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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름다운 소식에 침묵하고 있도다 (왕하 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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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소식에 침묵하고 있도다.
열왕기하 7:1-9

하루는 부부 참새가 전기 줄에 앉았습니다.  이들 부부 참새는 "네가 앞에 앉아라.  네가 앞에 앉아라"라고 하면서 서로 자리 싸움을 하다가 아내 참새가 앞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마침 포수가 쏘는 총에 아내 참새가 맞았습니다.  총에 맞은 아내 참새가 죽어가면서 남편 참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어려운 자리에 꼭 나를 앉히더니 기어이 이렇게 나를 죽게 만드는구만.  그럴 거라면 마지막 아침 설거지나 좀 도와줄 것이지.  벌레도 못 물어 오는 게 아이들이나 잘 키울지 모르겠네.  바보 같은 게 새 장가 든다고 옆집이나 기웃거리지 않을지 모르겠네..."
계속 재잘대며 끝까지 불평과 원망을 늘어놓았습니다.  남편 참새가 포수에게 말했습니다.
"아저씨, 총알 한방 남았나요?"
"왜?"
"남았으면 저 주둥아리에 한방만 더 쏴 주세요."

사랑하는 여러분, 불평과 원망의 병은 죽을 때까지 잘 고쳐지지 않는 난치병 가운데 하나입니다.  불평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천국에 데려다 놓아도 불평합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지옥에서도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불평하고 원망하면 마음이 강퍅해집니다.  그 마음이 완악해집니다.

불평과 원망이 가득하면 그 인생은 썩어버립니다.  통증도 없이 썩어 내리게 하는 것, 그것이 불명과 원망의 병입니다.  불평하고 원망하면 스스로 마음에 두꺼운 벽을 쌓으면서 사람들과의 관계까지도 마비되고 맙니다.  하나님의 축복까지도 부정적으로 비판하게 됩니다.  불평하고 원망하면 내 심령 깊은 곳에서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줄기를 끊어버리게 됩니다.

아십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끊어진 인생은 버려진 비참한 인생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내 마음에 있는 불평과 원망을 제거하고 감사와 찬양으로 채움을 받아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불평에는 행복으로 가는 길이 없습니다.  나를 바꾸고 감사하며 사는 길은 감사를 회복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사탄이 인간에게 하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먼저 분열을 일으킵니다.  유혹을 합니다.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기도를 막습니다.  찬양하는 입을 막아 버립니다.  성경도 보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우리에게 이런 곤경과 절망감, 낙심, 포기하고 싶은 유혹 등 절망적이고 어두운 경험으로부터 구출되는 길이 있다면 마땅히 그 길을 찾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낙심은 생명의 소망을 빼앗아 갑니다.  낙심은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맙니다.  낙심은 분별력마저 빼앗아 갑니다.  그러나 이 낙심은 실패한 사람에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탁월한 성공을 거둔 사람 속에도 낙심은 얼마든지 일어납니다.  성경은 모세가, 아브라함이, 엘리야가, 엘리사가 낙심한 모습을 얼마든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성경은 모세를 가리켜 그 온유함이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들보다 뛰어나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구원이 함께 하며 하나님이 높여주신 인물이라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붙들고 쓰시는 모세에게도 낙심은 있었습니다.  민수기 11장 15절에서 그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 당함을 내가 보지 않게 하옵소서"  한 마디로 죽여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왜 이렇게 낙심했을까?  그가 이렇게 자기를 죽여달라고 부르짖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과 원망 때문입니다.  민수기 11장 1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악한 말로 원망하매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불로 그 진영 끝을 사르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번에는 고기가 없다고 다시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모세는 주변의 끝없는 불평과 원망 때문에 낙심했습니다.  그 낙심은 모세를 극도로 피곤하게 했습니다.  결국에는 자기를 죽여달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하고 원망하는 꼴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사람이 생리적으로 육체적으로 불평과 원망의 소리를 들으면 몸과 영혼이 지치게 됩니다.  이것이 지나치게 되면 삶의 무기력증에 빠지고 맙니다.  사탄의 제일 무서운 마지막 무기는 바로 사람을 무기력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피차에 불평과 원망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판과 판단과 논쟁 속에 있으면 낙심합니다.  말 많은 사람하고 있으면 낙심합니다.  세상에 언어의 공해처럼 무서운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는 기도는 많이 하고 인간적인 말은 적게 하셔야 합니다.  우선 순위를 모르는 사람하고 있다 보면 낙심합니다.  너무 낙심하면 마지막 삶의 에너지도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법이 모든 죄와 실망과 낙심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 때문에 낙심할 것이 없습니다.  사탄은 나를 무기력하게 해서 삶의 에너지를 잃게 만들려고 하지만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는 그 모든 무기력으로부터 벗어나게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무기력을 정복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내 안에 나도 모르게 불평과 원망이 일어나거든 나사렛 예수 이름의 권세와 성령의 능력으로 물리치십시오.  성령의 권능을 받아 모든 무기력으로부터 벗어나 창조적인 신앙으로 일어나십시오.

