고 설교할 자신이 없습니다. 50년 예수 믿었고 20년 목회한 나도 안 변하는데, 어떻게 교인들만 변화받으라고 할 수 있습니까?" 라고 말했습니다. 모두 다 숙연해졌습니다. 저는 그 순간 부활절 예배를 위한 기도가 절로 나왔습니다. 부활절 예배를 통하여 모든 성도들이 정말 세상이 두렵지 않은 담대함을 얻게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우리를 두렵게하는 것 중에 가장 강한 것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다가도 "너 죽고 싶어?" 그러면 끝입니다. 아무리 옪은 것을 주장하고 싶어도 이제는 내 말을 돌리게 되지요. 3년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그 많은 기적을 보았던 제자들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로마 병정들이 "너 죽고 싶어?" 한마디에 무너지지 않았습니까? 다 도망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는 것과 그 많은 기적을 보고도 죽음 앞에서는 약해지는 것이 우리란 말입니다.

마귀는 이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마귀는 죽음을 가지고 인간을 조종합니다. 믿음이 좋다던 사람들도 “너 죽어!”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끝까지 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끝까지 가면 죽는다고 그러면 그만 꼬리를 감추어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활 신앙이라는 것은 내가 비록 죽는다 하더라도 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끝까지 가리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이 끝이 아닌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에 나를 가로 막을 것이 없다. 이것이 바로 부활 신앙입니다. 마귀가 그렇게 하지 못하게 막는 것입니다. 죽음의 두려움으로 우리를 막는 것입니다. 그냥 죽는 정도도 아니고 마귀는 재정적인 어려움만 가지고도 우리를 굴복시킬 수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계명을 잘 지키던 청년이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는 말에 두려워서 예수님을 따르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죽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사망 권세를 이기셨고, 모든 성도들에게 부활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부활 신앙을 가졌다는 말은 죽음도 두렵지 않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면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갈 수 없습니다.

  지동설을 최초로 주장하였던 갈릴레오갈릴레이는 지동설 때문에 1633년 이단으로 정죄되었을 때, 종교 재판에서 자기 학설을 철회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법정을 나서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말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아무리 진리를 깨달았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죽을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귀가 사망의 권세를 가지고 지금도 동일하게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끝까지 서지 못하도록 우리를 조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그 부활의 능력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여러분이 부활 신앙을 가졌다는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셔야 하는데, 죽지 않고 오래 산다, 다시 산다, 그런 뜻으로만 부활 신앙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지 않고 영원히 살기 때문에 죽었다가도 부활하기 때문에 죽음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길을 가로막을 수 없다. 예수님을 따라 사는 것을 그 어떤 것도 막을 수가 없다는 그 믿음을 갖는 것을 부활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여러 번 죽음의 위협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죽음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위대한 승리의 노래를 부릅니다.
(55절)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이것은 ꡒ더 이상 죽음이 우리를 굴복시킬 수 없다ꡓ는 승리의 외침입니다.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데 어떤 어려움이 와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으로 부활 신앙을 가졌는지 여부를 알 수 있습니다.
(58절) “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많은 크리스찬들이 ꡒ부활은 단지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이라ꡓ고 오해합니다. 이것은 정확한 부활 신앙이 아닙니다. 부활 신앙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바로 이 믿음이 성도를 세상과 구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활절은 성탄절은 세상의 반응이 다릅니다. 예수님이 탄생한 성탄절은 세상이 함께 기뻐해주지만, 부활절은 기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싫어합니다. 그래서 부활절 믿음을 보고 성도와 세상과 구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활절 때문에 예수님은 그리시도시고 우리는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탄절에는 기뻐하지만 부활절에는 싸늘합니다. 너무 이상한 절기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도 똑같이 예수님을 믿는 것같아도 부활절에 갈라집니다. 정말 부활의 확신이 있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순교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는 사람이 됐느냐? 아니면 아직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 조차도 안한 사람이냐 하는 것으로 갈라놓는 것이에요.

사도 바울은 처음에는 부활이 거짓말이라고 확신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의 부활을 전하는 자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다음에 그는 부활의 예수님을 전하다가 순교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절대 감동도 절대 부인도 하지 않습니다. 그저 믿어 주는 식입니다. 이런 믿음으로는 순교하라고 할까봐 하나님께 무조건 순종하겠습니다 하는 고백도 못합니다. 결코 이런 믿음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이 필요합니까?
초대 교회 당시 상황을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문이 퍼졌을 때, 대제사장과 빌라도, 가야바, 바리새인들은 당황했습니다. 예수가 부활하였다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초대 교회 때는 "예수는 부활하셨습니다!" 라는 말을 하는 것 조차 죽을 각오를 해야 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각오를 하고야 그 한 마디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누가 죽는 줄 알면서도 예수 부활을 고백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실제로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일어났습니다. 핍박자가 죽이고 가둘 때 굴복하지 아니하고, 한 사람을 죽이면 열 사람이 일어나고, 열 사람이 죽으면 백 사람이 다시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교회가 섰고 복음이 온 세상에 전해졌습니다. 

