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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의 것, 그리스도의 일군 (고전 3:16 - 고전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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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도 무슨 건물을 지을 때 관청의 허가를 받는 과정이 무척이나 복잡한 것 같습니다.
  언젠가 무슨 빌딩 하나를 지어 놓고 입주식을 할 때에 그 주인이 답사를 하면서 "여러분들 눈에는 이 빌딩이 철근과 콘크리트로 지어진 것처럼 보일지는 몰라도, 제 눈에는 전부 종이로 지어진 것처럼 보입니다."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 건물 짓는 허가를 받기 위해서 이곳저곳 찾아가서 도장 받은 서류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그 주인의 눈에는 그 빌딩을 지은 재료가 다 종이뭉치들처럼 여겨졌던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를 볼 때에는 어떠하겠습니까?
  아마 세상 사람들은 '교회' 하면 일단 십자가 탑이 있는 예배당 건물부터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의 주인 되신 예수님께서 생각하시는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바로 '신앙공동체'입니다.
  그렇다면 그 신앙공동체를 이루는 구성요소도 무슨 건축자재는 아닐 것인데,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그 점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3장 16절과 17절에 기록하기를 "16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17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분명히 못 박았습니다.
  이 '너희'는 바로 '예수 믿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고백한 신자들이 모여서 교회라는 공동체를 건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본문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고린도교회 교인들과 사도 바울과 같은 교역자들을 구분하면서, 각각 교회를 이루기 위하여 어떠한 구성요소가 되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 경향교회 설립34주년 기념주일입니다.
  이 교회는 실로 아름답고도 거룩한 '하나님의 집'으로 세워져 왔습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서로 잘 결합되는, 그래서 정말 교회다운 교회를 온전하게 세우는데 쓰이는 재료가 될 만한 교인과 교역자는 과연 어떤 사람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교역자를 통하여 오직 그리스도께 속하게 되는 교인'이 거룩한 교회의 훌륭한 구성요소(構成要素)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것'이 된다는 뜻입니다.
  본문 3장 18절에서 20절의 말씀에 "18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19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기록된바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20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 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는 말씀은, 스스로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말로 자기에게 스스로 속을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자리에 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바로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는 자, 곧 지능지수나 학력 따위의 세속적인 기준에 맞추어 볼 때 남보다 더 똑똑하다고 자랑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야말로 교회 안에서 더욱 "미련한 자가 되어야" 진짜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신자가 세상 지식을 추구하고 획득하는 노력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절대로 아니라, 자기가 학교나 사회에서 얻은 지식을 하나님 앞에서나 교회 안에서는 내세워서는 아니 된다는 뜻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는 미련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발견된 최고의 지식뿐 아니라, 인류 미래에 더 발전될 지식까지 이미 초월하는 완벽한 지혜, 즉 '전지(全知)'를 소유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런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지혜가 대단하다'고 자찬하는 것은, 그야말로 뉴턴이 표현했듯이, '미지의 대양을 앞에 두고 바닷가에서 조개껍질을 줍는 아이'에 불과한 존재가 스스로 우쭐거리는 꼴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사도 바울뿐 아니라 이미 구약 시대 때부터 각 세대의 성도들이 반복적으로 고백해 왔던 사실이었습니다.
  "기록된바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는 이"란 말씀은 욥기 5장 13절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여기 "궤휼"이란 '교묘함(craftiness, cunning)'이란 뜻으로서, 사람의 지혜란 것이 아무리 간교해도, 비록 사람을 속이고 자기 자신까지 속인다 해도 결코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는 말씀은 시편 94편 11절의 인용입니다.
  여기서 "헛것"이란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음'이란 뜻으로서, 사람의 지혜로 성취해 놓은 것이 꽤 대단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위대하신 창조와 보존과 통치 사역에 비하면 그야말로 '새 발의 피'도 되지 못할 것들뿐임을 강조합니다.

