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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빈무덤 예찬 (막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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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무덤 예찬" 마가16:1-8

I. 빈 무덤

덜렁이 아내 때문에 아침마다 평안이 깨지는 가정이 있었습니다. 아침에 이부자리도 정리 안하고 잠옷도 아무렇게 벗어 던지고 사는 부인에게 오늘따라 남편이 젊잖게 말했습니다. "여보, 예수님은 무덤속 그 정신없는 상황, 아픈 몸으로도 입고 계시던 세마포를 단정히 정돈하고 부활하셨어요." 부인이 상냥하게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여보, 미안해요. 제가 아직 부활을 못해서 그래요."

부활절 아침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여러분 모두에 평안을 주시길 축복합니다.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할렐루야.
모든 인생은 모두 무덤으로 끝이나나 우리 기독교는 빈무덤 부활의 종교입니다.

일전 중국 베이찡 천안문 광장에 갔다가 모택동의 무덤을 보았습니다. 썩지않게 방부제로 처리하고 항상 무덤 안을 섭씨 16도로 유지하여 지금도 죽을 때 모습 그대로 누워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참배하기 위해 혹 우리처럼 구경하기 위해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베이찡에서 멀리 사는 사람들은 이곳에 한번 다녀간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썩어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가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이구나 싶었습니다. 모스코바에 가면 레닌의 모습이 그렇게 되어 있고 북한의 금수산 기념 궁전에 가면 김일성의 무덤이 그렇게 보존되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 무덤의 크기로 생전의 권세와 위용을 자랑하곤 합니다. 피라미드가 그렇고 중국 진시황릉이 그렇습니다. 여산릉이라 불리는 진시황릉은 작은산만 하다고 합니다. 무덤 봉분 아래서 꼭대기까지 계단을 오르는데만 15분이 걸린다고 합니다. 중국에 어떤 지하 무덤을 구경하는데 두 시간을 돌아보고도 다 보지 못하고, 다리가 아파 그냥 나온 적이 있습니다.

인도 선교사 스텐리 존스가 이슬람 교도에게 전도를 했습니다. 그때 이슬람 교도가 선교사님께 말했습니다. "우리는 마호메드를 섬기는 사람들이요. 메카에 가면 아직도 마호메드를 모신 무덤이 있어요. 당신네들이 섬기는 예수는 무덤 하나 없지 않소." 그때 스텐리 존스 선교사가 대답했습니다. "예, 예루살렘 성분묘교회에 가면 예수님의 무덤이 있긴 하지만 시신이 없는 빈 무덤이지요. 만약 당신네들이 섬기는 마호메드처럼 일부라도 이땅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발견할 수 있다면 우리 기독교는 없어질 것입니다. 그분은 부활하셨고 승천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오늘이 부활주일입니다. 예수님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세상의 영웅들은 큰 무덤을 자랑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빈무덤을 자랑합니다. 세상에는 죽음에 대한 허무를 노래하는 애가를 부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그래서 오늘 부활절 아침 설교 제목이 "빈무덤 예찬"입니다.

II. 부활 찬양

구전 민요 가운데 상여를 매고 갈 때에 혹은 매장 한뒤에 흙을 다지며 부르는 '만가'라고 하는게 있습니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영영 다시 못 오리라
솥안에 익은 팥이 싹이 틀 때 다시 오랴
소반위에 삶은 닭이 나래칠 때 다시 오랴
한번 가고 못 오는 길 어이 섭지 아니하랴
북망산 마지막 길 내가 서러워 하노라

얼마나 허무합니까? 얼마나 공허합니까?

성경에도 사망을 향한 노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허망한 죽음 앞에 실패한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사망을 이기는 노래를 부릅니다.

부활장으로 알려진 고린도 전서 15장에 보면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죽음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멸시하는 노래, 죽음을 비웃는 노래, 죽음을 정복한 승리를 노래합니다.

빌리 그래함은 말했습니다. "오늘 신문에서 빌리 그래함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거들랑 믿지 마십시오. 나는 죽은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나라로 옮겨 간 것 뿐입니다."

김활란 여사는 말했습니다. "내가 죽거든 슬픈 장송곡을 부르지 말라. 천국문에 들어가는 환희의 노래, 승리의 행진곡을 불러다오."