오늘 본문을 이해하려면 앞장인 6장부터 진행된 사건을 이해해야 합니다.  북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성이 아람대군에 의해 전면 포위를 당한 채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성 안에는 양식이란 양식은 다 떨어졌습니다.  나귀 뼈다귀까지 삶고 또 삶아 먹어도 굶주린 배를 채우지 못했습니다.

급기야 오늘은 내 아들, 내일은 너의 아들, 그렇게 돌아가면서 자식을 잡아먹는 기아의 극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의 눈은 짐승처럼 충혈되어 있었고, 임금은 베옷을 입고 통곡을 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엘리사 선지자는 본문 1절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밀가루 한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고, 보리 두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리라"

쉽게 말해서 이 말입니다.
"내일 이 맘 때부터 마음놓고 싼 값으로 양식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먹을 것을 거저 줍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아의 절망에 허덕이고 있는 사람들에게 엘리사가 외친 이 메시지보다 더 위대한 복음이 또 있겠습니까?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는 그들에게 먹을 것을 거저 줍게 될 것이라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소식, 더 기쁜 소식이 또 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 2절에 보면 이 복음에 대한 한 사람의 응답이 나옵니다.  그는 왕의 총애를 한 몸에 지닌 재정경제부 장관 쯤 되었던 모양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이렇게 반응합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이 장관은 나라의 경제 형편과 국고나 식량 사정을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국가의 경제현실을 잘 분석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상들이 그 옛날 광야 여행을 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시던 일을 생각하고 한 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장관은 하나님의 도움, 이 역사적 사건을 한낱 이야기꺼리로 생각했습니다.  무슨 신화나 전설로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장관의 이야기는 빈정거리는 야유로 들리기까지 합니다.

본문의 이 사람은 똑똑하고 계산에 빠르고 영악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이나 계산 속에는 하나님께서 간섭하실 틈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이 사람은 약속된 말씀을 도무지 믿지 않는 불신앙적인 현대인들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오늘 많은 사람들이 현실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그 안타까운 환경에 대해서 탄식하고 비판하고 고발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신앙적인 안목이 없어서 믿음을 가지지 못한 채 그곳에 주저앉아 얼마나 처절히 절망하고 있습니까?  이러한 그들의 얼굴이 오늘 나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이 사람에 대한 엘리사의 대답은 이것입니다.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불신앙의 대가를 거두겠다는 말입니다.  사건을 조금 뛰어넘어 17절에 보면, 이 사람의 결국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백성이 성문에서 그를 밟으매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죽었으니"
말대로 됩니다.  생각대로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처럼 구원의 도리를 비웃는 자는 사람들의 발바닥에 밟힌 이스라엘 장관과도 같이 처절한 심판을 받을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 2절과 3절 사이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생략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는 성문 안에 있는 다른 백성들의 반응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장관의 부정적인 이야기를 듣고 온 백성들이 한결같이 엘리사의 아름다운 소식의 복음을 받지 못하고 부정적인 사고와 절망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사실은 한 사람의 부정적인 말이 얼마나 치명적인 영향력을 미치는가를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으로부터 쓰임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진정으로 성공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십시오.  내 입술에 천에 하나 만에 하나라도 부정적인 언어를 두지 마십시오.  여러분 혼자 망하는 것이 아니고 이 부정적인 언어는 전염병처럼 오염되어 가족을 죽이고, 이웃과 교회에 치명적인 손상을 주게 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말대로 됩니다.  말이 생명입니다.  말이 능력입니다.

