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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생의 목적이 변해야 합니다 (빌 3: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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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제 신학교 은사되시는 교수님과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요즘 자네 교회 얼마나 모이는가?” “예, 저희 교회 성도가 꽤 많이 늘었습니다.” 저도 사람인지라 이런 말을 할 때면 왠지 우쭐해집니다. 내심 “자네 목회 참 잘 하는구먼.” 하고 칭찬 받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교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면 그 분들 이름이나 얼굴을 다 알지 못하겠구먼.” 순간 저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실이니까요. 제 기억력이 별로 안 좋은 탓도 있지만 실제로 제가 우리 교회 출석하는 분들의 얼굴과 이름을 다 아는가? 그건 아니기 때문입니다. 순간 제 입에서 저도 모르게 이런 말이 나왔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선한 목자는 아닌가봅니다.” 요 10:3에 선한 목자는 우리에서 양들을 불러낼 때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낸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선한 목자는 적어도 양 한 마리 한 마리를 구분해서 이름도 붙여주고 그 이름을 다 알아야 한다는 뜻이지요. 우리가 볼 때는 양들이 다 비슷비슷하게 생겨서 그 양이 그 양 같지만 정말 선한 목자는 양들을 다 구분할 수 있고 그 이름도 안다는 것인데 어쩌면 출석교인이 늘어나는 것만 좋아하고 정작 그 이름과 얼굴을 다 알지 못하는 저는 선한 목자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집에 돌아와 그 때부터 또 고민을 시작했습니다. “교인 숫자라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부터 시작해서 “성공적인 목회, 성공한 목회자란 도대체 무엇일까?”라는 문제를 거쳐 결국 “교회란 무엇일까?”라는 질문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정말 지향해야 할, 목회자가 정말 추구해야 할 교회의 목적은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교인 숫자를 늘려서, 안 되면 실제 숫자보다 불려 이야기해서라도 다른 사람 앞에 우쭐대고 자랑스럽게 인정받는 것이 중요할까? 아니면 숫자는 적을지 몰라도 정말 교회다운 교회, 본질을 추구하는 교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를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할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력서

얼마 전 포항시내 모 교회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장년출석교인이 120~30명 정도 되는 교회인데 담임목사님을 새로 모시기 위해 공고를 냈더니 150명이 넘는 목회자가 지원을 해왔다고 합니다. 그 교회 청빙위원들은 150통이 넘는 이력서를 쌓아 놓고 고민에 빠졌답니다. 그 수많은 이력서 중에 단 한 통만 골라야 한다는 것은 이만저만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차적으로 이력서에 좋은 이력이 많이 쓰여 있는 분을 골라냈다고 합니다. “공부는 얼마나 했나? 목회는 어디서 했나? 부모님은 어떤 분인가?”까지 말입니다. 그래서 그 수많은 이력서 중에 열 분을 뽑고 다시 그 열 분에게 설교를 시켜서 최종적으로 한 분을 담임목사로 청빙하게 되었답니다.