  한 세기에 가장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던 실존주의 철학자 샤르트르(Chartre)가 죽을 때, 주위 모든 사람들이 크게 실망하였습니다.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그렇게도 외쳤던 그는 프랑스 파리의 부르세 병원에 폐수종으로 입원했던 한 달 동안을 그는 병원에서 발악하며 보냈습니다. 소리를 지르고 찾아온 사람들을 향하여 고함을 치며 절규했습니다. 그는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 때문에 자기의 병명이 무엇인지 아내에게조차 묻지 못했습니다. 그는 1980년 4월 16일 입원한 지 한달 만에 몹시 괴로워하다가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철학은 우리를 죽음의 공포에서 이기게 할 힘이 없습니다.

  반면 독일 신학자인 디트리히본훼퍼(Dietrich Bonhoeffer)는 세계 대전 중에 독일의 수용소에서 나치에게 항거하다가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한 간수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오는데 그는 직감적으로 이것이 자기의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벌떡 일어나 감방에 있던 자기 동지들에게 이렇게 인사를 했습니다. "동지 여러분! 이제 나에게는 죽음이 왔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마지막이 아니고 시작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예비하신 아버지의 집에서 만날 때까지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마지막 인사를 하고 감방을 나서는 그에게서 놀라운 평안과 기쁨이 넘쳐 났습니다. 그 감옥에 있었던 사람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의 마지막 모습을 충격과 감동으로 보았습니다. 본훼퍼는 부활 신앙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성도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그렇지만 한국 교회를 위해서도 이 민족을 위해서도 부활 신앙을 가진 성도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냥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시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바로 그 믿음을 주시려고 예수님의 부활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 교회 성도들에게 부활의 믿음이 정말 필요합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는 그 능력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래야 한국 교회가 살고 이 민족에게 다시 부흥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말 나에게도 부활의 능력이 임할 수 있을까? 여러분 중에 여전히 죽음 앞에서는 나는 내 믿음 지키기도 어렵겠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분명히 그렇습니다. 여러분에게 죽음이 두렵지 않는 부활 신앙을 하나님이 반드시 주십니다.

어떻게 죽음도 두렵지 않은 부활 신앙으로 살 수 있습니까?
부활 신앙을 가지기 전에 먼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하나 되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고백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의 생명이고 나의 주님이 부활하셨으니 나도 부활할 것은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죽음도 두렵지 않은 부활 신앙이 생깁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여러분, 부활의 능력은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부활의 능력을 가져야 되겠다, 그래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망의 권세를 우리 힘으로 뛰어넘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이상한 것은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 날부터 부활의 능력으로 살았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부활한 건 확실하다.' 하면서도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고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것이 마음에 걸려서 그랬을까요? 예수님께서 친히 물고기 잡으러 돌아간 베드로를 찾아가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하시면서 꾸짖지 아니하시고 사랑으로 용납해 주셨는데도 감격하면서도 아직 부활 신앙을 갖지는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웬 일입니까?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잘 안다고 부활 신앙을 자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28장 16절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면서도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고 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죽음도 두렵지 않은 부활 신앙을 가지지 못하는 것은 예수님과 하나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하나되지 못했기에 부활하신 예수님과도 하나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로마서 6장 5절)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로마서 6장 8절)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예수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이 내 생명입니다” 하고 분명하게 고백하는 자에게 성령께서 부활의 능력으로 임하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열흘 동안 간절히 성령을 사모하며 기다리다가 오순절에 성령 받으므로 비로소 부활 신앙을 가진 사도가 됩니다.
부활 신앙은 가지려고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하나되었음을 믿는 자에게 성령께서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57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분명히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 이라고 하셨습니다. 부활 신앙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부활의 능력이 없다고 한탄하지 마세요. 그것은 여러분에게 달려있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나는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믿는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예수님과 함께 살리라.” 그러면 성령님이 부활의 능력으로 역사하십니다. 

  며칠 전 새 가족 한 분이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이 분은 작년 11월 전도 집회 때 등록하신 분으로, 어려서 어머니 돌아가시고 결혼하여 일찍 남편과도 사별하였는데, 40년 세월을 자아 중심으로 살면서 다른 사람에게 상처받고 상처주며 살아오셨다고 했습니다. 이 분은 이렇게 쓰셨습니다. 