  사도 바울 당시의 사람들은 자기네들 당대의 헬라 철학을 중심으로 꽃을 피웠던 학문을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었을 것이며, 고린도교회 교인들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처럼 세상 지혜를 높이 숭상하고 자랑하던 자들이 교회 안에서도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할 때, 그들은 매우 중대한 잘못을 저지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어지는 21절부터 23절까지에 기록하기를 "21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22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23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그처럼 '사람의 지혜를 자랑하는 자'들은 필연적으로 교회 안에서도 "사람을 자랑하는" 행위를 보이게 되었습니다.
  그런 교인들은 그들을 가르친 사도들과 교사들 중에 자기 개인에게 지적으로 제일 잘 맞는다고 생각되는 한 명의 교역자를 골라내었는데, 그 이면에는, 자기에게는 자기의 지혜로써 더 훌륭한 사도를 구별해 낼 수 있다는 교만이 깔려 있었습니다.
  바로 그런 인본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한 교역자만 편애하면서 각각 '나는 아무 사도에게 속하였다'라고 공공연하게 떠벌리고 다녔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아무도 그런 식으로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왜냐하면 "만물이 다 너희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세상 지혜만을 자랑하는 불신자들은 실제로는 존재세계를 진정으로 소유하지 못하고 거기에 휩쓸려서 살고 있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신자들은 세상을 정복하고 만물을 다스리며 인생을 마음껏 누리며 사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불신자들과는 달리 존재세계와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바로 아는 지혜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는 성도들을 가리켜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다 너희의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참된 교인들은 사도에게 '속한 자'가 아니라 사도를 '소유하는 자'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교인들이 교역자 위에 고용주나 주인처럼 군림하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교역자들은 교인들이 무슨 '왕처럼 모셔야 할' 대상이 아니라 그 '어드밴티지를 활용해야 할' 대상임을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역자들의 말씀과 기도와 심방 사역 등을 통하여 자신의 신앙생활을 은혜롭고 복스럽게 누리며 살 줄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참된 신자는 시공세계의 만물과 영육 간의 축복 전부를 '다 자기의 것'으로 완전히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부유함을 누리기 위해서 한 가지 필수적인 조건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는 말씀입니다.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그리스도의 소유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먼저 자기가 종속되어 있는 대상을 바로 깨달음으로써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게 되는 원리는, 그 누구보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보여 주신 것이기도 했습니다.

  성자께서도 자발적으로 성부에게 복종하시고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심으로써 결국은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존귀하심은 그가 낮아지심과 직결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씀이 내포하는 바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자들 역시 자신이나 교역자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인생의 소유주가 되심을 인정하고 순종함으로써 비로소 모든 것을 소유하는 영적 부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회에서도 무정부주의자가 진정한 자유인이 아니라, 나라의 국민으로 종속되어 정부에 세금을 내고 보호를 받는 자가 진정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께 완전히 속한 그의 소유가 됨으로써, 비로소 그 안에서 완전한 자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갓 입대한 훈련병이 학교나 사회에서의 지식만을 내세운다면 결코 군생활에 적응할 수 없으며, 오직 조교가 가르쳐주는 대로 배우고 익혀야 훌륭한 군인이 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교인은 교회 안에서 세상 지식을 자랑하지 말고 오직 교역자를 영적으로 소유하고 활용함으로써 새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교역자 때문에 간신히 유지되는 신앙생활, 즉 담당교구 전도사에게만 매여 있는 교인이나, 혹은 한 교역자만 편애하고 나머지 교역자들은 무시하는 교인은 아직은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의 지체는 되지 못한 사람입니다.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제대로 붙어 있지 않은 교인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교역자를 통하여' 영의 양식을 마음껏 받아먹고 건강하게 자람으로써 자신의 전 인생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종속'시킬 줄 아는 교인 - 바로 이런 교인만이 진정 교회의 훌륭한 구성요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경향교회는 지난 34년 동안 교인들을 바로 이렇게 키워왔기 때문에 이처럼 든든히 서 있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경향교회의 교역자들은 교인들을 '자기 사람'이 아니라 오직 '예수 사람'으로 만드는 일에만 전념해 왔습니다.
  '목사가 독재'를 하고 '교인들을 목사에게 속하는 종'으로 만드는 교회라면 오늘날의 경향교회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어림도 없는 소리입니다.