이제 우리는 오는 7월 1일에 7번 만나 1영혼을 세우는 영혼추수주일로 지킵니다.  이 말을 듣고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번을 만나도 한 영혼을 세우지 못한다.  그러니 나는 못해!"
그러면 그 사람은 못합니다.  안 된다고 하는 사람은 절대로 안 됩니다.  잊지 마십시오.  전도에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자는 사탄 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아름다운 입술로 결코 사탄의 도구가 되지 마십시오.  나는 할 수 없지만 내게 능력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할 수가 있습니다.  말이 생명입니다.  말이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후로는 살아있는 말을 하십시오.  능력 있는 말을 하십시오.  창조적인 말을 하십시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말을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성문 어귀에 나병환자 네 사람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대로 앉아 있으면 죽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죽을 각오를 하고 살길을 찾기 시작합니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죽는다.  그들은 위기에 빠진 상태를 직시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들은 가만있지 않았습니다.

어느 전도지에 있는 내용입니다.
"지옥에 가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당신이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가만히 있으면 자동으로 지옥 간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죄인입니다.  이 죄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가만히 있으면 지옥으로 갑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이러한 자기의 영적 위기를 깨닫고 있느냐 이 말입니다.  영적인 위기를 깨닫지 못합니다.  괜찮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C.S 루이스 교수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시대 최대의 문제는 '구도의 정신을 상실했다.'  사람들이 무엇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자기의 영적 위기를 알지도 못하고 거기에서 빠져나가기 위해서 진지하게 진리를 찾는 사람이 없다.  구도의 정신을 상실하고 말았다.

저는 이것이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한국 교회 최대의 문제를 말하라고 한다면, 교회당에 드나드는 사람 가운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명목상의 기독교인에 불구하다는 사실입니다.  소위 이름뿐인 기독교인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거듭난 체험이 없습니다.  구원의 감격을 모릅니다.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인생이 뒤집어 지고 변화된 체험이 없습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이들 나병환자들은 살길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어디에 먹을 곳이 없는가?  어디에 살 곳이 없는가?  그들은 마침내 아람 군대의 천막에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사람은 없고 수많은 양식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간밤에 하나님께서 한 사건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아람 사람들의 귓전에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무수한 군대가 쳐들어오는 굉장한 소리를 듣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람 군인들은 이스라엘이 주변 강대국과 동맹을 맺고 쳐들어오는 줄로 생각하고 몸둥이만 빠져나와 허겁지겁 줄행랑을 친 것입니다.

이게 왠 떡입니까?  너무나 오랫동안 굶주려 왔던 나병환자들의 태도를 보십시오.
"장막에 들어가서 먹고 마시고 거기서 은과 금과 의복을 가지고 가서 감추고 다시 와서 다른 장막에 들어가 거기서도 가지고 가서 감추니라"

그들은 큰 부자가 되었고 잘 먹고 잘 살게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 이것을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사건이 여기서 멈추어졌다면 그것은 축복일 수도 없고, 성경으로서의 가치를 지닐 수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정한 축복이 무엇입니까?  전경연 교수는 '예수의 교훈과 윤리'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축복은 종말과 관계되어 있어서 먹고 마시고 감추고 쌓는 부귀영화가 아니라 적절히 나누어 줄 수 있는 여유와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는 지혜를 얻는 것이다"

이들 네 명의 나병환자들은 한참이나 먹고 마시고 감추다가 불현 듯 하나의 생각이 그들의 심장을 찔렀습니다.  나병환자들은 우리만 이렇게 먹고 마시고 즐기는 동안 저 성 안에 있는 수많은 내 동족들은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를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불쌍한 내 형제와 동포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굶주림에 허덕이고 괴로워하는 내 이웃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성경이 나병환자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 이유일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해서는 아니되겠도다.  오늘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거늘 우리가 침묵하고 있도다"

지금도 저 성 안에는 한 톨의 쌀이 없고 한 톨의 보리가 없어 죽어가고 있는데, 우리만 이렇게 먹고 마시고 잘 살고 있다.  우리가 이렇게 무관심한 행동으로 이웃을 등지고 외면하는 일을 내일 아침까지 계속한다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 것이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일어나자.  저 성 안에 가서 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자!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한국 땅을 축복하셨습니다.  한국 교회를 축복하셨습니다.  모두들 잘 먹고 잘 삽니다.  그러나 "잘 살다가 죽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이야기의 전부일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생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한 번 던져보십시오.
이 축복의 의미가 무엇인가?
우리가 이렇게 해서야 되겠는가?
침묵하고 있어도 좋은 시대인가?
내가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았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고, 무엇이든 잘 누리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선택해 주셨다는 말입니까?
그러다 죽어서 천당 가는 것이 여러분 자서전의 전부이어야 하겠습니까?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 우리가 잠잠해도 좋다는 말입니까?

