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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슨 상관이냐? (요 21: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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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오늘은 어떤 날입니까?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시나요?
오늘(4월 15일)은
-1949년에 해병대 창설기념일이며
-1994년(7월 8일)에 사망한 김일성이 1912년에 태어난 날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오늘은 내가 살아 있어 좋은 날'이라는 사실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어‘영생을 보장 받은 내가(우리가)
예배드리는 주일’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를 살게 하신 것, 오늘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또 하루의 선물이요/기회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며 사는 복된 날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세상적인 방법으로 세상 문제를 해결하려 하면 끝이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믿고 사는 사람들이므로
영적 지침서, 영적 나침반 … 성경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성경에 모든 답이 있습니다.
성경대로 믿고, 성경에서 답을 찾고, 성경대로 따르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맡기는 삶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들고 큰소리로 고백합니다.
성경을 높이 들고 우리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저는 예수 믿어 구원받았습니다(요3:16).
저는 예수 믿어 하나님 자녀 되었습니다(요1:12).
저는 예수 믿어 천국 백성 되었습니다(빌3:20).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오늘(시118:24),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습니다(딤후3:14~17).
눈을 열어 주의 법 안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보고 깨닫게 하소서(시119:18).
"아멘"으로 순종하여(고후1:20)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되게 하소서(마5:16).
아멘.

그런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하신 말씀이 8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8번의 말씀을 가지고 연구하여 설교하고
「누구를 찾느냐?」는 이름의 책으로 출판했습니다.
오늘은 그중에 마지막 8번째 말씀을 소개하며 은혜 받으려 합니다.

예수님이 부르실 때 배와 그물을 버리고 쫓았던 제자들은,
십자가 사건 이후에 큰 공포에 떨었던 이유에서인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손의 못 자국과
허리의 창 자국까지 확인하고도 다시 고기를 잡으러 디베랴라고 불렸던
‘갈릴리’호수에 모였습니다.

성경에 제자들의 이름이 언급되었던 것만 세어 보아도
대충 제자 6명이상이 모였습니다(요 6:1, 21:1).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고 부르셨는데
제자들은 다시 고기를 낚는 어부로 되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밤새도록 고기를 못 잡고 고생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아침이 되어서 예수님이 지시하는 대로
배 오른편에 그물을 내렸더니 그물을 들 수 없을 만큼
고기를 많이 잡게 되었습니다. (요21:6)
그때서야 비로소 예수님인 것을 알고 제자들은 반갑게 예수님을 맞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고기를 구워 아침식사를 같이 하셨습니다.

식사 후에 예수님은 베드로를 지목하여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Do you love me more than these?)
똑같은 질문을 세 번씩이나 반복해 물으셨습니다.
세 번씩이나 같은 질문(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을 받은
베드로는 근심(sad)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처형되시기 전에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했기 때문에 …
부활하신 예수님이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 질문에 당황스러웠을 것입니다.

주여 모든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베드로는 그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여 모든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다 아시면서 마음 괴롭게 무엇을 물으십니까?”

예수님은 지난 날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던 것,
제자됨을 포기하듯 말한 것, 제자로서의 일을 하지 않고
다시 물고기를 잡으러 온 것 …
모든 것을 탓하지 않으시고, 책망치 않으시고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다시 일하라”
“내 어린 양을 먹이라(15절),
내 양을 치라(16절),
내 양을 먹이라(17절)”라고 하시며 일을 맡기시고 또 확인하셨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배의 자리에 나오신 줄 믿습니다.
그러나 예배드리러 나오신 여러분,
주님을 사랑한다는 사실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세 번씩이나 고백한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그래, 네가 나를 사랑하냐? 그럼, 내가 복을 주겠다.
예루살렘 근처에 땅을 사면 값을 올려주겠다.
좋은 집에 살게 해 주겠다, 부자 되게 해 주겠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참으로 기막힌 말씀을 하셨습니다.
세상적인 생각과 가치로는 말도 안 되는 말씀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본문(요21:18) 18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21:18)

“너, 날 사랑한다고? 나를 사랑하는 네가 늙으면 순교하게 될거야.
비참한 죽임을 당할 거야”하는 무서운 예언입니다.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 예수님이‘사랑 한다’고 대답한 제자에게
‘너 그럼 죽을 거야. 비참하게 죽을 거야.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 때문에 너는 죽을 거야.’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에 걸쳐 물으셨던 질문은
베드로의 순교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십자가의 길이요, 외로운 길이요, 좁은 길이요, 험한 길입니다.
때로는 예수 믿기 때문에 핍박을 받을 각오도 해야 되고,
비난도 받아야 되고, 눈물을 삼켜야 하고
어려움은 물론이고 죽음도 각오해야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사랑하고 믿는 삶은
비난 받고, 핍박당하고, 어려움 당하고, 외롭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베드로는 몰랐습니다.
“너 날 사랑한다고? 그럼 넌 죽어야 돼.”
예수님을 따르고 사랑하는 길은
죽음의 길이요 순교의 길임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요한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랑한다고 고백한 베드로는‘순교하게 된다, 죽을 각오를 하라’는
엄청난 말씀을 듣고 기가 막혔던 모양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쳐다보다가 예수님을 따르는 다른 제자를 보았습니다.(요21:20)
베드로는 자신이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말씀이 답답했던지
“저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나는 죽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저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이 그토록 사랑하는 제자‘요한’이었던 것 같습니다.
(주의 만찬석에서 예수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라고 묻던 제자 - 요 13:23-25)

그때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22절에 “ …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고 했습니다.