  “전 지하철이나 공공장소에서 전도하시는 분들을 뵈면 왜 저렇게 해야 하나? 하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보기좋은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지하철에서 무료하게 앉아 있거나 졸거나 전화로 잡담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생겼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요즘 자살하거나 우울증으로 시달리는 주부나 청소년, 심지어 가장들이 늘어간다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저도 10년 전에 제 생명을 포기했던 사람입니다. 좌절과 실망 속에 살면서 저 자신을 사랑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복음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저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아노라 너를 사랑하노라.“ 여러분은 이 세상에 살면서 무엇을 원하십니까? 행복입니까? 기쁨입니까? 정말 원하신다면 하나님께 구하세요. 구하라 그러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구하지도 않고 하나님은 없다 구해도 안준다 그런 것이 어디 있느냐고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조용히 들여다 보세요. 복을 주시는 이, 만복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을 모르기에 어디에 구해야 하는 지를 몰라서 걱정하고 근심하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의 내일을 사시는 여러분, 오늘 모든 사랑의 근본이 되시는 주님을 만나시는 하루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그 분은 말했습니다. “아직 주님의 십자가를 어떻게 전해야 하는지 모르지만, 저는 저의 지난 아픔과 제가 만나 주님이 어떤 분인지 정말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이렇게 담대하게 되는 것입니까?
  그 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라는 말씀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주님 안에서 “예"하며 살겠습니다.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기에 부활의 능력으로 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분에게는 영원히 예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분에게 부활의 능력이 임하는 것입니다.
  개인 뿐 아닙니다. 부활의 역사는 지금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한 동안 공산주의가 예수를 죽여서 장사 지냈던 적이 있었습니다. 러시아도 동유럽도 중국도 북한에서도 공산주의자들이 예수를 죽여 무덤에 다 가두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보십시오. 지금 러시아에 중국에 선교사들이 넘쳐나고 있고 교회가 부흥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다시 부활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목격하게 됩니다.
 
  어느 목사님이 중국에 가서 주일 예배 설교를 하였는데 1부 끝나고 교인들이 나가지를 않습니다. 바깥에서 예배드리는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 스피커로 계속 말합니다.ꡒ1부 예배드린 사람 빨리 나오시오. 우리 들어가야 됩니다.ꡓ안 나갑니다. 똑같은 설교인데 두 번 듣고 싶어 합니다.
  지금 중국에서 부활의 능력이 어떻게 역사하는지 알고 싶다면 전 타임지 북경 지국장이었던 기자 출신 데이비드아이크만이 쓴 [베이징에 오신 예수님]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책에 중국 최고의 학술 기관인 중국 사회과학원의 한 연구원이 2002년 발표한 내용이 나옵니다. ꡒ우리의 연구 과제 중 하나는 서방의 우월함 즉, 서방 세계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우리는 역사, 정치, 경제, 문화 측면에서 가능한 모든 연구를 했습니다. 처음에는 여러분들이 우리보다 더 성능 좋은 무기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음에는 여러분의 정치 제도가 더 좋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는 여러 분의 경제 제도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20년 동안 우리는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종교인 기독교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이 서방이 그토록 강력한 이유였습니다. 우리는 기독교가 사회, 문화의 도덕적 기초로서 자본주의의 출현과 민주정치의 성공적 변천을 가져왔다고 확신합니다.“

  중국 요녕성 종교국장이라는 사람이 한 말입니다.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중국은 기독교 국가가 됩니다. 미국보다 많아질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나는 종교국장이라 알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숫자가 말할 수 없이 늘어갑니다. 앞으로 중국은 철저한 종교 국가가 될 터이니 보십시오."

  41페이지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2002년 초, 당시 중국 주석이자 공산당 지도자였던 장쩌민(江澤民)은 베이징 중심부 어느 정치 지도급 인사의 개인 저택에서 열린 저녁 만찬에서 한 손님의 질문을 받았습니다.ꡒ만약에 물러나기 전에 중국에 법령을 하나 만들 수 있다면 무엇을 만들 겁니까7ꡑ그는 환한 미소를 지은 채 방안을 둘러보며ꡒ기독교를 중국의 공식 종교로 만들겠다.ꡓ고 답을 했다. 물론 그는 얼마 후 후계자인 후진타오(胡鎬濤) 총서기에게 공식적으로 권력의 지휘권을 넘겨주었고, 설사 진심이었다고 해도 이미 실행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저 농담으로 넘기기에는 너무나 인 상적인 답변입니다.
  저는 북한에도 동일하게 부활의 능력이 임할 줄 믿습니다.

  그러면 이런 부활의 능력이 어떻게 나타나는 것입니까? 십자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도 중국도 북한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엄청난 순교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활도 당연히 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믿고도 슬픔과 좌절, 먹고 사는데 두려움과 염려 속에 있는 분이 있습니까?
부활의 능력을 주시는 성령의 역사를 사모하십시오.
오직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하나 됨을 고백하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이  부활의 능력으로 여러분에게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서야할 영적 자리는 부활 동산입니다.
죄를 애통하는 자리도 지나고 고난의 십자가 동산도 지나고 부활 동산에 이르러야 합니다.
기도를 하나 해도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 하나님 나는 말할 수 없는 죄를 지었습니다.” 하는 기도에서 그치지 말고, 속죄의 주님을 감사하는 자리에 서야 하고, 거기서도 멈추지 말고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긴 부활의 환희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찬양합니다. 죄에서 사망의 권세에서 우리를 이기게 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어떤 것도 내가 주님을 따라가는 길에 막을 것이 없습니다. ”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부활의 능력을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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