저희 교회에 올 때까지 저도 꽤 많은 이력서를 내 본 사람으로서 이 이력서라는 것이 참 묘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세상에 누가 이력서에 실패한 일이나 좋지 않은 조건을 쓰겠습니까? 공부를 많이 했다든지, 자격증을 많이 가지고 있다든지 어떻게든 좋은 이력을 한 줄이라도 더 써야 나를 뽑아줄 것 아닙니까? 우리 교회도 제 이력서 내용 중에 어떤 점 때문에 저를 청빙했는지 모르지만 회사뿐 아니라 하나라도 더 좋은 조건을 가진 분을 모시려는 마음은 교회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한 가지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이력서에 안 나타나는 것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력서라는 것은 그 사람의 겉모습, 밖으로 드러나는 조건밖에는 기록할 수 없습니다. 이력서에는 그 사람의 인격이라든지, 삶의 태도라든지, 그 사람의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기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이력서로만 판단할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됨됨이와 가치관, 무엇보다 그 사람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사는 사람인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의 이력서가 나옵니다. 5절과 6절을 읽습니다.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정말 ‘화려한’ 이력서입니다. 여기에는 바울에 대한 두 가지 이력이 나오는데 하나는 혈통이고 또 하나는 종교입니다. 바울은 혈통적으로도 유대인이요 그 중에도 베냐민 지파고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고 할 만큼 자부심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율법의 전문가인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에 정통하고 율법을 철저히 지키기 위해 교회를 핍박할 정도로 열심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누가 봐도 혈통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뒤지지 않는 대단한 이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뿐만이 아닙니다. 행 22:3에 보면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자신을 변호한 말이 나옵니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여기에도 바울에 대한 두 가지 이력이 나옵니다. 출생지와 교육입니다. 먼저 사도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 태생입니다. 다소는 길리기아 지방의 수도로 매우 부유한 곳이었고 또한 로마제국으로부터 완전한 자유시로 인정받은 곳이기에 이곳 태생이라 하면 대단히 자부심을 느낄만한 사실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당대 최고의 율법교사로 이름 날린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을 공부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정도만 해도 바울의 이력서는 정말 화려합니다. 혈통으로나 종교로나, 또 출생지나 교육으로나 당대 최고의 조건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 정도만 해도 어느 회사든 어느 교회든 수석으로 뽑힐 만한 조건을 갖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행 22:25부터 보면 백부장이 사도 바울을 채찍질 하려 할 때 바울이 자신을 로마 시민이라고 밝힙니다. 이 말을 듣고 천부장이 달려옵니다. 부하 천 명을 거느린 고급 장교입니다. 이 천부장이 헐레벌떡 달려올 정도로 당시 로마 시민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천부장이 사도 바울에게 묻습니다. “나는 돈을 많이 들여 로마 시민권을 얻었는데 너는 어떻게 얻었느냐?” 바울이 대답합니다. “나는 돈 주고 얻은 것이 아니라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이었다.” 이 말을 듣자 천부장이 두려워하며 결박한 것을 풀어줍니다. 당시 로마 시민권은 로마 사람이 아닌 경우 큰 공을 세운 사람에게만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로마 황제들이 국고를 충당하기 위해 시민권을 팔게 되었고 바울을 심문한 천부장도 바로 그렇게 시민권을 얻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지금 자기가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가 태어난 다소가 주전 171년 경 헬라의 도시로 편입될 때 그 도시의 엘리트들이 로마 시민으로 인정되었는데 아마 바울의 선조도 그 때 로마 시민권을 얻은 것이 아닐까 추측됩니다. 아무튼 이 사건은 사도 바울이 가진 로마 시민권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말해주는 장면입니다.

배설물

자, 하도 좋은 조건이 많아서 다시 한 번 정리해 드립니다. 사도 바울은 어떤 사람입니까? 혈통 좋지, 가문 좋지, 학력 좋지, 종교적으로도 엘리트지, 게다가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로마 시민권까지 가진 사람이니 어느 한 군데 빠지지 않는 완벽한 이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좋은 이력을, 이토록 완벽한 조건을 그가 어떻게 여겼느냐 하는 것입니다. 7절과 8절을 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바울은 이 화려한 이력을 무엇으로 여겼다고 합니까? 다 ‘해’로 여기고, 다 ‘배설물’로 여겼답니다. 성경이 고상하게 ‘배설물’이라고 번역해서 그렇지 원래는 ‘똥’입니다. 세상에, 사도 바울은 이 좋은 이력들을 모두 자기에게 손해 보는 일로, 똥으로 여겼다는 겁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세상에 누가 자기를 출세시켜 줄만한, 사람들 앞에서 우쭐거릴만한 그 좋은 조건들을 다 손해라고, 게다가 똥 같은 것이라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게 손해요 똥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그 까닭이 무엇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 답은 7절과 8절에 이미 나옵니다. 무엇일까요? 바로 ‘그리스도를 위하여’입니다. 바울은 이 모든 조건을 다 그리스도를 위해 버리기로 작정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살려니 이 좋은 세상적 조건들이 오히려 손해가 되고, 방해거리가 됨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손해요 똥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관심 가진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그리고 9절에 나온 것같이 바울은 믿음으로 얻은 의(義) 말고는 도무지 관심이 없었는데 이 믿음에 자기가 가진 세상적인 조건들이 오히려 방해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 중에도 세상적인 좋은 조건들이 믿음에 방해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재물이 방해가 됩니다. 주님이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좇으라.”고 하셔도 많은 재물 때문에 근심하며 돌아간 부자 청년처럼(마 19:21~22) 성도들 중에는 재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재물이 많아서 주님을 못 따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자신이 가진 권세나 지위 때문에 낮아지지 못하고 주님을 따르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학력이 너무 높아서 아니면 너무 똑똑해서 오히려 순전하게 주님을 믿지 못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화려한 이력이, 세상적으로 볼 때는 너무나 좋은 그 조건들이 오히려 주님을 믿는데 손해가 되고 방해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바울처럼 이런 조건들을 똥처럼 여기지 않으면 절대 주님을 올바로 믿고 따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오늘 주님을 온전히 믿고 따르는 데 방해거리가 되는 좋은 조건들은 무엇일까요?

무엇을 위하여?