‘날 사랑한다면서, 날 따르겠다면서, 무슨 말이 많아~
남이 어떻게 될 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야 …’
무 자르듯이 딱 자르는 말씀입니다.
“내가 요한을 살려 두던지 말든지 너는 상관 말아라.
너는 너의 길(죽음)을 가면 돼”라는 뜻입니다.
저는 이때 베드로의 표정이 어땠을지 참 궁금합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은 내가 어떤 일을 당하면
다른 사람은 어떤 일을 겪을까? 에 관심이 많습니다.
내가 주방에서 일하는데 다른 사람은 무엇을 할까?
내가 화장실 청소를 하는데 다른 사람은 무엇을 할까? … 하며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합니다.
자신이 순교해야 한다면 요한은 어떻게 될까하는 것이 궁금했던
베드로처럼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다른 사람과 자기 자신을 비교하는 것은 자신을 초라하게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우월감에 빠지게도 합니다.
다른 사람을 의식하는 비교 심리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도, 기도 많이 하는 사람도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도, 풍성하게 사는 사람도 … 다 있습니다.

비교의식은 죄로 발전할 가능성도 많습니다.
비교의식은 때로 자기 파괴로 몰아가기도 합니다.
베드로도 그렇게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아니, 나는 죽어야 하고 저 사람은 오래 산다니 …
왜? … 에이 나 안해.’라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겠습니까?

비교를 하다보면 때로는 잘못된 생각도 하게 되고, 잘못된 결론을 내기도 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다 보면 더 큰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기도 합니다.

가룟 유다가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베다니라는 곳에 가셨을 때
마리아라는 여인이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보통 손님이 방문할 때는 물로 발을 씻게 하는 것인데
그 여인은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그리고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았습니다.
온 집에 향냄새가 풍겼습니다.
그때 가룟 유다가“왜 삼백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않는가?”(요 12:1-8)라고 했습니다.
“아유 아까워라. 저것 팔면 삼백 데나리온이나 되는데.
차라리 저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지. 아유 아까워.”라고 했습니다.

사실 엄밀히 따지면 가룟 유다는 가난한 사람을 생각해서 말한 것이 아니라
그 여인을 비난하기 위해서 말했던 것이고
자기 욕심과 자기 판단대로 함부로 말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 가만 두어라”(요 12:7)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준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가룟 유다처럼 자기 판단이 절대라고 생각하고
자기 판다고 옳다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을 정죄할 때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이 틀렸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나와 다르다고 해서 모두 ~ 틀린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다른 것과 틀린 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제가 미국에서 intensive course라고 2주 동안 집중공부를 할 때
인도 사람과 룸메이트를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인도 사람이 먹는 카레의 향은 정말 독했습니다.
제가 못 견딜 정도로 냄새가 아주 심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제가 김치 먹고 트림할 때 나는 김치 냄새도 만만치 않았다고 하더군요.

여러분, 내가 좋아하는 것이라고 해서 다른 사람도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좋아한다고 나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다른 것은 다른 것입니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다른 것에 대해 함부로 말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의 일에 간섭하지 않도록 우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각기 다르게 만드셨고, 다른 것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열심히 하다보면
다른 사람이 하는 일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습니다.
또 자기 일에 충실하다 보면
다른 사람이 하는 일도 귀하게 여기게 되고, 가치 있게 생각하게 됩니다.

무슨 상관이냐?

예수 믿는 사람은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가장 큰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판단하실 것인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1달란트 받았으면 1개, 2달란트를 받았으면 2개,
다섯을 받았으면 다섯, 자기가 받은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삶, 하나님은 그것을 귀중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얼마를 받았는지,
다른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그런 일까지 신경 써야 하느냐?”
“하나님의 숨으신 뜻까지 알려고 하지 말아라.
요한이 어떻게 되든지 너하고는 상관이 없어,
유다처럼 함부로 결론짓고,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라.
그냥 믿고 따르면 돼.”

하나님은 우리 각자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를 다르게 주셨습니다.
내가 겪는 아픔을 다른 사람은 전혀 느끼지 않고 사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괴로워하는데
나는 아무런 괴로움이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가 지고 갈 십자가가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 순종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너하고 무슨 상관이냐?”라는 말씀에
항변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여러분‘쿠오 바디스(Quo Vadis)’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그 내용은 A.D. 64년 경,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한 30년쯤 지난 때에
네로(Nero) 왕이 로마를 통치하고 있을 때의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만들어 낸 영화입니다.
네로는 37~64년까지 로마를 통치했는데 거의 정신이상자 수준이었습니다.