오늘은 빈무덤을 예찬하고 부활의 노래를 부르는 날입니다. 이른 아침 우리가 부활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하루종일 우리는 부활의 노래를 부르게 되고 평생 목이 터져라 승리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III. 누가 이 돌문을 굴려주리요?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무덤에 묻히신후 사흘째 되던 새벽이었습니다. 그를 사랑하며 따르던 여인들이 주님의 시체에 향유라도 바르고 싶은 간절한 심정으로 새벽 미명 무덤을 찾아갑니다. 저들은 무덤을 찾아가며 걱정되는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무덤을 단단하게 인봉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무덤 문을 막았던 돌은 여인들로서는 움직일 수 없는 너무나 엄청난 돌임을 그들이 잘 알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이 무덤 문을 로마 군인들이 철저하게 지키고 있었습니다. 로마 황제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이 돌문을 굴려 줄 수가 없었습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이천년전 나약한 이 여인들이 물었던 이후 지금까지 모든 인간들은 어려운 환경에 부딪힐 때 마다 이 질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내 인생의 돌을 굴려주리요?

"누가 이 돌을 굴려 주리요" 인생의 짐이 너무 무거워서 쩔쩔매고 있을 때에, 이 짐의 돌문을 누가 굴려 주리요. 마음이 아프고 고통스럽고 상처가 나서 아무도 나를 어루만져 주지 못할 때에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버린 것처럼 홀로 고독에 젖어 울 때에 누가 이 상처의 돌문을 굴려 주리요. 인생 살아가다가 얽히고 설힌 문제, 내 힘으로 해결될 수 없는 막다른 인생의 골목에 서 있을 때마다 누가 이 무덤의 문을 굴려 주리요. 죄를 짓고 쩔쩔 매고 있을 때에 아무도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누가 이 죄 짐을 굴려 주리요.

죽음 앞에 섰을 때에 사랑하는 남편도 아내도 사랑하는 자식도, 죽음의 짐을 벗겨 줄 수 없을 때에 "누가 이 돌문을 굴려 주리요?" 묻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인간의 생명을 죽음으로 삼켜버린 허무와 절망에서 누가 우리를 위하여 이 죽음의 돌을 굴려 줄까? 물어왔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여기에 통쾌한 대답을 주지 못했습니다. 인간의 연약함과 허무만을 탄식해 왔습니다. 그렇게 발달한 21세기 지식도 과학도 이 돌문을 굴려 줄 수는 없었습니다. 이 땅의 어떤 권세도 재물의 힘도 죽음의 돌문을 굴려 줄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행복을 가로막고 있는 이 거대한 죽음의 돌문을 누가 옮길 수 있습니까?

이 돌 문이 무엇입니까?
4절에 보면 "심히 크다"고 말했습니다. 우선 이 돌은 "절망의 돌"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더불어 제자들의 소망도 기대도 꿈도 신앙도 다 뺏어간 절망의 돌이었습니다.

일찍이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말했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라구요." 인류 역사속에 다 저마다 끌어 안고 있었던 이 절망의 돌을 누가 굴려 줄 수 있었나요?

두 번째, 심히 큰 돌은 연약한 인간의 힘으로 도무지 굴릴 수 없는 "죽음의 돌"입니다. 죽음의 돌을 굴린 사람이 있습니까? 이 땅의 제왕들이 죽음의 돌을 굴릴 수 있었습니까? 진시왕의 불로초 불사약이 죽음의 돌을 굴렸습니까? 여러분 4대 성인들 예수 외에 그 누가 석가가 공자가 마호멧이 이 땅에 왔던 그 어떤 위인들이 죽음의 돌을 굴려 주었습니까? 그들은 저마다 자신의 무덤을 자랑하고 땅속에 묻혀 있습니다.

세 번째, 예수님의 죽으심과 동시에 허탈감에 빠진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돌은 제자 공동체를 파괴하는 돌입니다. 이 땅의 그 누가 감히 인생의 돌문을 굴려 줄 수 있을까요?

IV. 돌문은 벌써 굴러갔다.

이 크고 무거운 돌에 도전장을 낸 사람은 건강한 남정네들이 아니라 연약한 세 명의 여자들이었습니다. 죽음의 돌문이 무서워 모든 제자들, 심지어 베드로와 야고보 마저 도망을 가고 말았습니다.

연약한 여인들이 근심 중 무덤가에 다다랐습니다. 이게 웬일입니까?
4절입니다. "눈을 들어 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
여러분이 굴릴 수 없어 쩔쩔매고 있는 그 돌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안고 있는 인생의 무거운 돌이 무엇입니까? 그러나 오늘 주님이 부활하신 부활절 아침,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위대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무덤을 가로막고 있던 거대한 돌문은 이미 굴러 갔느니라! 할렐루야! 돌은 벌써 굴러갔느니라!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여러분 죄악의 짐이 이미 굴러갔습니다. 과거 여러분이 어떤 죄를 지었든지 예수 안에 돌아오기만 하면 이미 굴러갔습니다. 현재 여러분이 해결할 수 없어 쩔쩔매고 있는 죄악의 짐, 아니 미래에 지을 모든 죄악의 짐까지 이미 굴러갔습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 어떤 권세도 여러분을 정죄치 못할 것입니다. 어떤 마귀의 세력도 여러분을 정죄치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미 다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죽음 앞에 서서 쩔쩔매지 마십시오. 이 죽음의 문제를 우리 예수님 해결하셨습니다. 음부의 권세를 이미 부셔뜨리셨습니다. 지옥의 권세를 이미 멸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이름이 하나님 나라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모든 짐이 해결되어졌습니다.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이미 돌문이 열려져 있었습니다. 돌은 이미 굴려져 갔습니다. 죽음의 돌이 벌써 굴려졌습니다. 절망의 돌은 이미 벌써 굴려졌습니다. 죄 짐의 돌은 벌써 굴려졌습니다. 한숨과 염려, 걱정과 근심 그리고 슬픔을 거두십시오. 오늘은 찡그렸던 얼굴을 활짝 펴는 날입니다. 오늘은 무덤에 갇혀 우는 날이 아니라 빈무덤의 능력, 부활의 기쁨을 노래하는 날입니다.