  오늘날처럼 '세상에서 지혜로운' 교인들이 어떻게 그런 목사 밑에 모여들 리가 있겠으며, 자유를 찾아 떠나려 하는 교인을 그 누가 잡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경향교회의 교인들이 경향교회를 떠나지 않는 것은, 이들이 '목사에게 속한 자'가 결코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자'가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경향교회의 목사와 강도사와 전도사들은 교인들에게 '예수 구원'의 확신부터 철두철미하게 심어 주고 그 결과 필연적으로 '예수 목적'이라는 고차원의 인생목표를 붙잡고 살도록 만드는 이 사명만을 위해서 자신은 오직 '썩는 밀알'로 바치려 할 뿐인 것입니다.
  교인을 '목사의 사람'으로 만드는 교회는 결코 제대로 설 수 없으며 오직 교인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만드는 교회만이 든든히 성장할 수 있습니다.
  이 교회를 통하여 앞으로도 계속해서 '교역자에게 속하는' 교인이 아니라 '교역자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는' 교인이 됨으로써, 구원 받을 자들이 날마다 더하는 경향교회를 함께 세워 나가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교인들 앞에서도 오직 그리스도께로부터 판단 받는 교역자'가 거룩한 교회의 필수적인 구성요소(構成要素)입니다.

  이것이 곧 '그리스도의 일군'이라는 말이 뜻하는 바입니다.
  4장 1절과 2절에 "1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2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 "일군"이란 원래 '배 밑창에서 노 젓는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인데, 바울은 자기와 같은 복음 사역자들이 바로 그처럼 '그리스도의 종' 된 사람임을 천명했습니다.
  그러면서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마땅히" 그렇게 "여겨야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즉 '교인들이 사도들을 소유한다.'는 것이 결코 '교인들이 사도들의 주인이 된다.'는 뜻이 아님을 분명히 밝혀 두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비밀"이란 여기서는 '사람이 스스로 깨닫거나 연구해서 얻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셔서 알 수 있게 되는 진리'를 뜻합니다.
  바로 그 계시 사역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사용하는 종이 교역자들인데, 그런 뜻에서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 즉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청지기(steward, manager)'란 표현을 썼습니다.
  이 '청지기'란 당시 주인의 재산을 온통 떠맡아 관리하는 중대한 책임을 가진 직업이었는데, 사도 바울은 이 점에 대해서도 "사람이 마땅히" 자기네들을 그런 하나님의 관리인으로 "여겨야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항상 자기 자신에 대하여는 겸손하기 짝이 없던 바울이었지만, 적어도 이 점에 있어서만큼은 교인들이 분명히 알고 바로 대해야 한다고 못 박고 있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목사를 대할 때 그 가장 기본적인 존경의 자세가 바로 여기에 있어야 합니다.
  목사라는 직분이 가지는 가장 중요한 권한이 바로 '훈도권'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서, 성경 말씀을 가지고 교인을 가르칠 수 있는 권한이야말로, 목사에게 있어서 최고 고유의 권한인 것입니다.
  목사와 장로가 같은 장로이지만, 바로 이점이 그 두 직분을 구별시키는 가장 중요한 차이가 됩니다.
  그러므로 장로는 원칙적으로 예배시간에 설교를 할 수 없는 것이며, 교인들은 목사를 대할 때에 이 영역만큼은 그 어떤 경우에도 결코 침범하지 말고 절대적으로 존중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했는데 여기 "구할 것"이란 말은 '요구되는 것'이란 뜻입니다.
  "충성이니라"는 말도 정확하게 직역하자면 '충성된 자로 발견되는 것이니라'는 말로서,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인정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충성'이란 말을 좀 더 깊이 살펴보면 '열심히 일함'이라기보다는 '신뢰할만함'(trustworthy)라는 의미로서, 사실 청지기는 주인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믿을만한 사람'이어야만 했습니다.