네로가 로마에 불을 지르고 … 그것을 보고 시를 읊기도 하고 좋아했습니다.
네로의 신하들이 불을 지른 것이
네로황제라는 것을 백성들이 알면 민란이 일어날 것이 뻔하니까
그 불을 지른 범인이 기독교인들이라고 몰아 붙였습니다.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잔악하게 죽였습니다.
짐승의 밥이 되게 했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로마에서 복음을 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같은 엄청난 사건이 터지니까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선생님, 선생님은 이 로마를 빠져 나가십시오.
우리는 비록 죽는다 할지라도 선생님은 살아 남으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 어서 빠져 나가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럴 듯하지 않습니까?

베드로는 살아서 복음을 더 전해야 된다는 생각으로
로마를 빠져 나와 길을 떠납니다.

그때 베드로가 로마를 빠져 나가면서 나자러스라는 아이와 나누는 대화입니다.
영화‘쿠오 바디스’중에서 <영상 화면>

나자러스 : 비가 올 것 같은데 피할 곳을 찾는 게 좋겠어요.
그렇지 않나요, 베드로? 어디 아파요? 아무 말도 않는군요.
베 드 로 : 미안하구나. 나자러스.
나자러스 : 피곤하세요?
베 드 로 : 몸만큼 마음도 무겁구나. 뭔가 형제들에게 잘못한 것 같아.
모르겠어. 이럴 때 주님의 가르침이 필요한데….
나로선 도저히 결정을 못하겠구나.
주님께서 말씀만 해 주신다면….
저 나무 끝을 봐라.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네!
빛이 갑자기 이리 오는데? 나자러스, 보이니?
주님의 빛이야, 본적이 있어. 주 예수여, 오셨군요.
주여, 뭐가 잘못된 것입니까? 어떻게 해야 됩니까?
슬픕니다. 어떻게 주님을 따라야 합니까?
쿠오 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나자러스 : 내 양들이 로마에서 날 부르고 있노라.
베 드 로 : 나자러스, 방금 뭐라고 했어?
나자러스 : 양들이 로마에서 날 부르고 있다.
네가 내 양을 버리니 다시 십자가에 달리러 로마로 가노라.
베 드 로 : 나자러스, 축복이 내렸구나. 계속 말해봐, 어서!
나자러스 : 베드로, 왜 그러고 있죠?
베 드 로 : 지금 했던 말 다시 해봐!
나자러스 : 아무 말도 안했는데요.
베 드 로 : 이랬어, 내 양을 버리니 다시 십자가에 달리러 로마로 가노라.
나자러스 : 정말 아무 말 안했다니까요.
베 드 로 : 그래 주님께서 내게 하신 거야. 나자러스, 가자.
나자러스 : 어디로 가죠?
베 드 로 : 로마로!

예수 때문에

로마를 빠져나가다가 주님을 만난 베드로가
“쿠오 바디스 도미네(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주님은 다시 십자가를 지러 로마로 간다고 하셨습니다.
“네가 내 양들을 버리고 도망가므로
내가 다시 로마로 돌아가서 십자가를 져야 되겠구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후에 로마로 돌아간 베드로는 결국 붙잡혀 죽음을 당했습니다.

교회역사가 요세프스(Josephus)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로마에서 머리를 거꾸로 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 같다,
베드로 스스로 그렇게 죽기를 원했다”
그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길이기에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마땅히 감당해야 할 일이기에,
베드로는 그렇게 순교했습니다.

여러분,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정말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과 세상을 택하는 선택의 괴로움이
매순간 순간 여러분 앞에 다가옵니다(롬 8:21-25).
그러기에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려는 나는 살아야 하고
세상 법대로 살려는 나는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고전 15:31).

다른 사람에 대해 상관하지 말고
오직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성실하게 감당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 가족, 교회, 일터에서
예수 믿기 때문에 져야 되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참아야 되고,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눈물 흘려야 하고 … 모욕을 당하기도 합니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자존심 상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합니다.
그것이 부활을 믿는 신앙입니다. 그것이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믿음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오늘 주님이 베드로에게 물으셨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무슨 상관이냐?”하는 말씀을 가슴 속 깊이 담으시기 바랍니다.
때로는 죽음을 각오한 신앙, 아니 죽음을 향해 되돌아가는
베드로와 같은 발걸음 … 그것이 부활을 믿는 신앙입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순종했던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과 고난과 외로움과 죽음까지도 각오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을 믿노라고 하면서 자신과 가족과 교회와 일터를 통해서
어깨에 눌려지는 짐들을 벗으려고만 하는 자가 아니라
기쁨과 감사로 감당하는 십자가를 지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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