한신대 학장으로 계셨던 김정준 목사님은 그의 젊은날 마산 폐결핵 요양소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다르게 하루가 다르게 계속해서 사람이 죽어 나갑니다. 저마다의 얼굴에는 죽은 동료들의 시체를 바라보며 절망과 낙심과 한숨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김정준 목사님의 얼굴에는 평화가 넘쳐나고 있었지요. 곁에 있던 누군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까? 선생은 죽음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리하여 펜을 들고 써 내려간 시가 「내가 죽는 날」입니다.

내가 죽는 날 그대들은 저 좋은 낙원 이르니 찬송을 불러주오. 그리고 요한계시록 20장 21장 22장을 끝까지 읽어주오.
또한 나의 묘패에는 이렇게 새겨주오. 단 한마디 임마누엘!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내가 죽는 날은 비가 와도 좋소. 그것은 내 죽음을 상징하는 슬픈 눈물이 아니라 예수의 보혈로 내 죄 씻음 받은 감격의 눈물이리라.
내가 죽는 날은 바람이 불어도 좋소. 그것은 내 모든 이 세상 시름을 없이하고 하늘 나라 올라가는 내 걸음 준비함이라.
내가 죽는 날은 눈이 부시도록 햇빛이 비추어도 좋소. 그것은 영광의 주님 품에 안긴 내 얼굴에 광채 보여 줌이라.
내가 죽는 시간은 밤이 되어도 좋소. 캄캄한 하늘이 내 죽음이라면 거기 빛나는 별의 광채는 새 하늘에 옮겨진 내 눈동자이리라.
오, 내가 죽는 날 나를 완전히 주님의 것으로 부르시는 날 나는 오히려 이 날이 오기를 기다리노라. 다만 주님 뜻이면 이 순간에라도 닥쳐 오기를 번개와 같이 닥쳐와 번개와 함께 사라지기를.
그 다음은 내게 묻지 말아다오. 내가 옮겨간 그 나라에서만 내 소식 알 수 있을 터이니 거기서만 내 얼굴 볼 수 있을 터이니.

그렇습니다. 이 노래는 죽음의 돌문이 굴려져간 사람만이 부를 수 있는 환희의 노래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의심없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습니까? 주 안에서 우리 모두 영생으로 부활할 것을 믿습니까?

제 친구 목사의 아들은 어릴때부터 유난히 질문이 많았습니다. 한번은 시골길 밭뚝길 논뚝길을 걸어가는데 질문 공세가 시작되었습니다. "저건 뭐야?" "콩 심는 거야." "저건 뭐야?" "고추지." "어 고추 심었구나. 저건 뭐야?" "벼 심는 거지." 공동 묘지를 보더니 "저건 뭐야?" "저긴 죽은 사람을 묻었어." "어 저건 사람을 심은 거구나." 이 철없는 아이의 말 한 마디에 섬광처럼 계시의 메시지가 지나갔습니다. '아 그렇구나. 죽은 사람은 땅에 묻지만 하나님의 사람들, 예수의 사람들은 묻는 것이 아니고 심는 것이구나. 예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 부활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한번 땅에 묻히면 영원히 음부의 권세에 갇히는 것이지만, 우리는 땅에 심는 것이구나. 그렇구나 우리는 부활하는 것이구나. 살아나는 것이구나. 새롭게 영원한 세계에 심겨지는 것이구나.' 할렐루야.

부활장 고린도전서 15장은 말합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느니라"

V. 빈무덤 예찬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묻히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심기우는 사람입니까? 절망과 낙망과 사망을 노래하는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절망과 사망을 짓밟는 노래를 하는 사람들입니까? 돌문에 갇혀서 신음하는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돌문을 굴리며 노래하는 사람들입니까?