  주인의 전재산을 맡아 물품을 구입하고 장사하고 투자할 뿐 아니라, 주인의 다른 종들을 관리하고 주인의 가족들까지 돌보는 직책이었으니, 정말 청지기의 제일 자격은 무엇보다도 주인이 '신뢰'할 수 있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의 직분을, 하나님께서 믿고 당신의 소중한 양무리를 맡겨 주시는, 실로 과분하고 황공무지하기 짝이 없는 사명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바로 그런 자세로 사도의 직분을 수행했던지라, 그는 그 직분에 대한 평가 역시 오직 그 주인이 내리는 것에만 신경을 썼습니다.
  3절 이하 5절의 말씀에 기록하기를 "3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4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5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아무리 훌륭한 사도였지만 교인들 중에서 그에 대하여 시시콜콜한 평가를 내리는 일도 많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처럼 교인들에게 판단 받는 일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도 인간인지라 사람들이 자신을 비판할 때 아무래도 낙심도 되고 상처도 받곤 했겠지만, 그래도 그저 '개의치 아니하려고' 애를 썼다는 뜻입니다.

  또한 바울은 남이 자기에 대하여 비판하는 소리에 신경 쓰지 않을 정도가 아니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즉 남은 물론이거니와 자기도 자기 자신에 대한 올바르고 공정한 판단은 내릴 수 없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곧 이어서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는 말은, 스스로 자기를 괜찮다고 판단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판단은 교만할 수도 있고 또한 지나치게 겸손할 수도 있는 것인 까닭에, 객관적인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인간적인 판단들 대신에, 그 누구보다도 가장 공정한 판단을 내려 주실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두려워했습니다.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라고 말한 대로, 청지기는 다른 종들이 자기를 어떻게 비판하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오직 자기 주인이 자기를 어떻게 판단하는가 하는 것만이 정말 문제가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때가 이르기 전에"는 아무도 서로에 대하여 미리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주께서 오시기" 전에 미리 자기 평가를 높이 해 놓는다든지 남에 대한 평가를 깎아내려서는 아니 됩니다.
  왜냐하면 각 사람에 대한 판단은 그 누구보다도 심판주 예수님께 속한 권한, 그리고 가장 공정하게 행하실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이란 '드러나지 않았던 행위들'을 뜻합니다.
  "마음의 뜻" 역시 '드러나지 않았던 생각'을 가리킵니다.
  재림하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것들까지 다 들추어내셔서 각 개인에 대한 가장 공정한 판단을 내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주님의 심판날에 그 앞에서 "칭찬"을 받을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합당한 영예가 될 것이며, 그 전에 미리 스스로 자화자찬해 놓았던 것은 오직 무용지물이요 오히려 수치가 될 수밖에 없을 것 아니겠습니까?

  몇 년 전 당시의 집권 정부가 자기네의 치적에 대한 자화자찬의 평가를 학생들의 검인정 교과서에다가 써 넣어서 문제가 된 일이 있었습니다.
  단 한 세대도 지나지 않아서, 아니 그 당사자들이 대통령과 장관 자리에 아직도 앉아 있는 때에 벌써부터 객관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도 유치한 소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교역자들은 더욱 그러합니다.
  목사는 자신의 사역에 대하여 스스로의 평가는 두말할 것도 없고 교인들이 치켜 세워주는 말이나 어리석은 비난에 대해서도 아예 귀를 막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것은 실로 '매우 작은 일'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부교역자들 중에서도 가끔 당회장의 눈치만 살피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기한 것은 그것이 목사의 눈에도 보이는 것입니다.
  부목사와 전도사들이 목사의 눈만 의식하고 있는지 아니면 그저 하나님의 눈만 두려워하면서 사역하고 있는지는, 담임목사가 일부러 눈을 크게 뜨고 살펴보려 하지 않아도 절로 느껴지고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 영의 세계에서 사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교역자뿐 아니라 그 누구라 해도 남이 내게 잔소리하고 비판하는 것은 다 싫어합니다.
  그리고 정말 그런 판단으로부터 자유하고 싶으면 오직 하나님 앞에서 바로 살면 되는 것입니다.