이제 우리는 침묵의 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무관심과 이기주의와 안일주의의 죄악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입술을 열어 이 손과 발로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여야 합니다.

이 땅에 교회가 존재하는 중요한 이유는 '복음 전도의 책임'입니다.  이것은 영적 굶주림에 대한 해답입니다.  영적으로 굶주려 있는 사람, 그래서 방황하고 헤매고 삶의 목표를 알지 못하고, 인생의 무의미 속에서 죽어 가는 사람들.  이 영적인 굶주림에 대한 해답의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영적인 굶주림에 대한 해답은 무엇입니까?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떡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굶주린 영혼들에게 해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영혼의 갈증에 해답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말라 하고 있습니까?  영적으로 굶주려 죽어 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나는 생명의 떡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명의 떡이 누구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해답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주변에 죽어 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침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죄가 아닙니까?  죄입니다.  이것이 바로 '전도하지 않는 죄'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역사를 움직이시는 또 하나의 섭리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필이면 세상에서 버림받은 나병환자들을 선택하셔서 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성 안의 사람들에게서 버림받은 나병환자들을 통해서 성 안의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듣게 하신다.  이것은 미련한 자를 택하셔서 지혜롭게 하시고, 약한 자를 택하셔서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간혹 우리들 가운데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힘이 없습니다"  맞습니다.  당신은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힘없는 당신을 들어 능력 있게 하시고 사용하고자 하십니다.

"나는 자격이 없습니다"  맞습니다.  분명히 저와 여러분은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격 없는 나를 통해서 일하시기를 더 기뻐하십니다.

"나는 약하고 무식합니다"  자신을 잘 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약한 자를 들어 강하게 하시고, 무식한 자를 들어 지혜롭게 하십니다.  바로 당신이 일해야 할 사람입니다.  아름다운 복음의 소식을 전해야 할 사람은 "너"가 아니라 바로 "나"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 결코 잠잠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으십시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만일 너희가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이 아름다운 소식은 멀리 있지 않았습니다.  성문 하나를 열면 기쁨의 소식이 있었습니다.  축복이 쌓여 있었습니다.  우리를 포위하고 있었던 적군이 도망갔다는 해방의 소식이 있었습니다.  성 안에 갇힌 사람들은 기아의 공포와 자식을 잡아먹는 처절함이 있었지만, 성 밖에는 풍요와 승리와 구원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먼저 마음의 성문을 여십시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성 안에 갇혀있던 사람들은 불신 때문에 문을 열지 못했습니다.  부정적인 사고방식 때문에 아름다운 광경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성 밖에 쌓아둔 기쁨과 축복과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불신과 부정적인 사고방식과 용기 없는 나의 행동입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교회의 가장 큰 목적은 생명을 구원하는 전도에 있습니다.  불은 타는 것으로 존재하듯이 교회는 전도하므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주일예배를 드린다든지, 헌금을 드린다든지, 봉사한다든지, 이 정도만 하면 평균적인 크리스챤은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평균적인 크리스찬을 뛰어넘어 아주 모범적인 크리스챤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주일예배를 드리고, 헌금을 드리며, 봉사를 한다고 해도 내 삶에서 전도가 없다면 그것은 평균 이하의 크리스챤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전도하지 않는 성도는 자신의 존재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먼저 이 아름다운 소식을 발견하고 그 소식에 대한 감격을 통해서 인생이 변화된 기쁨을 이웃에게 전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인생이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름다운 소식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성 문 밖에 준비되어 있습니다.  아름다운 소식은 내 입술에 있습니다.  내 마음 속에 있습니다.  이 시간 마음의 문을 여십시오.  그리고 아름다운 복음의 소식을 전하십시오.
7월 1일, 일곱 번 만나, 한 영혼을 세우는 영혼추수주일을 잊지 마십시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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