지미라는 한 어린아이는 태어날 때에 온 몸이 꼬인채로 태어났고, 자기 목을 10살이 되도록 가눌 수 없는 정박아로 태어났습니다. 나이는 12살 13살이 되었지만 이제 초등학교 1학년에 겨우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실안에 방해꾼이 되었습니다. 아무렇게나 몸을 움직이다가 책상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꽥꽥 소리 지르기도 하고, 그래서 스미스 선생님은 지미의 엄마 아빠를 학교로 불렀습니다. "왜 이 아이를 특수학교에 보내지 않습니까? 친구들에게 여간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제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지미 엄마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합니다. "선생님, 조금만 더 참아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부를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의사 선생님이 말씀합니다." 그리고 말을 잊지 못하고 엄마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지미의 아빠가 눈이 충혈된채 입을 열었습니다. "지미는 친구들을 너무나도 사랑합니다. 지미를 저 멀리 다른 동리에 있는 특수학교에 보내게 되면 지미는 몹시도 슬퍼할 거예요. 아이들에게 양해를 구할 수 없겠습니까? 선생님, 조금만 더 참을 수 없겠습니까?" 선생님과 헤어져 돌아가는 지미의 엄마와 아빠를 바라보고 있는 스미스 선생님은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 드렸습니다. '생명이 이 땅에 얼마 남지않은 지미를 인내로 바라보지 못한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의 모든 친구들은 모두 지미를 사랑하는데 선생인 내가 지미를 아껴 주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지미의 영혼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십시오.'

그리고 겨울이 지나고 봄이 돌아왔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아이들에게 플라스틱 계란을 하나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빈 플라스틱 계란이었습니다. "얘들아, 부활절이 다가오고 있단다. 이 속에 예수님의 부활을 설명할 수 있는 무엇을 하나씩 담아오면 좋겠다. 그리고 부활절 전날 꼭 가져와야 된다." 아이들은 저마다 부활절을 기다리며 어떻게 숙제를 할까 생각했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씨를 심고 물을 주어서 싹을 틔어서 왔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예쁜 꽃을 담아 왔습니다. 그런데 계란 하나는 텅 비어있었습니다.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이것 누가 가져왔니?" 고개를 휘휘 저으며 어색한 입술로 "선생님 그거 제가 가져왔어요." 지미였습니다. "지미는 왜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했니?" "우리 엄마가 말씀하시기를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있대요." "왜 비어있데?" "나쁜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대요. 그런데 예수님은 나 때문에 돌아가셨데요. 예수님은 나를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부활하셔서 예수님 무덤은 비어있데요." "그렇구나.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있구나."
그리고 한달 두달 몇 달 후 지미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장례식장에서 친구들이 빈 플라스틱 29개를 지미의 관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거기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지미네 반 친구들은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듯이 이 땅에 짊어지고 있던 지미의 모든 고통이 벗겨지고 똑바로 세울 수 없었던 고개를 똑바로 들고 이 땅에서 그의 부모도 그의 친구도 선생님도 해결해 줄 수 없었던 지미의 모든 짐이 다 해결된채 영광스런 노래, 빈무덤을 노래하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지미의 부활을 소망할 수 있었습니다. 부활의 그날을 모든 사람들이 소망하며 지미의 가는 길을 밝혀 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부활절 아침, 절망의 돌문을 굴리는 노래를 부르는 날입니다. 죄 짐의 모든 돌 문이 굴러간 것을 노래하는 날입니다. 사망의 음부의 무덤의 모든 돌문을 굴리며 노래하는 날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돌문을 굴리며 노래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무덤에 갇힌 교주를 노래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빈무덤을 보고 부활하신 예수를 찬양하는 사람들입니다.
"사셨네 사셨네 우리 주님, 무덤에서 살아나셨네."
우리 또한 인생의 무덤에 갇혀 신음하고 슬퍼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무덤의 돌문은 이미 굴려졌습니다.
무덤의 돌문은 벌써 굴러갔는데 왜 당신은 거기 갇혀 절망하고 있습니까?


VI. 나도 살아나고 싶습니다.

전 서울대학교수이며 문인으로 활동하는 유안진 교수의 <부활의 노래>가 있습니다.

지난 겨울
얼어죽은 그루터기에도
새싹이 돋습니다.
말라죽은 가지 끝
굳은 티눈에서도
분홍꽃잎 눈부시게 피어납니다.

저 하찮은 초목들도
거듭 살려내시는 하나님
죽음도 물리치신
부활의 증거되신 예수님
깊이 잠든 나의 믿음
말라죽은 나의 신앙도
살아나고 싶습니다.
당신이 살아나신
기적의 동굴 앞에
이슬 젖은 풀포기로
부활하고 싶습니다.
그윽한 믿음의 향기
풍겨내고 싶습니다.
해마다 기적의
증거되고 싶습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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