  다른 그 누구보다도 교역자들 자신이 '교인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하는 마음에 전전긍긍하지 말고, 진짜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믿을만한' 청지기로 판단 받을 수 있도록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만 나를 판단하실 주인이시다'라는 믿음이 목사에게 특별한 면책 특권이 되고 목사를 자유방임하게 만드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판단하고 계실까?'를 항상 생각하고 사는 목사는, 사람 눈치 보는 목사보다 실상 몇 갑절 더 벌벌 떠는 가운데 목회사역을 섬기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비록 자기를 현실적으로 보고 있는 것은 교인들의 눈이지만, 자기를 판단하고 계시는 분은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뿐이심을 늘 의식할 줄 아는 목사와 강도사와 전도사 - 바로 이런 교역자가 진정 하나님께서 '신뢰하실 만한 청지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경향교회에는 실제적으로 '교인 앞에 있는 자리'에서도 그 심령으로는 '자기를 판단하실 주님만을 두려워하면서' 그 양무리에게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주는 충성된 교역자들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세워짐으로써, 실로 '크게 흥왕하며 이전보다 더 창대하는' 그리스도의 왕국을 이루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오늘날 건축에서 빼놓을 수 없는 대표적 재료가 바로 콘크리트입니다.
  현대의 콘크리트 제조법을 누가 발명했는지는 제가 잘 모르겠지만, 그 비슷한 원조는 이미 헬라로마 사회 때부터 있었다고 합니다.
  하여튼 이 콘크리트라는 것은 가만히 살펴보면 참 신기한 물질입니다.
  시멘트나 모래가 각각 따로 있을 때에는 아무 힘없는 가루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일정한 비율로 섞이고 물이 첨가되면 그처럼 단단한 물질로 바뀌고 마는 것입니다.
  그처럼 압력에 강한 콘크리트 덕택에 오늘날 온갖 대형 건축물이나 토목공사들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성경은 이 지상교회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집'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어떤 물리적인 건물을 두고 하신 말씀은 아닙니다.
  하지만 집이 지어질 때에 건축 자재들이 필요하듯이 교회라는 것이 세워지기 위해서도 자재가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교인과 교역자라는 구성요소들입니다.
  이것들이 적절하게 잘 결합될 때, 교회는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불리움을 받을만한, 아름답고도 견고한 집으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인이나 교역자나 둘 다 원래는 그저 죄인에 불과한 존재들입니다.
  그 상태 그대로는 무슨 교회다운 교회를 세울 수 있는 재료가 될 수 있을 리 만무합니다.
  그것은 마치 시멘트와 모래가 물 없이 섞여 있는 상태와 같습니다.
  아무런 접착력도 힘도 발휘할 수 없고, 물론 무슨 구조물은 결코 세울 수 없는 가루에 불과한 상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둘을 밀접하게 연결시키고 강력한 결합체로 만드는 '물'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교인이 목사만을 의존하거나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자가 되어서는 여전히 모래 가루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목사의 설교와 교역자들의 기도와 심방을 통하여 잘 양육됨으로써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지체'가 되면, 실로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를 이룰 수 있게 됩니다.
  목사가 교인의 판단에만 눈치 살피는 존재가 되어서는 평생 시멘트 가루로 흩날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오직 자기 자신도 장차 주인 앞에서 계수하기 위하여 서야 할 종인 것만을 의식하면서 그 맡기신 양들을 잘 키우는 충성된 청지기가 될 때에는, 예수님께서 '그 오른손의 일곱 별'처럼 높이 드셔서 당신의 몸 되신 교회를 위하여 크게 사용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경향교회의 34년이 바로 이처럼 '그리스도의 것'이 된 교인들과 '그리스도의 일군'으로 섬긴 교역자들이 콘크리트처럼 결합됨으로써 이처럼 놀라운 축복을 받고 큰 역사를 이루면서 지금까지 이어져왔습니다.
  앞으로도 역시 각자가 오직 '교역자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교인'이 되며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만 판단 받는 충성된 종'이 됨으로써 '세계를 받은 교회'의 비전을 30만의 교세와 땅끝까지 이르는 선교를 통하여 함께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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