그런데 나아가 사도 바울은 자신이 이런 조건들을 손해로, 배설물로 여긴 좀 더 구체적인 이유를 12절부터 14절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바울은 여기서 자신의 삶의 목적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께 붙잡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상을 받는 것입니다. 세상사람 모두가 자기 나름의 인생목표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육상선수처럼 달려갑니다. 누구보다 먼저 1등으로 그 골인지점에 이르러 받게 될 대가를 바라면서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려갑니다. 그 대가가 어떤 사람은 큰 재산이요 어떤 사람은 높은 지위나 명예입니다. 어떤 사람은 가정의 행복이나 자식이 잘 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달려가는 인생길이 아무리 멀고 힘들어도 그 골인지점에 이르러 얻게 될 대가를 생각하면 고달픈 것을 모두 잊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오늘 어떤 대가를 바라고 인생길을 달려가고 있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 12절 이하에서 사도 바울 또한 다른 사람들처럼 골인지점을 향해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뒤도 안 돌아보고 열심히 달려간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골인지점에 도착했을 때 얻게 될 상이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이나 명예나 행복을 상으로 받기 위해 뛴다면 사도 바울이 그토록 받기 원했던 상은 14절에 나온 것처럼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입니다. 무언가를 행해 열심히 달려간 것은 같아도 사도 바울은 인생의 목적이 다른 사람들과 달랐던 것입니다.

14절에 ‘푯대’라고 함은 ‘목표’라는 뜻입니다. 바울이 지향했던 인생의 목표는 무엇이었는가? 그가 만약 세상적인 성공을 목표로 했다면 앞서 말한 화려한 이력을 소중히 여기고 거기 의존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 자신의 좋은 조건을 자랑하며 우쭐거리고 살았겠지요. 그러나 그가 지향한 인생의 목표는 세상적인 성공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었기에 그 모든 세상적 조건을 다 포기한 것입니다. 만약 그가 받으려는 상이 세상적인 성공과 출세였다면 절대 포기하지 않았을 조건들이지만, 그가 정말 받으려고 했던 상은 하나님이 위에서 주시는 상, 즉 영생과 구원과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이었기에 이 조건들을 다 포기하고 배설물로 여긴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부터 ‘삶의 변화’라는 주제를 가지고 몇 주 동안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한 마디로 예수 믿은 후에 우리 삶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 부활주일 때 나눈 말씀처럼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 인생이 달라집니다. 인생의 목적이 달라지고 모든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완전히 변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사도 바울처럼 인생의 목표 자체가 변합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추구하고 인정해주는 그런 목적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분께 영광 돌리다가 마지막에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을 받고자 하는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 인생의 목적이 바뀌는 순간이 없다면 우리는 예수를 헛 믿은 것입니다. 저는 제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감히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바로 믿는다면 인생에 이런 순간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순간이냐? 내 삶의 목적이 바뀌고 인생의 가치관이 바뀌는 순간 말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면서도, 또한 예수를 오래 믿어왔으면서도 여전히 내 삶의 목적이 바뀌지 않았다면 죄송하지만 예수님을 못 만난 것입니다. 왜냐? 예수님을 진짜로 만나는 순간 우리의 삶의 목적이, 모든 가치관이 저절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나를 위한 삶, 성공과 인정받기 위한 삶이었다고 한다면 이제는 오직 예수님을 위한 삶, 그 분의 영광을 위한 삶, 그분이 주시는 상을 바라는 삶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도 고민합니다. 목회자로서 조금이라도 더 큰 교회, 조금이라도 더 많은 성도를 자랑하며 다른 사람에게 우쭐대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말입니다. 제 이력서에 한 줄이라도 더 좋은 조건을 덧붙여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 때문에 말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무엇이 더 가치 있는 삶인지 알았기에 이런 것들을 모두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깁니다. 그가 성공한 목회자로 인정받고 싶었다면 이방인을 위한 사도의 길로 가지 않고 곧장 예루살렘으로 가서 자신의 화려한 이력에 기대어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기둥 같은 지도자 노릇을 하려 했을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예수 믿지 않고 여전히 유대교에 남아 우쭐대며 살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저도 오늘 사도 바울의 삶을 보며 이런 다짐을 해봅니다. 나는 어떤 목사가 될 것인가? 우리 교회를 어떤 교회로 이끌어 갈 것인가? 숫자를 지향하지 않겠습니다. 화려한 목회, 내세울만한 것이 많은 교회를 지향하지 않겠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 집착하지 않겠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실은 제 야망을 채우려는 그런 자세를 포기하겠습니다. 오직 주님께 인정받고 상 받을 일은 무엇인가 고민하며 그분을 기쁘시게 할 일들만 하겠습니다. 여러분도 이 고백과 결단을 함께 나눌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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